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맛보고 그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여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 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자택 경교장 (京僑蔣)에서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7월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 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으며,
4월 의거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 졌다.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를 남겼다.
처음에 내 생명을 묻던 놈이 밤이 새도록 쉬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그 놈들이 어떻게 제 나라의 일에 충성된것인가를 알았다.
저 놈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 는 제 나 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 할수가 없고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백범 일지]
백범 김구(1876-1949)는 27년간 대한민국 입시정부를 이끌어 온 민족독립운동가요 해방된 조국 을
민족.통일.민주.문화의 바탕위에서 굳건히 세우려고 애쓰다가 비명에 가신 근대 한민 족의 큰
스승이시다. 백범의 가계는 안동 김씨로서 신라 경순왕과 고려 김방경의 후예이며, 파(派)의 시조
익원 공 김사형의 21세손에 해당된다. 그의 선대는 조선조에도 계속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방조
(傍祖) 김자점의 역모사건으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되자 그의 선조가 경기도 고양 을
거쳐 해주 서쪽 80리지점의 백운방이란 곳에 자리잡았다.
백범의 선조들은 낙향후에 양 반의 문화 생활을 멀리하고 짐짓 상놈의 행세를 하려고 역군토와
군역전까지 경작하였다. 이 같은 형편에서 이웃마을의 진주 강씨와 덕수 이씨로부터 멸시를
받아도 제대로 항변조차 하지 못했다. 초기 백범의 사상 가운데에 양반에 대한 분노와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는 집념이 강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가문의 형편이 이랬던 만큼 선대에는 불평객이 많았다.
백범의 아버지 순영(淳永)은 4형제 중 둘째로 의협심과 정의간이 넘치고 양반에 대한 저항심이
강한 분이었다. 그는 약한자를 돕고 자 주 대변하였으나 그런 일로 양반들의 미움을 샀다.
그가 도존위(면에서 세금을 거두 는 자리)의 직책을 수행할 때에는 양반들에게는 가혹하게 공전
(公錢)을 거두고 가난한 자들 에게는 자기가 대신 물어낼지언정 더 거두지는 않았다.
그 결과 3년이 못되어 공금에 축을 내고 사임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풍 곽씨(이름, 낙원)로
14세의 나이에 열살위인 신랑을 맞아, 17세 난산 끝에 백범 을 낳았다. 부모는 백범의 교육을 위해
자기 집에다 서당 선생을 모시기도 하고, 부친의 병환으로 학자금이 부족할때에는 이웃마을의
서당 훈장에게 간청, 무료로 교육시키 기도 하였다. 특히 모친 은 백범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다. 백범이 옥에 갇혔을 때 옥 바라지를 맡아 위로와 용기 를 주었을 뿐아니라, '안악사건'
으로 투옥되었을 때에는 "경기감 사를 하는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고 말함으로써 백범에게
큰 격려를 주었다.
일찍 죽은 며 느리를 대신하여 손자 인(仁)과 신(信)을 양육한 자정이며, 백범이 독립운동을
하는데에 지 장되지 않도록 두 손자를 이끌고 귀국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인내며, 왜경을 따돌려
버린 여성답지 않는 특유의 대담성과 지모(智謀)며, 백범이 일지(逸志)를 쓸때 그 자세한 연월과
일시를 일일이 자문할 정도로 만년에까지 간직한 총기등은 임정 주석 백범의 품격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백범은 1892년 과거에 낙방하는 것을 계기로 인생의 활로를 새롭게 모색한다.
그는 한때 풍수지리와 관상을 공부하였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l9세기 말의 민족적 수난을 감지하면서 동학에 입문한 백범은 최시형으로부터 황해도 팔봉접주로
임명받아 해주성 공격 에 앞장섰으나 청군의 철수로 실패하였고, 황해도 동학군의 자중지란으로
세력을 잃게 되자 안중근의 부친 태훈의 호의를 받아들여 부모를 모시고 청계동으로 들어가 잠시
우거하였다. 그는 거기서 일생동안 자신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친 척사위정(斥邪衛正)계의 유학자
고능선 을 만나 그의 섬세한 가르침을 받았다. 백범은 청계동을 찾아온 김형진을 만나 의기투합.
조국순례에 나선다. 그들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을 돌아 서간도 땅에 이르러 국경지역 주변에
거주하는 동족들의 어려움을 목도한다. 강계 부근에서는 김이언 부대를 따라 '국모'의 원수를 갚는
의병운동에 참여했으나 실패하였다. 청계동으로 돌아온 백범은 그가 없는 동안에 고능선의
요청으로 그의 손녀와 약혼이 이루어진 것을 알고 기뻐하였으나 김치경의 방해로 성혼되지 못했다.
백범은 다시 '방랑의 길' 에 올랐다. 이때 국내에서는 명성황후가 '왜놈' 들에게 시해당한 데다가
단발령 시행으로 백성들의 분기가 탱천하여 이곳저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방랑길' 에 오른
백범은 대동강 하류인 치하포 주 막에서 만난 일본인을, 그가 명성황후를 죽인 미우라(三浦誤樓)
공사이거나 그 일당의 하나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살해하였다. 그 일본인은 '육군중위' 쓰치다
(土田讓亮)였다. 이 일로 그는 해주 감영을 거쳐 인천감옥에 수감되었다.
백범은 재판을 받으면서그의 거사가 국모의 원 수를 갚기 위한 것임을 천명하여 관리들과
수감자들은 물론 인천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백범은 일본의 압력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국왕의 재가로사형집행은 면했다. 감옥 밖의 구출운동이 한계에 이른 것을 안 백범은
탈옥의 비상수단을 감행하였다. 탈옥에 성공한 백범은 삼남 지방을 주유하다가 공주 마곡사에
이르러 승려가 되어 원종(원 종)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탈옥에 따른 위험을 감추기 위해서는
승려로 신분을 위장하는것 이 좋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범은 평안도의 영천사 방주(방주)를 끝으로 일년여 동안의 승려생활을 청산하고 환속,
귀가하였다. 그에게는 민족을 위한 새로운 구상이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즉 그가 감옥에서
[태서신사]와 [세계지지] 등을 통해 깨달은 신지식에 의하면,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취했던 폭력의 방식이 아니라 민지를 깨우쳐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를 애국계몽운동에 나서게 하였다. l902년 부친상을 당한 백범은 그 이듬해
해상과 함께 예수교에 입교함과 동시에 구국교육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예수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예수교가 애국계몽운동에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와 잡학(雜學)에서 시작, 동학, 유학, 불교를 거쳐 예수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