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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전설(傳說) 삼의인(三宜人)
금오산(金烏山)은 구미시, 김천시, 칠곡군 북삼읍을 경계로 높이 976m 바위산인데,
800m 고지 산정에는 고산분지(高山盆地)가 형성되어 있어서 항상 물이 풍부하니
옛날에는 40여호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던 곳이다.
이중환(李重煥;1690~1752)의 <택리지(擇里志)>에서
“조선인물의 반은 영남에서 나오고, 영남인물의 반은 선산(善山)에서 난다.” 는 기록이 있듯이.
예로부터 금오산 주위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다.
최근에도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상모)와 박근혜가 있고,
국무총리를 역임한 신성모(인동), 장택상(북삼), 신현확(약목), 이수성(칠곡) 등이 이곳 출신이다.
금오산에는 산세(山勢)에 따른 설화(說話)가 있는데 재미있다.
금오산 동쪽 선산(善山)에서 보면 그 산세가 붓끝처럼 보여 ‘필봉(筆峰)’이라 한다.
그래서 선산 주위에서는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난 사람이 많이 났다.
남쪽 인동(칠곡 북삼)에서 보면 귀인이 정자관을 쓴 것 같아서 ‘귀봉(貴峰)’이라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높은 벼슬아치가 많이 나왔다.
남서쪽 성주에서 보면 산세가 음탕한 여인 모습 같아 ‘음봉(陰峰)’이라 한다.
그래서 성주 기생들 이름이 높다고 한다.
서북쪽 금릉 개령(김천 남면)에서 보면 도적이 짐을 지고 오는 형상으로 ‘적봉(賊峰)’이라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큰 도적과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북쪽 금산군(김천시)에서 보면 노적까리 쌓은 것 같아서 ‘적봉(積峰)’이라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큰 부자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금오산 남쪽 숭산 마을에서 예부터 내려오는 재미있는 구전설화(口傳說話)에 가 있다.
이 설화는 지금까지도 이곳 주민들이 굳게 믿고 있다.
그 내용인 즉,
“이 산의 본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였다.
신라불교를 처음 전파한 아도(阿道)가 선산 모례(지금의 上毛里로 추정)로 숨어들어,
표교할 때 세발금가마귀(三足金烏)가 날아드는 이산을 보고
신령한 태양산이란 뜻의 금오산(金烏山)으로 그 이름을 바꿔 부르며,
이 산의 남쪽 마을에서 앞으로 나라를 구할 3명의 의인(三宜人)이 나타날
동방의 길지(東邦吉地)다.” 라고 지칭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지금까지 전해오는 숭산마을 촌노들의 구전(口傳)에 의하면,
“숭양산(崇陽山) 효자봉(孝子峰) 아래 ‘금오산삼의인설화(金烏山三宜人說話)’의
첫 번째 의인은 중국 명(明)나라를 건국한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이고,
두 번째 의인은 한민족 5천년 가난을 해결해 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으로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의인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는데 나타나기를 가다리고 있다." 라는 것이다.
(그림1) 금오산 자락의 그 유명한 숭양산(崇陽山) 효자봉(孝子峰;528m) 정상.
(그림2) 저만치 보이는 산 봉오리가 숭양산(崇陽山) 효자봉(孝子峰;528m)이다.
(사진2)에서 멀리 보이는 푸른 산봉우리가 숭양산(崇陽山) 효자봉(孝子峰,;528m)이다.
그 효자봉 좌측으로 뻗은 산줄기 아래가 구미시 상모리(上毛里) 박정희 탄생지이고,
숭양산 효자봉 우측으로 뻗은 산줄기 아래가 숭산마을로서
촌노들 구전설화의 명태조 주원장 탄생지이다.
숭산마을은 고려 대각국사 은거지 선봉사가 있었던
지금의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崇烏里) 숭산마을이다.
그러나 '금오산 삼의인 설화'에서 말하는 세 번째 의인(宜人)은
이 산줄기 어디 마을에서 나타날까?
정말 나타나기는 할까?
그것이 궁금하다.
<첫째 의인(宜人) 숭산(崇山) 출신 주원장(朱元璋)>
예부터 경상도 금오산 숭산(崇山)마을에서 내려오는 전설적인 설화(說話)가 있다.
금오산 삼의인(金烏山 三宜人)의
첫째 의인은 금오산 줄기 숭양산 효자봉 아래 고려 선봉사와 고려귀족마을이 있던 숭산(崇山)마을 가난한 농부 집에서 태어나 스님이 되었다가 전국을 탁발하고 다니다가 노예상인에게 중국 원나라로 잡혀가 반원봉기(反元蜂起) 홍건적이 되고 두목이 되어 마침내 명(明)나라를 건국한 명(明)태조 주원장(朱元璋;제위 1368-1398)의 이야기다.
(그림3) 명(明) 태조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초상화.
“주원장은 금오산 줄기 숭양산 남쪽 골짜기의 가난한 주씨(朱氏)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5살에 스님을 따라 청송(靑松) 주왕산 어느 절로 가서 탁발승이 되었다. 어려서 부터 민첩하고 영특한 주원장은 15살에 속세로 나왔고 전국을 탁발하다가 17세에 전라도 나주(羅州) 근처에서 중국 원(元)나라 노예상인들에게 잡혀 중국으로 팔려갔다. 원나라에 팔려간 주원장은 홍건적(紅巾賊)의 졸개가 되었고, 함께 노예로 끌려간 추유(秋濡)등 고려 사람들과 죽을힘을 다하여 용맹하게 싸웠다. 주원장은 어떤 강적을 만나더라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돌진했다. 주원장이 어려서부터 절에서 글을 배워 읽고 쓸 줄도 알고, 싸움에도 몸을 사리지 않아 홍건적 소 두목 곽자흥(郭子興;미상-1355년)의 눈에 들었다. 곽자흥은 원(元)나라 말기 농민반란 홍건적의 강회지구(江淮地區)의 두목 이였다. 그가 싸울 때는 언제나 용감한 주원장을 자기 곁에 두었다. 얼마 후 주원장은 반란군의 중요한 장수가 되었고, 전공이 많아지자 중용되었다. 곽자흥이 남하하던 원군(元軍)을 격퇴시킨 후 부터 그의 군세가 커졌다. 그는 후에 주원장(朱元璋)을 휘하 총사령관으로 삼고, 곽자흥은 양녀 마수영(馬秀英)을 주원장에게 시집보내 사위로 삼았다.
서기1355년 3월 곽자흥이 병으로 죽자, 그의 세력 대부분이 주원장에게 계승되었다. 서기1370년 주원장은 반원군(反元軍) 최고지도자가 되었고, 곽자흥을 저양왕(滁陽王)으로 추봉했다. 주원장은 늙은 유생 주승(朱升)이 일러준 데로 “담을 쌓고 식량을 비축하고 기다리면 서서히 왕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을 받아 지구전을 펴, 끝내 원(元)나라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명(明)나라를 건국해 명태조(明太祖) 홍무제(洪武帝)가 되었다." 이 내용은 경상도 금오산 숭산(崇山)마을 노인들이 들려준 주원장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으로 조선 후기의 야담집 『조선기문(朝鮮記文)』에서도 주원장 이아기가 나온다. "주원장은 경상도 웅천의 주씨 노부부의 아들로 5살이 되던 해, 고승을 따라 절에 들어갔다가 15세에 하산했으며 총명하고 민첩했다.“라고 적혀있다.
또 『조선민간전설집(朝鮮民間傳說集)』에서도 “주원장이 중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 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로 미루어 명(明)태조 주원장(朱元璋)은 고려인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의 황후(皇后) 역시 ‘고려인 한영정(韓永矴, 韓確의 父)의 딸’로 기록되어 있고, 황후(皇后) 한씨(韓氏)는 명 제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1360-1424)의 어머니가 된다. 또한 한황후의 동생 한계란(韓桂蘭; 恭愼夫人 韓氏;1410-1483) 역시 명 제5대 황제 선덕제(宣德帝;1399-1435)의 황후가 되었다고 하니, 고려 한영정(韓永矴)은 두 딸을 명나라 황후로 보낸 샘이 된다.
[주원장(朱元璋) 고려인설(高麗人說)]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실체를 놓고 한국과 중국의 학자간의 대립을 다뤘다. 1368년 명나라를 세운 초대황제 '주원장의 출생'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상당수의 한-중학자들이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림4) 중국 역사상 가장 포학한 황제로 기록된 주원장(朱元璋).
한국의 역사학자 '백린(白麟)'은 『조선기문(朝鮮奇聞)』에 수록된 설화를 근거로 들었다. 『조선기문(朝鮮記文)』에는 명태조 주원장이 등장한다. "주원장은 경상도 웅천의 주씨 노부부의 아들로 5살이 되던 해, 고승을 따라 절에 들어갔다가 15세에 하산했으며 총명하고 민첩했다고 적혀있다." 또 1946년에 펴낸 『조선민간전설집』에도 “주원장이 중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 라는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어 신빙성을 더 한다.
반면 중국학자들은 역사학자 '오함(吳晗;1909-1969)'의 『주원장전』을 들어 주원장의 고려인설은 터무니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오함의 『주원장전』에서는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출신으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16세에 고아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기근을 피하기 위해 봉양현에 있는 황각사(皇覺寺)에 입문하여 승려가 되어 하북지방 일대에서 탁발하였다." 라고 되어있다.
이를 반박하는 학자들은 『주원장전』은 『조선기문』에 실린 탄생설화를 보고 만들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오함의 『주원장전』은 『조선기문』이 발행된 뒤에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두 책에서 서로 일치하는 점은 주원장의 출생과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과 주원장이 5살에 절에 들어갔다는 점과 그리고 주원장이 걸식하며 떠돌아다닌 시기가 15세-17세가 거의 일치한다.
또한 주원장이 명태조가 된 그 후까지 그의 주변에는 유독 고려인이 많았다. 주원장의 여인들은 물론 황궁의 환관들과 궁녀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고려인으로 채워졌다. 그의 심복이고, 명나라 건국공신, 호부상서 추유(秋濡;1345∼1404)까지도 전라도 남원출신 고려인으로서 주원장은 그를 각별히 신임했다. 주원장의 고려인 우대 행정을 시샘한 한족(漢族) 대신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니, 주원장은 한족(漢族) 대신들을 거의 다 죽이고 모든 분야를 친정했다. 그래서 중국 역사상 가장 포학한 황제로 주원장을 꼽는다.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의 친모가 고려인 한황후(韓皇后)였다는 사실이 ‘주원장 고려인’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이러한 주원장의 황후들에 대해서 중국의 사학자들은 그 여인들이 고려 공여(貢女)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아직까지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이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고려 공여설'은 어처구니없는 모순적인 주장이다. 왜냐하면, 명나라 건국이 1368년인데,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가 1360년 출생이니, 명나라가 개국하기 8년 전에 이미 태어난 샘이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반란군 홍건적 토벌에 이성계의 려-원 연합군 2,000여 고려군을 파병한 상황인데, 어떻게 반란 홍건적 소두목인 주원장에게 고려여인을 공녀를 보냈겠는가? 더구나 영락제가 출생한 1360년도에는 장사성(張士誠), 진우양(陳友諒)의 홍건적 거대세력이 있었던 때라, 당시 주원장은 별로 드러나지도 않던 작은 무리였을 뿐인데, 고려조정에서 조공공여(朝貢貢女)를 받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명나라 제3대 영락제는 후에 티베트, 베트남, 만주 등을 평정하여 명나라 최대의 영토를 넓혔으나 조선은 오히려 우대하였던 그 속뜻을 지금의 우리가 어찌 알 수 있을까?
영락제는 환관 '정화(鄭和;1371-1433)'를 시켜 6회에 걸쳐 멀리 세일론 섬, 아프리카까지 정복하였으니, 중국인들에게 지금까지 가장 큰 자긍심을 심어준 황제로 남아있다.
또한 주원장은 명나라 개국시기부터 한족 대신들과 한족 환관들의 말을 믿지 않았고, 고려인들을 주변 측근으로 많이 두고 그들과 국사를 논하였다. 그로 하여 한족들의 조롱과 비웃음이 심해지자 한족 대신들과 수많은 한족을 잡아 죽였다. 그래서 주원장을 중국역대 황제들 중에 가장 포악한 황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고려는 존중하면서도 무서워했던 주원장은 고려를 뒤집고 개국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1335∼1408)를 신뢰했고, 조선에서 많은 환관들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해 명나라 궁궐을 조선인들로 채웠다.
<둘째 의인(宜人) 상모(上毛) 출생 박정희(朴正熙)>
‘금오산 삼의인(金烏山 三宜人)’에서 둘째 의인은 금오산 줄기 숭양산 효자봉 왼쪽 아래 구미시 상모리(上毛里)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난 박정희(朴正熙;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이다.
그의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그는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117번지(현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 171)에서 부(父) 박성빈(朴成彬;1871~1938)과 모(母) 백남의(白南義;1872~1949) 사이에 5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박정희의 초혼은 김호남(金好南;1920-1991)으로 장녀 박재옥(朴在玉;1937, 韓丙起 부인)을 낳고 만주로 갔다. 1949년 이혼하고 김호남은 승려가 되었다. 그 후 육영수(陸英修;1925~1974)와 재혼하여 슬하에 박근혜(朴槿惠;18대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영(朴槿令), 박지만(朴志晩) 3남매를 두었다.
(그림5)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 박정희(朴正熙)
박정희는 1932년 3월 25일 구미공립보통학교(현 구미초등학교), 1937년 3월 25일 대구사범학교(현 대구교육대학교), 1942년 3월 25일 만주국육군군관학교, 1944년 4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김호남과 결혼하고 3년여 동안 문경공립보통학교(현 문경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첫딸 박재옥과 부인 김호남을 두고 괴뢰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진학하고 다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옮겨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되었다. 이듬해인 1945년 7월에는 중위로 승진했으나, 8월 15일 해방되기 며칠 전 중국으로 탈출하여 광복군에 배속되어 1945년 8월 29일 광복군 제3지대 소속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46년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고 그해 12월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되었다. 그러나 1948년 11월 남로당 관련 혐의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주위 군 선,후배들의 노력으로 감형되고 다시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방군 소령으로 복귀했다. 한국전쟁이 휴전상태로 돌입한. 1958년 3월 1일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1960년 1월 21일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부산으로 갔다.
자유당 말기 혼란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그는 쿠데타를 모의했다고 한다. 그는 동래 온천장 별관 등에서 김동하, 이주일, 홍종철, 전두열 등의 군인들과 모의를 거듭하고,『부산일보』주필 황용주(黃龍珠)와 자주 만나 의논하기도 했다. 부산을 방문한 장도영(張都暎;1923~2012) 2군사령관에게 쿠데타 계획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는데, 이때 장도영은 원칙적으로는 찬동하면서도 시기와 방법은 더 연구하자고 하였다. 그 후 박정희는 송요찬(宋堯讚;1918~1980) 육군참모총장이 미국으로 가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은 3·15 부정선거 촉발로 학생, 시민들의 4·19혁명이 폭발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4·19혁명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전국 주요 도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니, 박정희는 부산지구 계엄사무소장을 맡게 되었다.
4월 26일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나오자 부산 전역이 데모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분노한 군중들은 몽둥이와 사이다 병으로 경찰서, 파출소, 자유당 의원 집, 자유당 사무실, 구청, 소방서, 반공 청년단 사무실 등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일부 학생들이 시민에게 자제를 요청했으나 민중의 분노를 막을 수 없었다. 이에 박정희는 도청 앞으로 나와 “군(軍)은 데모를 보호하기 위해 나왔다.”, “이성을 잃지 말고 폭행과 파괴를 말자.”고 외쳤으나 시위는 더욱 강하게 번졌다. 시위가 격화되면서 군중들은 원정시위대를 조직하여 경상남도의 농촌지역과 마산지역까지 휩쓸었다.
제2 공화국 장면(張勉;1899~1966) 내각이 출범했지만 나라는 계속 기아와 혼란에 빠져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을 감행하여 성공하였다.
1961년 7월 3일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1967년 7월 1일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1971년 7월 1일 제7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維新憲法)에 의하여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의 오명(汚名)을 쓰고 타계했지만 그에 대한 ‘유수’의 생각은 이러하다.
‘유신(維新)은 국가 혁신(革新)의 통치행위이다. 즉 유신(維新)이란. 국가적 혁신(革新)을 말한다. 유신(維新)은 혁신(革新)적 방법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적 행위일 뿐 입니다.’ 라고 설명할 수 있다. 세계역사 속 선진강대국가 중에는 유신(維新)이란 과정을 거친 국가가 많다. 근세에 와서 유신(維新)의 과정을 거친 국가를 보면, 한국의 ‘박정희유신(朴正熙維新)’과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예로 들 수 있다.
‘명치유신(明治維新;메이지 유신)’은 덕천막부(德川幕府;도쿠가와 무신정치) 등이 700년간 내려오던 일본의 막부를 1867년 일본 메이지왕(明治王)때 무너뜨리고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이루어 유신통치(維新統治)를 실시하게 되었다. 명치왕은 유신통치로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地租改正) 등 일련의 혁신을 추진하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기치 아래에 서구 열강 근대국가를 모델로, 국민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관주도(官主導)로 일방적 근대국가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여 일본을 새 시대로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은 명치유신으로 하여 근대적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는데,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성립시켰고,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를 개시하었고, 사회, 문화적으로는 근대화를 추진하었고, 국제적으로는 획일적 국가구조를 대외에 실현시켰고, 비행기, 잠수함까지 만드는 산업국가가 되었다.
그 뒤 노-일 전쟁, 중-일 전쟁에서 승리했고, 대한제국을 합병시켜 식민지로 만들었고, 마침내 미국의 진주만을 공습하여,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만주, 중국, 동남아, 당시 미국령 필리핀까지 점령했고, 아시아의 최 강대국으로 일어서게 되었다.
한국의 ‘박정희유신(朴正熙維新)’은 5,000년 동안 지속된 지독한 굶주림과 외세의 침탈에 시달리던 한 민족을 혁신적 공업입국 산업사회로 발전시켜 세계10위의 경제대국을 만들었고 한류(韓流)와 G20국가로의 발전에 초석을 만들었다. 5'16군사혁명에 성공한 박정희는 1972년10월17일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낙후된 조국을 구제하겠다는 조국근대화의 원대한 이상을 가지고, 10월유신(十月維新)을 실시하여 부국강병 새 시대의 문을 열어, 국가재건사업 ‘새마을운동’을 의욕적으로 추진해 [공업입국으로 조국근대화]를 이루게 되었다.
‘박정희유신’은 국민들의 정신개혁과 경제개발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고 있었지만, 1979년 10월26일 김재규의 궁정동 대통령시해사건으로 박정희가 서거하자, 유신헌법은 막을 내렸고, 박정희 유신 경제개발은 수포로 돌아갔고, 한국의 경제발전은 둔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 한국은 그 경제적 바탕에서 민주화에도 성공하였고, 공업입국으로 세계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공했고, [G20국가]로 [한류문화국가]로 성장했다.
이 모든 것이 ‘박정희유신’이 초석(礎石)되어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박정희 유신헌법은 제왕적 독제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한국을 공업입국 근대화 산업사회를 만들기 위한 통치행위였을 뿐이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박정희유신’이 없었다면, “오늘날 누리는 이 풍요는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박정희의 당시 신념]
이 글은 1961년5월 군사혁명을 실행하려고 비행기로 서울로 올라오던 중, 구미 <금오산> 상공을 지나며 쓴 글이라 전 한다.
<국민에게>
황피(荒皮)에 시달리는 삼천만 우리 동포
언제나 구름 개이고 태양이 빛나리
천추에 <한(恨)>이 되는 조국질서 못 잡으면
내 민족 앞에 선혈(鮮血)바쳐 충혈원혼(充血寃魂) 되겠노라.
<향토 선배에게>
영남에 솟은 영봉 금오산아 잘 있거라
삼차 걸쳐 성공 못한 흥국일념(興國一念) 박정희는
일편단심 굳은 결의 소원성취 못 하오면
쾌도할복(快刀割腹) 맹세하고 일거취향(一擧醉鄕) 못 하리라.
그러나 박정희의 마지막은 1979년 10월 26일과 27일 당시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1926~1980)의 10·26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서거하였다. 국민들의 애도 속에 국장이 치러졌고, 그 후 매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1999년 7월 26일에는 김대중 대통령 시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고, 기념관 설립을 비롯한 여러 기념사업이 추진되었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의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그림6) 구미 상모리(上毛里) 박정희(朴正熙) 생가 동상.
그의 저서로 『지도자도-혁명 과정에 처하여』[1961], 『국가와 혁명과 나』[1963], 『조국 근대화의 지표』[1967], 『우리 민족의 나갈 길』[1969], 『민족의 저력』[1971], 『민족 중흥의 길』[1978] 등이 있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朴槿惠;1952,2,2~ )도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51.6%의 득표율로 민주통합당의 문재인(文在寅;1953.1.24 ~ ) 후보 득표율 48.0% 보다 많은 과반 이상 득표로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13년 2월 25일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함으로써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이자 1987년 대한민국 헌법 개정 이후 최초의 과반 득표 대통령, 최초의 이공계 출신 대통령, 최초의 독신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2017년 3월10일 헌법제판소의 탄핵 판결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상실했다.
<기다리는 셋째 의인(宜人)?>
숭산마을 노인들은 앞으로 나타날 세번째 의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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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남쪽 출생 그 외 역사적 인물>
금오산 주위에서 역사적 인물이 수없이 많지만,
여기서는 금오산 남동쪽 산 아래 30리 내에서 출생한 인물들 선출생별로 몇분만 소개한다.
선암 유창(劉敞;1352~1421)선생(인동현; 북삼 숭산 출생).
유창(劉敞)은 서기1352년 고려 공민왕 1년에 인동현(현,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숭산 고려귀족마을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유경(劉敬)이요. 자는 맹의(孟義), 호는 선암(仙庵),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서기1231년부터 1259년까지 몽고의 침략으로 경주 분황사 구층목탑이 소실될 당시 예외없이 신라불교 시원지(始原地)인 금오산 일대 사찰과 숭산 고려귀족마을 역시 패허가 되었다.
또한 유경(劉敬)의 부친 유천봉(劉天鳳)은 삼별초의 뜻에 동조하여 금오산성에서 항거, 금오산성마을에서 연명하다가 궁팝함에 못이겨 솔가하여 강릉부(江陵府) 우계현(羽溪縣)으로 이주하였다.
인하여 유경(劉敬)은 강릉 우계현에서 성장하고, 목은 이색(李穡;1328~1396), 정몽주(鄭夢周;1337~1392)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서기 1371년 고려 공민왕20년 문과에 급제해 성균학유(成均學諭)에 보직(補職)되었다가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한 후 문하주서(門下注書)로 옮겼다. 이듬해 사마시(司馬試)를 관장하여 박안신(朴安信) 등 99명을 선발했다. 그 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옮기고, 그 해 사직하여 신선술(神仙術) 배우기를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오히려 중추원좌부승지(中樞院左副承旨)로 발탁되었다. 서기 1375년 고려우왕1년에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로 임명되었고, 이후 전공좌랑(典工佐郞), 예의정랑(禮儀正郞), 군부정랑(軍簿正郞)을 차례로 거쳤다.
서기1376년 고려 우왕 2년에 예의(禮儀) 정랑(正郞)을 역임하고, 서기1389년 고려 공양왕1년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임명되었고, 이후 호조의랑(戶曹議郞)과 성균제주(成均祭酒)를 차례로 거쳤다.
유경(劉敬)은 이성계(李成桂)와 절친하여 측근에서 항상 학문을 강론하였으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 현,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이 되어 “군지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라며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스승 이색의 권유로 “젊고 명석한 사람은 새나라 만드는데 참여해야 되지 않겠는가.”, 또한 이성계(李成桂), 이방원(李芳遠)의 간곡한 권유로 1392년에 조선개국에 권근(權近;1352~1409)과 함께 참여한다.
이 무렵 유경(劉敬)에서 유창(劉敞)으로 개명했다.
유창(劉敞)은 조선개국공신 이등으로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서기1395년 조선 태조4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옥천군(玉川君), 우부빈객(右副賓客)을 차례로 거쳤고, 이후 승녕부윤(承寧府尹)으로 있다가 1402년 조선 태종 2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1404년 조선 태종 4년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차례로 거쳤다.
이듬해 문과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과거에서 이숙번(李叔蕃;1373~1440), 정초(鄭招;?~1434) 등과 함께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같은 해 다시 우부빈객에 임명되었으며, 1406년 조선 태종 6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1407년 조선 태종 7년 옥천군(玉川君)으로서 영가군(永嘉君) 권홍(權弘;1360∼1446)과 함께 명(明) 사은사(謝恩使)로 갔고, 이듬해 태상왕(太上王)으로 있던 태조(太祖)가 훙(薨)하자 3년 동안 능지기가 되어 능을 지켰다.
1410년 조선 태종 10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발탁되었고,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로 옮겼다. 1413년 조선 태종 13년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임명되어 세자 양녕, 효녕, 충녕 3왕자의 스승이 되었다. 1415년 태종 15년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으로 올려 봉해졌고, 이듬해 제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상서문(上書文)을 올렸다. 1418년 조선 태종 18년 다시 세자이사에 임명되었다가, 1421년 조선 세종 3년 예문관대제학 류관(柳觀;1346~1433)과 함께 궤장(几杖; 임금이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을 하사받았으며, 그 해 졸(卒)하니 세종대왕께서 문희(文僖)라는 시호를 내렸다.
문희공(文僖公) 선생은 숭산 자강사(紫岡祠)와 송계서원(松溪書院) 외에 여러 곳에 봉향되었다. 문집으로《선암집(仙庵集)》이 있다.
(그림7) 숭산 자강사(紫岡祠)에 모셔있던 문희공(文僖公) 유창 선생 영정
태종실록 8권 기록에서, “1404년 11월 16일 개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 66명이 참석한 경복궁 대청관에 모여 공신간의 협화(協和)를 위해 회맹(會盟)을 가진 후, 무일전(無逸殿)에 나아가 큰 연회를 베풀었다. 태종이 모여든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마음가짐과 사람을 두려워함이 마땅히 유모처럼 하여야만 하늘이 내리는 복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은혜와 대우가 두터워 임금의 사랑이 끝없음을 알만하다. 그 때에, 주변에 좌명공신들이 많이 있었는데 오직 유선생(劉先生)에게만 공심일시(公心一視) 네 글자를 친히 써 주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연회석상에서 태종이 [공심일시(公心一視)]를 하사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 태종은 3공신이 능히 협화(協和) 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는데 함께 맹세하여 그 마음을 하나로 하였다(태종실록 8권)라는 기록은 [공심일시(公心一視)]의 글속에 내포된 심오한 뜻과 일맥상통 한다. 공심일시의 뜻은, ‘공의 마음은 나(태종)와 하나가 되니(一致) 공의 마음은 한결 같다’는 의미로 전해오고 있다. 즉, 공은 개국에 참여하여 태조를 도왔고, 한결같이 나(태종)를 도와 충성을 다 하고 있음에 군신(君臣)간의 마음이 하나 됨을 기뻐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으신 임금님의 간절한 마음을 담은 글로 전해오고 있다.
(그림8) 태종대왕 어필 [공심일시(公心一視)]
태종대왕 어필 공심일시(公心一視)는 구한말 고명한 유학자 장복추(張福樞;1815~1900)의 숭산 자강사(숭양제) 어필각을 중수할 때 상량문과, 허훈(許薰;1836~1907)의 어필각 중수기의 내용이 시문(詩文)으로 남아있다.
[원문]太宗恭定大王 召諸臣宴于景福宮 謂近臣曰 特心畏寵 當如劉某然後 受天翁之降福 恩遇益隆 聖眷猶未己也 當時佐命勳貴許多 而獨於先生 親寫公心一視四字 以賜之.
태종대왕 어필 공심일시(公心一視)는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금오산 남쪽 숭산(崇山)마을 자강사(紫剛祠) 어필각(御筆閣)에 유창 영정과 함께 모셔져 있다가 관리상 서울시 상일동 해천제 유창선생 기념관으로 이전 관리하고 있다. 지금 자강사(숭양제)는 소실되고 그 터만 남아 있다.
야은 길제(吉再;1353~1419)선생(선산현; 선산 해평 출생).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로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자는 재보(再父)이고,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고, 시호는 충절(忠節)공이시다.
금주지사(錦州知事) 길원진(吉元璡)의 아들이다.
나이 18세에 상산(尙州)에 거주하던 박분(朴賁)에게 나아가서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하였다. 금주지사(錦州知事) 아버지를 따라 송도에 가서 이색(李穡;1328~1396),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문하에서 권근(權近;1352~1409)과 유창(劉敞;1352~1421)등에 이어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生員試)에, 1383년 고려 우왕 9년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 1387년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를 지냈다. 1390년 계림부(鷄林府)의 교수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고향으로 가는 길에 장단에 있던 스승 이색(李穡)을 만나기도 하였다. 고려 우왕의 죽음을 듣고 고향에서 3년 상(喪)을 행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 조선 정종 2년에 이방원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의 뜻을 말하며 거절하고 금오산 도선굴(道詵窟)로 들어가 조선에서 주는 녹봉은 받지 않고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하며 고려조정에 충절을 지켰다. 또한 부모를 섬김에 지극히 효도했고, 서모(庶母)이지만 노씨를 잘 섬겼으며, 부자 아내를 거느렸으나 검소하고 부지런하였다.
조선 4대 임금 세종(재위;1418~1450)이 즉위한 뒤 야은 길재 선생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서 그 자손을 등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 주었다.
(그림9) 충절공(忠節公) 길재 선생 영정.
길재 선생은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금오산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들이 줄을 이어 금오산 남통계곡으로 모였다. 1768년 조선 영조44년에 채미정(採薇亭)을 지어 그의 충절을 기렸다.
(그림10) 길재 선생 후학들이 세운 채미정(採薇亭).
야은 길재의 후학에는 김숙자(金叔滋;1389~1456, 김종직 부친)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정여창(鄭汝昌;1450~1504), 김굉필(金宏弼;1454~1504), 김일손(金馹孫;1464~1498), 정붕(鄭鵬;1467~1512), 조광조(趙光祖;1482~1519), 장현광(張顯光;1554~1637) 등으로 학맥을 이었다.
조선 전기 학자 조식(曺植;1501~1572)의 『남명선생문집(南冥先生文集)』에 야은 길재 선생의 충절과 학문을 흠모해 『야은선생전(冶隱先生傳)』을 지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길재는 과거에 올라 문하성주서가 되었고, 홍무 23년 경오(1390)에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봉계에 물러나 살았다. 그 후에는 벼슬을 제수해도 부임하지 않았고 공양왕이 서거하자 마음으로 삼년상을 지냈다. 조선 태종 때 태상박사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두 성씨를 섬기지 않는 의리를 지켰다.
길재는 상례에 엄하여서 불교의 의식을 따르지 않았다. 매양 한밤중에 자고 닭이 울면 일어나서 의관을 갖추고 사당과 앞 시대 성인들의 화상을 배알하였다. 서당으로 물러나와 책상 앞에 꿇어앉아서 학문을 강습하되 종일토록 게으름을 잊고 지냈다. 양촌이 별세하자 삼 년을 심상하였고, 박분이 죽자 또 그와 같이 하였다. 배우는 자들이 야은선생이라 일컬었고, 원근의 학도가 사방에서 모여들었는데 중들도 느껴 깨달아서 환속한 자가 수십 명이었다.“ (이하 결락)
선생은 청풍서원(淸風書院)에 봉향되었다. 문집에《야은집》,《야은속집(冶隱續集)》,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등이 있다.
여헌 장현광(張顯光;1554~1637)선생(인동현; 북삼 오태 출생)
장현광(張顯光;1554~1637)은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문신, 정치인, 철학자, 작가, 시인이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다. 그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써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의 문인과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의 문인들 사이에 학덕과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수많은 영남의 남인 학자들을 길러냈다.
류성룡(柳成龍) 등의 천거로 여러 차례 내외의 관직을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하였고 그 중에서 부임(赴任)한 것은 보은현감(報恩縣監)과 의성현령(義城縣令)의 외직과 내직(內職)으로는 공조좌랑(工曹佐郞),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형조참판(刑曹參判), 의정부우참찬 등이다. 서기 1602년 조선 선조 35년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정부의 주역(周易) 교정사업에 참여하고 이듬해 잠깐 의성현령으로 부임했으며, 그 외에는 모두 사양하거나 사직 고사하였다. 그 뒤 형조참판직에 잠시 취임하였으나 이후 계속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림11) 여헌 장현광(張顯光) 선생 영정.
여헌 장현광은 고려 상장군 장금용(張金用)의 후손이며 덕녕부윤(德寧府尹) 장안세(張安世)의 8대손(八代孫)으로 1557년 조선 명종9년에 아버지 장열(張烈), 어머니는 경산 이씨 사이에 인동현(仁同縣) 인선방(仁善坊) 남산(南山; 현 북삼읍 오태동)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7세 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8세 때 아버지 장열을 잃었다. 9세 때 매형인 송암 노수성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1세 때 학자인 신당 정붕(鄭鵬 1467~1512)의 아들인 정각은 그를 보고 "이 아이는 기상이 굉위(宏偉)하여 반드시 세상에서 특출한 사람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14세 때인 1567년 조선 명종22년부터 진사 학거 장순(張峋)에게 학문을 배웠고, 1571년 조선 선조4년 18세에「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지어 대학자로서의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 말미에 이르기를 '능히 천하의 제일사업(第一事業)을 할 줄 알아야 바야흐로 천하제일의 인물이 된다.' 라고 원대하고 굉위한 포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일찍이 호를 여헌(旅軒)이라 하였는데, 몸은 작은 평상에 있지만 정신은 큰 우주에 노닌다는 초세간적인 인물이었으니 한 곳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영천의 입암, 청송의 송학 주왕산, 봉화의 도심촌 등으로 1년에도 2~3차례 유랑하는 나그네로 우주를 벗 삼고 사방을 집을 삼아 여유로 낙을 삼았다. 학거 장순의 문하에 있을 때 성리대전을 읽고 심취하여 스스로 깨우치고 연구했다. 침식을 잊으며 오래도록 학문에 정진하여 23세 때인 1576년 조선 선조9년에 재능과 행실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다. 그 뒤 26세 때, 이황과 조식의 문인인 정구의 질서가 되어 교류 하였다.
김종직계열의 직계를 통해 김종직-김굉필-정붕-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였고, 처삼촌이자 거유인 한강과 교류하여 정구로부터는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계승했다. 그의 학덕이 퇴계 이황의 문도들과 조식의 문도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면서 한때 류성룡(柳成龍) 등의 천거로 여러 차례 내외의 관직을 받았으나 모두 사양한다.
23세 때 재사(才士)로 추천되었으며 26세 때에는 한강 정구의 조카딸과 결혼, 질서가 되어 한강과의 접촉이 시작되었고, 그 때 성주목사로 있던 허잠이 그의 문하에 찾아와 수학한다. 허잠이 한강 정구에게 묻기를 '남방에서 호학하는 선비가 누구입니까' 하니 한강은 장현광을 추천했는데 허잠은 '호학입지를 보아 이 사람이 훗날 나의 사표이 될 만하다'하였다고 한다. 그의 문인 허잠은 훗날 영의정을 지내는 허적의 할아버지로 그를 통해 허적 등에게도 영향을 준다.
그는 13세 때인 명종 21년(1566)으로부터 선조 23년(1590), 선조 25년(1592) 등 3차에 걸쳐 남명 조식의 문도들의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이 일로 남명학파 학인들과도 폭넓은 사상적 교유를 하였다. 이는 그의 처숙인 한강 정구가 퇴계 이황의 문인이기도 하지만 남명 조식에게서도 수학한 점에 연원을 둔다. 이런 연유 등으로 인조반정(1623) 이후 몰락한 조식의 후예들과 강우(江右) 지역의 유림들 중에 자신들의 학문 연원을 정구와 장현광에서 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1591년(선조 24년) 겨울 학행으로 다시 천거되어 전옥서참봉(典獄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오산(金烏山)으로 피난하였다.
광해군 때 합천군수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인조반정 이후 조정에서 학문적 권위를 인정한 산림(山林)에 꼽혔다. 인조 조에도 사헌부지평·집의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이괄의 난 때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어 취임하였고, 이후 형조참판, 대사헌 등에 제수되어 마지못해 취임했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우참찬에 임명되고 의병을 일으켜 청나라군과 교전하는 한편 군량과 군자물품의 조달과 지원을 주도했으나, 패전 후 실망하여 동해안의 입암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유교의 입장에서 온 세상의 만물이 생겨나는 근원을 이르는 태극을 내세우되 일체유(一體儒)와 그 근원을 대답을 기다리는 것과 조화의 논리로 융화 종합하는 철학적 근거를 명시하였다. 이황의 문인인 한강 정구의 조카사위였다. 이황의 학맥이자 영남학파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던 처숙인 정구를 통해 퇴계와 남명의 학통을 사숙하고, 그의 문인으로는 허목, 유진(柳袗) 정극후(鄭克後) 전식(全湜) 김응조 등이 배출되었다. 또한 허목을 통해 근기남인성리학파와 남인실학파로도 학통이 이어졌다.
신유(申瀏;1619∼1680)장군(인동현; 북삼 강진 출생).
신유(申瀏;1619∼1680)는 인동 숭오(현, 북삼읍 강진) 마을에서 태어나, 약목으로 이주했다. 그 생가 집터가 북삼읍 강진마을에 유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신유는 같은 고을 여헌 장현광(張顯光)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나, 1646년 조선 인조24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해 무인(武人)으로 등용되었다. 1658년 조선 효종9년에 함경북도 병마우후(兵馬虞侯)로 있을 때, 청(靑)나라 요청을 받아 영장(領將)으로서 조총군(鳥銃軍) 200여 명을 인솔하고 나선정벌(羅禪征伐)에 참여하였다. 이때 흑룡강(黑龍江) 부근으로 남하하는 러시아의 지휘관 스테파노프(Stepanov) 군대 270여 명을 전멸시키는 등, 러시아의 남하를 막은 큰 공을 세웠다. 이 원정(遠征) 내용은 그의『북정일기(北征日記)』에 기록되어 전한다.
(그림12) 러시아를 정벌한 신유 장군을 모신 숭무사(崇武祠).
1680년 조선 숙종6년에 장군이 62세로 별세하자, 왕이 제문(祭文)을 내리고 예관을 보내 제사하게 하고 약목면 남계리 숭무사(崇武祠)에 제향하고 경내에 신도비를 세웠다. 대사헌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교리 이동적(李東迪;1769~1843)이 전액하고 이재익이 음기를 썼다. 6·25전쟁 때 포격으로 파손되었다. 그 후 고쳐 세운 비석의 글씨는 이상건이 썼다.
유적 경내는 1980년에 중창되었는데, 정문인 북정문(北征門)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에는 존성재(存誠齋), 우측에는 신도비와 비각이 있으며, 내삼문인 선위문(宣威門)과 함께 사당인 숭무사(崇武祠)가 있다. 이러한 모습은 1980년에 부지 1,000평을 매입하여 기존 건물 3동(존성재, 삼문, 관리사)을 해체하고 경역(境域)을 조성하여 숭무사와 외삼문 그리고 비각을 신축하고 존성재를 복원하여 주위를 정비한 것이다.
한편 경내 왼쪽 담장 밖에는 근래에 건립된 정평부사(定平府使)를 지낸 신한(申瀚;1611~1672)의 기적비(紀蹟碑)도 세워져 있다.
장군의 유물로는 교지 35장, 논서 6장, 교서 1장, 사제문 1장, 부인교지 1장, 분재기 1통, 간찰 1통이 있다. 사당과 경역은 1979~1981년에 보수·정화하였다.
묘소는 2기(基)는 숭무사 뒤 200m 지점에 신유 및 정부인묘(貞夫人墓)가 있다. 신유 묘는 원형 토분(土墳)으로 좌우에 망주(望柱)가 서 있다. 매년 음력 정월 15일에 향사(享祀)하고, 3월에는 후손들이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만송 유병헌(劉秉憲;1842∼1918)선생(인동현; 북삼 강진 출생).
유병헌(劉秉憲;1842∼1918)의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자는 주현(周顯)이고, 호는 만송(晩松)이다. 경상도 인동현 숭오리(현;북삼 강진)에서 출생하여. 같은 고을 출신 여헌 장현광(張顯光)의 학통을 이어받아 벼슬길에는 뜻이 없고 성리학 연구에만 정진하였다.
일제가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하여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로 국권이 박탈되자, 그 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각종 세금을 총독부에 내지 말것을 장문의 통문을 각처 유림 향교에 돌렸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침탈되자 독립투사로 활약하니, 그를 조선의사(朝鮮義士)로 선산, 영덕, 울주, 강동 등 여러 곳에서 목비를 세워 그를 추앙했다. 그의 상소문이기도 하고, 유명한 통문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의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대저 은혜와 원수는 마치 백(白)과 흑(黑)과 같아서 변별할 필요조차 없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아! 섬나라 오랑캐가 세력을 얻어 내 나라를 빼앗고 내 임금을 쫓아내고 내 생민을 도탄에 빠트리니 이는 나의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그런데 저놈들은 도리어 재물로 우리 늙은이들을 '은사금'으로 유혹 하니, 이 어찌 흑을 가리켜 백이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간교한 꾀로 함정을 삼고 재물과 이익으로 미끼를 삼는데 불과하니 조선 사람들을 함정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진실로 흑과 백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즐겨 죽을 함정에 빠지겠느냐. 만약 이 함정에 잘 못 빠지면 빠져나올 기회는 다시없을 것이니 경계하고 두려운 일이 어찌 아니겠느냐. 돈을 받고 거주성명(居住姓名)의 도장을 준다면 끝내 왜놈의 노예가 되고 왜국의 종자가 되어 그 내용이 철권(鐵券)에 기재되어 무궁토록 전하여 그 자손들에게 까지 영향이 미칠 것이니 노예가 되면 다시 속죄할 수 없고 오랑캐의 종자(從子)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심장은 갈수록 혹독한 분통과 울분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니 창자와 쓸개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받을 것이며,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낮에 밥을 못 먹을 지경이 될 지어다. 차라리 원수의 칼에 죽을지언정 원수의 돈을 받지 말고 스스로 죽을 함정에 빠지지 않을 것을 맹세하라. 무릇 우리 조선 사람들은 이 글을 보고 또 경계하고 경계하여 삼가 할 지어다.”
유병헌 의사는 이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을 1911년 당시 대한제국의 고관대작, 관료, 유림들이 왜국의 은사금과 재물, 작위에 유혹되어 국권(國權)을 일본 오랑케에게 넘기는 사례에 대하여 애절 통탄하여 통열(痛裂)히 비판하는 글을 일본내각, 총독, 미국, 청국, 러시아, 영국, 불란서 대사관과 각처 관공서, 향교유림에 통문(通文) 하였고, 황제에게 올리신 상소문 내용의 일부이기도 하다. 특히 세금은 왜국 총독부에 내거나 빼앗기지 말고 조선조정에 바치도록 전국 각처 사림(士林)들에게 선통(先通)한 격문(檄文)의 한 부분이다. 이후 1919년 강우규(姜宇奎, 1855~1920, 연해주), 1920년 박재혁 의거(朴載赫,1895~1921, 부산)을 비롯하여 1932년 윤봉길 의거(尹奉吉, 1908~1932, 상해) 등, 전국 각지와 중국에서 의거가 일어난 것도 만송선생의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후 만송 유병헌 의사는 여러 차례 투옥을 거듭하다가, 1918년 대구옥에서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 하며 단식자진(斷食自盡) 하셨다.
(그림13) 조선의사(朝鮮義士) 만송 유병헌 선생 영정.
또한,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군민들을 모아 일제의 불의와 을사5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하였으며, 더욱이 한국인은 조선총독부에 일체의 세금을 납부해서는 안 되며, 은사금(恩賜金)도 모두 거부해야 된다고 통문을 보내고 역설하였다. 특히 친일분자들에 의한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의 송덕비축조계획을 알고 그 곳 향교 유림들에게 규탄 통문을 보내 저지시켰고, 순종황제와 황태자의 일본방문에 대하여 일본의 속샘을 극열히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 황태자 이근 만 일본에 가고 순종황제는 화를 면하게 했다고 한다.
유병헌 의사는 수차례 격문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을 전국 향교 유림들과 외국공사관에 살포한 것과 양조장 경영에 대한 일체의 세금납부를 일본총독부에 거부하고 직접 세금을 조선황실에 바치겠다고 서울로 올라가는 등, 9년 동안 일본 경찰의 체포, 투옥을 치뤘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투쟁하다가, 결국 1918년 대구 옥에서 단식을 결행하여 단식 7일 만에 순국하였다. 그의 영정과 위패는 서울 서대문독립공원 독립각 순국선열 헌충사에 모셔져 있다. 국가에서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허위(許蔿;1855~1908) 선생(선산현;선산 구미 출생).
조선의병장(朝鮮義兵長) 허위(許蔿)는 유교집안(儒門)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학문을 배웠다.
41세 되던 서기1895년 조선 고종32년에 을미사변과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이기찬(李起燦), 이은찬(李殷贊), 조동호(趙東鎬), 이기하(李起夏) 등과 함께 서기1896년 2월 10일(음력)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였다. 이기찬을 대장으로 금산(金山;金泉), 성주(星州)를 거점으로 대구부로 진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접한 대구의 관군이 급히 출동하고 이어 경군(京軍)과 공주의 관군이 합세하여 공격해옴으로써, 성주가 무너지고 이은찬 등 일부 장령이 사로잡혔다. 그 뒤 의병진에서는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재 반격을 준비 중이었으나, 이 때 고종이 내밀봉서(內密封書)로 내린 해산 명령을 받은 허위는 그민 자진하여 의진을 해산하여 귀향하고 말았다.
(그림14) 조선의병장(朝鮮義兵長) 허위 선생 영정.
1899년 2월 조정의 부름을 받고 상경, 원구단 참봉(圜丘壇參奉)을 시작으로 관계에 진출, 곧 성균관박사, 1904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평리원수반판사(平理院首班判事),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 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하고, 1905년 비서원승(秘書院丞)이 되었다.
이 때 일본의 국정간섭에 대한 죄상을 열거한 격문을 살포, 찬정(贊政) 최익현(崔益鉉; 1833~1906), 판서 김학진(金鶴鎭;1838~1917)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 뒤 일본인들이 회유책으로 그를 칙임관(勅任官) 2등으로 서품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05년 11월(양력)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경상·충청·경기·강원·전라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유인석(柳麟錫;1842~1915) 등 여러 지사들과 만나 의거를 결의하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새로이 보국을 결의하고 9월 민긍호(閔肯鎬;?∼1908), 이강년(李康秊;1858~1908) 등의 의병부대와 서로 연락하면서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8년 가을에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양주로 집결하여 13도의병연합부대(十三道義兵聯合部隊)를 편성하였다. 이때 이인영(李麟榮;1867~1909)이 원수부13도총대장(元帥府十三道總大將)이 되고 허위는 군사장(軍師長)이 되었다.
연합부대가 대오를 정비, 서울로 진격할 때, 정병300명의 선두에 서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하여 전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후속부대와 연락이 끊어진 상태였으며, 이를 눈치 챈 일본군은 각처로부터 밀려오던 의병부대를 개별적으로 타격을 가하였다. 이 때 그도 갑자기 몰려온 일본군과 사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후원군이 없어서 패하고 말았다. 당시 총대장인 이인영이 아버지 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돌아가게 되어 중책을 맡게 되자 의병들을 수습한 뒤, 임진강 방면으로 나아가 박종한(朴宗漢), 김수민(金秀敏), 김응두(金應斗), 이은찬의 의병부대들과 함께 새로운 임진강의병연합부대(臨津江義兵聯合部隊)를 편성하였다. 의병들의 정신무장을 강화하고 군율을 엄하게 하여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또한 이곳 일대에 군정(軍政)을 실시하여 의병부대에 소요되는 모든 군수물자는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조달하였다. 의병연합부대의 전법은 유격전술로 소단위의 게릴라 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연합부대를 지휘하면서 1908년 2월 가평, 적성 방면의 의병 5,000명을 집결시키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무기를 제조하였다.
4월에는 보다 광범위한 힘의 결집을 도모하기 위해 이강년(李康秊) 등과 함께 전국의 의병부대에 통문을 보내고, 5월에는 박노천(朴魯天), 이기학(李基學) 등으로 하여금 30개 조에 달하는 한국민의 기본 요구 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게 하기도 하였다.
새로운 항일전의 앞날을 준비하고 있던 중, 6월 11일 경기도 양평군 유동(柳洞)이라는 산중 마을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혀 10월 21일 서대문 감옥에서 51세로 순국하였다.
그의 영정과 위패는 서대문 독립공원 독립각 순국선열 헌충사에 모셔저 있다.
국가에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하였다.
장지연(張志淵,1864∼1921)선생(인동현; 북삼 인평 출신)
‘을사늑약(乙巳勒約)’ 3일 후, 1905년 11월 20일 장지연(張志淵)은《황성신문》사설에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 성토하였다.
장지연은 1864년 11월 30일 경상북도 인동 북삼 인평동 출생으로, 본관은 인동(仁同), 초명은 장지윤(張志尹)이며, 자는 화명(和明), 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 숭양산인(崇陽山人)이다. 그는 1885년 6월 향시(鄕試) 응제과(應製科)에 입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서 낙방하였다. 1894년 2월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으로 합격했으나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으로 임명되지 못 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 乙未事變)이 일어나자 의병궐기 호소 격문을 각처에 발송하였고,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때에는 고종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萬人疏)를 기초하기도 하였다. 1897년 사례소(史禮所) 직원으로 『대한예전(大韓禮典)』 편찬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7월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898년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하였고, 9월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창간되자 기자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총무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곧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해산되면서 체포되기도 하였다.
1899년 1월부터 8월까지 격일간 신문인 『시사총보(時事叢報)』 주필이 되었으며, 같은 해 9월 『황성신문』 주필로 초빙되었으나 수개월 후 사임하였다. 1900년 『시사총보』가 출판사인 광문사(廣文社)로 개편, 설립될 때 편집원으로 참여해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와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간행하였다. 1901년 다시 『황성신문』의 주필이 되었고, 1902년 8월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게재해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 논설은 일본의 국권침탈과 을사5적(乙巳五賊)을 규탄해 국민총궐기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65일간 투옥되었으며, 『황성신문』은 11월 20일자 압수되고, 1906년 2월 12일까지 정간되었다. 1906년 3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4월부터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평양일신학교(平壤日新學校) 교장을 지냈고, 1907년 3월 휘문의숙(徽文義塾) 숙장(塾長)으로 취임하였다. 이와 함께 1906년 6월부터 1907년 6월까지 대한제국 내부(內部) 발행허가를 받은 잡지 『조양보(朝陽報)』의 편집위원 및 주필로 활동하였다. 1907년 11월 대한협회(大韓協會)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원에 선출되었고, 11월 흥사단(興士團) 평의원, 12월 『대한협회회보』 편찬원을 맡았다. 이때 국채보상운동 동참을 호소하는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1908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의 『해조신문(海朝新聞)』 주필로 초빙되었으며, 같은 해 5월 『해조신문』 폐간 후 상하이, 난징을 거쳐 9월 귀국하였다.
1909년 1월 교남학회(嶠南學會) 취지문을 짓고 『교남교육회잡지』 편집원을 맡았으며, 같은 해 10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창간된 지방신문 『경남일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1911년 10월 진주로 이사하였다. 『경남일보』는 1915년 1월 경영난으로 폐간될 때까지 조선인이 경영했던 유일한 지방신문이었다. 『경남일보』 1910년 10월 11일자 「사조(詞藻)」란에 한일강제병합을 비난하며 8월 30일 자결한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유시(遺詩)」를 게재하고 평(評)을 달았다. 이로 인해 『경남일보』는「신문지법」제21조 위반으로 10월 25일까지 10일간 정간되었다.
복간 후 『경남일보』는 1910년 11월 5일자를 일본 천황 메이지[明治]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기념호로 발행하였으며, 1911년 11월 2일자도 천장절을 기념해 2면을 일장기와 오얏 문양으로 장식해 ‘축천장절(祝天長節)’이라 표기하고 기념 한시(漢詩)를 무기명으로 게재하기도 하였다. 1913년 신병을 이유로 『경남일보』 주필을 그만두고 마산으로 이주하였다.
1914년 11월 경성부 수송동 각황교당(覺皇敎堂)에서 불교진흥회(佛敎振興會) 발기총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2월 열린 불교진흥회(1917년 2월 불교옹호회로 개편) 설립총회에서 간사로 선출되었다. 호은율사(虎隱律師)의 제자로서 불심이 깊었으며, 율사가 입적하자 화엄사 주지 진응(震應)이 「호은대율사비(虎隱大律師碑)」를 세웠고 장지연이 비문을 직접 찬하였다.
『매일신보』 1914년 12월 23일자부터 숭양산인(崇陽山人) 장지연의 실명으로「고재만필(古齋漫筆)-여시관(如是觀)」이라는 글로 연재를 시작해 1918년 12월까지 약 700여 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그가 『매일신보』에 게재한 산문과 한시(漢詩)들 중에는 유교(儒敎)를 교풍(矯風)하고 신학문을 장려한다는 내용의 글들과 함께 1915년 1월 1일자 「조선풍속의 변천」, 1915년 12월 23일자 「만필쇄어(17)」, 1916년 6월 8일자 「시사소언(8)」, 1916년 9월 16일자 「만록(漫錄)-지리관계(5)」등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과 일제강점기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일본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글들이 포함되었다.
1921년 10월 2일 병사하였으며, 사망 후 「시일야방성대곡」 발표 등 언론인으로서 일본 침략에 저항한 공을 인정받아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2004년 11월 국가보훈처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1914년 12월 23일부터 1918년 7월 11일까지 『매일신보』에 글을 연재하며 발표한 시와 산문들 중 친일경향의 글들이 있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기도 하였고, 2011년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영예수여 및 취소안」이 심의-의결되어 그의 서훈이 취소되었다. 하지만 2012년 1월 20일 법원은 해당 서훈의 취소결정을 다시 무효처리하였다.
(그림15) 장지연 초상.
(그림16)《황성신문》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재상인 이지명(李知命,1127~1191)이 쓰기를 선산은 “땅이 사방 백리인 천년 고을인데, 삼한의 일선성(一善城)이라고 하네.” 라고 묘사한 선산(善山)은 신라 경덕왕 때 숭선군(崇善郡)이라 부르다가 조선 태종 때 일선군(一善郡)으로 바꾸었다.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인 권채(權採,1399~1438)는『광선헌기(廣善軒記)』에서 쓰기를 “경상도는 영남의 큰 길인데, 그 경계 위에 있는 선산(善山)은 실로 한 도의 큰 길거리다. 사신의 행차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더러는 같은 날 한꺼번에 몰려오기도 하여 늘 손님이 묵을 숙소가 모자랐다.” 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중환(李重煥,1690~1756)의 『택리지(擇里志)』에서 금오산의 “그 남쪽에 선산(善山)이 있는데, 산천이 상주보다 더욱 깨끗하고 밝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조선 인물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물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 라고 했을 만큼 선산 금오산에서는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왔다.”, “논과 밭이 아주 기름져서 백성들이 안락하게 살며, 죄를 두려워하고 간사함을 멀리하고 충절을 지키는 까닭에 충신열사가 많이 배출되었으며 여러 대에 걸쳐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고려 후기 이후에 선산 김씨, 해평 윤씨 등의 명문세족들이 성장하였고, 산 남쪽에 인동 장씨, 성주 이씨가 세족을 이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선산 땅에서 인물이 많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말할 때마다 이곳의 명산인 금오산과 이곳을 거쳐 흐르는 낙동강의 수려한 모습도 함께 거론된다.
선산 고아에서 태어난 고려 말 삼은(三隱) 중 하나인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문하주서(門下注書) 길재(吉再,1353~1419)는 이색(李穡,1328~1396), 정몽주(鄭夢周,1337~1392) 등의 문하에서 유창(劉敞,1352~1421;강릉 劉씨 도시조), 권근(權近,1352~1409;안동 權씨 도시조) 등과 동문수학하였다. 그들의 후학에는 김숙자(金叔滋,1389~1456), 김종직(金宗直,1431~1492), 김굉필(金宏弼,1454~1504), 정여창(鄭汝昌,1450~1504), 조광조(趙光祖,1482(성종13)∼1519(중종14) 등이 영남학통의 맥을 이어가 조선 성리학의 꽃을 피웠다.
금오산 금릉 하로리(賀老里)는 판서(判書) 최선문(崔善門)의 고향이다. 최선문은 노산군을 위하여 절의를 지켰다.
또한 사육신의 한 사람인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1412~1456)는 선산 영봉(이문리)에서 태어났고, 조선 중종 때 서릿발 같은 반정공신 성희안(成希顔,1461~1513)이 청송의 이름난 잣과 꿀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받은 청송 고을원으로 봉직하던 정붕(鄭鵬,1467~1512)은 “잣은 높은 산 나무위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으니 내가 어떻게 구하리오.” 라는 유명한 답장을 보내 금오산 선비들의 꼿꼿한 기품을 알렸다. 그 후 정붕은 선산 고향에서 제자들을 길러냈다.
노수신(盧守愼,1515~1590)의 고향 역시 선산인데, 정여립(鄭汝立,1546∼1589)을 천거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된 노수신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19년 동안 진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이황(李滉,1501∼1570), 김인후(金麟厚,1510~1560)와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고, 중국의 진백이 지은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는데, 이것이 사림들 사이에 퍼지면서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노수신은 『대학장구(大學章句)』와 『동몽수지(童蒙須知)』를 진도 귀양살이에서 주해하였다. 노수신은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을 가진 문신 학자로서 사림(士林)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17세기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칭송이 높았던 장현광(張顯光,1554~1637) 역시 고향이 인동(仁同) 오태로서 그의 사상적 특징은 유학의 입장에서 태극(太極) 이론을 앞세우고 일체유(一體儒)와 그 근원을 대대(對待)와 조화의 논리로 융화 종합하는 철학적 근거를 명시하였다는데 있다. 문집으로 《여헌집》,《성리설(性理說)》,《역학도설(易學圖說)》,《용사일기(龍蛇日記)》 등의 저서가 있다. 류성룡(柳成龍,1542~1607), 정경세(鄭經世,1563∼1633) 등과 더불어 영남의 수많은 남인학자들을 길러냈다. 사후에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등 여러 곳에 제향되었다.
이어 한말 독립순국의사 만송(晩松) 유병헌 선생도 이곳 인동 숭오(崇烏)에서 태어나, 충절의 고향 금오산의 면면을 보여주고 있다.
금오산 주위에는 명당(明堂)이 넓리 산제하고 있어 근대에 와서 박정희 대통령이 금오산 밑 상모에서 태어났고,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도 고향이 금오산인 샘이다.
그 외 금오산 줄기에서는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택상(북삼 오태), 신현확(약목) 등,
많은 인물들이 근세에도 배출되었다.
이곳 내 고향 숭오(崇烏) 오리곡(梧里谷) 선영아래 알땅재(下峴岾)에는 나의 유택(幽宅)도 마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