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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과거 영광은 그들의 강인한 개척 정신과 뭉쳐진 영혼으로 다시금 꽃 피우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도이며 성지인 예루살렘은 과거의 성스러움과 그 역사의 모습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다윗과 예수께서 탄생한 베들레헴과 함께 순례자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예수께서 소년시절을 보냈던 나사렛 땅에는 갈릴리 지방을 여행하는 많은 크리스챤 순례자들이 소년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찾아오고 있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살았던 브엘셰바가 그 척박한 광야로부터 20세기 근대도시로 탈바꿈하여 지역중심으로 네게브사막 입구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최남단부에 홍해로 통하는 출애굽 여정의 도시 에일랏은 솔로몬 시대의 융성을 상기 시키는듯 사철 휴양지로서 매우 부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종교적 역사적 유산을 가진 나라로서 이스라엘은 여행자들에게 많은 것을 제공해 주는 나라이다.
지중해를 안고 펼쳐지는 깨끗한 모래밭과 눈부신 태양, 맑고 시원한 공기를 즐길 수 있고 부족함이 없는 근대 신흥도시들과 훌륭한 서비스의 호텔들, 제각기 독특한 키부츠 농장들, 호화스러우면서도 매력 넘치는 나이트 클럽, 건강과 미용에 뛰어난 효능을 지닌 온천과 사해 주변 휴양 레져시설들, 그밖에 4,000년 역사가 숨쉬고 있는 지역특유의 골동품 시장들도 이스라엘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해안을 떠나 차를 타고 몇 시간만 달려나가면 눈 덮힌 산과 푸른 숲이 나타나고, 광활한 벌판과 사막이 펼쳐진다. 밤에는 환상적인 달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순례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자그마한 땅 이스라엘은 너무나 많은 비밀과 역사가 숨쉬고 있으며 풍부하고 다양한 대비와 대조가 신비하게 어우러져 있어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환희를 배우고 느끼게 해주는 그런 나라이다.
지리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교차로에 있는 남북으로 좁고 긴 작은 나라로서, 동경 34도48분에서 35도36분과 북위 29도33분에서 33도10분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레바논, 동북쪽에는 시리아, 동쪽에 요르단, 남서쪽에 이집트, 그리고 서쪽에는 지중해가 접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면적은 골란고원을 포함했을 경우 약 21,946제곱킬로미터로 우리나라 남한 면적의 약 4.5분의 1에 해당하며 최북단에 위치한 해발 2,224m의 헤르몬산에서 남부의 네게브 및 아라바사막을 거쳐 최남단 홍해까지 약 450Km이고 폭은 가장 넓은 곳이 약 130Km입니다.
안평야 지중해 연안을 따라 텔아비브와 하이파로 연결되는 지역으로서 사론평야로 불려지기도 합니다. 이곳에는 이스라엘 인구의 반 이상이 살고 있는 곳으로 악고, 하이파, 텔아비브, 가이사리아 등의 주요도시와 항구가 자리하고 있어 각종 산업체와 농업.관광시설들이 몰려 있습니다. 동부계곡지대 이스라엘 동부 요르단 강의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와 홍해까지의 남북으로 긴 계곡지대로서, 북쪽 지역은 아주 비옥하고 남쪽지역은 반건조한 지역입니다. 주요도시로는 벳산, 여리고, 엘랏 등이 있으며 농업, 어업, 경공업, 관광업이 이 지역 주민들의 주된 수입원입니다. 중앙산악지대 갈릴리 지역의 산악지대와 사마리아 및 유대 산악지대로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연결되는 황량한 광야와 사막이 펼쳐지는 곳이며 예루살렘, 베들레헴, 헤브론, 세겜 등 성경의 중요한 도시들이 있습니다.
두드러진 지리적 특성은 터키(Turkey)에서 연결되어 이스라엘을 지나 아프리카까지 뻗은 리프트밸리(Rift Valley)로, 요단강(the Jordan), 아라바(Arava)와 훌라(Hula)계곡, 갈릴리 호수 그리고 사해(Dead Sea)가 이 리프트 밸리에 속한다. 강이 많지 않아(요단강이 유일한 주요 강임) 습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북쪽지역에서만 농업을 한다. 나라의 주요 물공급원인 사해는 지구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엄청나게 짜다. 사해 왼편으로 유대사막(the Judean Desert)이 있고, 더 남쪽으로 가면 네게브사막(the Negev)이 있다. 지리적 특성상 이스라엘은 네지역으로 나뉘어지는데, 이로 인해 이곳에서 풍부한 야생동식물들을 접할 수 있다. 북부 이스라엘은 습한 산악지대로, 월계수림과 수달의 서식처이다. 남부는 사막지대이며 야생튤립, 붓꽃, 대추야자나무를 볼 수 있다. 또한 남,북반구가 교차하는 이 곳은 세계 각 처에서, 각종의 철새들이 날아드는 두 번째로 큰 이동로이다.
이스라엘의 5분의 1은 국립공원으로 -300여개 정도-, 이 곳에는 성서시대 이후 멸종된 많은 동식물종이 다시 서식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사람들은 사막이 이들의 생태계 공원으로 바뀐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 한다. 국립공원과 환경문제에 대한 정보는 이스라엘의 '자연보호협회(Society for the Protection of Nature)'로 연락. 이스라엘의 기후를 꼭 집어 말하기는 힘들다. 예루살렘에선 눈이 오는가 하면 사해근처는 섭씨 23도로 화창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은 온화하고 여름과 겨울, 2개의 계절로 구분된다. 11월에서 3월까지의 겨울은 상당히 춥고, 북부는 매우 습하다. 여름은 바다쪽은 상당히 뜨겁지만(에일랏은 섭씨 40도까지 올라간다.) 사막지대는 밤에 꽤 춥다. 봄에는 강풍이 불어 기온이 많이 올라간다.
역사
이스라엘은 역사상 부유한 나라는 아니다. 이멜다 마르코스와 같은 근거없는 부자라고나 할까. 다분히 문학적이고, 왕족의 이름이 가득히 장식된, 평화의 순간이 거의 없었던, 이스라엘의 역사는 현재까지 깊게 괸여하고 있다. 천년 전 갈등이 현재의 사건으로 연결되는 이 나라에서 역사는 과거의 사건이 아닌 현실이다. 이 모든 것은 아브라함이 유목민을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에서 이끌고 와, 가나안(Canaan)산에 정착시킨 기원전 1800년부터 시작되었다. 기원전 1023년 사울(Saul)과 그 뒤를 이은 다윗이 왕국을 형성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해 수도로 정했다. 기원전950년 경,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인 예루살렘 제일사원(First Temple of judaism Jerusalem)을 세웠다.
사원은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의 침략으로 파괴되었지만, 결국 재건되었다. 막강한 로마제국이 기원전 63년에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헤롯(Herod)과 성 빌라도를 포함한 총독의 지배 아래 놓였다. 이때가 예수가 살아서 이스라엘에서 설교했다고 알려진 시기이다. 칼리굴라(Caligula)의 지배 하에, 제국의 광기가 날이 갈수록 더해서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4년동안 계속됐지만 사원이 다시 파괴되었을 때 마침내 패배했다. 2차 반란 후 예루살렘이 파괴되어, 신도시 알리아 캐피톨리나(Aelia Capitolina)가 그 폐허에 건설되었고, 팔레스타인의 영토로 정해졌다. 이 패배는 유대 영토의 종말이자, 유대인들이 뿔뿔이 흩어진 디아스포라(Diaspora)의 시작으로 기록되었다. 331년 콘스탄티누스대제는 기독교인이 되어, 이전까지 불법이었던 종교를 승인했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성지에 대해 알고 싶어했고, 성묘교회(Holy Sepulchre)와 탄생교회(Nativity)같이 많은 건물들이 종교적으로 중요한 장소를 나타내기 위해 이스라엘 전역에 세워졌다. 하지만 나라에 퍼졌던 기독교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638년 예루살렘이 칼리프 오마(Caliph Omar)에게 넘어가서, 마호멧(Prophet Mohammed)의 성전산(Temple Mount)승천을 근거로 이곳을 이슬람의 성지로 선언했다.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이 신성모독에 격분하여, 1099년까지 군대를 합쳐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눈에 띄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거의 100년동안의 기독교 지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1187년까지 수십년동안의 기독교/이슬람교도의 난투 끝에 이슬람교도들은 다시 우위에 놓이고, 이슬람무사들이 1291년에 최후의 십자군 성채를 함락시켰다. 이후 500년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조용했던 시기이다. 제국이 세워지고, 무너지고, 나라의 지배권이 단조롭게 변해가는 중 약간의 분쟁이 이스라엘 땅에서 있었지만 - 전쟁이 일상화된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아주 평화로운 시기였다. 유일한 변동이 16세기에 있었는데, 오토만제국이 지배하고 대술만이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한 것이다. 19세기 중반 오토만제국이 지배권을 잃고, 세계의 이목이 다시한번 이스라엘에 집중되었다. 영국이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열고, 1839년 영국계 유대인 모세 몬테피오르(Moses Montefiore)경이 유대국가에 대한 개념을 정립해, 1878년 최초의 유대식민지가 세워졌다. 그 훨씬 이전에 최초의 앨리야(Aliyah)를 비롯한 이민자들의 물결이 시작되었고, 이와 동시에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민족주의적이고 반유럽적인 성향이 강화되었다. 1차세계대전 때 영국은, 아랍인들에게는 아랍 영토를 인정해 준다고 약속하고, 유대인들에게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 국가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이스라엘 통치에 깊이 관여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은, 이 나라의 통치국으로 지정되어, 유럽이 2차대전으로 옮겨갈 때 영국은 이스라엘로의 모든 이민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필사적인 불법이민자들이 계속해서 도착했고, 아랍인들의 폭력행사도 계속 증가추세였다. 1947년 영국이 지쳐갈 무렵 그들은 나라를 아랍과 유대지구 둘로 나누는 것으로 결정하고 1948년 5월 14일 물러났다.
거의 곧바로 분쟁이 터져 1949년 휴전이 선언되었을 때 이스라엘군은 대부분의 팔레스타인을 손에 넣었다. 이주를 원하는 유대인은 누구에게나 시민권이 주어졌고, 이스라엘인들은 가장 황폐한 지역까지도 자리를 잡고 구석구석 개척하기 시작했다. 우호적이지 않은 아랍국가들에 둘러싸여, 새로운 이스라엘은 금방 공격을 당하게 됐다. 1967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그 뒤 요르단, 시리아와 전쟁을 치뤘다. 6일 후 이스라엘인들이 승리했고 영토를 골란고원, 웨스트뱅크, 가자지구와 시나이사막까지 확장했다. 이스라엘의 터프한 출발은 유대인 이민자들을 다시 불러들였고, 그 동안 500,000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땅을 나가게 만들었다. 계속 머물어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들의 고국을 되찾을 목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결성했다. 그러는 동안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수년의 PLO활동이 국제적 비난 정도였지만, 1987년 유명한 팔레스타인 폭동인 이니파다(Inifada)가 일어나, 상황은 역전되었다. 무력한 아랍어린이들을 쏘는 이스라엘군인들이 텔레비젼에 방영되 팔레스타인의 주장이 힘을 얻었고, 그들의 조국을 되찾는 것에 대한 세계의 호응이 커졌다. 1991년 이스라엘대표단은 팔레스타인쪽과 만났고, 결국 PLO 대표인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와 이스라엘 수상 라빈(Rabin)이 백악관 잔디밭에서 악수를 하고, 평화를 위한 협력에 동의했다. 그러나 당연히 이 협력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 가자지구과 웨스트뱅크 일부가 팔레스타인 자치로 주어지고, 팔레스타인 선거가 열렸지만 1995년 라빈이 암살당했다. 그의 오른팔이었던 벤야민 네타냐후(Binyamin Netanyahu)는 평화에 대해 열성적이 아니었고, 그의 집권기 동안 증가하는 이스라엘인 정착과 테러리스트들의 보복이 이 나라를 벼랑으로 몰고갔다. 1999년 에후드 바락(Ehud Barak)의 선거에서 이스라엘은 한번 더 평화를 수용하는데 기회를 걸었다.
≪ BC이전 역사 개요
bc1900년경-메소포타미아에 살고있던 유대인의 선조 아브라함이 가나안인이 사는 팔레스타인에 이주해 정착하였다. 신이 그들에게 주는 약속의땅이라 믿고 있다. bc세기-모세의 인도로 노예생활을 하던 이집트를 탈출하였다. bc1000년경-왕정시대. 사울 다윗 솔로몬왕 통치시대에 전성기를 이루며 솔로몬왕 시대에 유대인의 정신적 지주인 성전이 첫번째로 세워졌다. BC 930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BC 722-720 아시리아에 의해 이스라엘 왕국 멸망하였다. BC 586 유다 왕국, 바빌로니아에게 정복됨. 유태인,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바빌론 유수) BC 538-333 페르시아가 지배하였다. BC 332-142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하였다. 그리스의 지배하에 있었다. BC 142-63 하스모니아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다. BC 63- AD 313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313-636 비잔틴 지배받았다. 636-1099 아랍 지배받았다. 1099-1291 십자군의 통치 : 라틴계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다. 1291-1516 맘루크 지배받았다. 1517-1917 오스만 제국 지배를 받았다. 1897 테오도어 헤르츨,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온주의자 회의 개최 : 시온주의 협회의 초석이 되었다.
≪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1917 영국, 오스만 제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종식시킴. 영국, 발포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태인의 민족적 조국 건설을 지원"한다고 약속하였다. 1918-1948 영국의 통치받았다. 1939-1945 제 2차 세계 대전 : 유럽에서 유태인에 대한 대학살(Hulocaust)이 있었다. 1947.11. 국제연합, 팔레스타인에 아랍. 유태의 개별 국가를 건설 및 예루살렘의 국제연합관리 결의 채택하였다. 1948 영국의 통치 종료(5월 14일) , 이스라엘 건국 선포(5월 14일) , 아랍 5개국의 이스라엘 침공(5월 15일) , 독립 전쟁(1948년 5월~1949년 7월) , 이스라엘 방위군 조직하였다. 1949 이집트.요르단.시리아.레바논(이라크는 제외)과 휴전 협정 조인. 초대 크네세트(의회) 선출 , 이스라엘, 국제연합의 59번째 회원국 가입하였다. 1956. 시나이 전쟁이 일어났다. 1967. 6일 전쟁이 발생하였다. 1967.11. 유엔 안보리,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 및 교전상태 종결 결의되었다.(242호) 1973.10. 욤키푸르전쟁(10월 전쟁)일어났다. 1973.10. 유엔 안보리, 안보리 결의 242호 이행촉구 결의(338호)되었다. 1978. 9. Camp David 협정 서명하였다.
1979. 3. 이스라엘-이집트 평화협정 체결하였다. 1980. 7. 이스라엘, 동예루살렘 합병되었다, 1981. 이스라엘 공군기가 이라크 원자로 폭파하였다. 1982. 4. 이스라엘군, 시나이반도 철군 완료되었다. 1982. 6. 이스라엘군, 레바논에 진입하였다.1991.10. 마드리드 중동평화회의 개최하였다. 1992. 6. 노동당 정부 출범하였다. 1993. 9. 팔레스타인 자치이행에 관한 원칙선언(Oslo I)했다. 1994.10. 이스라엘.요르단 평화협정 체결하였다. 1995. 9.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잠정자치협정(Oslo II)하였다. 1996. 1. 팔레스타인 자치선거(자치정부 및 자치의회 출범)를 행했다. 1996. 6. 리쿠드당 집권, 네탄야후총리 취임하였다. 1997. 1. Hebron 철수 의정서 서명하였다. 1998. 10. Wye 의정서 서명하였다. 1999. 1. 의회 해산 및 조기총선 법안 통과하였다. 1999. 5. 주재국 총선, 노동당 Barak 당수 총리 당선되었다. 1999. 7. One Israel(노동당연합) 중심 연정구성, Barak 총리 취임하였다. 1999.9. Sharm el-Sheikh 합의서 서명하였다. 1999.12. 이.시리아 협상 재개하게 되었다. 2000.3. Clinton-Assad간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이.시리아 협상 교착상태에 있게 되었다.
≪ 이스라엘 독립전쟁역사
■1948년 독립전쟁
1948년 영국의 신탁통치가 종료됨에 따라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국가를 선포했으며 바로 아랍 5개국(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이 5월 15일에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독립전쟁이 시작된다(1948년 5월-1949년 7월). 이 전쟁에서 결국 굴복하리라 예상했던 이스라엘이 기대 밖의 선전을 함으로 1949년 아랍국가들은 휴전협정을 맺는다.
■1956년 시나이전쟁
1956년 7월 26일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운하를 봉쇄하여 이스라엘 선박의 운하 통과를 금지했다. 그럼으로써 중동에 다시 전쟁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연합군(영국,프랑스군)과 더불어 이집트를 공격하는데 6일만에 지중해 연안을 석권하고 시나이 반도를 횡단하여 홍해와 아카바 만을 향해 진격한다. 11월 5일 이스라엘 군이 홍해연안의 샴 엘-세이크(Sharm el-Sheikh)를 점령함으로써 시나이반도는 완전히 이스라엘의 수중에 떨어진다(이 엘-세이크는 요즈음 평화협상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1월 7일 유엔은 이스라엘에게 점령지구를 포기하고 독립전쟁 당시의 국경선으로 즉각 물러나라고 요구, 11월 14일 이스라엘 의회는 시나이 반도에서의 철군에 동의하고, 1957년 1월 22일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반도에서 완전 철수한다. 그러나 이 전쟁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국방력을 대내외적으로 한층 높여준 결과가 되었다.
■1967년 6일전쟁
1967년 6일전쟁은 세계전쟁사에 길이 남을 만한 전쟁이고 이스라엘에게는 잊지 못할 전쟁이다. 6일전쟁시 이스라엘군의 병력은 아랍연합군의 병력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5,404의 탱크에 겨우 800대의 탱크로, 900대의 전투기에 200대의 전투기로 대항하는 역부족의 싸움이었으나 6일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전쟁은 끝이 났고, 이때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구시가를 탈환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가자 지구, 시나이 반도, 골란 고원, 지금의 요르단 강 서안 지역을 점령하게 되며 이때 이스라엘의 영토는 이전에 비해 무려 3배 가까이 늘어나게 되었다.
■1973년 욤키퍼전쟁(10월전쟁)
1973년 10월 이집트와 시리아가 6일전쟁시 잃어 버렸던 영토를 다시 되찾으려고 욤키퍼(속죄일)에 기습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함. 이스라엘은 무방비 상태에서 아랍연합군에 대항하여 끝까지 투항하였고 힘겨운 100 시간여를 버텼고, 그 후 이스라엘 지원군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오히려 전세가 역전되어 결국은 이스라엘이 이 전쟁에서도 승리를 하였다. 이 전쟁에서 이집트와 시리아는 소련(USSR)으로부터 무기원조를 사실상 받았으며 재정적 지원은 쿠웨이트와 사우디 아라비아가 했다. 또한 아랍 산유국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을 돕는 서방에 대해 원유수출을 제한하기도 했었다. 유엔도 안보리가 결의한 242호(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 및 교전 상태 종결)의 이행을 촉구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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