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희 교수의 글에는 성령에 의해서 주입되는 성화(imputation)는 강조되지만, 성령의 사역에 성도가 영성수련으로 동참하여 본성마저도 변화되는 성화(impartation)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논문에서 아예 선행의인화에 기초한 영성수련이나 영성신학은 필요없다고 단정한다. 그러한 영성신학이나 영성수련은 천주교회적 발상이라고 규정짓는다. 천주교 속에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과 거듭남을 체험하는 영적 각성운동이 더욱 일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거듭나지도 않았는데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듭난 개신교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는 영적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는 영성수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웨슬리의 속회의 목적도 단지 행정적인 조직이나 교인수만을 증가시키는 양적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화훈련이라는 질적 성숙을 도모하는 목회적이고 신앙적인 동기에 있었다. 모든 속도들은 자신의 영적 상태들을 간증형식으로 고백하고 나눔으로써 서로 권면하고, 돌보며, 격려하고, 위로하는 영적 책임의식을 가졌다. 이러한 성화의 책임의식과 연대의식인 ‘accountability’를 직고(直告)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속회를 통하여 소규모 단위의 성경공부, 기도회, 그리고 신앙적 담화를 위한 좋은 장이 마련되었다. 이 속회활동을 통하여 그들의 신앙이 파선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삶을 통해 움직이도록 하는 것, 또한 은혜를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랑의 선행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속도들이 속회공동체를 통해 공동의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강제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조하고, 서로 응답하며, 서로 격려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는 속회를 통한 공동체적 성화 생활을 강조한 반면에, 개인적, 수도원적, 신비주의적, 은둔적 성화 생활을 비판했다. 고독하고 은둔적인 종교를 만들려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웨슬리는 못박아 얘기한다.
▲웨슬리가 두번째로 만든 예배당.왼쪽에 보이는 대리석 기둥이 예배당 전체를 돌아가며 세워져 있다.이대리석 기둥을 영국왕 찰스대제가 감리교의 사회변혁과 사회구원 운동에 감하사며 기증한 것이다.
성화훈련의 중요한 세 가지 요소는 첫째로, 내면적 개인적 경건을 힘쓰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도와 금식과 성경읽기와 일기쓰기 등 경건의 선행을 힘쓴다.
둘째로, 상호협동적 영성훈련을 힘쓴다. 이를 위해 서로가 권면하고 격려하고 충고하고 상담하는 크리스천 컨퍼런스를 가진다.
셋째로, 악행을 금지하고 선행을 실천하는 자비의 선행을 힘쓴다.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갇힌 자와 나그네와 신체장애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는 선행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사회적 성화의 행동으로 이어진다.
속회의 영성수련에서도 이렇게 세속성으로부터 분리되는 경건의 선행과 함께 세상 속으로 성육신화해 가는 자비의 선행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이선희 교수가 오직 믿음 만이 성화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인용한 “성서적 구원의 길”이란 설교 후반부에서 웨슬리는 “성화를 위해 선행이 필요한가?”라고 질문하면서 경건의 선행과 자비의 선행이 성화의 수련을 위해 동시에 필요함을 강조한다. 믿음으로 성화가 시작되지만 믿음의 증가와 계속성을 위해서 선행의 열매가 계속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만이 성화의 조건이 아니라 믿음과 선행(경건의 선행과 자비의 선행)이 함께 성화의 조건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속회의 본래의 목적을 한국감리교회가 회복해야 한다. 성화훈련을 집중시킬 수 있는 지도자의 영성수련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지도자의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영국과 미국 감리교회의 속회가 죽어가게 되었다. 한국감리교회가 이러한 철저한 지도자 훈련에 의한 성화중심의 속회로 돌아가야 한다.
가령 알콜중독자가 그 병에서 벗어나려면 성령의 은총을 강하게 체험하면서도 부단히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성수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14단계로 영성수련을 알콜중독자에게 거치게 한다. 신경질내고, 분과 화를 내는 사람이 은총과 믿음으로만 나쁜 기질을 고칠 수 없다.
성령의 은총과 믿음을 가지고 부단히 자기 절제의 영성수련을 할 때, 그 나쁜 성질에서 그리스도의 성질로 변화될 수 있다. 교회출석을 열심히 하고 기도의 능력을 받아서 병도 고치는 감리교권사가 교통사고가 나서 6명의 환자와 더불어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미국에 사는 딸이 간호하러 왔는데 환자들 보는 앞에서 내 딸이 아니라고 딸을 야단치고 신경질을 냄으로써 전도의 길을 막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인격적 성숙을 이루는 영성수련이 절실히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오래 예수 믿었고 능력은 있으나 인격적으로 덜 성숙한 이런 성도들을 철저하게 성숙시키는 영성수련 프로그램을 개발하여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을 매 연회 때마다 강조하였다. 다양한 은초의 수단을 활용하여야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은혜의 선물로 다가오지만, 그 은혜가 임할 때까지 선재적 은총으로 일하는 자유의지를 통하여 은총의 수단 곧 성경읽기, 금식, 기도, 선행의 실천 등을 사용할 것을 웨슬리는 강조한다: “그리고 행동하기를 배우십시오. 선행을 사모하십시오. 자비의 선행뿐만 아니라 경건의 선행도 열심히 하십시오. 가족기도와 은밀히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도 노력하십시오. 은밀히 금식하십시오. 성경을 연구하십시오. 성경말씀을 우리들과 함께 들으며, 또 홀로 읽으며 그리고 그 읽은 말씀을 명상하십시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찬에 참석하십시오.” 이것을 오해한 모라비안교도들은 웨슬리와 1740년경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모라비안지도자 몰더는 신앙이라는 선물이 다가 오기까지 기다려야하고 모든 외적 선행을 실천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이러한 정숙주의를 비판하면서 한 여인이 아직 의롭다함을 얻기 전에-거듭나기 전에-성찬을 받다가 거듭남을 체험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선재적 은총으로 회복된 자유의지를 통하여 이러한 은총의 수단을 사용해야함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