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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 洪履祥 가족사와 묘
시조는 고려 고종 때 국학직학(國學直學)을 지낸 지경(之慶)이다.
이 파는 조선 헌종 때의 세도가문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에 상신 5명, 문형 3명을 비롯,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모두 시조의 9대손인 이상(履祥)의 후손이다.
그의 아들 여섯이 모두 문과에 올랐는데, 이들 여섯 아들에게서 손자 11명을 얻었으며,
6대손에서는 140여 명으로 자손이 번창, 풍산홍씨의 세력 신장과 직결되었다.
여섯 아들 중에서도 넷째 영(霙)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영의 아들 주원(柱元)은 선조의 부마가 되었고, 주원의 큰아들 만용(萬容)은 숙종 때 예조판서,
만용의 손자 현보(鉉輔)는 영조 때 예조판서를 각각 지냈는데,
이 현보의 아들이 유명한 봉한(鳳漢)과 인한(麟漢)이다.
봉한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사도세자의 비이자 정조의 생모(生母)인
혜경궁(惠慶宮) 홍씨의 아버지이다.
이들 두 형제는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인한 궁중참변의 격동을 맞아 형 봉한은 부왕(父王) 영조의
실덕(失德)을 힐책하는 시파(時派)로, 아우 인환(좌의정)은 세자의 실덕을 규탄하는 벽파(僻派)로
갈리어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정조를 세손 때부터 보호한 사람이 국영(國榮)인데,
그는 주원의 둘째아들인 만형(萬衡)의 5대손으로 정조가 즉위하자 도승지와 숙위대장이 되어
세도정치를 휘두르지만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풍산홍씨의 대표적 학자로는 양호(良浩)와 만선(萬選)을 꼽는다.
양호는 당대의 뛰어난 학자요 문장가로 《영조실록》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중국의 석학들과 교유하고 돌아와 고증학(考證學)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지방관으로 있을 때에는 치산(治山) 식수에 힘썼고,
1764년(영조 40)에는 일본에서 벚나무를 들여와 서울 우이동에 심어 경승지를 이루게 하였다.
한편, 만선은 숙종 때의 실학자로 실학사상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그의 저서 《산림경제(山林經濟)》는 후일 실학 연구에 커다란 바탕이 되었다.
그밖에 회인홍씨에서는 윤성(允成)을 배출하였는데, 그는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2등이 되고, 예종 때에는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끝으로 부계홍씨의 인물로는 귀달(貴達)과 그의 두 아들 언충(彦忠) ·언국(彦國) 3부자가 유명하다.
귀달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웠으며,
예종 때에는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오례의주(五禮儀註)》를 개정하였다.
언충 ·언국 형제도 연산군 때 문장과 글씨로 각각 이름을 날렸는데, 언국은 특히 지조가 굳어
연산군이 그의 딸을 탐내어 입궁(入宮)을 강요하였으나 거절하고 거제에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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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 홍씨(?山洪氏) 〔풍산은 안동(安東)의 속현이다.〕
시조 홍지경(洪之慶)〔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감 직학(國子監直學)을
지냈다.〕
아들 홍간(洪侃)〔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사인(舍人)이었다.〕
홍간의 아들 홍유(洪侑)〔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이었다.〕
홍유의 아들 홍연(洪演)〔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이었다.〕
홍연의 6세손 홍이상(洪履祥)〔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이었으며,
호당(胡堂)에 뽑혔다.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홍이상의 조카 홍보(洪寶)〔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참찬(參贊)이었으며,
공신으로서 풍녕군(?寧君)에 봉해졌다.〕
홍이상의 손자 홍계원(洪桂元)〔선조조(宣祖朝)의 부마(駙馬)로서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졌다.
시호가 문의공(文懿公)이다.〕
홍이상의 증손 홍만우(洪萬遇)〔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사인(舍人)이었으며,
호당(湖堂)에 뽑혔다.〕
홍계원(洪桂元)의 아들 홍만용(洪萬容)〔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예조 판서(禮曹判書)였다.
시호가 정간공(貞簡公)이다.〕
홍만용의 손자 홍석보(洪錫輔)〔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判書)이었다.
시호가 충경공(忠敬公)이다.〕
홍현보(洪鉉輔)〔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판서(判書)였다. 시호가 정헌공(貞獻公)이다.〕
홍현보(洪鉉輔)의 아들 홍봉한(洪鳳漢)〔장조조(莊祖朝)의 국구(國舅)로서
영풍 부원군(永?府院君)에 봉해졌다.〕
홍석보(洪錫輔)의 아들 홍상한(洪象漢)〔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시호가 정혜공(靖惠公)이다.〕
홍상한의 아들 홍낙성(洪樂性)〔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이었다.〕
홍낙성의 아우 홍낙명(洪樂命)〔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제학(提學)이었다.〕
홍낙성의 아들 홍의모(洪義謨)〔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였다.
시호가 효헌공(孝獻公)이다.〕
홍의모(洪義謨)의 손자 홍우건(洪祐健)〔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참판(參判)·제학(提學)이었다.〕
홍상한(洪象漢)의 증손 홍석주(洪奭周)〔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좌의정(右議政)이었다.〕
홍석주의 아우 홍현주(洪顯周)〔정조조(正朝祖)의 부마(駙馬)로서 영명위(永明尉)에 봉해졌다.〕
홍만용(洪萬容)의 5세손 홍열모(洪說謨)〔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였다.
시호가 문헌공(文憲公)이다.〕
홍계원의 5세손 홍낙순(洪樂純)〔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이었다.〕
홍계원의 8세손 홍우길(洪祐吉)〔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였다.
시호가 효문공(孝文公)이다.〕
홍계원의 현손 홍양호(洪良浩)〔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대제학(大提學)이었다.〕
홍양호의 아우 홍명호(洪明浩)〔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였다.
시호가 효헌공(孝憲公)이다.〕
홍양호의 손자 홍경모(洪敬謨)〔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제학(提學)이었다.〕
홍양호의 아들 홍희준(洪義俊)〔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제학(提學)이었다.〕
홍명호(洪明浩)의 아들 홍희신(洪義臣)〔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였다.
시호가 익정공(翼靖公)이다.〕
홍이상(共履祥)의 현손 홍중효(洪重孝)〔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판서(判書)였다.
시호가 효민공(孝敏公)이다.〕
홍중효(洪重孝)의 아들 홍수보(洪秀輔)〔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판서(判書)였다.
시호가 정익공(貞翼公)이다.〕
홍수보(洪秀輔)의 아들 홍의호(洪義浩)〔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판서(判書)였다.
시호가 정헌공(正憲公)이다.〕
홍이상(洪履祥)의 증손 홍만조(洪萬朝)〔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였다.
시호가 정익공(貞翼公)이다.〕
홍만조의 아들 홍중징(洪重徵)〔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판서(判書)였다.
시호가 양효공(良孝公)이다.〕
홍이상의 10세손 홍우순(洪祐順)〔벼슬이 좌참찬(左參贊)이었다.
시호가 효정공(孝貞公)이다.〕
홍구 [洪龜, ?~?] ( 洪履祥 의 5대조)
고양입향조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에서 펼쳐지는 연회. 이제 겨우 한 살이 된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저고리와 바지, 그 위에 마고자와 쾌자(快子:명절이나 돌날에 아이들이 입는 옷-편집자 주)까지 걸치고서 중앙무대에 올랐다. 안면도 없는 아저씨는 마이크를 잡고 아이의 한 살 생일을 축하한다며 고함을 지른다. 그 목소리에 놀랄 만도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온갖 음식과 꽃 장식, 그리고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신기하고 재미있기에 아이 눈빛은 마냥 초롱초롱 빛이 난다. 이윽고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 중에서 무언가를 잡으라고 엄마가 난리법석을 피운다. 자꾸 재촉을 하니, 어쩔 수 없이 책에 손이 갔다. 그러자 눈앞의 어른들이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친다. ‘그래, 공부를 잘하겠구나,’ 하는 소리도
들린다. 앞에서 살펴본 요사이 뷔페식당에서 펼쳐지는 돌잔치의 장면과는 사뭇 다르지만, 돌잡이 풍속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그림 속의 아이는 방금 돌잡이를 했다. 오른손에는 책이, 왼손에는 붓이 쥐어졌다. 아마도 돌잡이를 막 끝낸 모양이다. 사랑채 마루에 앉은 아이 뒤에는 할아버지가 방에 앉아 담뱃대를 입에 물고서 건너편 아이의 돌잡이 결과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를 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가치이던
당시에 아이는 용케도 어른들 뜻을 잘 알아차렸다.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1549~1615년)이다.
할아버지는 증좌승지를 지낸 홍세경(洪世敬)이고,
아버지는 부사직을 지낸 홍수(洪脩)이며, 어머니는 백승수(白承秀)의 딸이다.
그러니 그림에서 담뱃대를 물고 있는 노인은 바로 홍세경이고, 오른쪽 앞에 앉은 이는 홍수이며, 왼쪽 앞에서 돌상 가까이 앉은 이는 어머니 백씨다. 그림의 주인공 홍이상은 실제로 만 서른 살의 나이(1579)에 3년마다 열리는 정기시험인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갑과로 장원급제를 하였다. 그러니 책과 붓을 잡은 돌잡이 결과는 29년 후 바로 현실이 된 것이다.
그보다 200년쯤 뒤에 살았던 단원 김홍도가 그린 것이니, 이미 돌잡이의 결과를 알고서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모당 홍이상 8첩 평생도(平生圖)』의 한 폭인 이 그림은 김홍도가 29세이던 1773년 9월에 후손의 부탁을 받고 와서(瓦署: 조선 때, 관에서 쓰는 기와나 벽돌을 만들어 바치던 관아-편집자 주)에서 숙직을 하다가 그렸던 것이다. 그러니 홍이상의 전모를 아는 단원이 돌잡이 장면을 그리면서 책과 붓을 양손에 쥐게 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하지만 홍이상의 할아버지가 담뱃대를 물고 있고, 마루 앞에도 장죽과 재떨이가 놓인 것을 보면 그림에 보이는 모습은 단원이 살았던 시기의 것이다. 여하튼 아이 홍이상은 바지 저고리에 쾌자를 입었고, 복건도 썼다. 허리에는 끈을 두르고 자수가 놓인 두툼한 주머니를 양쪽에 찼다. 발에는 수를 놓은 타래버선을 신었을 것이나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 앞에는 돌상이 놓였다. 그런데 그림이 훼손되어 그 전모를 살피기는 어렵다. 그래도 이 그림과 비슷한 구도를 하고 있어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다른 평생도를 보면서 돌상을 맞추어보면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보통 백설기, 수수팥떡, 쌀, 국수가 돌상의 대표적인 음식물이다. 아마도 아이 홍이상의 돌상에도 이들 음식물 중 몇 가지가 올랐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백설기와 수수팥떡은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 백설기는 그 색이 희기 때문에 앞으로 펼쳐질 아이의 인생이 깨끗하기를 기원하는 데서 돌상에 올랐다. 수수팥떡은 수수[고량(高粱)]와 붉은팥으로 만들었는데 그 색이 붉기 때문에 귀신을 물리친다고 여겨져 돌상에서 빠지지 않았다. 이 떡 역시 아이의 인생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돌잡히기를 할 때 아이의 손이 떡에 먼저 가면 어른들이 질색을 했다. 떡을 잡으면 미련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마도 떡이 지닌 점성으로 인해 총명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
듯하다. 아마도 여기에는 쌀이 담겼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쌀은 돈을 대신할 정도로 귀한 곡물이었다. 쌀은 재산을 상징했다. 그래서 만약 아이가 쌀을 집게 되면 부자가 될 것으로 여겼다. 그림에는 보이지 않지만 국수를 올리는 집도 있다. 국수는 그 긴 가락이 장수를 의미하기 때문에 돌잔치는
물론이고 혼례와 회갑 잔치 때도 단골로 등장하는 음식이었다. 남자아이나 여자아이 상관없이 책 붓 벼루 먹 흰실타래 대추 등이 앞의 음식물과 함께 오르지만, 활과 장도는 남자아이 돌상에, 바늘 가위 인두 따위는 여자아이의 돌상에 올랐다. 남자아이가 활과 장도를 먼저 잡으면 무관이 되리라 예측하고, 여자아이가 바늘이나 가위를 먼저 잡으면 바느질 솜씨가 좋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다른 의미에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송나라 주희가 편찬한 『소학(小學)』이란 책에 오른손잡이를 올바른 것으로 여기도록 했기에 왼편에 놓인 활과 장도를 아이가 잡기는 어렵다. 당연히 아이의 오른쪽에 책과 붓을 놓고 그것을 잡도록 했다. 문관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원망(願望)이 돌상에 표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다지 많지 않다. 아이 돌잔치를 거족적인 행사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요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높은 벼슬에 있던 아이 홍이상의 돌잔치는 너무나 조촐하다. 우리 풍속에 아이가 태어나서 21일째 되는 삼칠일에 겨우 친척과 이웃에게 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그만큼 아이의 생명부지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비록 삼칠일을 무사히 넘겼다고 해도 한 돌이 될 때까지 부모는 아이의 목숨 유지에 안절부절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돌잔치는 크게 할 듯하지만, 예전 사람들은 이것도 식구들만 모여서 해야 아이에게 좋다고 여겼다. 그만큼 새 생명이 사회적인 존재로 되기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험난한 과정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잘 커서 혼례를 치르게 되면 그제야 안심을 하고 동네방네에 알려서 큰 잔치를 했다. 그래서 그림에서도 보이듯이 아직 혼인하지 않은 숙부와 고모가 사랑채 마루에 앉았고, 마당에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하인들 중에서 아이를 둔 어머니와 아이들만 모였다. 각자 한둘씩의 아이들을 포대기에 싸서 엎고 오기도 하고, 품에 안고 와서 마루를 향해 축하를 보낸다. 더벅머리의 아이들도 이 광경을 재미있어 하며 본다. 아마도 돌잔치를 아이들 잔치라 여겼던 모양이다. 또 마당에는 삽살개와 암탉과 수탉이 잔치 분위기를 돋운다. 하지만 외부 사람들에게 아이의 한 돌을 알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랑채 대문에는 옻칠을 한 함지박에 보자기를 씌워 머리에 인 여자 하인이 막 들어서고 있다. 아마도 친척이나 이웃이 보낸 축하 선물인
듯하다. 그러면 주인집에서는 백설기를 함지박에 담아 되돌려 보냈다. 백설기는 백(百)을 의미한다고도 여겨서 백 사람에게 돌리는 떡이 되었다. 이렇게 백설기를 백 사람에게 돌리면 아이의 인생에 복이 있을 것으로 믿었다. 금붙이를 선물하고 그 답례로 뷔페식당에서 음식을 얻어먹는 요사이 돌잔치 풍속은 그야말로 최근 이삼십 년 사이에 생긴 풍속에
불과하다. 중국 한족들도 아이에게 돌잡히기를 시킨다. 예전에는 남자아이의 경우 음식과 함께 책 종이 벼루 주산 장부 장난감 등을 올렸다. 그 중에서 주산이나 장부는 우리와 다른 돌잡이 물건이다. 우리가 벼슬을 통해서만 출세를 기원했다면, 그들은 벼슬과 함께 장사를 잘하는 상인도 기대치에 넣었다. 그래서인지 중국 상인의 명성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자하다.
산다. 조선시대 조촐했던 돌잔치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기에는 세상 인심과 풍속이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文)을 으뜸으로 여겨 공과대학 가는 학생이 줄어드는 현실에서 돌잡이 물건에 펜치(pincher)나 드라이버(driver)도 올리자고 하면 너무 지나친 주장일까? [출처] 돌잔치 붓을 잡다| |
홍이상 의 양 조부모 世敬墓
생 조부는 洪禹甸
묘역맨아래에서두번째
홍영 [洪霙, 1584~1645] ( 履 祥 의 네째아들 )
秋巒公派祖 가 된다
홍이상 [洪履祥, 1549~1615]
본관 풍산(豊山). 자 원례(元禮). 호 모당(慕堂). 초명 인상(麟祥).
1579년(선조 12) 식년문과에 장원, 예조와 호조의 좌랑과 정언(正言)을 거쳐 수찬(修撰) ·
기랑(騎郞) ·교리를 역임하였으며, 집의 ·응교 ·직제학 ·동부승지 등을 거쳐 이조참의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예조참의로 왕을 서경(西京)까지 호종하여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의 사주를 받은 영남(嶺南)의 유생 문경호(文景虎)가 상소하여 배척하는
성혼(成渾)을 변호하다가 안동부사로 파천되고, 이어 청주목사가 되었다.
광해군 초에 대사간에 소명(召命)되고, 도헌(都憲) ·부제학을 거쳐 개성유수에 올랐다.
개성유수는 현재 서울시장 (정2품)
홍이상의부모 洪脩 墓
맨위 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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