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답사(2) : 경북 고령, 대가야의 땅
경상도 지역에 남아있는 가야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행은 일종의 애수를 동반한다. 고대 한반도에서 삼국과 더불어 존재와 힘을 과시했던 세력이 사라진 이후 그것을 증언할 수 있는 공간인 고분의 모습에서 비어버린 시간의 단절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본 금관가야의 유적은 역사적인 익숙함과 파사석탑과 어교문의 신비로움 때문에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다른 지역에 남아있는 고분을 찾았을 때는 역사의 현장에서 잊혀진 사람들의 비애의 목소리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무대에서 살았지만 사라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금관가야 마지막 왕의 무덤을 해질녁에 찾았을 때 다가온 회색빛 색조의 음침함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마지막이라는 이미지와 회색빛 무덤의 색조가 묘한 긴장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조는 현재의 사람들에게 삶의 부질없음과 동시에 승리와 성공에 대한 야심을 정당화시킬지 모른다.
경북과 경남의 경계에 자리 잡은 고령은 작은 지역이다. 고장의 대부분이 ‘대가야의 기억’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군청과 고령박물관은 대가야의 고분인 대규모의 ‘지산동 고분’과 함께 모여 있었다. 발굴된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수백기의 고분은 마치 거대한 무덤의 고장이라는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새로 만들어지고 단장된 고분들과 역사테마 시설은 이곳이 가야의 마지막 중심지였던 대가야의 땅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대가야는 신라 진흥왕 때인 562년에 멸망하였다. 멸망의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한 국가의 최후는 비극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전하고 있지 않지만 고령은 국가의 멸망과 재구성이라는 역사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안내문에는 금관가야의 후손인 김유신이 신라의 무에 영향을 끼쳤다면 대가야는 강수, 김생, 우륵 등의 인물을 통하여 학문과 예술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지산동 고분은 매력적인 역사 산책길이다. 제법 큰 규모의 무덤들과 새롭게 만들어진 건물들은 차분하게 과거의 시간으로 안내한다. 가까이에서 보는 고분의 목소리와 함께 멀리서 바라보는 고령의 전경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역사테마공원에는 숙박을 할 수 있는 펜션과 야영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공사 중이다. 고령은 대가야를 통한 부흥을 시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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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를 생각하며 걷는 산책길은 호젓해서 좋다. 특히 가을 폐사지를 걸으면서 세월의 흐름을 느껴보는 것은 애상을 떠난 호들갑스러운 일상을 정리할 수 있게 한다. 역사로부터 듣는 소리는 준엄하다. 지난 것이 낡은 것이 아니라 새 것의 이정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