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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북한과 남한, 서로에게 너무 상처가 되는 한국전쟁을 벌인지 벌써 60년이 다 되가네요. 전쟁이 끝난 뒤, 서로 총부리를 겨눈 지도 56년, 길고 긴 시간 동안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전쟁 공포에 떨면서 지내왔지요. 국민의 정부 들어 ‘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에 큰 변화가 있는 듯싶었으나 10년 만에 다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건으로 평화가 깨질까 조마 조마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탈북자들이 있지요.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넘어온 사람들,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요? 북한에서 한의사였던 김지은씨는 2002년에 남한으로 들어와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한의학을 공부하고, 올해 한의사 면허시험에 합격하였지요. 5월 30일, ‘진 한의원’과 ‘남북한의학연구소’를 여는 탈북한의사 김지은씨를 만나 이야기 들어보았어요.
-한의원 개업을 앞두셨는데, 소감은 어떠신가요?
“지나고 보면 어렵고 힘든 일이 많았는데, 이루어지면 힘들었던 과정은 생각나지 않잖아요. 힘든 과정이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았다고 봐요. 성공이라고 표현하지는 못 하겠지만 바라는 삶을 살 수 있는 준비를 어는 정도 마쳤다고 봐요. 만감이 교차하네요.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눈물이 많이 나요. 제가 눈물을 안 흘리는 성격인데, 요즘은 혼자 있다가도 주르르 눈물이 나네요.”
“남한 사회는 적어도 자기 스스로 도전을 할 수 있고, 북한 사회보다 자유로워”
-북한에서 사시다가 한국에서 6년 사셨는데, 어떤 차이들이 있나요?
“정말 힘들어서 유서 적어놓고 자살하려고 했어요. 그렇게 힘들었지만 남한사회가 북한사회보다 좋아요. 남한 사회에서는 기회가 저한테 있기 때문이죠. 남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잘 모르고 지내지만, 계획을 세우고 평생을 노력해도 못 이룰 수 있겠지만 적어도 도전을 할 수 있는 사회잖아요. 선택권이 나한테 있고, 어떤 일이든 도전 해볼 수 있는 거죠.
또 자유로워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사회죠. 남한 사회는 약육강식이 판치는 썩고 병든 자본주의사회라고 북한에서 배웠는데, 그런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부 그렇지는 않았어요. 따듯한 심성들 가진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나눔을 하는 사람도 엄청 많고 희망이 있는 사회라고 생각이 들어요. 대학에서 다시 공부를 할 때, 애들이 같이 놀아주고 저를 챙겨주고 이끌어줬어요. 칭찬을 하고 싶어요.”
-15년 동안 북한에서 한의학 공부를 했음에도 다시 한의대를 다니셨습니다.
“북한은 한의대가 7년이에요. 그렇게 7년 공부하고 8년 동안 한의사를 하다가 남한으로 왔지요. 다른 법제도에 왔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는 게 당연히 마땅하죠. 직업엔 귀천이 없고, 한국에서 반드시 한의사하려고 한 건 아니라 교차로, 가로수를 보면서 일자리를 찾으려 했고, 한국에 적응하려고 했어요.
전화를 하면 제 억양을 듣더니, 교포세요? 탈북자세요? 물으면 ‘예’라고 대답하게 되죠. 운전은 할 줄 모르고, 컴퓨터는 할 줄 안다고 대답하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하고 끊어요. 저는 다시 연락 주는 줄 알았어요. 한국에서 그 표현은 거절의 의미더라고요. 그걸 이해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렸어요.
탈북자들이 사회에 정착을 잘 못한다고 하잖아요. 저 역시 어떻게 하면 잘 정착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걸 하자, 침 놓고 맥 짚고 약 짓는 걸 제일 잘하니까 다시 한의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통일부에 자격신청을 내서 학력을 인정받았고 교육부에서 한국한의대 6년 졸업한자와 동등한 자격을 받았어요.
그런데 국가고시 시험을 치르는 게 안 되는 거예요. 자격은 교육부 주관이지만 시험은 보건복지부관할이에요. 보건복지부에서, 의사생활을 했다는 서류를 북한에서 가져오래요. 남북관계가 너무 많이 좋아졌기 때문에 달러 가지고 북한에 들어가서 필요한 서류를 가져나오면 된대요. 서류가 중요하다는 건 이해가 돼요.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에게 서류를 가져오라고 하는 건 완전히 언어도단이에요.
탈북자들이 다른 나라 대사관에 들어가 망명신청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영화 <크로싱> @캠프B
“북한에 들어가서 필요한 서류 가져오세요”, “북한에 들어갔다 오라는 게 말이 됩니까?”
아무리 공무원이로서니 북한에 들어갔다 오라는 게 말이 됩니까? 저는 지금 대한민국 등록증을 갖고 있습니다.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인데 북한에 들어가서 북한주민과 접촉할 경우 국가보안법에서 저촉되지 않는다는 확인서를 발급해달라고 했더니 그렇게는 할 수가 없대요.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냐. 왜 책임 없는 발언을 하냐, 했지요. 나중에 한의대 편입하는 게 어떠냐는 공문이 왔지요.
북한에서 공부하고 한의사를 했었지만 분명히 남한과 다른 부분이 있을 거 같았어요. 자꾸 배우면 좋은 거잖아요. 좋다, 다시 배우자고 편입을 하려고 하는데, 학교대학법상 한 사람이 같은 전공을 두 번 공부할 수 없대요. 저는 이미 한의대 6년 공부하고 졸업한 자격을 받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거예요. 교육부에서는 한의대 졸업자격주고 보건복지부는 시험 안 된다며 편입하라고 하고, 대학은 이미 자격 있으니 편입 안 된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국회에 청원을 넣었고 국정감사 때 발표를 했지요.”
-국정감사 때, 어떤 말씀을 하셨나요?
“철저히 대한민국 법을 따르겠다, 내가 그냥 한의원을 열겠다는 게 아니라 증명을 받고 싶다, 부합이 안 되면 안 하겠다, 그런데 왜 시험도 못 치르게 하느냐고 국회에서 얘기를 했지요. 시험을 치고 안치고도 중요하지만 탈북자라고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났어요. 이정도만 해줘도 감지덕지하겠지, 이거 먹고 떨어져 이런 식으로 저를 대하는 거 같은 느낌이 든 거예요.
이건 저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제2, 제3의 김지은이 나타날 겁니다.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저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데, 다 무시되고 있습니다. 그걸 다 인정해달라는 게 아니라 북한이 한국에 비해 뒤떨어져있는 부분이 있으면 그걸 보충하게 해달라는 거예요. 보충을 해야 정착을 잘할 수 있지요. 탈북자들이 정착을 못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국가에 다시 환원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앞으로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통일이 되어서 집단과 집단이 만날 때, 우리 같은 사람을 통해서 데이터를 축적해 놓으면, 훗날 행정을 풀어갈 때 조금 더 쉬울 거예요. 제 후배들은 제 과정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고, 이런 걸 발판삼아 통일이후 정책추진이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국회의원들이 방심한다면 대한민국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니 국감장이 조용해지더라고요. 당시 한덕수 국무총리실 비서실장이 해결해줘야 하는 문제라고 해주셔서 대학에 편입을 하게 되었죠.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과 20년 차이가 나고, 시스템도 많이 차이가 나서 힘들기도 했지만 참 재미있게 공부했고 정말 재미있게 지냈어요. 대학공부를 잘 마쳤고 이번에 졸업을 하고 한의사 시험에 합격을 하였죠.”
-탈북자들이 한국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는데, 무엇이 힘든지요? “탈북자들이 회사생활을 잘 못해요. 가장 중요한 건 탈북자 자신이 변하고 한국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를 써야겠죠. 그동안 시키는 일만 해서 창조적이지 못 하거나 시간 되면 바로 퇴근했기 때문에 일을 잘 못 할 수 있어요. 한국에선 오너가 뭘 주면 그게 끝이더라고요. 본인이 알아서 해야 되는데, 탈북자는 알아서 하는 게 익숙지 않은 거예요. 처음엔 조금 더디더라도 하나하나 가르쳐주면 지금보다 훨씬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그 과정을 좀 참아줬으면 좋겠어요. 북한 사람들보다 한국 사람들의 일반 지식수준이 높아요. 정보채널이 많이 있고, 아는 것도 많죠. 북한 사회는 많이 닫혀있기 때문에 탈북자는 많이 어려워해요. 한국 사람들이 일 잘하는 게 사실이잖아요. 그렇다면 무조건 못 한다고 하지 말고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이끌어줬으면 좋겠어요.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말도 있듯이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기다려줬으면 좋겠어요.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적응할 때까지 도와준다면 조금 더 자신감 갖고 기술 익히면서 정착할 수 있을 거예요. “탈북자에 대한 편견이 없었으면, 가슴 속에 말 못 할 아픔들이 다 있어” 그리고 탈북자에 대한 편견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정착 못하고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다며 안 좋게 보시는데, 그건 탈북자이기 때문에 사고를 치는 게 아니에요. 사람마다 다양하듯이 자기의 사고방식 때문에 물의를 일으킨 거예요. 전체 탈북자가 그런 것처럼 매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러운 게 뭐냐면 탈북자들은 인간성도 없어, 지만 살자고 가족 다 버리고 온 거라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듣게 돼요. 인터넷 게시판에도 보게 되고요.…… 남한이나 북한이나 우리 조선족들이 가족에 대해서 굉장히 끈끈하거든요. 버리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결과가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할 말은 없지만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아픈 과정도 한 번 생각 해줬으면 좋겠어요. 가슴속에 말 못 할 아픔들이 다 있어요. 탈북자를 무조건 잘 해달라는 게 아니에요. 한국사회가 넓은 마음으로 탈북자를 안아줬으면 좋겠어요. 결국, 한국사회로 복이 돌아온다고 생각하거든요. 북한사회가 변화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탈북자가 변화시킬 수 있는 큰 힘을 가졌어요. 정부가 아무리 말하는 것보다 탈북자가 북에 있는 친지들에게 한 마디 하는 게 더 중요해요. 조금 더 아량을 보여주면 지금은 보이지 않아도 엄청난 폭발력이 생길 거예요. 탈북자들에게 너무 아무렇게나 얘기를 던지는데, 그런 점은 아쉽죠.” -남북관계가 점점 안 좋아지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심스러운 부분인 거 같아요. 저는 의료인이에요. 어떤 편에 들 수 없어요. 다만, 생명과 연결되는 일이라면 그 상대가 누구든지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게 제 견해에요. 생명가지고 장난치면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적십자정신에 충실해야죠. 우선, 북한이든 어디든 굶어죽으면 보내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두 번째로, 너무 극단적으로 가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북한은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인데, 자칫 잘못하면 북한이란 땅덩어리를 중국에 뺏기지 않을까 걱정 돼요. 거기 살았으니 그쪽 민심을 알잖아요. 중국과 북한은 굉장히 끈끈해요. 남한사회가 그동안 많이 보냈는데, 그런 도움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 관계가 틀어지면, 실컷 주고 나서 무너지는 거잖아요.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2005년 학술논문서 '고구려사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독도도 우리 땅이지만 일본과 싸우듯이, 동북공정 때문에 고구려랑 백두산을 두고 중국과 싸우잖아요. 한반도 같은 땅덩어리 안에서도 싸우는데, 국경 넘어 만주에 있는 고구려 역사를 아무리 우리 역사라고 소리쳐도, 지금 있는 너희 땅이나 잘 지켜라, 이렇게 할지도 몰라요. 제 개인 생각이지만 더 크게 보고 널리 봤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북한과 통일 안 되어도 괜찮다, 북한 버려도 된다고 말하는데, 그러면 고구려역사를 다 버리게 되고, 독도까지 버리게 될지 몰라요. 을사오적이 100년 전에 나라를 팔아먹었잖아요. 그때는 국민성이 낮았기 때문에 눈 훤히 뜨고 당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국민성이 높은데도 이렇게 가다가는 그와 같은 상황이 또 도래할 수 있는 거예요. 남한이 포용력 있게 북한을 끌어당겨서 차츰차츰 가까워져야 통일 된 다음 혼란도 막을 수 있을 거예요.” -앞으로 계획과 꿈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한의원을 열면서 남북한의학 연구소도 함께 열어요. 현재 남과 북에서 한의학을 다 공부한 사람은 전무후무하죠. 남이 우세한 게 있고 북이 우세한 게 있어요. 장점들들 살려서 완성된 하나로 만들어 ‘한국 한의학’을 세계에 내놓고 싶어요. 지금껏 눈물을 안 흘리고 지냈어요. 참고 지냈어요. 눈물 한두 방울 흘려서 해소될 수 있는 가벼운 아픔이 아니라서 울지 않고 지냈어요. 요즘은 눈물을 자주 흘려요. 이 눈물은 제가 사람과 사람을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고 대화하겠다는 의미에요. 충분히 눈물을 흘리면서 사람들과 교감하고 같이 아파하겠다는 의미에요. 한국 사회가 인간성이 없다는 표현은 아니지만, 냉정한 부분이 많아요. 쉽지 않겠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가고 싶어요. 제한시간 안에 환자를 봐야하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시간을 쪼개서라도 환자 손을 한 번 더 잡아주고 눈 한 번 더 마주치고 싶은 게 제 생각이에요. 조금 더 사람 마음을 읽고 교감할 수 있는 한의사가 되고 싶어요. 저는 최고가 되지 않으려고 해요. 어차피 인생살이에서 누구나 최고가 될 수 없잖아요. 한국사회 경쟁은 너무 치열해서 무서워요. 본의 아니게 경쟁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줘야 하고 밟아야 되죠, 그로 인해 자신이 힘들고요. 그래서 최고가 되는 것보다 최선 다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최고가 되지 않는다고 실패가 아니거든요.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잘 지내 나갔으면 좋겠어요.”
2002년 7월 1일, 국군수도병원 종합체육관에서 열린 서해교전 희생자 4인 합동 영결식이 끝난 뒤 운구행렬이 행사장을 빠져나오고 있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귀순 용사에서 탈북자가 된 사람들, 날로 심해지는 남북갈등, 한반도 평화는 도대체 언제? 탈북자들은 예전만 해도 ‘귀순 용사’라고 불리며 영웅대접을 받았지요. 그러다 ‘귀순자’라고 불리더니 1990년대, 북한의 식량난으로 남한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2004년 ‘탈북자’라는 말을 쓰죠. ‘탈북자’라는 말이 좋지 않다는 여론이 일자 2005년 ‘새로운 터전에 정착한 주민’이라는 ‘새터민’이란 신조어를 쓰기로 하죠. 새터민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자 2008년, ‘새터민은 가급적 안 쓰기로 했다’는 발표가 있었고, 지금은 탈북자라고 하지요. 남한으로 들어온 탈북자들의 숫자가 15,000명을 훌쩍 넘었어요. 그러나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죠. 2008년, 일을 구하려 했던 탈북자 가운데 취업한 사람은 12.7%밖에 안 되었으며 일한 평균 기간도 5.8개월에 머물렀지요. 탈북자 열 명 가운데 일곱 명은 남한 정착 교육기관 하나원에서 퇴소한 뒤, 거주할 임대주택조차 배정받지 못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남한에 들어온 탈북자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거라고 할 수 있지요. 남한과 북한도 아닌 곳에서 떠도는 탈북자들은 어디에도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지요. 붙잡혔다가 풀려난 한국계 유나 리와 중국계 로라 링이라는 기자들은 두만강 접경지대에서 음란 화상채팅을 강요당하는 탈북여성들의 비참한 인신매매 실태를 취재 중이었지요. 수많은 탈북자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안타까운 사실이죠. 남북한은 고통 받는 탈북자들을 챙기지 않고 있습니다. 금강산 피격사건, 삐라, 위정자들의 강경발언, 개성공단 중지, 북한의 미사일 발사, PSI참여 등등 많은 일들이 벌어지면서 남북 갈등은 점점 심해지고만 있죠. 2002년, 서해 교전에서 알 수 있듯 언제든지 남과 북은 충돌할 불씨가 있지요. 남한과 북한이 서로 주장하는 선이 다르고, 비무장지대처럼 군사 완충지대가 없기에 서해엔 늘 긴장이 감돌고 있지요. ------------------------------------------------------------------------------------------------- 김지은 진한의원 원장은 함경도 청진시에서 평범한 공장 노동자의 딸로 태어났다.
지금 긴장관계보다 훨씬 큰 문제는 앞으로 남북관계 전망이 밝지 못하다는 거죠. 헌법 4조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이 정부의 1차 목표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MB정부는 통일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듯싶어요. 통일에 대한 목표와 방향은 어떻게 갈 것이냐, 한반도는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기본 원칙이 6.15와 10.4에 드러나는 데, 이런 밑그림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죠.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면서 하염없이 계속 싸울 준비를 하자네요. 한반도 평화는 도대체 언제 올까요?
학창시절 줄곧 전교 1~2등을 할 만큼 성적은 뛰어났지만 고등중학부(한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북한의 교육과정)에 들어서며 본인의 출신 계급으로는 꿈에 그리던 법관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정무원 국가고시(한국의 수학능력시험처럼 전국의 졸업반 학생들이 모두 응시하는 시험)를 치를 즈음엔 사범대학으로 진학을 해서 아나운서의 꿈을 그려보기도 했지만 시험성적 발표 후 학교에서 청진의학대학을 지원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의대를 가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싫었으나 농장이나 탄광을 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열심히 입학시험을 준비했다. 대학엔 차석으로 합격했고, 다행히 그나마 반감이 적었던 동의학부에 배정됐다.
7년의 교육 과정을 마치고 8년간 한의사로 일하며 머릿속에는 늘 '그래도 농장이나 탄광을 가는 것 보다는 한의사를 하는 것이 낫다'는 자기 위안뿐이었다. 북에서의 마지막은 원하던 대로 임상의학연구소 생활도 할 수 있었지만 당시의 북한은 의학연구에 국고를 지원할 여유가 없어 연구다운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였다.
열흘 가까이 굶는 날이 많아졌고, 부친이 돌아가시며 북한에 더 이상 미련도 없어졌다. 1999년 북한을 탈출해 중국·태국·미얀마·라오스 등을 거쳐 2002년 마침내 한국에 입국했다. 막막하고 긴장된 한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며 한의학을 공부했다는 것이 처음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북한에서의 시간을 헛되이 하지 않고 한국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제도에 막혀 바로 한의사 생활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보건복지가족부에선 북한에서의 증명서가 없어 학력과 경력을 인정할 수 없으니 한국 한의대에 편입하라는 의견을 내놨고, 교육부에서는 이미 한의대 졸업 자격이 있으니 다시 편입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국회에 청원을 넣고 국정 감사 때 발표까지 하며 그는 어렵게 한국에서 한의학을 공부할 자격을 얻었다.
그는 2005년 세명대 한의대 본과 1학년에 편입해 한국에서의 한의대 정규과정을 마쳤다. 한글로만 되어 있던 교재에 익숙했던 터라 한자·영어공부에 고생도 많았고, '머리 엄청 크다'는 칭찬에 기뻐하지 않는 스무 살 어린 동기들과 지내며 문화적 차이도 느낀 4년이었다. 또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가 만들고 싶은 병원'을 끊임없이 그려온 시간이었다.
올해 1월엔 국가고시에 합격했다. 은행에 담보할 수 있는 건 한국의 한의사 자격증과 통일한의학을 실천하는 병원의 청사진뿐이었지만 그의 꿈을 믿어주는 사람들 덕분에 병원을 낼 수 있었다. 6월 1일 개원을 앞둔 하루 전 날, 김지은 원장은 밤새워 울었다. 그는 머릿속에 왜 눈물이 나는지 이유도 떠올리지 못하고 마냥 울었다고 했다.
▲한의원 내부. 한국에서 한의대를 다니는 4년 내내 김 원장은 병원을 너무나 내고 싶고 진료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시간만 나면 여기저기 병원 위치를 보러 다녔고 어떻게 꾸밀까를 고민했다. 병원은 4년간의 꿈을 실현한 공간이다.
ⓒ2009 HelloDD.com
병원을 개원한 지 채 한 달이 안 된 6월의 마지막 주, 그를 찾아갔다. 그는 병원 한 편에 마련된 '남북한의학연구소'를 보여주며 "남과 북의 한의과대학 정규과정을 경험한 유일한 사람으로서 서로의 장점을 살려 좀더 완벽한 한의학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조심스레 밝혔다. 그는 그것을 '해야 한다'는 의무가 아니라 '하고 싶다'는 의지로 표현했지만 그의 표정은 매우 진지하고 심각했다.
그는 이어진 2시간 30분의 긴 인터뷰 내내 모든 질문에 자세하고 정확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북한의 한의대 교육이나 임상·연구 활동에 대한 질문에는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기억해내려 애썼다. 인터뷰는 편안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지만 그의 미간에 주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 북한에서도 의대는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가나요.
"제가 전교에서 1~2등정도 했으니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는 것 자체가 매우 소수에게 해당합니다. 저희 학급에선 52명 중에 6명만 대학 원서를 쓸 수 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사회에 나갔습니다. 북한은 기본적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이나 약학대학 등 전국에 하나만 있는 경우가 아니면 모두 지역에 있는 대학을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만, 그래도 여기처럼 학교별로 대학 합격자 수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또 재수(再修)가 없다보니 학생들을 합격가능성이 높은 대학에 전략적으로 배정을 해주죠. 우리 학교에 저보다 더 뛰어난 학생 있었는데, 그 학생은 김일성종합대학을 지원하라는 학교의 지시에 따라 입학시험을 쳤지만 떨어져서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프고,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한국에서는 재수를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은 것 같아요."
- 그럼 청진시에 살았기 때문에 청진의대를 가시게 된 건가요.
"네, 맞습니다. 의학대학은 전국 주요시도에 11개가 있었습니다. 물론 구강학부(한국의 치대)는 다 있는 게 아니라 없는 의대도 있었지요. 약학대학은 하나 따로 존재했는데, 북에서도 약대는 인기가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약을 다루며 개인이 조금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한의대는 의대 안에 배속되어 있는 건가요.
"네, 의학대학 안에 여러 학부가 있습니다. 동의학부(고려의학부)·의학부·약학부·위생학부로 나뉘어져 있지요. 위생학부는 한국에는 없는 건데, 보건·복지·방역 등을 따로 배웁니다. 나름 비중이 있는 학부죠. 방역의사를 하면 세관에 배치되는데 사람들이 선호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다른 학부는 한 학년에 100명쯤 되지만 위생학부는 25명만 뽑지요."
- 의대 안에서 학부도 선택할 수 없나요.
"일단 의대에 합격하면 학교에서 학부를 지정해 줍니다. 저로서는 그나마 동의학부에 배정되어 다행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한의사였기 때문에 그래도 친숙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 북한 한의대의 교육체계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나요.
"예과 1년, 본과 6년. 총 7년의 교육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본과는 다시 기초의학부와 임상의학부로 나누어집니다. 본과 1~3년은 기초학부라고 해서 양방의학과 한방을 같이 배웁니다. 해부학부터 미생물·병태생리·기생충·일반생리 등 순 기초학문을 배우고 마지막에 진단학을 합니다. 기초의학부까지만 마치면 최소한 진찰할 수 있는 능력은 인정받아 준의사자격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과 4~6년은 임상의학부라고 해서 본격적인 임상실습을 합니다. 병원의 입원실 옆에 강의실이 있고 교수들도 다 임상교수죠."
- 남북의 교육과정을 비교해 보신다면.
"장단점이 다 있지만, 학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북한이 교과시스템은 더 낫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임상의학부 3년 동안 환자를 계속 보기 때문에 환자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교수들이 환자의 맥을 짚으며 '이런 것을 보고 현활맥이다'라고 하면 학생들이 다 똑같이 짚어보고 체득할 수 있죠. 진단·치료를 모두 현장에서 배웁니다."
- 한국의 수련의 같네요.
"네, 비슷합니다. 밤에도 집에 안 가고 병원에서 환자를 볼 수 있습니다. 또 마지막 6개월은 전국에 있는 모든 병원에 뿔뿔이 흩어져 전공실습을 나갑니다. 다른 의료인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출·퇴근을 하는데, 개인 방과 책상을 받고, 입원실도 한 칸 지정해주죠. 직접 환자를 초진하고 치료하며, 어느 정도 양약을 처방할 수 있는 자격도 있습니다. 실습 나갔던 병원장의 평가서와 6개월 실습보고서를 논문으로 제출해야 졸업 시험자격이 주어집니다. 한국에서는 학생들이 이론 암기만 하고, 그걸로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환자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죠. 학교에서 학생들이 '나가서 환자를 어떻게 볼지 무서워요'라고 말하는 걸 보면서 측은하고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실습을 많이 하지 않으니 당연히 두렵겠지요."
- 한국에서도 이에 대한 문제점이 계속 제기되고 있죠.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남북의 정서상 차이도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학생들이 진료 과정에 참여하면 환자들이 귀찮아하고 싫어할까봐 걱정합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이를 당연하게 여깁니다. '제도가 좋다 나쁘다'를 떠나 이러한 정서상의 차이점도 크다고 봅니다."
- 한국 교육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원전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의학은 전통의학이고 민족의학이지만 북에서는 이러한 교육을 하지 않습니다. 한의학은 임상에 가서 환자를 볼 수 있는 실제적인 교육일 뿐이라는 입장입니다. 동의보감 등 교재가 다 한글로 만들어져 나오는데 내용은 거의 같지만 그걸 만든 사람에 대한 공부도 해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여기 와서야 알았습니다. 한의학도라면 조상들이 어떻게 한의학을 계승·발전해 왔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 밖에 차이점이 또 있을까요.
"국가고시를 치르고 안 치르고 차이점이 있습니다. 여기 와서 국가고시를 준비하며 정말 죽기 살기로 공부했습니다. 한자와 영어 때문에 고생이 많았지요. 그런데 북한이 국가고시를 안 치긴 하지만 졸업 기준이 매우 높습니다. 먼저 의학에 대한 원서를 500페이지 이상 번역하는 시험이 있는데 저는 러시아어로 쓰인 심혈관 계통의 독일 의학서를 번역했지요.
또 군진의학도 통과해야 합니다. 화재사고가 났을 때, 핵무기·화학무기 피해가 있을 때, 대퇴골절 탈골이나 호흡정지가 있을 때 등 전쟁시 부상병·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따로 공부해 이론·실습시험을 봅니다. 대신 졸업을 하게 되면 대대위생소장 계급을 받게 됩니다. 가끔은 아무리 현재 휴전상태가 지속되고 있다고 해도 한국은 언제든지 전쟁이 날 수 있는 나라인데 이러한 부분을 배우지 않아서 어떻게 하는지 걱정되기도 합니다. 그때 가서 의사들이 '이런 것 배운 적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기에 앞서 말씀 드렸던 6개월 현장실습 평가서·보고서 제출 과정을 거치면 졸업시험자격이 주어집니다. 졸업시험은 이론인데 대부분 통과합니다."
- 혹시 학생들의 차이점도 있을까요.
▲"여기선 머리 크다는 말이 칭찬이 아니라면서요?
전 얼굴이 너무 작아서 아나운서를 못했습니다."
ⓒ2009 HelloDD.com
"아무래도 공부분량에서 차이가 있지요. 북에서는 여름·겨울방학이 각각 1주일에서 10일 사이이고, 주6일 정규수업에 일요일에도 공부할 때가 꽤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선 여름·겨울 두 달 반씩 방학만 5개월이고, 중간·기말고사 등 시험기간을 빼면 결국 공부하는 기간은 6개월 남짓 밖에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 기간동안 이론 위주로 교육하다보니 임상에 갈 경우 별로 의미 없는 교육도 많습니다. 또 물론 한의대에 오는 학생들은 대부분 열심히 하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나라에서 무료로 교육을 시켜줘서 그런지 대학생이 공부 안 하는 것을 매우 창피하고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 남북의 한의사들의 의료 활동의 차이는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북한의 의료수준은 굉장히 열악합니다. 제가 여기에서 이렇게 (현재 개업한 병원처럼) 하는 것이 신기합니다. 또 한국에서는 진단기기가 많아서 정말 편할 것 같습니다. 사상체질 분석기나 맥진기 등을 봤는데 참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또 북한에서는 하루에 32명의 환자를 봐야했는데 32명을 보기가 매우 힘들었어요. 여기선 하루에 100명도 넘게 보기도 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의 그냥 잠깐 지나치는 수준이 되지 않을까요?
의사라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라는 것은 남북이 같은 것 같습니다. 북에서도 의사·교사한테는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집에서 누가 아플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일종의 대우라면 대우를 받고 있는 거죠."
- 북한에서의 양한방 협진은 어떻습니까.
"정책 자체가 기본적으로 '양방학적인 진단에 한방학적인 치료'입니다. 양방병원에도 각 질환마다 나눠진 양방과와 별도로 한방과가 하나 혹은 두 개 정도 따로 있죠. 한방병원인 경우에는 한방과도 질환별로 나누어져 있고요. 병원에서는 대개 양방과의 비중이 더 크고 입원실을 따로 쓰긴 하지만 정책 기조에 따라 협진은 잘 이루어지는 편입니다. 한의사들이 양방에 대한 것을 배우고 나왔기 때문에 드물긴 하지만 양방과에 투입될 수도 있습니다. 저도 내과·소아과에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서로의 장점을 잘 이용하자는 분위기죠. 하지만 우리의 것으로 치료한다는 겉으로 주장하는 목적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양방의약품을 확보할 재원이 없는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북한의 연구소 수준은 어떻습니까.
"조선의학과학원 산하 함경북도 임상의학연구소에 잠시 있었습니다만 중앙 의학과학원이 아니었고, 또 1996년 한창 북한이 힘들 때 연구소 생활을 해서 제 정보가 정확하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국가에서 주어지는 연구도 있었고, 자체 계획도 있었지만 국가에서 재료를 지원하지 못하니까 말만 연구소지 전혀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하던 연구소는 아니었죠. 바다에서 바다풀로 관절염 약을 연구하는 과제가 있었던 것은 기억이 납니다. 규모는 4~5층 짜리 건물이 3개 동 정도 있었고, 전체 인원은 모르지만 제가 있었던 소화기 계통 연구팀은 8명 정도였습니다. 연구소도 크게 질환별로 구분되고 그 안에 양·한방으로 나뉘어졌었지요. 제가 1989년도에 처음 병원에 나갔을 때만 해도 병원 재정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으니 당시 연구소는 조금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찌됐든 연구 부분은 한국이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최근 한국 한의계에서는 봉한학설의 검증이 큰 화두인데요. 북한에서도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나요.
"예과 해부학 실험에서 잠깐 교수님이 언급하시는 걸 들었습니다만 이후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북한에서는 봉한학설을 거론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건 분명합니다."
- 제형에 대한 연구는 따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나요.
"위에서 다 만들어져 나옵니다. 제약공장에서. 한국은 개별적으로 약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처방을 내릴 수 있지만 북한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동약과에서 다 다루죠. 물론 몇몇 좋은 것도 있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썼던 약침을 그대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약침학회에 가입하고 혹시 원하는 제형을 만들어줄 수 있는지 논의 중입니다. 잘못하면 조금 우스워질 수 있어서 조심스럽습니다. 향후에는 한의원 내에서 약을 만드는 것도 해보려 하는데, 현재로선 시기상조이고 앞으로의 계획일 뿐입니다."
▲"여기 한의원에는 좋은 기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북에서는 제가 직접 약을 만들지 않아 처음에 조금 헤맸는데
약탕기가 좋아서 아주 편리한 것 같습니다."
ⓒ2009 HelloDD.com
- 북한의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북한도 나름대로 처방, 약침, 민간요법, 일반 침·뜸 연구를 굉장히 많이 합니다. 치료를 한방으로 해야 하니까요. 또 임상의들이 연구발표를 엄청나게 많이 하죠. 한국에서는 여러 가지 자기 경험을 공유할 때는 강의 등의 명목으로 금전이 오고 가지만 북에서는 시스템 상으로 일주일에 한 번 기술학습을 통해 반드시 발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임상세미나처럼 지역의 의사들이 다같이 모여서 의학·과학잡지를 공유하고, 치료 중 경험들을 수치를 사용해 설명해야 합니다. 기술학습에 참석하지 않거나 3달에 한 번 필수로 발표하는 것을 거르면 월급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 3년에 1번씩 자격시험을 다시 칩니다. 6급에서 시작, 3년이 되면 5급 자격시험을 쳐야 하고, 안 치면 자격이 박탈될 수도 있습니다. 5급에선 5급을 유지하거나 4급에 도전하는 것 중 선택해야 합니다. 4급에 도전하려면 논문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요. 북한에서 한의사는 끊임없이 책을 보고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 한국에서의 한의학 연구·진료에 대해 아쉬운 점도 있습니까.
"한의학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관점이 한의학은 보약 등 건강관리 위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의 한의학은 치료가 위주입니다. 한국에서는 중환자들을 한의원에서 볼 수 없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습니다. 양방에서 잘못해서 배가 팽팽하게 불러서 와도 한약으로 물을 빼고 의료 활동을 합니다. 여기선 약도 굉장히 약한 것만 쓰지만 북한에서는 필요에 따라 강한 약도 많이 씁니다. 한국에서 그런 것을 안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이 의료사고가 두려워 그런 것을 쓸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되도록 적극적으로 치료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 한국에도 한국한의학연구원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까.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지난해(세명대 재학시) 연구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행사(연구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KIOM 리크루팅 & PR쇼 'KIOM 올래프로그램'을 지칭하는 듯)에 참가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연구원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연구원에서 진행하는 해외연수프로그램인 KIOM 글로벌 원정대에도 참여를 했습니다. 꼭 선발이 되었으면 했는데… 아쉽게도 떨어졌습니다. 지금 생각을 해도 너무 아쉽네요."
- 한국한의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어떤가요.
"제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북한과 남한은 여러 가지로 환경이 다르니까요. 하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당연히 도와야지요."
- 남북한의학연구소를 개소하셨는데, 끝으로 이에 대한 포부를 말씀해 주신다면.
"허울만 크고 아직 아무것도 없어서 창피합니다. 남북한의학연구소를 세울 생각을 한 것은, 남과 북에 한의학과대학 정규과정을 모두 배운 사람은 저밖에 없기 때문에 양쪽을 비교하고 서로에게 좋은 것들을 살려서 좀 더 완벽한 것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물론 북한에서 한의사 자격을 받고 한국에서도 한의사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많은 정보들을 남북한이 공유할 수 있겠지만, 제가 교육체계나 내용 같은 것을 비교분석하고 데이터화 하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북한의 교육이나 임상기술을 정립해서 한국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고, 한국의 의사·한의사들과 머리를 맞대고 노하우를 공유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국민들에게 좋은 서비스와 혜택을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이 한의학이 대한민국의 이름을 걸고 세계로 나가는 데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깃집에 갔더니 이런 비슷한 기계가 있데요? 한의원이 잘 안되면 이거 고기 구워먹는데 쓰려고요."
뜸치료실의 장비를 보여주며 김 원장이 농담을 했다.
ⓒ2009 HelloDD.com
▲카메라 앞에서 자꾸 굳어지는 김지은 원장을 웃게 하기 위해 말을 많이 건네야 했다. "한의원에 단골손님이
만명이 되는 날을 생각해 보라"는 말에 김지은 원장이 웃었다.
첫댓글 남북한의학 연구소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