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의 미래]
2010. 7. 19. 지 운
(정선 백석폭포 앞강에서 )
아름다울 미(美)의 會意는 羊+大->美. 양이 크고 살찐 것이 특히 맛이 좋다는 데서, 맛이 좋음을 나타내고, 나아가서 ‘좋음·아름다움’의 뜻을 나타낸다. 목축이 주업이던 시절에는 살찌고 풍성한 양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 시기는 현대적인 의미의 미적 개념이 생성되기 이전의 안정감, 혹은 원초적 행복감 같은 것이 미적 기초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도시인이 한적한 산골마을로 여행을 가서, 한 촌로를 만나서 인사말을 건네었다.
“어르신,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사시니 좋겠습니다!”
“에이 뭐, 살기만 팍팍하지... ”
산골에서 일만 많이 하지, 사는 재미를 못 느낀다는 뜻일 게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의식주가 급한데 경치 볼 겨를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도시의 삶이 아무리 팍팍하다고 해도 조금은 여유가 있기에 여행도 다니고 좋은 경치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수석인은 약간의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기에 탐석도 다니고 전시회도 관람하러 다닌다. 수석인의 삶이 곧 행복이다.
현대적인 한국 수석의 개념이 정립된 이후로 가장 많은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 이른바 수석의 기준과 표준규격으로서 전시와 수집의 대상이 되어 왔다. 수석의 삼요소를 질·형·색으로 하고, 거기에 고태미와 자연미 등 몇 가지를 보태기도 한다. 인공이 아닌 자연적으로 형성된 순수 자연석이라야 참 수석 대접을 받는다. 수석의 크기는 한 사람이 들 수 있고 실내에서 감상할 수 있는 것으로 대·중·소로 구분하여 상·하한을 두었다.
그러나, 최근의 수석 열기에 비해서 탐석 여건은 점차 부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수석의 메카 남한강 일대는 ‘사대강정비공사’로 출입이 금지된 상태이고, 서해의 섬탐석은 배삯에다 숙박료, 그리고 풍도의 경우에는 입장료 3만원까지 부담해야하니 비용이 만만치 않다.
살펴보면 시대와 지역, 환경에 따라 종교와 사상 그리고 미적 기준이 달라져 왔으며, 수석의 기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전후 해석 도입 초창기와 20년이 경과한 2010년 오늘의 수석 경향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강돌과 산돌 경석 위주의 규격석을 선호하던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둥글둥글하기만 하고 아무런 형태미가 없는 해석은 아예 수석의 범주에 넣지 않았었다. 반대로 해석이 대세인 오늘 날은 둥근 돌이 아니면 좋은 해석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완전히 역전 현상이 생겨난 것이다.
기존의 딱딱한 수석관에서 조금 벗어나 느긋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산에는 온통 흰 화강암이 푸른 녹음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도 짙은 색감만 고집하는 수석이론이 타당한 것일까. 꼭 규격석이 아니면 어떠랴, 작은 돌은 가까이 다가서면 더욱 앙증스럽고, 혼자서 들 수 없는 대형석은 큰 건물의 로비나 넓은 정원에 연출하면 더욱 좋으리. 명칭이야 뭐라고 하든 그게 뭐 대수인가. 시야를 조금 넓혀보면 아직도 가볼 만한 돌밭은 많다. 남한강의 상류인 정선과 영월 지역은 산수 좋고 깨끗한 돌밭이 널려 있다. 피질이 다소 거칠지만 사이즈가 크고 여유로운 동해안 북부 속초에서 남부 울산 주전까지 이어지는 바닷돌밭은 또 어떤가.
(서해 황금산 돌지판 위에 주전, 일광의 사유석 율두석 연출)
해석 도입 초창기에 시간적·경제적으로 불리한 여건에 있었던 나는 부득이 소품석 그 중에서도 극세석에 초점을 맞추었다. 다행히도 내가 마음을 빼앗겼던 일광 돌밭에는 손톱만한 작은 돌, 심지어 콩돌 정도의 세석들도 온전한 모양과 미려한 피질을 지닌 것들이 많았다.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언저리에 양 다리를 쭉 펴고 눌러 앉는다. 다리 안쪽 돌무더기 바닥을 손가락으로 파서 마치 포크레인 갈퀴처럼 긁으면 작은 칠보석들이 손가락 사이로 스치며 흘러내리는 촉감이 황홀하다.
언뜻언뜻 모양을 제법 갖춘 촌석들이 머리를 내밀면 잔뜩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 올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탐석 삼매에 들곤 했다. 십 수 년 간 주말과 여가를 이용해 동남해안 일대의 해석산지를 오가며 그렇게 손가락 탐석으로 모은 작은 돌,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촌석, 밤알 크기의 율석, 콩돌 크기의 두석들은 내 애장석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의 기준으로는 전시회 출품 크기에도 미달하지만, 인공으로 가공한 보석보다도 더 아름답고 귀한 자연산 보석이다.
해석의 연출에는 좌대가 필수적이다. 사람마다 의복의 규격과 스타일이 다르듯이, 돌마다 좌대의 모양과 비율을 달리하여 돌의 품격과 소장가의 개성에 맞추어야 한다. 나도 들은 애기지만, 1990년대 초반 부산의 어떤 수석인은 같은 돌 좌대를 무려 스무 번이나 달리 만들었다고 한다. 좌대사에게 맡긴 것이었는데, 매번 소장가의 의도와는 다른 모양으로 좌대를 만들어내는 통에 매번 고쳐달라고 수정 요청을 하는 과정이 반복되어 그 횟수를 헤아려보니 무려 스무 번이나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좌대 값을 추가로 받은 것도 아니고 A/S 차원에서 스무 번이나 좌대를 고쳐 만들었다니, 아마도 자존심 싸움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수석의 좌대에는 소장가의 심미적 소양과 좌대사의 장인 정신이 깃든다. 단지 판매만을 목적으로 건성으로 만든 막좌대는 일단 소장가의 선택으로 수중에 들어오면 거의 전부 제대로 된 좌대로 다시 만들게 된다. 수석을 수석답게, 예술적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는 관건은 바른 좌대 만들기에 달려 있다고 본다. (농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