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초등학생과 청년, 노회한 정치가가 한 말이다. 똑같은 인사말인데도 학력이 높을수록, 세상경험이 많을수록 말을 어렵게 부린다. 사람들은 법규와 약관을 이해하기 위해 돈을 들인다. 아니, 돈을 드린다. 거리에 나가 교양 있어 보이는 사람들한테 금치산자와 한정 치산자를 물어보면 과연 제대로 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석유 1배럴은 몇 리터이며 금 1온스는 몇 그람인가? 오늘도 골프공은 ‘야드’로만 날아가고 법을 만들어 미터법을 강제하는 위정자들은 ‘원형지 3.3제곱미터 당 암만’이라 말하고 있다. 3.3제곱미터가 바로 한 평이니 ‘눈 가리고 아웅’이 따로 없다. ‘원형지’도 거슬린다. 세월만 흘러갈 뿐 ‘말의 민주화’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맴을 돈다.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리면 어떤 소리가 날까? ‘꾀꼬리 같이 아름다운 목소리’라 하기에 꾀꼬리 노랫소리를 들어보았느냐고 했더니 꾀꼬리가 황조(黃鳥)인 줄도 모르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천사의 음성 같았으며 그의 얼굴은 바로 천사의 모습이었다고 하기에 꿈속에서라도 천사를 만난 적이 있었는지, 천사란 과연 그런 존재인지 물으니 묵묵부답이다.
“6․25전쟁 때 북한군 탱크가 지나가는 소리 같았어요.”
열서너 살 되어 보이는 소녀가 한 말이다. 아이티 지진참사 현장을 목격한 기자들의 일성은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그들은 책에 기록된 아비지옥과 규환지옥을 떠올렸을까. 부디 간접경험이라도 꺼내서 말을 하고 글을 쓰면 좋겠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을 속이고 독자를 속이면 끝장이다.
김장을 담았다거나 담궜다고 하는 사람더러 무식하다 핀잔을 하면서 정작 자신은 ‘김장 담그기’가 바르다며 우쭐거린다. 겨우내 먹기 위하여 김치를 한꺼번에 많이 담그는 일이 ‘김장’이고 또 그렇게 담근 김치를 가리켜 ‘김장’이라 하니 어느 경우에도 ‘김장 담그기’는 옳지 않다. ‘역전 앞’을 비웃는 사람이 ‘맡은 바 소임(所任)’을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폭설 피해방지에 대한 대책’을 강조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귀에 못이 박히고 발바닥에 못이 박히면 어찌 될까. 쌀을 익혀 삭히면 식혜도 되고 막걸리도 되지만, 분(憤)을 삭히면 가루(粉)가 되고 기침을 삭히면 하품이 되는지 궁금하다. 고기를 썩히면 먹을 수 없게 되고 일감이 없어 기계를 썩히면 녹이 스는데 자식이 속을 썩히면 그 속은 어떻게 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글을 쓴다하는 이들도 이런 잘못을 되풀이한다.
좋아하고 슬퍼하고 미워하면 그만인데 굳이 좋아해하고 슬퍼해하고 미워해하면서 그게 더 지적이며 고상한 표현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우리 집에 들린다더니 그냥 갔느냐는 배우의 대사는 정확했을 터이니 작가를 나무랄 밖에 도리가 없다.
햇빛이 들자 장미꽃이 눈부시게 빛나는데도 빚이 많은 그는 걱정이 태산이라는 말을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끝내 핻삐시 들고, 장미꼬시 눈부시고, 비시 많아 걱정이라고 우긴다. 다들 ‘구개음화(입천장소리되기)’엔 빠삭하건만 막상 ‘바틀(밭을)’이라 발음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안절부절못해야 될 터인데 안절부절 했었다니 말문이 막힌다. ‘살해’와 ‘피살’을 모르는 사람이 있으랴만 죽은 한 사람을 두고 살해당한 자라하고 피살당한 자라고도 하니 어안이 벙벙하다. 우리 국어생활의 현실이다. 내로라하는 우리말 실력자들 가운데 ‘시옷(ㅅ)’을 ‘시읏’이라 말하는 이가 적지 않다. 더구나 텔레비전 방송에 나와 사회자와 나누는 대화는 대체로 국어의 생활화와 동떨어져있다. ‘화이팅’은 다반사요, 문제를 내면 ‘틀리다’와 ‘다르다’를 잘 구별하면서도 오가는 대화에선 딴판이다. 담배를 피면 건강에 해로운지, 피우면 해로운지 헷갈리니 금연하기도 쉽지 않은가 보다. 어느 월간 문학지를 훑어보았더니 오탈자와 맥이 통하지 않는 문장들이 가히 ‘자갈밭’이다.
한때 순 우리말을 살려 쓰자며 오래된 무덤을 파헤쳐 미르와 즈믄의 미라를 꺼내오더니 백골마저 진토가 되어버린 옛말들을 닥치는 대로 그러모아선 살려 쓰자 떼를 쓴다. 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명멸하는 생명체일진대 영정사진이 곱다하여 무턱대고 관 뚜껑을 열어서는 안 된다. 숨이 붙어있어 회생 가능한 토박이말을 살려낼 노릇이지 죽은 아이 고추를 만지고 있어선 곤란하다. 부관참시일 뿐이다.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일정한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다는 뜻으로 쓰이는 부사가 ‘너무’이니 자신의 의지나 통제를 벗어난 경우에 써야한다. 너무 춥다거나 너무 먹었다고 하면 자연스럽지만 자신이 의도적으로 하는 행위를 수식하는 데에 쓰면 말이 되지 않는다. 연말이면 방송가에는 으레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타령이 차고 넘친다. ‘너무너무 고맙습니다.’하면 어디에 덧이 나는가 보다. ‘엣지있게’라는 되잖은 신조어를 남발하기에 앞서 다들 우리말의 기초부터 다졌으면 좋겠다. ‘행가래’는 용서가 되나 달력을 ‘calender'라 쓰면 무식쟁이가 되어버리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첫댓글 이희순 선생님! 이번 수필계 봄호에서 밑줄 그어가며 재미있게 읽은 글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너무너무 감사하다는 인사는 드리지않겠습니다.)
이런 글을 대하면 주눅이 듭니다.
뭔가 잘못하고서 어른 앞에 무릎 끓고 앉아 야단을 맞는 것같은 생각이 많이 들기도 하구요.
갈수록 모르는 것은 더 많다는 것을 깨닫기는 하는데 그것들을 넘어가는 길의 실행은 어렵기만 합니다.
주눅이 들기는 저도 마찬가집니다. ^^
예상했던 대로 '역전앞'이라고 제대로 쓰여있는 원문을 보고 미소지었습니다. 수필계책자에서 '역 앞'이라고 인쇄되어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지요. 제대로 된 표기인 '역앞'이 왜 비웃음을 당할 까 하면서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책자에는 위의 세 문장이 생략되어있네요. 그래서 책을 읽으며 서두에서 한참 당황했습니다. 무슨 말이지? 하면서......
기러기 삼형제가 그만 날아갔답니다^^
아, 기러기 삼형제가 순천만 갈대밭 사이로 날아갔군요^^
쪽지 보냈습니다.
시종여일님 너무너무 반갑습니다.(이크, 이것도 잘못된 말인갑다.) 여인 천하 카페에서 내시처럼 호호 웃다가 님을 뵈오니 힘이 좀 납니다. 자주 오시어 좋은 카페 분위기 맹글어 주시기 바랍니다.(어, 이말도 혼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