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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적멸보궁 법계사 그 고행의길 9.4
법계사는 지리산에 수십군데의 사찰이 있지만 유일하게 走路上에 위치해 있고 또한 법계사를 산행중에 들리지 않으면 정신적 영적 포만감을 채울수 없는 필수통과 祈禱사찰이다. 법계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1450m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873번지 지점에 위치한 사찰로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이다. 寂滅寶宮이란 석가모니불이 『화엄경』을 설한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寂滅道場)을 뜻하는 전각으로, 불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이곳에서 적멸의 낙을 누리고 있는 곳임을 상징한다. 따라서 진신인 사리를 모시고 있는 이 불전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불사리는 곧 법신불(法身佛)로서의 석가모니 진신이 상주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적멸보궁의 바깥쪽에 사리탑을 세우거나 계단(戒壇)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불사리를 모신 곳이 많지만 그 중 대표적으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①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②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중대(中臺)에 있는 적멸보궁, ③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에 있는 적멸보궁, ④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에 있는 적멸보궁, ⑤ 강원도 정선군 동면 고한리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 등이다.
이 중 태백산 정암사의 적멸보궁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시대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불사리 및 정골(頂骨)을 직접 봉안한 것이며, 정암사의 보궁에 봉안된 사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서 통도사의 것을 나누어 봉안한 것이다.
법계사는 이렇듯 선조들의 기행문등에서도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 유명한 적멸보궁 사찰인데 법계사에는 또한 어사 박문수에 얽힌 설화도 갖고 있다. 박문수 어머니가 법계사에서 주목껍질을 벗겨서 즙을 짜서 밥을 지어 먹고 즙으로 목욕을 하면서 천일기도를 올렸는데 정성이 지극해 부처의 어머니인 문수보살이 아들을 하나 점지해 주겠다 해 자식을 얻어 낳은 아들이 바로 박문수라고 한다. 문수란 이름도 문수보살을 의미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대한민국이 일본과의 숙명적 관계를 유지하며 오랜 역사를 보내왔듯 법계사도 마찬가지로 일본과의 전란 때마다 수난을 겪어 왔던 것이다.
법계사 연혁 안내판 적멸보궁 법계사 현판
법계사 최초의 수난은 고려 우왕 6년(1380) 9월에 왜구의 방화로 크게 불탄 것이다 남원의 황산전투에서 이성계장군에게 크게 패한 왜구들이 황급히 지리산으로 도망가면서 불태웠던 것이다. 그후 조선시대에 재건돼 많은 불자들의 기도처로 이용돼왔으나 1908년 지리산이 항일 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박동의의 의병부대가 덕산에서 패한 뒤 법계사로 후퇴, 계속 항전을 벌일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두번째 화마에 휩싸이는 수난을 겪었다. 이와 함께 법계사는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겪으면서 지리산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토벌군이 대원사와 함께 불태워 세번째의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이 그것이다.
역사의 아픔과 함께 수난을 감수하면서도 오늘에 이르기 까지 지리산과 더불어 우리와 호흡을 같이하는 법계사는 이 같은 연유에선지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이 亡하고 법계사가 망하면 일본이 興한다는 얘기가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선지 그 맥을 끊기 위하여 일제시대에 전국 명산 대부분 특히 서울 경복궁 인근에 있는 진산에 수십개를 박았고 법계사와 천왕봉에도 2개의 쇠말뚝을 박았다 그래서 지난 2005년5월1일과 2006년10월3일에 뜻있는 산악인들과 법계사 스님들이 이를 제거하고 그 실체를 법계사 법당 밖에 보관 전시 중에 있다.(사진참조)
이제 비천스님에 대하여 보따리를 풀어보자. 박두봉(법명:비천) 감독이 86년 1월 초 속세를 떠나 입산수도 했던 곳인데 실연은 아닌 것 같고 군대가서 고무신도 아니고 그 사연이 대략 이러하다
남해의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대 원예과에 합격을 했다. 동네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ꡒ우리동네 학생이 대학에 붙었으니 소잡아 동네잔치 해야겠네ꡓ 하고 만나는 동네사람마다 축하인사고 찬사가 온동네를 메아리 쳤다. 어머님께서 하시는 말씀, ꡒ한 마리 있는 소 팔아가지고 등록금 해라ꡓ 시골의 전 재산인 소를? 이제 합격의 기쁨보다는 등록금을 걱정해야하는 또 다른 고민에 빠질 즘, 재수하여 대학을 가되 家長을 이어받을 대장부로서 집안에 부담을 안주고 가는 방법,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에 한두번 지리산종주를 해본 경험이 있는 천왕봉 법계사에 무작정 입문하기로 하고 묵어도 좋다는 명문스님 의 하명을 가다리는 중 ꡒ여기는 요양하는 절(등산객 출입빈번)이지 참선하고 공부하는 절은 아니니 내가 적당한 곳을 소개해 줄터이니 이 서찰을 가지고 가게ꡓ 이래서 동문 수학생이던 문경의 최도사와 함께 찾아간 곳이 화엄사 위에 있는 구층암이었다. 구층암은 대웅전과 선방이 따로 분리되어 있고 첩첩산중이라 찾아오는 손님이라곤 절간스님들과 공부하는 학생 열에 한두명 뿐, 문경의 최도사와 독방을 얻어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공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가만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니 서울 SKY대 수험반과 고시반 수험생들이었다. 공부하는 태도를 보니 아침 저녁으로 공양시만 볼까 하루종일 공부방에 들어가면 두문불출, 우리는 방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으면 좀이 쑤셔 한 식경(食頃 밥을 먹을 동안의 시간 1~20분)을 넘기기가 어렵고 공부방에서 장난치고 씨름하고 하는 우리는 대학입시 후보생이요, 자아 들은 그때만 하더라도 공부의 최고의 경지, 고등고시를 쪼우는 공신(공부의신)이니 공부하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고시공부에 방해가 될꺼라는 자격지심에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자 공신에 들어간지 3일만에 법계사로 원대복귀 했단다.
ꡒ그래서 명문스님한테는 뭐라고 했나요?ꡓ
공부방도 없고 명문스님이 보고 싶고 건강이 걱정되어 되돌아 왔다고 했다나! 구관이 명관이라고 그래도 법계사가 좋고 정이 들어 명문스님을 봉양하고 석이버섯을 3가마니를 따서 명문스님 탕제해 드리면서 더덕이며 산삼캐러 지리산일대를 이 잡듯이 돌아다닌 적 엊그제 같은데 벌써 26년이 지났다. 하루는 중산리에서 기와장 불사를 하는데 가로세로 40㎝, 3㎏ 짜리 기와장을 법계사까지 운반하는데 장당 7000원 한짐에 8장정도 하루에 오전에 2번 오후에 2번 하루 일당이 20여만원, 한달만 고생하면 등록금 벌고 공부도 하고 2마리토끼를 잡을수 있다는 불쌍한 어린중생의 가냘픈 마음, 땡초가 수도 공부는 안하고 잿밥에 유혹되었던일, 법계사는 사람의 출입이 많다. 부산의 모 대학에서 30여명이 MT를 하필 법계사로 왔는데 그만 이친구들과 어울려 밤새도록 놀고, 곡차 한 말이나 축내며 그중에 마음이 가는 여대생과 눈이 맞아 법계사 달밤에 데이통하는 이 108번뇌를 어찌할꼬, 중생의 유혹을 멀리하고 공부에 정진하여 장학생 되기를 맹세하고 입산하였건만 공부에 길은 멀어지고 세월만 흘러 가을이 되는 그해 9월 추석 전에 도사는 되지못하고 반도사가 되어 하산하고 말았던 박두봉의 전설! 믿거나 말거나, 그때 신부를 했으면 지금 조계종 총무원장 밑에서 비서실장 길을 걷고 있을 비천스님, 아! 아! 안타까운 운명이로고, 마라톤 감독은 못하고 있을지라도! 아마 그랬으면 우리랑 상종이나 할낭가, 모르는체 하겠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ㅠㅠㅠ
법계사 바로밑에 있는 로타리 대피소 지리산종주 마지막 대피소 사회봉사단체인 로타리클럽에서 1978년도 회비를 모금하여 환경부에 기부 체납한 것이 로타리 산장이다. 여기서 물 한바가지 얻어먹고 삼거리 기로에 섰다. 왼쪽으로 가면 순두류 자연학습장 해서 5.4㎞요 오른쪽으로 가면 문창대, 칼바위로 해서 3㎞, 조금이라도 거리가 짧은 칼바위쪽으로 가자하니 누구도 의의를 거는 대원이 없어 내려오는데 『약은쥐 밤눈이 어둡다』고 소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못한 결과, 이제는 엎지러진 독 물담기, 회군은 안되고 계속 내려가야 한다. 왼쪽은 거리는 머나 차량통행이 가능하고 오른쪽은 거리는 짧으나 끝까지 걸어서 죽기살기로 내려와야 한다는 사실을 중산리 휴게소 식당에 내려와서야 알았다.
법계사에 보관중인 쇠말뚝 (자료사진) 가을국화 구절초
그런데 이 코스가 「사람잡는 마의 비탈 언덕 미끄름 빙판길」이 기다리고 있는 줄 꿈엔들 알았을까? 여기에다 장마철 안개비로 하산길 노면은 스키장 노면과 진배가 없으니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힘든, 그리고 기고 기어서 고난의 하행길을 50분을 허우적거리다가 무식한 용감한 녀석들이 되었다. 무릎인대가 파열된 줄도 모르고 기어서 장터목으로 올라가는 칼바위 삼거리까지 내려왔다. 올라가는 나그네에게 ꡒ휴게소 얼마나 남았지요ꡓ 하니 ꡒ곧 다되어 갑니다ꡓ. 한다. 곧 다되어 간다는 소리는 무슨말인가! 0.5㎞, 1㎞, 2㎞인지 도저히 알수 없으나 곧 다되어 간다고 하니 마음은 가볍다. 20분 전부터 계속 따라오는 폭포소리 시냇물은 하이얀 거품을 내며 성을 낸다. 빨리 빨리 내려가지 않고 뭐하냐고 바로 앞에 두개로 갈라진 칼바위가 나무밑에 서서 길을 안내를 하고 있다.
한편 박견태 조장은 지리산 천왕봉에 모처럼 등산한다기에 목욕재계하고 몸을 정히 할 양으로 이발하고 손톱,발톱다 깍아 상당히 신경을 쓰는중 왼쪽 엄지발고락 엄지발톱 귀팅이를 손질하다 발톱은 안짜리고 살점을 짤라버렸단다. 소독은 했지만 이게 덧이 나서 올라 갈때는 여성대원들 앞이라 소리는 못내고 그런대로 참을 만 했단다. 천왕봉에서 종주팀 오기전에 조은데이 정복주 서너잔하고 막걸리까지 두어순배 돌리고나서 한 20여분 있으니 이제 발꼬락이 성을 내어 욱신욱신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사나이 체면에 이정도야 하며 하산을 시작할 때 법계사 까지는 그런대로 참아가며 내려왔단다. 본격적인 비탈길 칼바위 방향으로 후미조에서 김영표대원,윤정아대원,황인교대원 함께 내려올때 성한 사람도 기어서 내려올판에 욱신거리는 왼쪽다리가 땅에 닿을 때마다 아파 미칠 지경이다. 명세기 등반조장인데 119 산악구조대 부를 수도 없고, 스틱을 간신히 짚고 내려오면서 한국에 현존하는 욕을 다 동원하여 발꼬락 보고 고함을 지르고 욕을 퍼 부우면서 천신만고 끝에 내려왔다는 전설, 그 고통을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필자도 이길은 10년만에 내려오는 길이지만 그 때는 중산리 왕복이니 그냥 따라서 내려왔지만 오늘은 지리산 종주 35㎞ 참으로 힘들다 야영장이 보이고 건물들이 보인다 다왔다. 큰길까지 내려와서 소피를 보고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10분 있으니 조봉수대원과 박견태 중간조 일행이 연이어 도착한다. 다시 합류하여 500m 더 내려가 중산리 휴게소 식당에 도착했다. 17시 41분, 35㎞를 드디어 완주,아침 1시부터 시작한 지리산 종주는 이렇게 끝이 났다.
벌써 도착하여 하산주를 먹고있는 이상만,하청두,류옥희,김석년,정호득 그리고 곽길심아내와 아들 문영호 그리고 여자친구 박지혜가 환영을 하고 좀 쉬었다가 단체 기념촬영후 울산팀은 먼저 출발을 하고 오늘의 마지막 하산주 막걸리 한 잔을 폼잡고 한순배 쭉 들이켰다. 캬 ^^^ 그리고 천왕봉 계곡 얼음물에 몸을 씻고 한숨돌리니 우리를 태운 승합차는 쏜살같이 냅다 달려 60분 만에 해단식이 있는 남해설천면 어부촌 횟집에 도착했다. 우리는 여기서 해단식을 핑게로 맥주와 소주를 500ℓ 냉장고 다 비우면서 모든 회포를 통행금지 직전까지 풀었다는 전설.
다음호 제19최종회로 계속 다음호 주제: 19. 지리산을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12.9.7
첫댓글 법계사까지 왔습니다. 중산리까지 왔습니다
이제 하산주 한잔 하자 아이고 되다! 아줌마 도토리 묵에 막걸리 한 말
숨 차게 달려왔네요!! 하산주에 행복한 하루 였읍니다.
아~! 글씨(거시기) 문경 최도사는 그 질로 부산 범어사(승가대학4년)로 고행수행 끝, 대평스님으로 수계 받아 지금껏... 번뇌와 싸울터...
우리네 인생사 세옹지마 / 일장춘몽 이더이 굳지...명예도 부도 거느리기 힘든세상! 이라면... 마음심 움직여 행복한 삶이라도 쫓읍세다.
지리종주겨울산행추진본부 * 화엄사 구청암이 아니라 구층암임다. 그 구층암의 자랑꺼리는 자연 그대로의 모과나무 기둥과 앞 마당에 살아 있어되...수령을 알 수
없는 괴목 같은 모과나무가 기억에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