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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오봉산(五峰山) 청평사(淸平寺)를 찾아서 1
현지사를 나와서 화천쪽으로 아름다운 파로호 강변을 끼고 꼬불꼬불 달리다가 오봉산을 감돌아 올라갔다가 내려 청평사로 향했습니다. 산길에 아직도 도로변에는 눈이 많았고 줄줄 녹고 있었습니다. 바깥 날씨는 5~6라 포근했습니다. 승용차 주차료가 2,000원이요, 입장료는 어른은 1, 300원입니다. 청평사에는 회전문(廻轉門)이라는 보물 한 점이 있어 문화재관람료로 받는다고 합니다. 청평사를 승용차로 가려면 많이 돌아서 가지만 소양강 댐쪽에서 배를 타고 가면 많이 단축할 수도 있습니다. 배삯이 왕복 5,000원이라고 하네요.
공주와 상사뱀의 전설
매표소에서 청평사쪽으로 조금 올라오다 보면 쉼터에 공주와 상사뱀의 전설을 어둡고 조잡하게 조성해 놓았네요. 그런 느낌이 듭니다.
평양공주 몸을 감은 상사뱀
앞서 <불교이야기>방에 올린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올려 봅니다.
아득한 옛적 어느 날 구룡폭포(현 구성폭포)앞에 당나라의 복색을 한 두 여인이 폭포의 장관을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태종의 딸 평양공주와 그의 시녀였습니다. 평양공주가 본국에 있을 때 사랑하던 청년이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 청년은 죽어서 상사뱀이 되어 살았을 때 밤이면 찾아가던 공주궁에 들어가 공주 몸에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이번에 함께한 일행의 모습입니다.
공주는 날이 갈수록 병세가 악화되어 나라 안에 있는 유명한 복술가를 전부 불러들여 성대한 제를 올리는 한편 전 의원들을 불러 치료 하였지만 공주의 병은 날이 갈수록 더하여 왕은 최후 수단으로 전국 사찰을 순례하면서 부처님께 지성껏 빌어 보라고 했습니다. 습니다. 이 때 신라에서 간 구법승의 말을 듣고 신라에 건너와 산자수명한 해동의 산하를 두루 다니면서 절을 찾아 불공을 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그러던 어느날 청평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길상님
두 여인은 그 곳 동굴 (후세 사람들이 이를 공주굴이라 함) 에서 노숙을 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 종소리를 듣고 자기 몸에 서려있는 상사뱀에게 말했습니다.
그때 절에서는 가사불사 법회를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주는 지금의 공주탕에서 목욕 재계를 하고 가사에 서너 바느질 뜬 후에 법당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염불을 하고 있었 습니다.
계곡에 조성된 공주와 상사뱀상
한편, 동굴에 남아 있던 상사뱀은 기다리다 못해 공주를 찾아서 절에 올라가 정문을 들어 가려고 하니 별안간 뇌성벽력과 함께 소나기가 쏟아져서 마침내 그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고 합니다. 의외에도 상사뱀이 죽어 폭포에 떠 있었습니다.
정성껏 묻어 주고 그 사실을 본국에 알렸습니다.
금덩어리 3개를 보내어 화려한 법당을 세우게 했다고 합니다. 한 개는 후일 공주의 귀국 여비로 주고 떠났습니다.
삼층석탑을 세워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고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이 탑을 후세 사람들은 공주탑(公主塔)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거북바위라고 하는데 거북같이 보이십니까? 아닌 것 같지요?
그런데 이렇게 보시면 어떻습니까? ^^
공주가 머물렀다는 공주굴입니다.
구성폭포. 여기서 상사뱀이 죽었다고 하네요.
구성폭포의 유래. 말이란 거너뛰면 와전되기 쉽습니다.
삼층석탑(공주탑) 문화재 자료 제 8호
이 탑을 공주탑이라고 하는데 미처 못 보아 카메라에 담지 못하여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 애증의 상사뱀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한 애뜻한 탑입니다.
청평사에서 만년을 보낸 매월당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설잠스님의 시 한 수를 소개합니다.
유객(有客) 나그네
청평사 영지(影池)
눈이 덮이고 얼어서 제멋이 안 살지만 이 영지는 고려시대 때 청평사에서 수행하던 이자현 (李資玄)거사가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려 물길을 끌어들이고 정원 안에 연못을 만들어 오봉산의 모습이 비치도록 조성했다고 하여 영지(影池)라 합니다.
드디어 청평사 모습이 보입니다.
두 그루의 소나무가 일주문처럼 계단위에 서 있습니다.
정면에 그 유명한 회전문이 보입니다. 오봉산과 어울어져 장관입니다.
청평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고려 광종 24년(973) 백암선원(白巖禪院) 이 개창되면서 뚜렷한 역사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산백과사전에 의하면,
『고려시대 973년(광종 24) 승현(承賢)이 창건하고 백암선원(白岩禪院)이라 하였으나, 그 뒤 폐사되었다. 1068년(문종 2) 이의(李顗)가 중건,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다. 이의의 아들 자현(資玄)이 이곳으로 내려와 은거하자 오봉산에 도적이 없어지고 호랑이와 이리가 없어졌다고 하여 산 이름을 청평이라 하고 사찰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으로 하고 중창하였다.
1550년(명종 5) 보우(普雨)가 청평사로 개칭하였다. 6 ·25전쟁으로 구광전(九光殿)과 사성전(四聖殿) 등은 소실되고, 현재 보물 제164호인 청평사 회전문과 극락보전 등이 있다.
절터는 강원도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었으며,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8호인 3층석탑이 있다. 이 탑에는 상삿뱀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사찰 내에 있는 고려정원은 일본 교토[京都]의 사이호사[西芳寺]의 고산수식(枯山水式) 정원보다 200여 년 앞선 것이다.』
회전문 앞에서
상사뱀이 이 문을 들어서려다가 뇌성벽력과 함께 내린 폭우에 휩쓸려 내려갔다고 하네요. 안타깝게도 애욕에 집착하다가 죽음에 이르렀는데 집착의 허망함을 깨달았는지..... 회전문이란 말이 이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네요. 회전(廻轉)이란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준말입니다. 윤회의 원인은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집착입니다. 그러니까 문 밖의 세상은 중생세계로 온갖 집착이 무성한 세계로 윤회하는 세상이지만 이 문 안으로 들어서면 반야 지혜의 세상이므로 생사거래가 없는 해탈의 세계입니다. 갑시다! 해탈의 세계로.....
짠!
그런데 청평사에 회전문이 있다고 하니 사람들이 빌딩에 있는 회전문을 연상하는 듯 합니다. 저도 옛날에 그런 줄 알고 빙글빙글 도는 문이 어디있나 찾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회전문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더니 그런 뜻이 있는냐고 이해하더군요.
화전문(廻轉門) 보물 제 164호
안내문 전문을 옮겨 봅니다.
『사찰의 중문에 해당하는 회전문은 조선 명종 때인 1545~1567년경 보우선사(普雨禪師)에 의하여 다시 지어졌다. <청평사지(淸平寺誌)>에는 남문(南門)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700년대의 기록에 회전문에 관한 부분이 기재되어 있다. 1936년 일본인에 의해 해체ㆍ 수리된 바 있고, 1963년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몇 차례의 보수를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단층 맞배지붕인 3량집 구조이며, 중앙을 넓게 통로로 하고 마루를 깐 뒤에 여기에 천왕상을 안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심포 계통의 익공[창방과 직교하여 보를 받치며 쇠서(소의 혀) 모양을 내고 초각한 공포재] 양식으로 연등천장에 홑처마로 되어 있다. 따로 쌓은 기단 없이 축대 위에 구성된 주춧돌은 지붕 및 몸체의 구성과 어울려 단순하고 절제된 맛을 보여 준다.』
경운루(慶雲樓)
경운루 모습
중회랑 모습
회랑에는 이렇게 연등이 형형색색 걸려 있습니다.
대웅전. 대웅전 모습은 이렇게 밖에 찍을 수 없더군요.
우보처 보현보살 본존 석가모니불 좌보처 문수보살
대웅전 앞 우측에 자리한 나한전
대웅전 앞 좌측에 자리한 관음전. 어째 삐딱하게 찍어졌네요. ㅎㅎㅎ
조그만 마당을 가운데 두고 대웅전, 나한전, 관음전, 경운루가 ㅁ자형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관음전과 나한전은 맛배지붕으로 지어진 전각이네요. 모두 최근에 건립된 듯 합니다. 한 곳에 집중적으로 건물이 배치되다 보니 좀 답답한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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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청평사에는 사실 불교의 인물들이 많이 거쳐간 곳입니다. 김시습이 만년을 보낸 곳이기도 합니다. 환적대사와 설화대사의 부도가 있다고 하는데 미처 못가봤네요. _()_
수고하셨읍니다()
예전메 가 보았던 청평사가 아니내요!! 불사를 넘 잘 해서인지 잘 모르겠내요....나무묘법연화경()()()
15년 전 쯤 갔었지만 생각나는 것은 오직 폭포 밖에 생각이 안나네요. _()_
보는 각도에 따라 거북바위가 다르게 보여지는군요. 해탈의 세계로 잘 보고 갑니다.
그래서 제법이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인식주관에 따라서 다르니... 김시습 시 한 수를 올린다는 것을 깜박했네요. 늦었지만 올려 봅니다. _()_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해 주셔서 고맙게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이 청평사는 많은 시인 묵객들이 머물며 감회를 읊었다고 하네요. 나옹 스님이나 설잠 스님뿐만 아니라 이제현 선생, 이황선생 등도 머물다 가셨다고 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