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밤과 낮>이 베를린영화제와 서울에서 같은 날 공개됐다. 짧은 일탈과 귀여운 욕망, 헛헛한 연애의 끝을 보여주는 홍상수식 화법은 이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홍상수 영화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친숙한 것과 낯선 것, 다양한 층위로 읽힐 수 있는 요소들이 무궁무진하게 들어 있는 <밤과 낮>을 영화평론가 이상용이 읽는다.
홍상수 감독의 여덟 번째 영화 <밤과 낮>은 아주 명료한 제목을 달고 있다. 자막으로 시작하는 내용은 단순하다. 화가 김성남(김영호)은 2007년 우연한 기회에 대마초를 피우고, 일행 중 하나가 경찰에 붙잡히자 무작정 파리로 도주한다. 영화는 김성남이 파리에 도착한 후 공항을 나와 담배 한 대를 피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추레한 프랑스인(걸인으로 보인다)이 다가와 담뱃불을 빌린 후 그에게 영어로 “당신 조심하라”고 충고한다. 그가 조심하라고 경고한 이유는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도 알 수가 없다.
김성남이 공항에 도착한 날은 8월 8일이다. <밤과 낮>은 김성남이 파리에 머물다가 서울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날짜를 세어가며 일기처럼 기록하고 있다. 어떤 날은 건너뛰기도 하고, 어떤 날은 아주 길게 묘사되는가 하면, 어떤 날은 짧은 장면 하나로 넘어간다. 모든 기록의 중심에는 김성남이 있다. 그런데 ‘밤과 낮’이라는 제목과 달리 영화는 숱한 낮 장면을 보여줄 뿐 대수로운 밤 장면은 없다. 화려한 파리의 야경은 볼 수 없다. 밤 시간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장면은 민박집에 앉아 전화통을 붙들고 한국에 있는 아내 성인(황수정)과 통화를 하는 게 대부분이다. 성남은 한국에 있는 아내와 1시에 통화하기로 약속한다. 성남이 말하는 1시가 한국의 새벽 시간인지 파리의 시간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겠다. 다만 성남이 전화를 할 때 민박집의 불은 꺼져 있고, 주변은 고요하다.
<밤과 낮>의 밤은 아내와의 은밀한 대화 시간이다. 9월 4일의 통화에는 성욕을 견디다 못한 성남이 아내에게 자위를 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아내는 호들갑스럽게 웃으며 “손 씻고 금방 올게”라고 답한다. 장면은 여기에서 끝난다. 이는 9월 6일 성남의 꿈 장면으로 곧장 이어진다. 성남은 민박집 아저씨의 소개로 만난 유학생 현주(서민정)와 그녀의 동거인인 유정(박은혜)을 알게 되고, 점점 유정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다. 9월 6일에는 성남이 유정의 발을 애무하다 들통이 난다. 유정의 호통이 시작되고, 잠시 후 하루 종일 여자 꿈만 꾸었다는 성남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비로소 이 장면이 성남의 꿈임을 알게 된다.
9월 4일 통화와 9월 6일 꿈을 통해 밤과 꿈이 성남의 욕망과 관련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내와 통화를 하는 밤 시간은 성욕을 토로하는 시간만은 아니다. 그것은 성남이 떨쳐버릴 수 없는 현실의 시간이자 언젠가 돌아가야 하는 귀향을 예고한다. 마녀의 마법에 걸린 오디세우스가 끝없이 고향 이타카를 생각하는 것처럼 파리의 밤은 성남이 돌아갈 곳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생각해보면, 홍상수 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은 우유부단하면서도 소심한, 엇비슷한 지식인 형의 인물로 생각돼왔다. 그들의 복잡한 사생활이 이야기의 얼개지만, 유부남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전면에 나서는 경우는 두 번째라고 할 수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에서 여주인공인 유부녀 보경이 소설가 효섭과 사귀었고, <생활의 발견>(2002)의 추상미는 유부녀였으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는 과거의 연인들이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만나 합류했다. 홍상수 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은 대부분 집을 떠나와서도 굳이 돌아갈 강박관념을 느끼는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가족이나 아내의 그림자가 슬쩍 지워져 있다. 유부남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첫 번째 영화는 <강원도의 힘>(1998)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집으로의 귀환은 강력하게 전제되지는 않는다(보다 중요한 차이에 대해서는 글의 맨 마지막에서 언급된다).
<밤과 낮>은 뚜렷하게 돌아갈 곳을 상정한다. 파리에서 도망자 생활을 하는 성남은 법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언제든지 돌아갈 태세를 취하고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아내의 거짓말이 통할 수 있는 것도 성남이 유부남이라는 사실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생활의 발견>이나 <해변의 여인>(2006)처럼 그들은 유원지에서 멈춰 선 채 영화를 끝냈을 것이다. 아니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처럼 엉뚱하게 미끄러져 여인숙에서 황급히 나오면서 끝을 맺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친숙한 것들
<밤과 낮>의 두 번째 꿈 장면은 한국으로 돌아와서 제시된다. 아내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던 성남은 다른 여자와 함께 사는 꿈을 꾼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를 통해 가장 불가해하다. 꿈속의 아내는 파리에서 본 적이 있는 지혜(정지혜)라는 인물이다. 그녀는 미술학도였던 유정의 문제를 성남에게 알려주었던 여자다. 왜 하필이면 성남은 그녀를 아내로 꿈꾸었을까. 외출을 준비하는 지혜가 목욕탕에 갔을 때 창문을 두드리는 돼지의 모습도 불가해하기는 마찬가지다. 농담처럼 말하자면, 성남의 꿈은 돼지꿈인 셈이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난 성남을 향해 아내 성인은 왜 자면서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냐며 따진다. 수상하다는 아내의 말에 성남은 그저 꿈이라고 변명한다. 아내는 “그런 건 꿈이 아니야”라고 분노를 터뜨린다. 아내의 말대로 그건 꿈이 아니다. 파리에서 성남은 유정을 따라다녔다. 하지만 지혜에게 사랑을 고백한 것은 아니었다. 아내의 의심은 맞지만, 성남의 꿈은 명확한 사실 관계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 장면을 보면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보경이 꾼 꿈이 떠올랐다. 효섭을 만나기로 한 보경은 연락이 닿지 않자 친구가 운영하는 약국에서 잠시 몸을 쉬다가 잠에 빠져든다. 흥미롭게도 그것은 보경의 장례식 꿈이다. 남편이 상주 역할을 하고 있고, 효섭과 그를 따라다니는 민재가 함께 식장을 찾아왔다. 그런데 따로 마련된 장례식장이 아니라 일상적인 가정집에서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두 꿈은 닮은 구석이 있다. 꿈속에서 성남은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현실의 아내인 성인을 찾아가보자고 지혜에게 말을 건넨다. 지혜는 어렵게 동의를 표시한다. 그것은 아내와 성남 사이의 비밀과 미묘한 간극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이다. 사실, 꿈속에서 펼쳐지는 기묘한 상황들은 깨어난 후에도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프로이트의 표현처럼 꿈이 인간의 무의식 저편이라면, 그것이 욕망의 밑바닥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방향은 항상 알 수 없고 불가해하다. 사무엘 베케트의 언어를 빌리자면,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이며 “왔다 갔다”하며 내가 하는 말들은 “내가 아니다”. 공교롭게도 끝없이 미끄러지는 이러한 상황은 베케트의 희곡이나 소설에서 웃음을 만들어낸다. 슬랩스틱 코미디와 무성 코미디 영화를 좋아했던 베케트는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유머를 놓치지 않았다.
<밤과 낮>에도 부조리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오는 웃음이 있다. 가령 위에서 언급한 돼지의 느닷없는 등장 같은 것이 웃음을 준다. 어딘지 낯설고, 이물감이 느껴지며,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의 그물을 빠져나갈 때 주는 묘한 쾌감이 존재한다. 그것이 쓴웃음이든, 공감의 웃음이든 웃음은 자연스럽게 관객들을 공모자로, 홍상수 영화의 동조자로 만든다. 베케트의 작품이 그러한 것처럼 이러한 태도는 인간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질문에서 비롯된다. 결국 예술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반복되는 답변이며, 집요한 탐구인 것이다.
그 어느 영화보다 <밤과 낮>을 보며 사무엘 베케트에 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베케트의 이야기들이 끝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관한 것이라면, 홍상수의 영화에서도 기다림은 아주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밤과 낮>에서 성남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파리에서 기다리고 있고, 유정을 유혹하기 위해 그녀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으며, 화가의 자의식으로 오르세 미술관을 비롯하여 파리의 도시를 배회하고 있다. 이 집요한 기다림은 홍상수의 카메라가 서울에 있든, 파리에 있든, 런던에 있든 달라지지 않는다. 기다리는 과정 속에서 인물들은 끝없는 유혹과 불만에 시달린다.
가령 현주와 유정과 함께 첫 식사를 하면서 성남은 이 맛없는 음식에 150유로나 써야 하는 것에 짜증내고, 굴을 먹는 파리의 시민들을 보며 굴을 먹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것은 유정과 자고 싶은 욕망으로 곧장 이어진다. 술이 또한 빠질 수는 없다. 소주 대신 와인이 자주 등장하지만, 유정과 함께 낮술을 한 성남은 파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하루를 보낸다. 그것은 홍상수가 공간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감독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질 탐구에 있어서는 일관적인 예술가임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증식하는 영화
영화 초반부에 김성남이 파리에서 처음으로 만난 여자는 과거에 사귀었던 민선(김유진)이라는 인물이다. 프랑스인과 결혼해 파리에 살고 있는 민선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성남을 향해 한마디 던진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니.” 민선의 뼈 있는 대사는 <극장전>(2005)의 마지막 장면에서 동수의 말을 떠올리도록 만든다. “생각하자, 또 생각하자.” 생각하며 살기를 바라던 홍상수의 남자 주인공은 이국땅인 파리에 와서 만난 오래전 연인에게 생각 없이 산다는 핀잔을 듣는다.
그것은 홍상수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질타였을까. 아니면 그저 웃어보자는 것이었을까. 아무래도 전자 같은 기분이 든다. 생각하며 살기로 결심했지만 삶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어느새 생각하자를 되뇌던 인물은 생각 없어 보이는 인물로 뒤바뀌어 있고, 여배우를 쫓아 서울 시내를 헤매었던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은 어느덧 파리에서 미술학도를 쫓아 헤매고 있다.
홍상수 영화는 작품 안에서도 그렇지만 전작들과의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진동한다. 이전과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들여다보면 그다지 바뀐 것이 없는 것 같은 태도는 홍상수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흔히 ‘차이와 반복’으로 이야기되는 홍상수의 세계는 점점 더 자신의 영화들을 쌓아올리며 하나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 홍상수의 세계는 조금씩 부서지면서, 조금씩 완성된다. 과거의 인물들과 사건을 따라가는가 하면, 어느새 뒤집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간다. 이 끝없는 과정 속에 <밤과 낮>은 놓여 있다.
전작들을 통해 아주 친숙한 장면이 프랑스 북부의 도빌 해협으로 두 번 여행을 가는 대목이다. 한 번은 현주와 유정과 함께 렌터카를 이용해 간 여행이고, 다른 한 번은 유정과 단둘이 간 것이다. <강원도의 힘>, <생활의 발견>, <해변의 여인>에서 익히 보아온 반복되는 상황들은 미묘하게 어긋나면서 두 번의 여정을 따라가게 만든다. 첫 여행에서 성남은 여권이 없어 도박장에 들어가지 못했고, 세 사람은 다툼을 벌이다 굴을 먹지 못했다. 그러나 두 번째 여행에서 성남은 도박장에서 800유로가 넘는 돈을 따고, 유정과 굴을 먹고 섹스를 한다. 이러한 홍상수 영화의 태도를 두고 ‘일상의 반복’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 그것은 일상이 매번 엇비슷하게 반복되기 마련이며, 인간은 그 안에서 권태를 느끼기 마련이고, 그 일상의 지루함을 홍상수 영화가 집요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반복되는 도빌 여행은 홍상수에게 일상의 권태를 제공하기보다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자기 부정성에 가깝다.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들은 한곳에 가만히 머물지 않는다. 서울 시내의 주변이라도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계속해 이동한다. 두 번째 간 도빌 해협은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사건과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고, 그들은 친숙한 행동을 반복하지만 달라진 결과를 보여주면서 성남에게 도빌의 의미를 다른 것으로 바꿔버린다.
부정을 통해 새로운 것을 취하는 것이야말로 홍상수 영화가 기다리는 과정 속에서 반복을 취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부정과 반복의 방식들은 이야기가 결말에 다다르는 것을 지연시키고, 남녀 사이의 줄다리기를 통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성남의 욕망은 온통 유정에게 쏠려 있으며, 두 사람 사이에 분명 어떤 일들이 일어날 거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이 기대감이야말로 홍상수 영화의 에로티시즘이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성남의 행위는 집요하면서도 반복적이다.
9월 21일에 성남은 카페에 있는 유정에게 다가가 “꼬맹이”라 부르며 반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때부터 새로운 진전을 얻는다. 무작정 유정의 집 앞에서 얼쩡대는 태도를 벗어나 성남은 자신의 욕망을 과감하게 토로한다. 관계에 균열을 가하고, 그것을 통해 조금씩 진도를 나아가는 홍상수의 태도는 집요하다. 이러한 집요함은 성적 욕망을 통해 크게 부각되지만, 뒤집어놓고 보면 반복되는 부정과 승부의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의 과정을 모면하기 위한 남자들의 술책이자 승부의 게임인 것이다.
모방과 변형, 교감의 순간들
<밤과 낮>에는 낯선 것들도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아이의 등장이다. 유정과 처음으로 키스를 하는 날 창밖을 내다보는 성남의 눈에 유모차에 탄 아이의 존재가 들어온다. 음식점을 돌아다니며 취직을 위해 이력서를 넘겨준 날에도 할아버지와 손자로 보이는 아이가 지나간다. <밤과 낮>에서 ‘아이’는 중요하게 숨겨진 것이다. 성남은 끝없이 아이의 존재를 상기하고 있으며, 결국 아내의 거짓말에 모든 것을 정리한 채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한다.
<밤과 낮>이 아이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제시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의식적으로 그것을 염두에 둔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성남의 결단처럼 아이는 아버지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게 만들지 않는다. 이 점은 <강원도의 힘>과는 매우 다르다. <강원도의 힘>의 남자 주인공도 유부남이지만 아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밤과 낮>은 아이를 통해 성남을 결단하게 만든다. 아이의 미묘함은 레비나스 같은 철학자가 통찰한 바 있는 것이다. 아이는 나와 동일시되는 존재인 동시에 나와는 아주 다른 타자다. 이 미묘한 간극은 아버지를 결단하게 만든다.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이러한 표현을 쓴다. “출산은 나의 미래를 지시한다. 나의 이 미래는 동일자의 미래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나의 모험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매우 새로운 의미에서 나의 미래다.” 레비나스의 통찰을 <밤과 낮>에 돌려주면 성남이 아내의 말을 통해 유정과의 관계를 서둘러 정리하고 황급히 한국행을 택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홍상수의 영화가 달라질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더 이상 홍상수의 영화가 여자를 쫓는 모험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면서 새로운 모험의 가능성에 탐구를 시작할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사석에서 들었던 한 가지 이야기를 끝으로 하고 싶다. <밤과 낮>에는 오르세 미술관의 내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현주와 성남은 이곳에서 귀스타브 쿠르베의 미술작품을 감상한다. 두 사람이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은 여성의 음부를 클로즈업한 <세상의 기원>이라는 작품이다. 현주는 대화 중 ‘인류의 기원’이라는 말실수를 한다. <강원도의 힘>에 니콘과 나이콘의 언어유희와 말실수가 오가는 것처럼. 그리고 현주는 이 그림은 처음 본다는 말을 덧붙인다. 실제로 오르세 미술관에서 <세상의 기원>을 보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그만큼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는 그림이지만, 홍상수의 영화를 좋아하는 오르세 미술관장의 배려로 촬영이 가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석에서 홍상수 감독은 원래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성남의 대사 중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 그러나 오르세 미술관은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지 않다. 이유에 관한 말을 듣기는 했는데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려나 <밤과 낮>에는 <돌 깨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순간이 있다. 성남이 카페에 있는 유정을 만나려고 할 때 도로에서 공사를 하는 사람들을 좀 길게 잡은 장면이 등장한다. 홍상수 감독의 말에 의하면, 이 장면의 구도는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 구도를 고스란히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 확인 결과, 두 남자가 작업을 하고 있는 구도가 영락없는 쿠르베의 작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홍상수 영화의 회화적인 의미나 음악의 사용에 대해 이렇다 할 분석이 드물었다는 게 이상했다. 홍상수 감독의 말을 듣고 나니, 과거에 지나친 여러 작품들 속에서도 회화와 음악의 프레임을 염두에 둔 장면들이 적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은 서로를 모방하면서, 서로를 변형해가면서, 서로 다른 영역 속에서 조금씩 교감을 쌓는다. 홍상수의 영화가 언제나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교감의 순간들 때문이다. 과거 홍상수의 영화를 통해 교감의 기호들을 찾아가든, 현재의 감성으로 교감을 발견하든 그것은 보는 사람의 몫이다. 문제는 교감의 신경들이 예민해지면 예민해질수록 홍상수의 영화는 풍부한 이야깃거리와 상상력으로 우리의 의식을 뒤흔든다는 것이다.
<밤과 낮> 또한 그러한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베토벤의 음악 사용을 이야기하고, 파리의 뒷골목과 도버 해협을 떠올리고, 사무엘 베케트와 기독교에 대한 홍상수의 집요함에 웃음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는 쉽게 답변을 내리지 않고, 어느 순간 멈춰 서거나 다른 곳으로 달아나버린다. 그것은 연극에서 말하는 타블로(tableau)의 순간일 수도 있다. ‘타블로’는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이나 끝에 움직임이 액자 속의 그림처럼 정지된 순간을 의미한다. 아니나 다를까, <밤과 낮>의 마지막 숏은 꿈에서 깨어난 성남의 집에 걸린 거대한 구름을 타블로 하면서 끝이 난다. 베토벤의 음악과 함께, 반복되면서, 멈춰 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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