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덕희의 說,수다,talk> 중에서 |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어학 연수를 앞둔 딸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조차 없어서 |
엊그제 그런 시간을 따로 가지게 되었다. |
그래 봐야 예쁘고 바르게 커줘서 고맙다는 말과 미국에 가서도 열심히 생활하기 바란다는 |
다른 엄마의 부탁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그런 이야기지만 단둘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
하지만 그날 난 너무 많이 커버린 딸 때문에 가슴 저린 감동을 또 받았다. |
늘 바쁘게 돌아다니는 내게 |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디자인하고 난 내 인생을 디자인해서 멋지게 살아야 한다'던 아이가 |
어느 새 멋있는 숙녀가 되어 있었다. |
"엄마, 난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자랑스러워요." |
딸은 이런 말을 하더니 내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심각해졌다. |
"엄마, 난 엄마를 너무 사랑하지만 아무것도 갖지 못한 것 같은 아빠가 늘 마음에 걸려요. |
아빠는 돈도 못 벌고 우리한테 아무것도 해준게 없다는 이유로 너무나 기가 죽어 있잖아요. |
힘없는 아빠를 보면 전 마음이 아파요. 그래서 이번에 미국 갈 때 아빠한테 편지를 쓰려고 해요. |
아빠가 그렇게 곧은 모습으로 우리 옆에 계셨기 때문에 우리가 바르게 클 수 있었다구요. |
아빠가 계셔 준 것만으로도 저희는 힘이었고 자랑이었어요." |
난 성숙한 딸의 말을 듣고 입을 떠억 벌릴 수밖에 없었다. |
내 딸이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랐구나 싶었고, |
난 더 감사하고 더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요즘은 세상이 모계 사회로 회귀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자들의 기운이 강해서 |
어딜 가나 기를 못 펴고 사는 남자들을 많이 보게 된다. |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들도 어떤 면에서는 가부장제의 억울한 희생자들이기도 하다. |
그들은 가부장 사회에서 그런 교육을 당연한 듯이 받았기에 여자의 위치를 인정할 줄 모르기도 하고, |
자기 중심으로 사는 게 당연하다는 식이다. |
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만이 큰 힘을 실어주기 때문에 |
돈을 제대로 벌어주지 못하는 남자가 비실거리는 것도 당연지사이다. |
결국 남성 우위의 사고방식으로 돈도 제대로 못 벌어주는 남자는 |
어떤 가정에서도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져 가고 있는 셈이다. |
아버지에 대한 식구들의 은근한 왕따가, 많은 가정에서 은연중에 이루어지고 있다. |
아버지는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고, 아버지는 집안일을 아는 게 없다. |
아버지는 돈만 잘 벌어다 주면 되고, |
아버지는 어떤 짓도 저지르지 않아야 하고 깊이 알려고 해도 안 된다. |
그저 아버지는 아침 일찍 나갔다가 될 수 있으면 늦게 들어오는 게 좋고, |
주말에도 집에 없는 게 나은 존재인 것이다. |
하지만 내 딸의 말처럼 아빠가 꼭 돈을 벌어야만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
지금 이 날 이 시간까지 돈이라고는 별로 벌지도 않았고, |
공부하기만 더 즐겼던 남편을 난 한 번도 드러내놓고 욕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
그것은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그렇게 늙어가는 남편이 예뻐서가 아니라 |
건강하게 나를 지켜보며 살아주어서 고맙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기 때문이다. |
만일 지금이라도 남편이 병 들어서 드러누워 있기라도 한다면? |
생각할수록 끔찍한 일이다. |
그런 일이 생겼을때 내가 남편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내 자신도 할 수가 없다. |
그런데 남편은 건강하게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
내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으면서... |
난 남편이 젊은 날, 아무 보잘것없는 나를 데려다 호강시켜 주고 |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준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
때문에 가끔 남편이 내게 미안한 얼굴을 할 때마다 남편에게 당당하게 말했었다. |
"괜찮아요, 여보. 당신은 젊을 때 나한테 저축을 많이 해줬잖아. |
난 지금 당신이 해준 저축을 갚는 중이에요." |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여성들은 '괜히 착한 척하고 난리야'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
착한 척하는게 아니다. |
난 인생이 저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
또 집안에서 설 곳이 없고, 기댈 곳이 없어서 식구들 곁을 겉도는 남편이 되게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
만일 아빠가 그런 모습으로 존재한다면 아이들 가슴이 그늘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고, |
난 그런 기억을 애들 가슴에 남기고 싶지 않다. |
때문에 남편이 아프지 않아서 고맙고, 내게 잔소리하지 않아서 감사하고 그렇다. |
어쩌면 내 딸도 그런 나를 보면서 아빠에게 한없는 연민을 가졌었는지 모른다. |
"엄마, 아무 걱정 하지 마세요. 내가 얼마나 아빠랑 엄마를 사랑하는지 아시겠지요?" |
딸과 기울이던 소주잔 속으로 내 눈물 한 방울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듯했다. |
"고맙다. 넌 나보다 더 행복한 여자가 되어야 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