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대학교 해양과학대학 실습선 해림호
6월 24일 일요일 <나가사키 검역묘지>
실습생 중에 한 학생이 찾아오더니 갑자기 물체의 상이 여러개로 보여 혼란스럽다고 한다. 일단 더 지켜보기로 했다. 오후가 되자 묘박지에 새로운 배가 두어척 들어와 닻을 내리고 있다. 한 척은 킹스톤에 선적항을 둔 중국 선박이고 또 한 척은 일본 선박이다. 어제 이곳 나가사키 지방과 부근 사세보 항구에 200미리에 가까운 폭우가 쏟아져 산 사태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장마전선은 지나갔지만 아직도 바람은 강하게 불어온다. 어느덧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전형적인 여름 날씨로 바뀌었다.
이미 선내는 에어컨을 작동하고 있어 시원하지만 선실을 벗어나면 덥고 후덥지근하게 느껴진다. 육지는 상당히 무더울 것이다. 한국에도 한창 장마비가 내리고 있으며 충청도 지방엔 호우주의보가 내렸다고한다. 원양실습은 으레 장마와 함께 시작되고 동시에 끝난다. 그러니까 해림호 승무원들은 해마다 장마철을 바다에서 보내는 셈이다.
묘박지에서의 이틀이 벌써 다 지나갔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도선사가 승선할 것이고 우리는 도선사의 지휘를 받으며 항구에 입항할 것이다. 행정 직원 J씨는 승무원과 실습생에게 지급할 상륙비와 환전 달러를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비디오와 독서로 하루를 보내다. 오전엔 임권택의 <춘향뎐>을 비디오로 감상하고 오후엔 조셉 콘라드의 <나르시스호의 검둥이>, 김호경의 <인간의 옷을 입은 성서>와 김진수의 <우리는 왜 지금 낭만주의를 이야기하는가>를 교대로 읽다.
임권택의 <춘향뎐>을 보는 동안 춘향이 변학도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는 장면부터 자꾸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는 마치 오페라를 연상시키듯 창과 극이 동시에 진행되지만 오페라의 경우 등장 인물들은 오케스트라에 맞춰 자기 배역에 해당하는 연기와 노래를 하는데, 영화 <춘향뎐>은 오페라와 달리 극 속에서의 인물과 관객 앞에서 창을 하는 조상현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아마 이런 점이 서양의 오페라와 판소리 양식의 근본적 차이일 것이다. 판소리 양식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결국 창자(唱者)한 사람에 의해 전체 내용이 사설과 노래로 불려지는 점이고 이에 반해, 서양의 오페라는 오로지 오페라 자체에 모든 촛점을 맞추지만 판소리는 창자와 객석에서의 관객의 일치된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령 오픈된 무대에서 창자(唱者)와 관객은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마주하고 있다. 그래서 창자(唱者)의 호흡이 그대로 관객에게 옮겨지게 되고 관객은 그 느낌을 추임새로 화답한다. 일찍이 브레히트는 자신의 서사극을 중국의 경극이나 일본의 노에서 발견한 바 있지만 판소리 양식(특히 현대화된 마당극)은 뻬이징 경극이나 노 이상으로 소외효과를 유발하는 대표적인 노래극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어느 점에서 영화 <춘향뎐>의 스타일은 서양의 뮤지컬과 비교할 수 있으나 조상현이 관객 앞에서 창을 하는 장면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역시 사뭇 다르다 할 수 있다.
오랜만에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LP판으로 감상하다. 피아노 연주는 마르타 아르헤리치. 한때 KBS교향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한 바 있던 샤를르 뒤트와가 지휘하는 로얄필하모니 오케스트라 협연한다. 이 LP 음반은 지난 20년전 원양어선 시절에 스페인에서 구입한 음반으로 도입부 오케스트라 연주의 웅장함이 너무 매력적이라 비교적 자주 듣는 음반 가운데 하나이다.
실습생의 눈에 이상이 생긴 원인을 알아냈다 한다. 그 학생은 출항 때부터 멀미 방지를 위해 기미테를 계속 붙이고 다녔는데, 기미테를 만진 손을 눈과 접촉하면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한다. 설마? 하고 의아해 했더니 기미테를 포장한 케이스에 그런 주의사항이 써있다고 일등항해사가 알려준다. 참 희안한 일이다.
6월 25일 월요일
아침 점호가 끝날 무렵 1등항해사가 찾아와 학생 침실에 상당량의 물이 흘러들었다고 보고한다. 급히 내려가 보니 고인 물을 퍼내느라 갑판부원들이 총동원되었다. 출항 전 취사실의 배수구 공사를 할때 물이 배출되는 선외변의 넛트를 완전하게 조이지 않아 생긴 일이었다.
그동안 취사실에서 버린 물이 배수관을 타고 침실로 흘러들었던 거다. 몸집이 작은 조기장이 비좁은 벽을 타고 들어가 선외변 넛트를 조이고 패킹을 새로 교환하니 더 이상 새지 않는다. 참 한심하다. 도대체 기사들은 어째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른단 말인가.
휴일 새벽까지 강행군한 공사였다. 그런데 그렇게 힘든 작업을 하고도 가장 기본적인 넛트를 조이지 않았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실수를 한거다. 결국 그들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나쁜 이미지를 남겼다. 이런 식의 실수는 전형적인 우리의 모습이다. 마지막 점검을 소홀히 하고 대충 대충 일을 마무리 한 결과들....
취사실이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해수가 누수되었다면 어쨌을까. 아침 식사 후 전체 사관들을 살롱에 집합시키다. 이대로 적당히 넘어가서는 안될 문제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질건 따지고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또다시 그런 실수가 반복되기 마련. 일차적으로 공사를 맡은 기사들의 실수랄 수 있지만, 공사 감독을 소홀히 한 우리측의 책임이 더 클 수 있다. 특히 이번 공사는 워낙 중요한 일이라 일이 시작되기 전에 전 부서가 협력해서 공사 감독을 철저히 하라고 특별히 강조했던 참이다. 30여분에 걸쳐 일일이 따지고 각 부서의 사관들에게 충고하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어쨋튼 이번 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또 다시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한 후 끝내다. 출항 하자마자 자꾸 일이 벌어지다 보니 이젠 전화나 노크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덜컥해진다.
아침부터 배수구 누수건으로 북새통을 떨다 오전 9시경 도선사의 지휘를 받으며 항내로 항해를 시작하다. 워낙 바람이 강하게 불어 도선사가 배를 부두에 접안시키다 약간의 실수를 했다. 일단 도선사가 승선하면 선박의 총지휘는 도선사가 하게 된다. 그래서 선장인 나는 도선사의 지시만을 따를 뿐이며 그가 하는대로 가만히 지켜봐야 한다. 배가 거의 부두에 접근할 무렵, 갑자기 쿵 소리가 나면서 배가 동요하자 당황한 늙은 도선사는 오더를 서둘러 내렸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 달리 방법이 없다.
다행히 경미하게 부딫쳐 파손된 곳은 없었다. 어째 오늘은 안좋은 일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도선사들은 거의가 대형 상선에서 최소한 20년 이상의 승선 경력을 지닌 베테랑들이다. 아마 이 도선사는 해림호와 같은 1000톤급의 작은 배를 조선한 경험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오늘처럼 강한 바람이 날 예인선이 없이 조선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이다.
접안을 마치고 떠나가는 그에게 볼펜 셑트를 선물로 주다. 도선사가 돌아가자 이윽고 우리 입항 수속을 대행해 주는 에이전트 그린쉬핑에서 직원 한 분이 찾아와 입항 수속을 시작하다. 60세쯤 될까? 이런 업무를 하기엔 꽤 나이든 분으로 명함을 보니 회사의 취체역이고 이름은 니시무라다.
취체역이란 우리 경우 사장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대개 현장 업무는 활동적인 젊은 직원이 나와 재빨리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나이든 사장님이라 모든 게 슬로우 템포다. 저녁 식사 후 모처럼 첼로 연습을 하다. 출항 후 처음으로 한 연습이니 꼭 일주일만에 첼로를 만져본 셈이다.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연습 교본은 미뤄두고 <예스터 데이>만을 반복해서 연습했다. 그러나 제대로 연주하려면 아직 어림없는 수준이다. 만약 이번 실습 기간동안 부지런히 하지 않는다면 전체 곡을 제대로 연주할 수 없을 것이다. 문득 레쓴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라 긴장이 된다. 어영부영 제대로 연습하지 않았다간 분명 귀가해서 꾸지람을 들을 게 뻔하다.
그러니 게으름 피지말고 열심히 연습해서 아가씨 선생님께 나의 멋진 연주 솜씨를 자랑스럽게 보여주도록 하자. 그나저나 예쁜 첼로 선생님 더 나이들기 전에 얼른 시집가야 할텐데.......
첫댓글 작은 실수가 큰 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워낙 오래 전의 일기라 내가 언제 배를 탔었지? 가물가물하군요. ^^ 어설픈 글인데 열심히 읽어주시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