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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곳 : 블로그 >중국,북경,장안가에서
글쓴이 : 중은우시
읽기 편하도록 단락을 조금 정리했습니다.
조조에게는 처첩이 매우 많았다. 그중 성씨(姓氏)를 아는 사람이 15명이다.
<<무문세왕공전>>의 기재에 따르면 그 중의 13명의 부인이 25명의 아들을 낳았다:
변황후(卞皇后) : 비(丕), 창(彰), 식(植), 웅(熊)
유부인(劉夫人) : 앙(昻), 삭(?)
환부인(環夫人) : 충(沖), 거(據), 우(宇)
두부인(杜夫人) : 림(林), 곤(?)
진부인(秦夫人) : 현(玹), 준(峻)
윤부인(尹夫人) : 구(矩)
왕소의(王昭儀) : 간(幹)
손희(孫姬) : 상(上), 표(彪), 근(勤)
이희(李姬) : 승(乘), 정(整), 경(京)
주희(周姬) : 균(均)
유희(劉姬) : 극(棘)
송희(宋姬) : 휘(徽)
조희(趙姬) : 무(茂)
조조가 인생에서 천번지복의 대변천을 겪는 동안 미래의 위문제 조비의 모친인 변씨는
계속 조조를 따라다니면서 그와 함께 영욕을 같이 했다.
변씨. 조적은 낭야 개양(현재의 산동 임기), 한나라 연희3년(161년) 12월 기사일에 제군 백정에서 출생.
변씨집안은 대대로 천직에 종사했다. 즉 노래와 춤으로 살아가는 집안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변씨가 출생하였을 때,
아이를 낳는 방에 노란색빛이 가득했다고 한다. 처음에 변씨의 부친인 변경후(卞敬侯)는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여
점치는 왕단에게 물어보았다. 왕단은 "이것은 크게 길한 징조이다. 이 작은 여자아이의 앞날은 대단할 것이다"라고 답한다.
그렇기는 했지만, 나이가 든 이후에도 어린 변씨는 여전히 집안의 비천한 직업을 바꾸지 못하고,
노래와 춤을 추는 광대가 되고 만다. 이들은 사방을 떠돌아다녔고, 몇 해 뒤에는 초지(현재의 안휘 호현)에 도착한다.
이곳은 조조가 당시 권력자에게 밉보여서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글을 읽으며 사냥이나 즐기고 있을 때였다.
바로 여기에서 나이 이미 스물이 된 변부인은 재주와 용모가뛰어났고, 당시 25세이던 조조의 눈에 들어 조조의 첩이 된다.
국면이 바뀌어 조조는 전군교위에 임명되며, 대장군 하진의 부하가 된다.
막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던 변씨는 남편을 따라 동한의 수도인 낙양으로 오게 된다. 낙양에 온 후,
변씨는 첩의 신분에 맞게 조용히 지낸다. 중평4년(187년) 겨울에 미래의 위문제인 조비를 낳는다.
이상한 것은 조비가 낙양에서 출생하지 않고, 조조의 고향인 초지에서 출생하였다는 점이다.
왜 임신한 채로 고향으로 되돌아가서 아이를 낳게 된 것일까? 이것은 아마도 조조의 적처(본부인)인 정부인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정부인은 아주 오만하여, 광대출신인 변부인은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정부인은 자식을 낳지 못했으므로,
변씨는 그녀를 피해서 고향으로 돌아와 아이를 낳았다고 하더라도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
189년 여름, 동한왕조에 큰 변고가 발생한다. 대장군 하진이 비명에 죽고, 동탁은 하태후를 시해하고, 소제를 폐위시키고,
헌제를 황제위에 앉힌다. 동탁은 조조를 인재로 생각하고 효기교위이 벼슬을 내리나, 조조를 이를 거부하고 낙양성을 빠져나간다.
이 때 원술은 조조가 죽었다는 소식을 조조의 고향에 전한다.
이때, 고향의 조조의 집은 한바탕 혼란에 빠진다. 그에게 의탁했던 부하들이 도망치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강호를 떠돌아다니던 28세의 변씨는 이때 집안 일을 혼자서 다 처리한다. 그녀는 남편의 부하들이 떠나려한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마음이 급해서 내외유별도 무시하고, 흩어지려는 부하들 앞에서 "조조의 생사는 그저 몇마디 전해주는 말로 확정할 수는 없다.
만일 다른 사람이 거짓말로 지어낸 것이라면 너희가 오늘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내일 조조가 평안히 돌아오면 어찌 주인의 얼굴을 뵐 것인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대문에 일생의 명예와 절개를 버릴 것인가?"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떠나려는 생각을 버리고 남아서 조조의 소식을 기다리게 된다.
변씨의 한마디는 조조의 많은 부하들을 남아 있도록 하였다. 당시 혼란스러운 시대였으므로 부하들의 숫자가 얼마이고,
얼마나 충성스러운가는 그 사람의 위망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조조는 비록 낙양에 없었지만, 낙양의 옛부하들은 아무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이것은 소문내지 않더라도 먼곳에 나가있는 조조가 병사를 모집할 때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이때 조조는 진류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병사를 이끌고 기오에서 기병한다.
중국고대에는 "차라리 영웅의 첩이 될지언정, 못난이의 처가 되지는 않겠다(寧爲英雄妾, 不做庸人妻)"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이 말을 할 수 있는 여인은 몇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웅의 처가될 자격을 가진 여인은 그 중에서도 더욱 적다.
조조는 확실이 운이 좋았던 것같다. 그는 그의 첩이 될만한 여자를 취했을 뿐아니라, 그와 감히 대적할만한 본부인인 정부인도 가지고 있었다.
조조의 위세는 10명의 남자라면 9.9명은 두려움을 느낀다. 견식이 뛰어난 변부인도 조조의 앞에서는 공손했다. 그러나, 유독 정부인만,
아마도 세상에서 오로지 그녀만, 이 남자 조조를 눈에 두지 않았다.
조조는 영웅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풍류남아이기도 했다. 소년시절 가장 큰 즐거움은 바로 사람들 틈을 뚫고 들어가서
다른 사람의 신부를 구경하는 일이었다. 나중에 그가 성인이 되어서는 미인관을 넘지 못해서, 첩을 아주 많이 두었다.
그의 첩들은 일생동안 25명의 아들과 더 많은 딸을 낳아주었다.
그러나, 정실부인인 정부인은 자식을 낳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큰 첩인 유부인은 장남 조앙과 장녀 청하공주를 낳았다. 그리고 조삭도 낳았다.
그런데, 자녀가 어릴 때 유부인은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임종때, 그녀는 자기의 자녀를 모두 정부인에게 부탁하고 간다.
정부인은 유부인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 세 자녀를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어른으로 기른다. 특히 장남 조앙에게는 그녀의 모든 심혈과 희망을 건다.
조앙도 적모의 바램이 헛되지 않게, 효성스러울 뿐아니라 청수유아하였고, 문무를 겸비했다. 19세때 효렴이 되고, 이름을 날리는 소년장군이 되었다.
조조의 처첩들은 출신이 가지각색이었다. 정부인(丁夫人)은 평민양가출신이나, 변부인은 광대집안출신이고,
윤부인은 원래 동한 말년 하태후의 조카며느리인데, 남편이 동탁의 난 때 죽은 이후로, 윤씨는 어린 아들 하연(何宴)을 데리고 살고 있었는데,
조조는 그녀의 미모에 반하여 부인으로 받아들였다. 조조는 원래 하연을 양자로 들이려고 하였으나,
하연은 나이는 어리면서도 자기는 성이 "하"씨이고 신분이 "조"씨보다 높다는 이유로 성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조조는 어린아이와 다투지 않고 그의 성을 그대로 둔채 길러준다. 이 하연은 자란 후 용모가 준수하고 풍모가 뛰어났다.
조조는 자기의 딸 금향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낸다. 그리하여, 윤씨는 금향공주의 서모이면서, 금향공주의 시어머니가 되었다.
양가집 규수출신인 정실부인 정부인은 당연히 남편의 풍류에 불만이 많았다. 여기에 그녀는 성격이 아주 굳세었고, 부부간의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건안2년(197년)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남양의 장수를 토벌한다. 장수는 대적이 되지 않자 투항한다. 원래는 좋은 일인데,
조조는 장수의 숙모가 용모가 뛰어난 것을 보고는 그 자신이 그녀를 취해버린다. 장수는 어쩔 수 없이 투항해서 기분이 좋지 않은데,
조조가 자기의 숙모까지 취하자, 분노가 극에 달하여 옛부하들을 이끌고 중군대영으로 쳐들어간다. 조조는 대책없이 당하고는
무양(현재의 하남필양)까지 도망친다. 혼전중에 조조는 화살에 맞고, 그의 장남, 정부인이 그렇게 아끼던 조앙이 피살되고 만다.
전설에 의하면 조조가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타고 다니던 말 "절영(絶影)"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절영은 바로 조앙이 부친 조조에게 준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인은 통곡을 금치못한다. 그리고 그녀는 장수가 배반한 이유를 알게 된 후에는 더욱 더 슬퍼하며 조조를 미워한다.
다음 해, 조조는 다시 장수를 포위하여 승리를 거둔다. 관도지전의 전날 장수는 다시 한번 부하를 이끌고 투항한다.
조조는 마침 원소와의 싸움에 인원이 필요했는데, 그가 투항해오자 예전의 원한은 잊고 다시 그에게 양무장군의 직위를 내린다.
이 소식을 듣자 정부인은 노발대발한다. 조조에게 "넌 내 아들을 죽게 만들고도 아직 조금도 미안한 생각이 없느냐"
이 일 이후에 조조가 아무리 달래어도 정부인은 마음이 돌아서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는 욕을 해대고, 뒤돌아서면 눈물을 흘려서,
조조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리게 하였다. 조조는 비록 조앙의 일로 인하여 정부인에게 미안한 생각이 있었지만,
결국은 참지 못하고 정부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낸다. 그는 원래 정부인이 조조에게 시집와서 호의호식을 하였으므로,
친정으로 돌아가서 힘들게 생활하게 되면 후회하는 마음이 생겨 다시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부인은 태연자약하게 친정으로 가서 베를 짜면서 생활하고, 조조가 여러번 사신을 보내어 돌아올 것을 권유했지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이때의 조조는 이미 조정의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었는데, 당당한 조조의 집안에 정실부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조조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친히 말을 타고 시종을 데리고 처를 맞이하러 갔다. 정씨 집안 사람들은 사위가 온다는 말을 듣고는 천둥번개가 치는 것처럼 놀랐다.
급히 정부인에게 남편을 맞이하러 나가라고 권했다. 그러나, 정부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저 베를 짤 뿐이었다. 조조는 정부인이 마중을 나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정부인이 베짜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문지르며 애걸했다. "한번만 나를 돌아봐 달라.
나와 함께 가마를 타고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정부인은 돌아보지 않았을 뿐아니라, 대답조차 주지 않았다. 조조는 한참을 기다리다 어쩔 수 없이 베짜는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종이 조조에게 말에 오르라고 하자, 조조는 다시 한번 방의 창문앞으로 가서 처에게 마음을 돌려달라고 사정했다. "정말 다시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냐"
정부인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은채, 손안의 베틀에서 줄하나 어긋나지 않게 짜고 있었다.
조조는 할 수 없이 길게 탄식을 하면서 "정말 나와 헤어지기로 결심한 모양이구나" 라고 하며, 정씨집을 떠났다. 조조는 돌아온 후,
사람을 보내어 말을 전하게 했다. 비록 자신은 이미 정부인의 마음을 돌릴 수 없게 되었지만, 정부인의 앞날을 그르치고 싶지는 않으니,
정부인이 원하면 다른 사람에게 개가해도 좋다고 하였다.
정부인은 조조를 상대도 하지 않았지만, 정씨집안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조조를 매우 무서워했고, 조조가 어느날 마음이 바뀌어
자기들을 괴롭힐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부인은 이후에도 개가하지 않았다. 나중에도 조조는 정부인을 잊지 못하고, 자주 변부인의 명의로
정부인에게 왕궁에 와서 연회에 참석해달라고 요청했다. 변부인도 남편의 심정을 알고, 항상 남편 옆의 정실부인 자리는 정부인을 비위하여 비워두고,
자기는 첩의 위치에 앉았다. 정부인이 정실부인으로 있을 때, 변부인에게 그다지 잘대해주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변부인이 이처럼 자기를 후대해주자,
정부인도 변부인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미 떠난 사람인데, 부인께서 이렇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겸손의 말을 했다.
그러나, 옆자리에 앉아서 자신을 보는 조조에게는 눈길한번 주지 않았다고 한다.
몇년후, 정부인이 친정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조조는 정부인의 죽음에 애통해하면서 자신이 더 이상 속죄받을 기회가 없다고 한탄한다.
변부인은 남편의 내심을 헤아려서, 스스로 나서서 정부인의 장례를 치뤄주겠다고 한다. 조조도 동의하고, 그 스스로 정부인의 묘자리도 잡아주어,
허창의 성남쪽에 안장한다.
여러해 후, 조조는 인생의 말년이 되어, 임종하기 전에도 그는 여전히 정부인이 떠난 일에 대하여 잊지 못하며 탄색했다:
"나의 일생에서 가장 걸리는 것은 정부인이다. 그녀에 대하여는 정말 미안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잘못한 일은 만회하기 어려웠다.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있다면, 나는 저세상에서 앙이를 만났을 때, 그가 만일 내게 나의 모친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하여야 할까"
정부인이 떠나가자, 조조의 집에는 여주인이 없게 되었다. 장남 조앙은 전장터에서 죽었다. 그렇다면, 변부인이 낳은 둘째아들 조비가
살아있는 아들중에서는 장남이 된다. 조비 이외에 변부인은 조조를 위하여 조창, 조식, 조웅의 세 아들을 더 두었다.
(어느 공주가 그녀의 소생인지는 기록이 없다). 변부인이 정부인을 후하게 대접해준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변부인은 조조의 많은 첩들에게도 잘 대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광대집안 출신이다보니 부부간에도 잘 지냈고, 게다가 뛰어난 아들을 넷씩이나 낳아주었다. 조조도 그녀에게 잘 대해주었다.
변부인의 출신이 미천했지만, 조조는 옛날의 고루한 습속에는 속박받지 않는 남자였다. 그래서 정부인이 떠난지 오래되지 않아. 조조는 변씨를 정실부인으로 삼는다.
변씨는 이때부터 "변부인"이 되었다.
정실부인이 된 후, 변부인은 여전히 남편을 도와, 자녀를 교육시키고, 첩들을 잘 대해주었다. 첩들중에는 유부인처럼 젊어서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고,
많은 어린 아이들이 생모를 잃어서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조조는 이런 자녀들은 모두 변부인에게 맡겨서 길러달라고 했다.
변부인은 이런 아래들을 모두 잘 교육시켜서 조조로 하여금 안심하게 하였다.
216년 조조가 위왕에 오른 후, 변부인의 자녀들, 특히 조비와 조식은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명쟁암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변부인은 침묵을 지키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해 11월, 조조는 조비를 후계자로 선택하고 위왕태자에 앉힌다.
조비가 후계자로 정해진 후 이 소식을 변부인에게 알리자, 변부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조비는 장자이니, 후사를 잇는 것이다.
아들을 교육시키는데 무슨 잘못이 없었다는 것이면 충분하다. 우리 모자는 무슨 공로도 없는데, 무슨 상같은 것을 받겠는가?"
조조는 변부인의 대답을 듣고는 아주 흡족해 했다. 건안24년 7월 조조는 책서를 반포한다 '부인 변씨는 여러 아들을 기르고 모의지덕이 있다.
이제 왕후에 봉한다." 출신이 미천했던 변부인은 마침내 위왕 왕후에 오르니 이때 그녀의 나이 58세였다.
한번은 조조가 바깥에서 아주 예쁜 귀걸이를 많이 얻었다. 그래서, 기쁘게 들고 들어와서 변부인에게 먼저 고르라고 하였다. 그런데,
변씨가 고른 것은 예상외로 중등급의 귀걸이었다. 조조가 이상하게 생각해서 변부인에게 왜그러냐고 물으니, 변씨가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가장 좋은 것을 집는다면 그것은 탐심이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가장 나쁜 것을 고르면 그것도 가식일 것입니다. 그래서 중간 것으로 골랐습니다"
이런 그녀도 남동생의 일로는 조조와 얼굴을 붉힌 적이 있다. 남동생인 변병(卞秉)은 조조를 따라서 전쟁터를 섭렵했다.
공로가 뛰어났음에도 조조는 그에게 관직을 올려주지 않았다. 그보다 공로가 적은 자들도 모두 관직이 오르는데, 그는 겨우 별부사마를 지냈다.
변씨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조에게 항의를 했다. 그러자 조조가 말했다: '그는 내 처남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큰 관직을 줄 수가 없다"
그러자 변씨도 더 이상 관직을 가지고 얘기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남동생이 관직이 낮을 뿐아니라 재산도 없어서 힘들게 살자, 다시 말했다.
"적절한 관직을 줄 수 없다면, 재물이라도 좀 내려달라" 그러자 조조는 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네가 몰래 그에게 좀 주면 족하다.
내가 공개적으로 상을 내리면, 그것은 곤란하다" 변씨도 멍청하지는 않았고, 조조가 그렇게 하는 것을 이해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몰래 남동생에게 재물을 주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조조가 죽을 때까지 변병은 직위도 낮고 가난하게 살았다.
건안25년 정월 66세의 조조가 세상을 떠났다. 임종시에 그는 유언을 남겼는데,
죽을 때 입었던 옷 그대로 입관시키고 관에는 도자기나 나무나 넣고 금은진보는 넣지 말라고 했다.
이외에 상복을 입지 말고 그냥 원래의 직위에서 그대로 일을 하라고 하였다.
후궁중 자녀가 없는 첩들은 모두 친정으로 되돌려보내어 새로 시집갈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다.
조조의 이 유조는 위진시대에 간소한 장례의 모범이 되었다. 이후 위나라는 물론 양진의 황제나 황후, 황족 중신들도 모두 그를 본떠 간소한 장례를 하게 된다.
진보를 무덤에 넣지 않았을 뿐아니라, 묘를 크게 만들지도 않았고, 자녀가 없는 첩들은 더 이상 과부로 지내지 않아도 되게 하였다.
일대영웅 조조가 죽으면서 변왕후의 아들 조비는 역사무대의 전면에 등장했다. 위왕위에 오른후 생모인 변왕후를 위왕태후로 한다.
조비가 41세의 한헌제로 하여금 '선양'하도록 하게 하여 정식으로 동한왕조를 끝내고 조위제국을 건립한다. 이 때가 황초(黃初) 기년이다.
황초원년 11월 계유, 조비는 선위를 받은 후, 한헌제 유협을 산양공으로 봉하며, 특별히 그에게는 자신의 앞에서 신하로 칭하지 않아도 되게 해준다.
유협의 네 아들도 동시에 후로 봉하여 한왕조의 후손이 끊이지 않도록 해준다. 동시에 조비는 조부 조숭을 태황제, 부친 조조를 무황제로 추존한다.
광대출신인 변씨는 60세환갑이후 천하제일귀부인인 황태후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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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이구, 눈이 어지러워요. 단락 정리했다하구선... 좀 끊어줘봐요. 서울 갔다와서 읽어야지.
조조의 여인들은 처음 읽어보는데요.....너무 재미있어요....마부님 고마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