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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욕 후 도자기 식기에 쌀밥이면 어떨까
중리동 아파트단지내 상가의 지하에 있는 천연자수정사우나.
최대규모 최고의 시설이란다.
찜질방에 관한한 전국 섭렵을 반복중인 내게 과장이 통하겠는가.
수도권의 유명 온천지역이라는 점으로 보면 실망스런 시설이다.
이천지역 내에서 그렇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천온천의 역사는 500여년으로 전해온다.
효성이 지극한 한 농부는 심한 피부병과 안질로 고생하는 노모로
인해 상심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논 한 가운데에서 사철 더운 물이 솟아나는 것을 발견한 그는 그
물을 떠다 모친을 씻겨드렸다.
놀랍게도 모친의 병이 깨끗이 나았더란다.
진산인 설봉산과 도드람산을 병풍으로 하여 솟아오르는 알카리성
이천온천은 무색, 무취, 무미의 단순온천이다.
홍보물은 염화칼슘, 염화나트륨, 탄산칼슘, 마그네슘 등의 성분이
함유돼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나트륨이 많이 포함돼 있어 만성 습진을 비롯한 각종 피부병,
신경통, 부인병, 눈병 등에 효험이 있다고 강조한다.
수여선 철도 개통(1935년)을 계기로 온천영업이 시작되었단다.
그러나, 조선인(추창엽?)의 목욕탕(약수목욕)은 일본인에게 넘어
갔고, 광복 후에는 운영난과 동란으로 폐쇄되었다는 것.
우여곡절 끝에 재개발에 성공했나 보다.
1970년대초, 수시로 드나들던 때에 비해 지금은 다목적 웰빙시설,
대형 온천랜드로 성장했다.
지명(地名) 이천은 이섭대천(利涉大川)에서 유래했단다.
고려태조 왕건의 개국 전투와 결부된 설화가 있으나 "험난한 강을
건너면 천하가 이롭다"는 뜻으로 이미 주역에 자주 나온 말이라고.
남한강의 지류인 복하천(福河)과 청미천(淸渼)이 흐름으로서 잘
발달된 평야지 이천은 최상미질의 대명사격인 이천쌀의 생산지요
대표적 도향(陶鄕)이다.
섭강의 힘(涉江力), 즉 학문과 덕을 쌓고 힘을 키워 천하를 이롭게
한 후 온천욕을 하고 도자기에 담은 쌀밥을 먹으면 제격이겠다.
이섭대천하기 위해 미리 그리 하는 것은 어떨까?
무료를 달래느라 별 생각을 다 해본다.
이 찜질방 PC로 인해서도 그랬거니와 이즈음에는 참으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난다.
산에서는 애오라지 山이야기 뿐인데 길과 집(찜질방,식당)에서는
노심초사하는 애국지사(?)와 건강이 소망인 병약자 등.
혼란한 사회, 침체된 경기, 비전 없는 교육 등 걱정이 태산이다.
당시의 선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가 찜질방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객주집 찾느라 그랬을까?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직선화 길을 가려고 애썼을까?
내가 산과 길의 가이드(guide)성 글을 쓰지 않는 것은 그 작업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도로의 이름과 번호, 버스의 노선과 그 번호, 운행시간 등의 잦은
변경, 오전 오후가 다른 체력, 수시로 변하는 기분 등을 다 담아낼
수 없지 않은가.
게다가, 한 해가 멀다 하고 새 도로가 등장하고 있다.
넋고개와 넓고개
이천현 관아가 있던 지역은 관고동(官庫洞)이다.
옛 이름은 관후리(官後里)로 관아 뒤의 마을이라는 뜻이란다.
읍내면(邑內面)이 바뀌고 바뀌어 이천시 관고동이 되었다.
먼동이 틀 무렵, 3번국도 옛길가(邊)의 양정여고 앞으로 나갔다.
'무감독 시험제도'를 실시, '양심'을 강조하는 기독교계 학교다.
한국 최초의 종군여기자였으며 후기엔 주로 장편역사물을 집필한
소설가 J여사 생전에 함께 이천에 갈 때마다 들렀던 학교다.
설립자의 부인인 K교수와 자매처럼 왕래하시던 70년대의 일이다.
차편으로만 다녔던 꼬부랑 비탈길을 걸어서 새3번국도와 만나는
기치미고개에 올라섰다.
읍내면 관고리와 신둔면 사음리(지금은 모두 이천시 관고동)간의
고개인데 신립장군의 넋이 기침했다 하여 기치미고개라 했단다.
탄금대에서 장군의 시신을 수습해 한양으로 오는 도중에.
고개마루에 예전에 없던 다산고등학교가 자리잡았다.
다산(茶山)의 생가인 남양주시 조안면과 유배지 강진외 지역에서
학교명으로 만나게 되어 관심 가지고 살펴보았다.
그러나, 다산의 정체성은 느껴볼 수 없고 교장이 정씨라는 것으로
막연한 개연성이 짐작되었을 뿐이다.
기치미고개에서 사음동을 관통하는 옛길은 3번국도가 되어 잘려
난 군데군데를 제외하고는 신둔면 수광리 한하고 길게 이어진다.
사음동, 수광리 일대는 '이천쌀밥' 밀집지역이다.
수광리 '송월한정식' 자리는 본래 '쌀밥집 청목'이었으며 지나는
길에 곧잘 들러 식사하던 집이다.
어느 날 들렀더니 주인이 바뀌었다.
거액의 권리금을 받고 넘길 때 영업을 그만둔다고 했다던 청목은
얼마 후 이웃 사음동 대로변에 원래 이름 그대로 신장개업했다.
목좋은 곳에서 옛 단골을 고스란히 되찾아 더욱 성업중이다.
송월에게는 기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음식이 아무리 맛깔스럽다 해도 나는 상도(商道)에 하자가
심각한 청목에는 발길을 끊었다.
지순택요(窯), 고려도요와 수광(합병된 水北, 廣峴 양마을의 첫자)
삼거리를 지나 한참 가면 광현(넓고개)이다.
이천 신둔면 수광리와 광주 실촌읍 신촌리의 경계로 옛 광현점(廣
峴店)이 있던 광현마을 뒤 고개다.
기치미고개에서 기침을 했던 신 장군의 넋이 이 고개에서는 잠잠
했으므로 넋이 떠난 고개라 하여 넋고개라 했다지만 억지다.
한문 '廣峴'의 우리말 넓고개가 발음의 유사성으로 인해 와전됐을
뿐이므로 넋고개와 기치미고개의 전설은 지나친 작위라 하겠다.
그런데, 넋고개가 왜 이리 많은가.
신립장군의 시신을 모시고 배회라도 했나.
남정삼거리에서 송월한정식 앞 소로를 계속해 올라가면 광현마을
직전에 또 넋고개가 있고 광주 실촌읍 신촌리에도 또 하나 있으니.
아무튼, 광현 마루에는 이천의병전적비(義兵戰跡碑)가 서있다.
고종 33년(1896년) 1월 이천수창의소(首倡義所) 의병들이 일본군
수비대 1백명과 싸워 왜군을 섬멸한 역사의 현장이란다.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의병들의 구국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88년 7월에 이 전적비를 세웠다는 것.
1975년에 발족한 이원회(利元會: 양정여고 설립자 김동옥 목사를
비롯해 이천 토박이원로 모임)이 주축이 되었나 보다.
그러나,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무수한'廣峴'표기에도 아랑곳
없이 '넓고개'는 없고 '넋고개', '넉고개' 표기 일색이라는 점이다.
이천의병전적비
아뿔싸, 넓고개가 앵자지맥이 통과하는 고개렸다.
늙은이 약올리긴가.
지맥 답사중이라는 종주팀을 또 만났다.
문드러니고개에서의 기분이 다시 고개드는 것은 자명한 일.
더구나 전날과 달리 몸 컨디션도 양호했다.
일명 솥뚜껑산인 정개산(鼎蓋)으로 오르는 그들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으려니 착잡했다.
그래서, 광현 주변을 좀 더 살피려던 요량을 접고 빨리 떠났다.
한데, 대동지지는 "自廣峴不入利川直至長磴店四十五里"라 했다.
장등점 ~ 이천 30리, 이천 ~ 광현 20리로 50리길인데 광현에서
이천에 들르지 않고 장등점으로 직행하면 45리라는 것.
이 첩로를 확인하지 못한 채 이천땅을 떠난 것이 유감이다.
생존을 위한 전략의 시대?
광주땅 정개산록(麓)의 동원대학 앞이 버스로 분주했다.
일정수(數) 이상의 학생확보는 대학자립의 손익분기점에 오르기
위해서뿐 아니라 통학버스의 유인에도 절대적 필요조건이다.
재단이 수익사업에 대한 전폭적 세제혜택의 악용은 물론 과실의
전출은 고사하고 학생등록금의 부당 착취까지 비일비재로 한다.
그래서 자립에 필요한 학생수의 확보는 대학 사활의 문제다.
대중교통의 소외지역에 위치한 학교에는 더욱 절실하다.
버스가 스스로 노선을 열게 하려면 이익을 보장해 줘야 하니까.
그러므로, 바야흐로 학생수의 격감 현상이야 말로 대학의 심각한
전방위적 위기다.
특단의 생존전략을 찾고 있으나 묘책이 없는 듯 하다.
노변에 들어선 다양한 업종의 건물들이 걸을 수록 늘어가고 있다.
서울에 접근하는 것과 비례한다고 할까.
옛 선인들도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었을까.
이마에 백색 훈장(?)을 달고 용케도 걸어왔다.
내일로 끝이라는 생각에 감개무량은 물론 더욱 신선하고 싱싱해
지는 느낌이었다.
신촌리, 수양리, 곤지애(昆池厓:곤재마을)가 일산천리였다.
패장이었음에도 신립장군은 기치미고개와 넋고개에 이어 곤지암
(경기도문화재자료 제63호)에 까지 이름을 남겼나.
그의 묘에서 좀 떨어진 길가에 고양이 모양의 바위가 있었단다.
말을 타고 이 바위 앞을 지나던 이들은 말굽이 땅에 붙은 채 떨어
지지 않아 애먹었는데 지나던 한 장군이 크게 책망했더란다.
'패장이 무슨 체면으로 행인을 괴롭히느냐'고.
곧, 돌연한 뇌성벽력에 바위가 두 쪽나 고양이 형태가 없어졌으며
그 후로는 행인들을 괴롭히는 일도 사라졌다는 것.
이천이 쌀밥이라면 광주는 소머리국밥이다.
특히 곤지암리 3번국도 좌우로는 소머리국밥집들이 벌이는 원조,
시조 경쟁이 가관이다.
부러 이 집, 저 집 다녀봤지만 도토리 키재기다.
코미디연예인의 이름을 팔거나 연조(年條)를 내세우는 것은 단지
유객용 홍보 전략일 뿐이다.
국민개차(皆車) 시대의 고객에게는 그보다 편리한 접근성과 주차
공간이 선호의 조건 아닌가.
백화점 진열장의 물건이 하도 팔리잖아 짓궂은 점원이 가격표에
0 두개를 더 그려넣었더니 그 날로 팔리더라나.
황당한 고가(高價)도 질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전략일 수 있겠다.
내가 들른 '본가소머리국밥'도 그래서 비쌀까.
시장한 나그네의 한 끼에 질의 비교가 뭐 중요하겠는가.
값의 차이가 오히려 선호의 기준이지.
이름만 지키면 무슨 의미?
쌍령점(雙嶺店)이 있던 초월읍 대쌍령리 대쌍마을까지 진출했다.
광주시내~실촌 사이의 고개 2개에 들어선 마을이라는 뜻이란다.
'실촌(實村)'의 실촌(失村)에 실망했는데 고층 아파트들로 뒤덮인
초월은 숨구멍을 막는 듯 했다.
"자연과 달이 어우러진다" 해서'초월(草月)'이라 했다건만 자연은
시멘트 괴물들에 밀려나 빈사 상태다.
곤지암천이 휘돌아 흘러감으로서 섬처럼 보이는 도평(島坪) 남촌
유원지도 아파트 혹은 공장에 그림같은 분위기를 앗기고 말았다.
아직도 너른 땅덩이건만 왜 공중으로 오르려고만 할까.
어찌하여 자연의 향기(흙냄새)를 두고 콘크리트벽속에 갇히려고
안간힘을 쓰는 걸까.
땅값의 인플레 때문일까 편리 일변도의 몰지각 탓일까.
초월읍과 경계인 쌍령동도 시멘트 괴물들이 하늘로 치솟고 있다.
경안천을 건너(雙嶺橋) 광주시 다운타운에 들어섰다.
광주(廣州)의 이름은 고려초부터 줄곧 유지돼 왔단다.
목(牧), 부(府), 군(郡), 시(市)로 변하는 동안 여기저기 빼앗기긴
했어도 이름 하나만은 올곧게 지켜왔다는 것.
이름만 지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연보전과 개발의 조화는 수사(修辭)일 뿐이고 친환경 청정도시
운운도 슬로건에 불과하다면 속빈 강정에 다름 아닌데.
심야택시를 타고"광주갑시다" 부탁한 후 곤히 잠들었다가 깨어난
승객이 황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리에 서투른 기사가 밤새워 광주광역시까지 갔기 때문.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이 코믹(comic) 화제가 두 개의 광주(한자
표기는 다르지만)로 인한 혼란을 부각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듯 지켜온 광주가 바야흐로 실명(失名) 위기다.
성남과 하남, 광주가 초대형 기초단체로 통합된다니까.
실은, 예전의 광주로 환원되는 것일 뿐이다.
성남과 하남이 모두 광주에서 분가했으니까.
그런데도, 이(離)에 비해 합(合)에는 원래 난제가 많은 것인가.
분가한 아우들이 청출어람(靑出於藍)의 형국이 됨으로서 난해(難
解)한 조건들이 있기 때문인 듯.
경안역(慶安驛)이 있던 경안동(京安洞) 역마을은 광주 시가지의
중심 상가지역으로 변했다.
다소 이르긴 해도 마지막 밤을 보낼 찜질방 찾기에 들어섰다.
남한산성까지는 한나절 남짓 걸릴 거리일 뿐 아니라 더 진행해도
되돌아 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쇼핑나온 듯한 젊은 부부에게 찜질방을 물었다.
내 물음이 애매했나 그들이 잘못 이해했는가.
그들은 45번국도 건너편 아득히 보이는 산비탈을 가리켰다.
소위 오리지날이라는 참숯가마한증막이 있는 곳이란다.
알려준 길을 걸으면서 "작은 도시라 시내에는 없는 것인가."
혼자말로 중얼거리다가 퍼뜩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불경기 탓일가.
마침, 택시를 즐비하게 세운 채 한담중인 기사에게 다시 물었다.
하마터면, 생 고생할 뻔 했다.
불과 50m 정도 옆, 경안동 번화가 한복판에 두고 아슴푸레하게 먼
곳까지 갈뻔 했으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