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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
황 금 찬
길에서 만난
세 사람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손이다.
한 마디 말도 없다.
무거운 발걸음만
옮기고 있다.
산굽이를 돌자
저만치 숲이 보이고
그 숲옆에 집이 한 채 보인다.
아, 저기 파출소가 있네.
파출소가 아니고 주유소 같은데
내가 보기엔 여인숙 같습니다.
그들은 과연 어떤 목적으로
거기 서 있을까
20세기에 목적 없는 집만 세워두고
이제 문을 닫는가.
자연에 상처만 남기고
끝나는가.
그럼 안녕…
꽃
최 은 하
사람의 그 무엇이
저렇게 꽃으로 타오르는가.
지내오는 고빗길에서마다
제대로 대답 못한 안타까움으로
모가지에 연자맷돌 매달고
바람의 울음 날리며
밤이란 밤새내 떠돌아도
별빛은 그래, 그대롤레라.
내 어쩌다가
더듬거리는 말씨로
눈부심을 역력히 마주하게 되었는지.
할 말 마저 다 못하고
마주치는 눈빛은 영롱하다.
사라지는 것은 언제나
검디검게 사무쳐 응어리지다 바랜다.
이슬방울 속에 한 번 비췄다가
드러나는 모습은 누구라도
영영 지울 수가 없으리.
이승의 그 무엇이
저렇듯 향기로 피어나
사뭇 젖어들게만 하는 걸까.
꽃 앞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조차
어쩌면 이리도 어처구니없을지 몰라라.
눈을 감고 보니
최 은 하
흐린 날이 개이고
그대 떠나보내고 나서야 알았지,
세상에 이런 낭떠러지가 일어서고 있는 것을
급기야 절벽은
아우성치는 파도로 휘몰아와
나를 바다 가운데 섬으로 떠돌게 하고
첩첩 산으로 다가와선
그대 부르는 목소리마저 산산이 흩뜨려버렸다.
그날 이후 노출된 나는
침몰 당하지 않으려
당겨지고 조여드는 오금이란 오금
안간힘 다 해 펴고
악몽의 식은 땀 속에서도
발설치 못했던 날마다
지피는 고빗길로 지내온다.
처음부터 강산은 적막이었으리
흐르는 물과 바람,
온갖 꽃의 웃음소리
나 혼자 열고 있는 귓결에
이제 눈을 감고 보니 더 많은 이야기
환히 보고 듣겠구나.
시창작론
- 시와의 결혼
황 송 문
시를 쓰려거든
시를 사랑해야 하느니라.
좋은 시를 쓰려거든
죽도록 사랑해야 하느니라.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시와 함께 살겠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것은
시와의 결혼이 아니라
터무니없는 욕심이니라.
시가 그리워서
시가 보고 싶어서
시가 읽고 싶어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야 하고,
시가 배고파서
언제나 시를 먹고 마셔야 하느니라.
하루 이틀 사흘……
시를 만나지 않고도
멀쩡한 사람은
시를 허영으로 넘보는 거간꾼,
고등 사기꾼이라 하느니라.
분해와 결합과 변화의 반딧불
황 송 문
단기 4334년(서기 2001년) 여름
중국 연길 연자산장(燕子山莊)에서
한밤중 직녀성 꿈을 꾸다가
소피보러 나왔을 때
숲속에 유영하던 반딧불은
사랑 나누려고 발광(發光)하던 유성들
대 여섯 마리 반짝이는데,
서울의 숨구멍
남산의 영화진흥공사에서
시사회 때 관람하던 홋타루가와(螢川)
수천의 반딧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골짜기에서 뒤엉킨 꿀벌들처럼
반딧불 냇물이 흘러내렸다.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대자연의 오르가즘을 향하여
일제히 알전등을 켜들고
산짐승 같은 포효
정상에서 소리 지르고 있었다.
나그네
김 년 균
집에 들오서면 밖이 그립다 하고
밖에 나서면 집이 그립다고 한다.
고무줄 늘이듯 마음을 당기고
집에 들어서 보면,
또는 밖으로 나서 보면,
거짓말이어라.
마냥 거짓말이어라.
사랑이여, 이 상처 절여진 곳에
필경 무슨 꽃이 피올는지.
눈 물
가 영 심
내 눈물의 근원은 명주실이었다.
하얀 누에고치에서 무한 슬픔의 실로 뽑아 올려져
고운 실타래로 엮어지는 생애였다.
어머니를 거부하던 또 다른 내가
기억의 고집으로 들어앉은 고치 속의
무지와 반항의 긴 잠을 깨우려고
내 눈물샘 그 깊은 어디쯤서
갈증의 목선(木船)을 띄워놓고
밤새워 성모송(聖母頌)을 외워가던 어머니가 계셨었다.
슬픔이 한 모금의 물로 고인
희한의 눈물 한 바가지 얻어 마시고
적막 빈 꿈만 흐르는 밤에
어머니의 한(恨)을
은빛 머리칼로 엮어 올올이 짜 올리던
목숨의 한 생(生)이 희고도 눈부셨다.
이르는 말씀
-바다의 설화 (14)
김 하 영
태어나 말을 배우면서부터
바다가 이르는 말씀
지금도 맑디맑은 목소리로 들린다.
내 그 어디, 어느 때라도
가슴으로 안아 어르고
밤하늘 별의 눈짓과
산야에 피어나는 꽃의 웃음을
알아보게 한다.
고향은 멀리 떠나 있을수록
사무친 하늘
이렇게 아스라한 굽이굽이
돌아 지내온 자리에서
바다의 말씀 찾아든다.
내 혈맥엔
파아란 바다 숨결이 잔잔하고
그리움 익히는 아침저녁
오늘도 고향을 향해
손길 가벼이 휘날리며
돌아가는 발길이다.
바닷길
김 하 영
바다로 가자
바다에 가서 출렁이는 물결로 살자구나
이승의 꿈이란 꿈 접어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하늘 아래서 엇설킨 자국들
땅 위에서 하나씩 지워가며
갈앉은 안개로부터 이젠
어둠 헤치고
마련된 시계를 맞추어
아무렇지 않게시리 정산하자.
사랑하는 이여,
저 파도소리 들으며
가벼이 고개로 답례를 하자
오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자리를 맞이하자.
하루해가 저물어
노을도 사위어 가고
별들이 총총 돋는구나.
바라는 마음
-상념의 끈
정 지 운
한 물결 내려오고
한 물결 가노니
내게 온 물결 내 안에서 없어지고
생각 또한 그러하니 마음 둘 곳 없어라.
익히려는 구제중생 늦어지니
내 어찌 슬프지 않으리.
오가는 물결따라
오가는 생각따라
희비가 무상하구나.
허허로운 헛기침 소리
새벽안개 헤매네.
봄 날
이 동 백
참 고웁다.
담장 안
환한 웃음 벙그는 목련은
꽃 그늘 아래 강아지
나른한 봄꿈에 젖고
나도 그대 환한 웃음에
흠뻑 취해
자꾸만 어지러웁다.
참 고웁다.
환한 봄날
웃음 벙그는 목련은
오디새의 비행
정 민 욱
구름바다를 향해 날아오르면
초록으로 활짝 핀 여름
하늘에 머무는 순간
한 컷의 사진으로 찍어놓고
날렵한 바이올린 선율에
격정의 카타르시스
그 끝을 날아
공중에 머무는 찰나의 순간
어미 새는 모정(母情)을 그려 넣는다
침묵으로 흐르는 말줄임표
고요를 여며놓은 여름날의 오후
바람대신 머물다 가는 나그네 새
푸른빛의 동심원으로
그리는 여름 향기
*오디새 : 여름 철새 후투티, 오디(뽕나무 열매)가 익어갈 즈음 뽕나무에 앉아 해충을 없애주는 고마운 새로 여겨‘오디새’라고 부르기도 했고, 머리 깃이 인디언 추장의 머리장식과 비슷해‘추장새’라 부르기도 한다.
그녀를 접목한다
유 회 숙
베란다에 화분을 바라본다.
섬처럼
드문드문 떠있는 기억
밀물과 썰물
단정 지울 수 없는 의미로
한나절이 지나간다.
비슷하다는 것은
얼마나 머언 거리일까.
서로가 서로에게 스미기까지
새큼달큼 탱탱한
탱자나무에 접목시킨 귤나무
하얀 꽃이 피고 지는 사이
아름다운 모순이여
뿌리 가까운 경계에
가시를 감추지 않은 모습
낯선 시간 속으로
단단히 접목 시킨 그녀를 떠올린다.
뮤즈의 여름
유 회 숙
발걸음도 물이 들어
안팎으로 숲이 생기네.
햇살이 머물고
바람이 서둘러 지나가고
나비가 돌 위에 앉아 있네.
마법에 걸린 것처럼
눈을 뗄 수 없네.
돌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한 송이 꽃으로 피는 거였네.
돌문 앞에서
열려라 참깨
주문을 외는 것은 사람뿐이네.
그 광경을 엿보는
바위틈 달개비꽃 보이네.
제목과 크기 작가의 이름 없네.
휴대전화가 불타고 있다
박 정 희
민들레 꽃씨들. 메시지를 쳐댄다.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
하늘에 흩어진다.
거리에 흐드러진 민들레 신호음
보관된 편지 삭제 중
민들레가 몸을 턴다.
다시 너에게
메시지,
메시지가 날아간다.
사서함, 보관된 편지 5개
후두둑 피는 한 무더기 민들레꽃
문자가 떴다.
너에게 나를 전송한다.
방금 그 꿈이 도착했다.
증도 염산마을
박 정 희
까맣게 변색된 치아를
살짝 내보이는 칠순 할배
증도 염산 마을 지키느라
생이 소금에 절여있다.
햇빛 강한 한낮에
흔건한 땀 한 됫박
할배 노래 한 됫박
큰 숨 들이쉬고 흘린 눈물 한 됫박
천일염,
햇빛 카랑카랑, 바람, 땀이
순백의 꽃으로 피어난다.
해가 피곤한지
서쪽으로 얼굴 숨길 때
나도 해넘이 따라가다
무척이나 지쳐 버렸다.
소금처럼 절여
여기 증도에 머문다.
제부도 ․ 1
송 선 애
속절없이 너는 내게로 와서
등에 기대어 목놓아 울다가
도마뱀처럼 꼬리를 끊고 내달렸다가
혈흔같은 상처만 남겼노라고
짜디짠 참회록의 행간(行間)속으로
아련한 전설을 부려놓고 간다.
모 종
박 기 동
상추를 옮겨 심는다.
겨울 끝자락에서 몇 번은 풀이 죽어
시름시름 앓다가도
흙냄새에 제법 몸을 세우고 생기가 돈다.
이놈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 그림자 나를 따라 움직이며
시시로 맘 고생좀 했겠구나 생각한다.
지난날 끼니 때울 그릇 몇 개 장만해주시고
휑한 자취방에 까까머리 아들 당그라니 남겨두고
못내 발걸음 옮겨가며 눈물 훔치신 어머니
상추 모종을 대하며 불현듯 그 생각도 난다.
내 발걸음은 늘 불확실에 힘겨워
몸 가누지 못할 휘청거림도 있었으리라.
이젠 살아온 날 보다 짧은 나의 생
가야할 길이 확연하게 보여
터를 잡는 날
그날의 확신에 나를 모종 한다.
벚 꽃
박 기 동
겨울 울음 맺혀 있다
시린 끝가지에
젊은 날의 기억 화사하다.
벚꽃으로 불 지핀 듯 피는
빛의 산란
그 시간의 증발,
또 다시 긴 동면에서 깨어난
나를 버릴 수 있을까.
벚나무 꽃물 한창 오르기도 전에
벚꽃진다.
봄의 연가 끝 소절로
가슴에 고인 눈물 밀어 올려
뒷모습 가벼워진다.
사라지는 것을
허무라 말하지 않는다.
바랄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잎,
잎이,
가지 끝 순에 푸르름만 남긴다.
가을 길
김 아 랑
산으로 난 길
통나무집과 어린양
뇌우와 천둥과 번개 쏟아지던 길
불이 붙었네.
그를 기다리던 여인은
신의 말없는 기억 속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
불붙은 바람 속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나니
대지여 입맞추어다오.
그 사랑의 노래를 들어다오.
시계는 11번 종을 치고
달력은 11장이 날아갔네.
알던 모든 것은 뒤바꿔졌고
함께 걷던 길도 세월 속에 떠내려갔지.
사람들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하는데
사랑의 댓가가 어떤 것이란 걸 알게 됐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갈가마귀를
싸늘한 대지에 스케치하며
남이 다 포기한 그 길을 간다는 것
수레바퀴는 쌓인 낙엽을 밟네.
한 번 만이라도
단 한번 만이라도
생명의 따스한 손길을 다오.
품에 돌아오라 그대여
돌아와 그대가 막 미소 지을 때
그때 사람들은 말하리라
사랑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담쟁이
이 병 훈
막다른 골목
담벼락에 찍혀있는
초록 발자국들…
쫓기던 발걸음이
너울너울 어깨동무하고
가로막힌 절벽을
시원스레 넘고 있다.
어린 이파리들
강파른 등에 업고
더듬거리며 기어오르는
언뜻언뜻 보이는
저 억척스러운 줄기
들여다볼수록
영락없이
우리 어머니 손등 위로
굵게 솟아오른 힘줄이다.
향수(鄕愁)ㆍ3
ㅡ 유년의 가을
정 명 숙
유년의 고향집은
익어가는 자두가 담장을 이뤘었다.
생솔가지 타는 연기
마당에 가득하고
활활 타는 아궁이 불빛에
온 집안이 환했다.
다가온 저녁
고개 내민 늦호박 하나
노을빛 받아
담장 위 덩그렇고
김이 솟는 가마솥엔
끓어 넘치는 된장국이
허기진 입맛을 다시게 했다.
이런 밤이면
어른이 되는 이야기로 지새고
달빛은 문풍지 안으로 스며들어
방안이 온통 대낮이었다.
오늘도 유년의 가을은
고향 마당에 가득하겠다.
대둔산 가을빛
정 명 숙
구름 헤치고 내비치는 햇살
온 산을 눈부시게 수놓는다.
바위 등걸에
뿌리 내린 소나무
휘몰아치는 바람에도
제자리 지키며 서있다.
산봉우리 높이 치솟고
아스라한 바위 밟아 오를수록
몸 안팎의 전율은 까치발 세운다.
발끝에 서걱이는 낙엽은 흩날리고
나무들은 또 한 겹
나이테를 감겠지.
바람은 바람끼리 산굽이를 감돌아
단풍잎을 물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