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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의 일곱 가지 죄 - 존 테일러 개토
제가 개토입니다. 26년 전, 제가 교사 노릇을 직업으로 골라잡았던 것은 그보다 썩 좋은 다른 일거리를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자격증은 영어와 영문학을 가르치는 것인데요, 하지만 제가 하는 일은 전혀 그게 아닙니다. 저는 영어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냥 선생 노릇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을 잘한다고 상도 타고 그러는 겁니다.
가르친다는 일, 이것은 지역에 따라 다른 내용을 가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할렘에서 할리우드까지 어느 곳에서나 두루 가르치는 일곱 가지 교과 내용이 있습니다. 이 일곱 가지로 이루어지는 전국적인 교과목을 위해 여러분이 얼마나 여러 가지 길로 돈을 내고 있?d디 여러분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내용이 뭔지 좀 아시는 게 좋겠죠. 물론 여러분이 이 내용들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볼 것인지는 여러분 마음대로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비꼬는 뜻에서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믿어 주십시오. 이 내용들은 바로 제가 가르치는 것이며, 그 보수를 여러분이 저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좋아하시든 싫어하시든 그것은 여러분 마음입니다.
1. 혼란
언젠가 인디애너 주에 사는 케이시라는 여자분이 이런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생각이란 어떤 것들일까요? 글쎄 제 생각으로는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생각은 자기들이 배우는 것이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 같습니다. 그 모두에 어떤 체계가 있으며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것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이해하는 일, 체계를 잡는 일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케이시는 뭘 잘못 알았어요. 제가 맨 먼저 가르치는 것이 바로 ‘혼란’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모든 것은 제멋대로예요. 모든 것들의 연관성을 파괴하도록 가르칩니다. 관계의 단절, 그것이 제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들은 너무 많아요. 행성의 궤도, 상수법칙(常數法則), 노예제도, 형용사, 건축제도법, 무용, 체육, 합창, 회의방법, 소방훈련, 컴퓨터 언어, 육성회, 교사 연수, 퇴거 연습, 표준화된 시험, 학교 밖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연령별 격리… 이들 가운데 무엇이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단 말입니까?
아무리 좋은 학교라도 교과 내용과 시행 방법을 세밀히 검토해 보면 체계에 결함이 있고 모순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연의 질서와 순리를 깨뜨리는 강압이 교육의 질(質)이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자신들에게 뒤집어씌워지는 데서 오는 두려움과 분노를 어린이들이 꼭 집어서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학교라는 곳은 졸업생이 어떤 참된 열정을 갖고 사회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대신에 경제학, 사회학, 자연과학 따위에 나오는 뜻도 모를 전문 용어가 뒤범벅되어 들어 있는 공구 상자를 들고 나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무엇에 대해서든 깊은 배움이 없이 교육의 질이란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의 작업에 연관성을 거의 느끼지 않는 많고많은 어른들이 사실은 자격도 없는 전문성을 내세우면서 아이들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단절된 사실의 파편들이 아니라 의미입니다. 그리고 교육이란 원재료를 가공하여 의미를 뽑아내는 하나의 공정입니다. 사실과 이론들을 누비이불처럼 뒤얽어 놓는 학교 제도의 관행과 집착은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오랜 노력의 역사를 감춰 놓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초등학교에서는 그리 두드러져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하자’는 것과 ‘저것을 하자’는 것 사이의 소박하고 단순한 관계 속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냥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학교생활의 경험들이 그런 대로 뭔가 체계있는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아직 그 연극과 꾸밈 뒤에 얼마나 빈약한 내용이 가려져 있는지 분명하게 인식할 단계에 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순리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어린아이가 걷거나 말하기를 배우는 과정, 해뜨기에서 해지기까지 빛의 변화, 농부나 대장장이나 제화공이 대를 물려온 일하는 방법, 추수감사절 잔치 준비. 모든 부분이 다른 부분들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하나하나의 행위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과거와 미래를 모두 비춰 보여 줍니다. 학교의 원리는 이렇지 못합니다. 한 교실 안에서도 그렇지 못하고 하루의 일과표 속에서도 그렇지 못합니다. 학교의 원리는 미치광이 원리입니다. 어느 한 부분도 확고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세밀히 살펴보면 허점 없는 것이 없습니다. 학교나 교사의 독단을 비판할 수 있는 수단을 감히 가르치려는 교사는 거의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교과목들을 배웁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카톨릭 신자들이 교리 문답을 배우듯, 성공회 신자들이 39조항을 외우듯, 그렇게 받아들일 따름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모든 일과 모든 것들 사이의 연관성을 해체하도록 가르칩니다. 체계화의 정반대 방향으로 끝없이 세계를 조각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텔레비전 프로 편성에 가까운 일이지, 질서를 심고 키우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정이란 것이 이름밖에 남아 있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맞벌이 때문이기도 하고, 이사를 너무 자주 하거나 직장을 너무 자주 바꾸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나친 야심 때문이기도 하고, 뭔가가 사람들을 너무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가족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만든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에 저는 학생들에게 혼란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가르치는 첫째 내용입니다.
2. 교실에 갇히기
두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학생들이 교실에 갇혀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있을 곳은 교실 안이니 교실에서 나가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사실을 결정하는 것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건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학생들에게는 번호가 매겨져 있어서 교실을 벗어나더라도 제자리에 쉽게 되돌려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번호 붙이는 여러 가지 방법이 너무 발달해서 이제는 그 숫자들의 중압으로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쳐다보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그 사업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지만, 아이들에게 번호 붙이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고도 유익한 사업입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것을 부모들이 항의 한 번 안 하고 용납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그것도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제가 할 일은 번호가 붙어 있는 어린이들이 갇혀 있는 상태를 좋아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좋아할 만큼은 아니더라도 별 말썽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제 할 일을 잘하면 아이들은 자기들이 다른 곳에 설 수 있다는 상상도 하지 않게 됩니다. 더 우월한 반을 선망하고 두려워하도록, 더 열등한 반을 경멸하도록 제가 가르치기 때문이지요. 이 능률적인 제도가 잘 돌아가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서로를 견제해 가며 행진이 보조를 잘 맞추게 됩니다. 대부분의 학교처럼 짜고 벌이는 경쟁판에서 정말로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저마다 자기 위치를 알고 받아들이게 하는 거지요.
학생들의 99퍼센트를 교실 안에 묶어 두는 것이 교실 체제의 전체 구도이지만 저는 아이들이 시험 성적을 올리도록 공공연히 격려하기도 합니다. 잘하기만 하면 더 우월한 반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는 미끼를 던져 가면서, 언젠가는 고용주들이 시험 성적과 등급을 근거로 신입 사원을 채용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따금씩 악몽처럼 저를 덮칩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는 대부분의 고용주들이 현명하게도 그런 데 신경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학교 교육과 진실이란 근본에서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소크라테스가 갈파한 사실입니다. 번호 매긴 교실의 가르침이란 모든 학생이 피라미드 속의 돌멩이처럼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숫자의 마술이 아니고는 그 자리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 길 말고는 아무도 자기 자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3. 무관심
세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무관심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지나친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아무리 아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싶어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방법은 아주 교묘합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제 강의에 완전히 몰두하도록 하는 거지요. 자리에 똑바로 앉아서 온 마음을 기울여 경청하게 하고 제 눈에 들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도록 시키는 겁니다. 학생들이 그렇게 움직여 줄 때는 마음이 흐뭇하죠. 누구라도 신명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강의를 아주 잘 할 때, 저는 바로 이런 효과가 일어나도록 몹시 공들여 강의 계획을 짭니다. 하지만 종이 땡 울리기만 하면 지금까지 하던 일이 무엇이든 곧바로 손을 떼도록 요구합니다. 다음 시간에 할 일로 서둘러 넘어가기 위해서지요. 아이들은 전등불을 켰다 껐다 하듯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겁니다. 제가 가르치는 교실에서든, 제가 아는 어느 교실에서든, 어떤 중요한 일도 제대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학생들은 교과 진도표 위에서 말고는 완전한 경험이라는 것을 가지지 못합니다.
진정 종소리가 가르치는 것이란 어떤 일도 끝낼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에 지나치게 몰입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 해 동안 종소리에 길들여지고 나서도 중요한 일거리가 아무것도 없는 그런 세상에 맞춰지지 않는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은 성격이 웬만큼 강한 사람이 아닐 겁니다. 학교 시간을 지배하는 감춰진 원리가 바로 종소리입니다. 그 원리는 가차없는 원리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이 원리에 따라 파괴되며 이 원리는 같은 길이의 어떤 시간이든 서로 똑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마치 지도의 추상화 원리가 서로 다른 산과 강들을 똑같은 것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종소리는 학생들의 모든 노력을 무관심이 지배하도록 감염시키는 힘을 가졌습니다.
4. 정서적 의존성
네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정서적 의존성입니다. 동그라미와 곱표, 미소와 찌푸림, 상과 벌, 표창 따위로 저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미리 목표가 정해진 지휘 체계에 따르도록 가르칩니다. 모든 권리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 주기도 하고 박탈하기도 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이의를 제기할 틈이 없습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이 인정해 주지 않는 한, 학교 안에는 어떤 권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헌법에 명시된 자유로운 의사 표시의 권리조차 예외가 아닙니다. 저는 교사로서 여러 가지 개인 결정에 간섭하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합당한 일에는 허가해 주기도 하고 제 통제력을 위협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교정 조치를 취하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이나 십대 학생들에게는 끊임없이 개성을 드러내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신속정확하게 판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개성이란 학급 이론에 저촉되는 요인이며 모든 분류 체계에 암 같은 존재라 할 것입니다.
아이들의 개성이 밖으로 나타나는 흔한 예들을 들어보겠습니다. 수업 중에 볼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어 변소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일, 복도에서 목이 마르다는 핑계로 수돗가로 빠져나가는 일. 저는 핑계라는 걸 알면서도 속아 줍니다. 그렇게 해야 아이들이 제 눈치를 보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따금은 제 관할을 벗어나는 일로 아이들이 분노하거나 실망하거나 기뻐할 때 아이들의 자유 의지가 제 앞에서 마구 터져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교사가 아이들의 권리를 판별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주었다 빼앗았다 할 수 있는 특혜를 빌미로 올바른 처신을 강요할 뿐입니다.
5. 지적 의존성
다섯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지적 의존성입니다. 교사가 어떻게 하라고 시키기를 기다리는 학생들이 착한 학생들입니다. 자신보다 더 잘 훈련받은 다른 사람이 자기 인생의 의미를 결정해 주도록 기다리게 하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모든 중요한 선택은 전문가에 의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공부할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교사인 저뿐입니다. 아니, 제게 봉급을 주는 사람들이 그 결정을 내려주면 제가 실행에 옮기는 거죠. 생물의 진화가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가르치라는 지시를 받으면 저는 그대로 가르칩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생각하도록 가르치라고 제가 지시받은 내용을 거부하는 아이들은 벌을 받습니다. 아이들이 생각할 내용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있기 때문에 잘하는 학생들과 못하는 학생들을 구분하는 일도 아주 쉽게 됩니다.
잘하는 학생들이란 이렇게 생각하라고 제가 시키는 방향을 별 저항없이 잘 따르는 학생들입니다. 기분 좋을 만큼 열의를 보여 주기까지 하지요. 공부할 가치가 있는 수없이 많은 것들 가운데 우리가 가진 시간으로 무엇무엇을 공부할지를 제가 결정해 줍니다. 아니, 얼굴이 감춰진 제 고용주들이 결정해 줍니다. 그 사람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데 제가 뭐하러 왈가왈부하고 나섭니까? 제 직업에는 호기심이란 것이 작용할 여지가 없습니다. 동화(同化)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못하는 학생들이란 물론 여기에 저항하는 학생들이죠. 자기들이 저항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이해할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기네가 무엇을 언제 공부할지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 녀석들을 그대로 놓아 두고서야 어떻게 저희가 선생 노릇을 해먹을 수 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저항하는 아이들의 의지를 꺽는 데는 효과가 확인된 방법들이 있습니다. 물론 극성스런 부모가 애들 편을 들 경우 일이 훨씬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학교란 곳의 평판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그런 일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나본 중류층 학부모 가운데 자기네 아이들의 학교가 나쁜 학교라고 정말로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26년 동안 교사 생활을 하면서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부모 자신이 학교를 제대로 다니면서 일곱 가지 가르침을 잘 받은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증언해 주는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착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뭘 어떻게 할지 전문가들의 지시를 받으려 합니다. 이 가르침의 토대 위에 우리 경제 체제 전체가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의존성을 갖도록 훈련받지 않는다면 무슨 꼴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십시오. 사회 사업이라는 것은 설 땅을 잃고 그것이 생겨나던 근세의 역사적 조건 속으로 사라져버리겠죠. 정신 장애자의 공급이 끊겨서 상담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은 공황에 빠지겠죠. 사람들이 제멋대로 노는 방법을 다시 익히면서 텔레비전을 비롯한 상업 오락과 흥행들은 말라죽어버리겠죠. 사람들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 채소를 심고 거두고 요리하는 일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하게 되면 식당과 패스트푸드점 같은 전문 음식 사업이 크게 위축되겠죠. 근대 법학과 의학, 공학의 많은 부분도 사라져버릴 겁니다. 의류 산업과 학교 산업도 마찬가지고요. 이 모두가 해마다 학교에서 쏟아져 나오는 의존성을 가진 사람들 덕분에 존재하고 번창할 수 있는 겁니다.
학교 제도의 근본 개혁을 지지하는 투표를 하시기 전에 신중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월급 봉투에 어떤 변화가 올지 모르니까요. 스스로는 무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남들이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바탕으로 하나의 생활 양식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6. 조건부 자신감
여섯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조건부 자신감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부모가 자기를 사랑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아이들을 한줄로 정렬시키는 일을 한번 해보십시오. 자신감에 찬 영혼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동화를 배격하는지 알게 될 겁니다. 우리 세계는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버텨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아이들의 자신감이 전문가의 의견에 얽매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끊임없이 평과와 판별을 받습니다.
달마다 번듯한 모습으로 모든 학생들의 가정을 찾아가는 통지표는 부모들에게 자기 아이에 대해 얼마만큼 만족을 느끼고 불만을 느껴야 할지 퍼센트 단위까지 정확하게 알려 줍니다. ‘좋은’ 학교 분위기의 생태 원리는 상업 경재오가 마찬가지로 언제나 불만을 갖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수치로 나타낸 성적을 작성하는 데 얼마나 적은 시간과 생각이 들어가는지 알면 놀랄 분들도 계시겠지만,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통지표들이 쌓이고 쌓인 무게 아래 아이들은 성의없는 누군가의 판단에 따라 자기에 대해, 또 자기 미래에 대해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나타난 모든 주요한 철학 체계의 밑바탕이 되었던 자기 평가라는 개념은 전혀 설 땅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험과 성적, 통지표의 가르침이란 아이들이 자기 자신이나 부모를 믿기보다는 자격증을 가진 권위자들의 평가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남이 가르쳐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7. 숨을 곳은 없다
일곱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숨을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늘 감시받고 있다, 나와 내 동료들이 끊임없이 너희들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자기만의 공간도, 자기만의 시간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수업 사이의 휴식은 정확히 30초로 제한해서 뜻하지 않은 동료애가 생겨날 여지를 최소한으로 줄입니다. 학생들 서로간에 일러바치는 일, 심지어는 자기 부모의 일을 일러바치는 것까지 장려됩니다. 물론 저는 부모들에게도 자기 아이들의 문제점을 보고하도록 권유합니다. 집안에서 서로 고자질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은 사회에 대해서도 위험한 비밀을 간직할 위험이 별로 없겠죠.
저는 숙제라는 이름으로 학교 공부가 집안에까지 연장되도록 시킵니다. 감시 자체는 연장되지 못해도 감시의 효과는 연장되는 셈입니다. 아이들에게 남는 시간이 있으면 자기 부모에게서든, 길거리에 다니면서든, 동네에 사는 현명한 할아버지에게서든, 학교에서 인정할 수 없는 내용을 배울 위험이 있습니다. ‘못난 사람이 한가로이 있으면 착하지 못한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과 같이 학교 제도의 이념에 반역하는 마음은 한가한 아이들에게 언제나 찾아올 수 있는 마귀입니다.
끊임없는 감시와 개인 영역의 박탈은,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으며 혼자만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감시란 유서 깊은 제도로서 영향력 있는 여러 사상가들이 신봉해 온 것입니다. 이것은 《공화국》《천로역정》의 ‘천국편’ 《기독교의 제도들》《뉴 아틀란티스》《리바이어던》을 비롯한 많은 책에 중심 처방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아이가 없었던 이 책의 필자들은 모두 같은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사회를 확고한 중앙 통제 아래 잡아놓으려면 아이들을 빈틈없이 감시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제복을 입혀 악대 속에 묶어놓지 않으면 떠돌이 피리쟁이를 따라가 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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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육의 일곱 가지 내용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십시오. 혼란, 교실에 갇히기, 무관심, 정서적 의존성, 지적 의존성, 조건부 자신감, 숨을 곳은 없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은 언제까지고 예속된 계급을 위한 가장 중요한 가르침들입니다. 자신이 원래 무엇을 타고났는지 알아낼 길을 영원히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훈련 제도는 피지배층을 통제한다는 원래의 목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1920년대 이래 학교 관료주의의 발전, 그리고 그보다 눈에 덜 띄는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 같은 학교 제도에서 혜택을 얻는 온갖 산업 분야의 발전으로 확대된 이 제도의 힘은 중산층 자녀들까지도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비난에 소크라테스가 격노한 것이 이상한 일로 보입니까? 벌써 그때부터 철학자들은 교육의 직업화가 가져올 폐단을 통찰했던 것입니다. 건강한 사회에서라면 모든 사람이 가지고 발휘할 교육의 기능을 봉쇄하는 것이 바로 교육의 직업화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과 같은 내용들을 날이면 날마다 학생들에게 가르치고도 국가의 위기를 맞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위기의 성격은 언론 매체에서 선전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세계나 미래에 대해서 관심을 잃고 있습니다. 가지가지 오락과 폭력 말고는 관심을 갖는 대상이 거의 없습니다. 잘살건 못살건 21세기의 주역이 될 어린이들은 어떤 일에든 오랫동안 집중할 능력이 없습니다.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에 대한 감각이 빈약합니다. 결손 가정 아이처럼 친근한 관계에 편안해하지 못합니다. 실상 아이들의 부모의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해온 사실을 생각하면 모두가 결손 가정의 아이들인 셈입니다. 아이들은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고 잔인합니다. 물질주의적이고 의존적이며 수동적입니다. 난폭하면서도 예상치 못한 일 앞에서는 겁쟁이며, 의미 없는 일에 몰두합니다.
어릴 적의 갖가지 버릇들은 학교 교육을 통해 조장되고 확대되어 추악한 모습으로 자라납니다. 학교는 감춰진 교과 과정으로 올바른 인간성의 성장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사실입니다. 아이들의 공포심과 이기심, 미숙함을 이용하지 않고는 우리의 학교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저도 자격증을 가진 교사로서 자리를 지킬 수 없을 겁니다. 감히 일반 학교에서 비판적 사고의 도구가 되는 변증법이라든가 발견법처럼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이 쓰는 무기를 아이들 손에 쥐어 주었다가는 오래 안 가서 풍비박산이 날 겁니다.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학교도 그 가르침이 신앙으로 받아들여져야만 유지될 수 있는 겁니다.
자, 이제 제도가 된 학교 교육이 어린이들에게 얼마나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바로 보도록 합시다. 일곱 가지 내용의 교과 과정, 그 해독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지독하게 반교육적인 것입니다. 서투른 땜질로는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류가 겪는 가장 어처구니없는 모순의 하나라 할 것입니다. 학교 제도를 전면적으로 재고할 경우 그 비용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것보다 너무나 적어질 것이기 때문에 이해 관계가 얽힌 세력들이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놓아두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취로 사업 대상자인 셈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육 사업은 수의계약업자들의 힘으로 지탱됩니다. 사업 규모를 줄이거나 제품을 다양하게 만들어 비용을 줄인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의 성장에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것이 제도 학교 교육의 철칙입니다. 일반 회계 원칙이나 합리적인 경쟁 원리가 통하지 않는 사업이 이것입니다.
공교육에 어떻게든 자유시장 원리를 도입하는 것이 해결의 길을 찾는 가장 그럴싸한 방향일 것 같습니다. 문중(門中) 학교들, 규모가 작은 기업 같은 학교들, 종교계 학교들, 기술 학교들, 농업 학교들이 다양하게 있어서 정부 교육과 경쟁하는 자유시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그리는 학교 교육의 자유시장이란, 남북전쟁 전의 미국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에게 맞다고 생각하는 교육의 종류를 학생들이 선택하는 겁니다. 독학도 선택의 한 갈래가 될 수 있겠죠. 벤자민 프랭클린이 독학 때문에 손해 본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선택의 길들이 지금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힘차고 활기찼던 지난 시대의 흔적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그런 길을 지금 누리기 위해서는 아주 좋은 배경이나 뛰어난 용기, 기막힌 행운이나 엄청난 재산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계층의 힘없는 사람들, 도시 근교 중산층의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에게 이처럼 더 나은 교육의 길이 거의 완벽하게 닫혀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정부 독점 교육 제도의 이 난장판을 뒤엎기 위해 우리가 뭔가 용감하고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일곱 가지 가르침의 재앙은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어른이 되어 반평생을 학교 교육에 바쳐온 저는 믿습니다. 대량 교육의 진정한 알매이란 그것뿐이라고. 좋은 교과 과정이나 시설, 그리고 좋은 교사진이 여러분 자녀들의 교육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라는 말에 속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검토해 온 학교 교육의 병리 현상들은 대부분 학교가 학생들을 가로막고 붙잡아 두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가족들과 마주치는 가운데 생겨나는 자발성이나 인내심, 용기, 자존심, 사랑, 그리고 타인에 대한 봉사 정신 같이 가정 생활과 지역 사회에서 배워야 할 소중한 가르침을 얻지 못하게 합니다.
30년 전만 해도 아이들은 학교 문을 나서면 이런 것들을 배울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텔레비전이 그 시간을 거의 다 먹어치웠고, 맞벌이 가정이나 이혼한 가정의 긴장감이 가정이라는 것을 삭막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완전한 인간으로 자라나기에 시간으로 보나 공간으로 보나 너무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 우리 문화 위에 덮여오고 있는 미래는 우리 모두에게 비물질적인 경험의 지혜를 익히도록 강요할 것입니다. 그 미래는 우리에게 생존을 위한 대가로서 물질의 사용을 극소화하는 자연의 길을 따라 살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학교에서는 그런 공부가 가르쳐질 수가 없습니다. 12년 징역과도 같은 학교 제도, 거기서 진정으로 가르쳐 주는 것은 나쁜 생활 태도뿐입니다. 학교 선생 노릇을 잘했다고 상을 타먹는 제가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 존 테일러 개토(John Taylor Gatto)―미국 뉴욕 주 맨해튼의 몇군데 공립학교에서 26년 동안 교사 생활을 하면서 여러 차례 모범교사상을 받았다. 퇴직한 뒤로는 올바니 자유학교에서 자신의 독특한 게릴라식 교수법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으며 또, 전국을 다니면서 국가 교육제도의 근본 개혁을 촉구하는 활동도 함께 하고 있다. 이 글은 1991년 ‘뉴욕 주 올해의 교사’로 지명된 기념 행사때 했던 연설로, 푸른나무가 펴낸 《바보 만들기》에서 뽑은 것이다.
첫댓글 짝짝짝, 적극 공감하는 좋은글입니다. 몰래보기 아까워 광장으로 옮길테니 이해해줄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