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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neowave
三十二年王聞 陳 亡大懼理兵積穀爲拒守之䇿 |
隋 髙祖 賜王璽書責以雖稱藩附誠節未盡且曰彼之一方雖地狹人少今若黜王不可虚置終湏 更選官屬就彼安撫王若洒心易行率由憲章即是朕之良臣何勞别遣才彦王謂 遼水 之廣何如 長江 髙句麗之人多少 陳 國朕若不存含育責王前愆命一將軍何待多力殷勤曉未許王自新耳王得書惶恐將奉表陳謝而未果 수 고조 (高祖)가 왕에게 새서(璽書)를 주어 질책하기를 “ 비록 번부(藩附)라고는 하나 정성과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의 지방이 비록 땅이 좁고 사람이 적다고 할지라도 지금 만약 왕을 쫓아낸다면 비워둘 수 없으므로 마침내 관청의 아전과 하인을 다시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다스리게 해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새롭게 하고 행실을 고쳐 법을 따른다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수고롭게 별도로 재주있는 사람을 보내겠는가?" "왕이 요수(遼水)의 넓이를 말하나 어찌 장강(長江)만 하겠으며 고구려 인구의 많고 적음이 진(陳)만 하겠는가? 짐이 만일 포용하고 기르려함이 없고, 이전의 잘못을 질책하려 한다면 한 장군에게 명할 것이지 어찌 많은 힘을 필요하겠는가? 하여 은근히 타이르고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할 뿐이다.” 왕이 글을 받고 황공해서 표(表)를 올려 사과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
강이식(姜以式) |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廣) |
“고구려는 본래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은 땅으로, 한(漢)·진(晉) 때에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고 따로 외국의 땅이 되었으므로 앞의 황제께서 정벌하고자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양량(楊諒)이 못나고 어리석어 군대가 출동했으나 공이 없었습니다. 폐하의 시대가 되어 어찌 멸망시키지 않음으로써 예의 바른 지역을 오랑캐의 고을로 만들겠습니까? 지금 그 사신은 계민(啓民)이 온 나라를 들어 모시고 따르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하여 사신을 위협해 입조하게 하십시오.” ─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
“고구려 작은 무리들이 사리에 어둡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 와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 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한(漢)과 위(魏)의 거듭된 토벌로 소굴이 잠시 기울었으나, 난리로 많이 막히자 종족이 또다시 모여들어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을 이루고 씨를 뿌린 것이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저 중화의 땅을 돌아보니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어 악이 쌓인 것이 가득하다. 하늘의 도는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리니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옛날에 정벌할 때 천자가 행하는 형벌에서 빠져 이미 앞에 사로잡힌 자는 죽음을 늦추어주고, 뒤에 항복한 자는 아직 죽음을 내리지 않았는데, 일찍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길러,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를 지키는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일을 익혀 요서 를 침범하였다. 또 청구(靑丘)의 거죽이 모두 직공(職貢)을 닦고, 벽해(碧海)의 물가가 같이 정삭을 받드는데, 드디어 다시 보물을 도둑질하고 왕래를 막고, 학대가 죄 없는 사람들에게 이르고 성실한 자가 화를 당한다. 사명을 받던 수레가 해동에 갔을 때 정절(旌節)이 행차가 번방의 경계를 지나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왕의 사신을 거절하여,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신하의 예절이라고 하겠는가? 이를 참는다면 누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인가? 또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번거롭고 무거우며, 힘센 신하와 호족이 모두 권력을 쥐고 나라를 다스리고, 붕당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풍속을 이루고, 뇌물을 주는 것이 시장과 같고, 억울한 자는 말을 못한다. 게다가 여러 해 재난과 흉년으로 집집마다 기근이 닥치고, 전쟁이 그치지 않고 요역이 기한이 없고 힘은 운반하는 데 다 쓰이고 몸은 도랑과 구덩이에 굴러 백성들이 시름에 잠겨 고통스러우니 이에 누가 가서 따를 것인가? 경내(境內)가 슬프고 두려워 그 폐해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머리를 돌려 내면을 보면 각기 생명을 보존할 생각을 품고, 노인과 어린이도 모두 혹독함에 탄식을 일으킨다. 풍속을 살피고 유주(幽州), 삭주(朔州)에 이르렀으니 무고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죄를 묻기 위해 다시 올 필요는 없다. 이에 친히 6사(六師)를 지배하여 9벌(九伐)을 행하고, 저 위태함을 구제하며 하늘의 뜻에 따라 이 달아난 무리를 멸하여 능히 선대의 정책을 잇고자 한다. 지금 마땅히 규율을 시행하여 부대를 나누어서 길에 오르되 발해를 덮어 천둥같이 진동하고, 부여를 지나 번개같이 칠 것이다.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갑옷을 살피고, 군사들에게 경계하게 한 후에 행군하며, 거듭 훈시하여 필승을 기한 후에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장잠 (長岑)·명해(溟海)·개마·건안 (建安)·남소·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 등의 길, 우(右) 12군은 점제(黏蟬)·함자(含資)·혼미(渾彌)·임둔(臨屯)·후성 候城)· 제해(提奚)·답돈 (踏頓)·숙신·갈석 (碣石)·동이 (東▣)·대방·양평(襄平) 등의 길로, 연락을 끊지 않고 길을 이어 가서 평양 에 모두 집결하라.─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
6월 기미(己未)에 수 황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행차하여 성과 못의 형세를 보고 여러 장수를 불러 잘못을 따져 꾸짖어 말하기를 “공(公)들은 자신이 관직의 높음을 가지고 또 집안의 지체를 믿고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으로 나를 대우하려 하느냐? 서울에 있을 때 공들이 모두 내가 오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은 병패(病敗)를 당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공들이 하는 바를 보아 공들의 목을 베려함이다. 공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 내지 않으니 내가 공들을 죽일 수 없을 것이라 여기느냐” 하였다.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