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證道歌 무비스님 문수원 강의 9강
(30.從他謗任他非하라~33.不因訕謗起怨親이면)
그래서 이물응기종불린(利物應機終不恡) 이라 그랬어요. 이건 이제 물(物) 중생들이죠,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근기에 맞춰 주었다, 응기(應機) 근기에 응한다 이말이예요. 사람들 따라서 근기에 맞춰 가지고서 어떤 도력을 베푼다, 불법을 전한다, 지혜의 가르침을 펼쳐서 인생을 슬기롭게 살게 한다든지 하는 그런 일에 마침내 아낄 것이 아니다. 다하지 않는다.
아낌이 없다 이런 말입니다. 이물응기(利物應機) 깨달음의 그 도리를 가지고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니까 그게 무슨 뭐 아낄 게 있습니까? 아낄 일이 아닌거죠.
三身四智體中圓이요
(삼신사지체중원이요)
삼신과 사지가 내 마음 가운데 원만히 갖춰져 있고
삼신사지체중원(三身四智體中圓)이요 팔해육통심지인(八解六通心地印)이라. 그런 깨달은 그 입장에서는 삼신사지, 삼신이라고 하는 것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神)이지요.
사지라고 하는 것은 또 네 가지 그 지혜로서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 이런 등등 그 깨달음은 뭐 하나의 지혜다 이렇게 이해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또 그것을 좀더 세분해서 아주 큰 거울과 같이 안 비추는 게 없다, 하는 그런 입장에서 대원경지다,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지혜다.
그리고 평등한 성품,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성품이 있다고 하는 거, 그 평등의 이치를 그대로 꿰뚫어서 아는 그런 지혜다.
그리고 묘관찰지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잘 관찰한다, 묘하게 관찰한다, 아주 슬기롭게, 무엇이든지 다 꿰뚫어 보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누구를 안다, 아니면 뭐 어떤 사물을 안다 하면은 그 사물의 전후의 인연들을 환하게 관찰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또 마음이 열려놓으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소작지라, 그다음에 지을 바의 어떤 일을, 할려고 하는 만약에 어떤 일이 있다면은 그 일을 아주 제대로 성사시키는 그런 지혜, 어떤 계획을 세운다든지 어떤 일을 치루는데 이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라고 하는 그런 문제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서는 그것도 마음을 깨달은 이 일로 인해서 말하자면은 지혜가 거기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八解六通心地印이라
(팔해육통심지인이라)
팔해탈과 육신통도 본래로 마음 땅에 모두 있네.
팔해육통심지인(八解六通心地印)이라. 팔해라고 하는 것은 여덟가지 해탈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도 깨달은 사람이 누리는 그 해탈을 여덟 가지 입장에서 세분화 해 보는 것입니다.
육통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통이죠. 천안통 천이통 뭐 숙명통 누진통 등등 신족통 이런 등등의 여섯 가지 신통, 그걸 깨달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것이 마음껏 다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인이다 그랬어요.
마음 땅의 도장이다. 다 그대로 도장의 무늬가 다 드러나 있다 이것입니다. 그걸 쓰던지 안쓰던지 하는 것은 별 문제이고.
삼신과 사지는 우리의 심체 가운데 원만하고 그 다음에 팔해탈이라든지 여섯 가지 신통이라든지, 그러니까 해탈, 또는 신통 이런 것들은 전부 마음속에 그대로 딱 박혀 있다. 언제든 도장을 꺼내서 찍으려면 찍을 수 있듯이 그러면 그 도장 무늬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마음속에 다 갈무리 되어 있다.
上士一決一切了하고
(상사일결일체요하고)
상근기는 한 가지를 해결하면 일체를 다 해결하고
상사(上士) 일결일체요(一決一切了)하고 중하(中下) 다문다불신(多聞多不信)이라 그랬어요.
상사(上士)는, 상사는 이제 상근기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건데 이 상근기는, 상사는 일결일체요(一決一切了)야, 한 번 결단하면 거기에 일체를 다 마친다. 그러니까 마음 한 번 딱 돌이키면은 거기에 전부 불법 전부가 다 딸려 오는 것이지 어느 부분은 남겨놓고 해결하고 하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까 한 번 깨달아서 다 깨닫는 거고 한 번 들어서 아 이 불법이 참 너무 틀림없는 진리다 확실한 진리다, 이렇게 딱 되면 다시 뭐 여부가 없는 거죠.
그대로 다 수용하고 들어가는, 그런 입장을 말하는 것이고
中下多聞多不信이라
(중하다문다불신이라)
중근기 하근기는 그렇게 많이 들어도 믿지를 않네.
중근기 하근기는 다문다불신(多聞多不信)이라 많이 들어도 많이 그 들은 대로 믿지를 않아, 들어도 믿지를 않는다.
그래서 노자 도덕경 같은 데서도 보면은 상사문도(上士聞道)에 근이행지(勤而行之)라 상근기는 도가 있다면 도의 이치를 들으면은 그건 눈에 보이는게 아니니까, 막연하거든요. 사실 도 도, 뭐 진리, 법 언필칭 하는 소리지만은 그게 사실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설명으로 듣고 아니면은 먼저 간 사람들이 기록해 놓은 이런 깨달은 사람들의 생각, 깨달은 사람의 말씀을 이렇게 보고서 마음에 탁 와 닿는다고 하는 것은 그건 쉬운 게 아닌거죠. 그게 일결일체요라.
마음에 딱 결정이 되는 거지. 아 그거 뭐 도 보나마나 당연한거라고 이렇게 이해 한다는 거지. 그래서 상사는 문도에 근이행지라. 부지런히 행한다, 부지런히 그 도를 행한다.
그 다음에 중사문도(中士聞道)에 약존약망(若存若亡)이라
중근기는 어떤 도에 대해서 들으면은 그런가 저런가 그거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긴가민가 이렇게 여겨지는 게 중근기라는 거예요.
그다음에 하근기, 하사문도(下士聞道)에 대소지(大笑之)라, 크게 웃는다 비웃는다 이거예요.
하근기들은 그 뭐 그런 아니 이 몸뚱이 갖고 먹고 사는 것 밖에 뭐가 있느냐? 너무나도 유물론자 같은 그런 견해에 떨어진다는 거지.
그래 어떤 정신세계에 대한 것, 어떤 정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해가 통 안 되는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비웃는다는 거죠, 뭐 전생이 있느니 내생이 있느니 이런 소리들도 전혀 납득이 안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하사불소((下士不笑)면은 하근기들이 비웃지를 아니하면은 부족이위도(不足以爲道)니라 족히 도가 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들도 있고 그래요. 요런 이야기들은 뭐 도처에 늘 있는 말이죠.
그리고 다문다불신(多聞多不信)하는 중하(中下) 근기가 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또 그렇습니다.
‘가히 더불어 말할만한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면은 사람을 잃고, 말해서는 안 될 사람에게 말을 하면은 말을 잃어버린다.’ 그러니까 먹히지도 않을 사람에게 자꾸 이야기를 하면은 괜히 말만 잃어버리는 거예요. 말만 잃어버린다.
물론 어느 정도 조금 관심을 기울인다면 거기는 효과가 있겠지. 그렇지만 그것도 아닌 경우에는 말을 잃어버린다.
그런데 정작 제대로 알아들을 사람, 말이 통할만한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면 그건 사람을 잃는 일이된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할 자리에는 당연히 하고, 하지 아니할 자리에는 당연히 안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 옛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但自懷中解垢衣언정
(단자회중해구의언정)
다만 스스로 마음 가운데서 때묻은 옷을 벗어 버릴지언정
단자회중(但自懷中)에 해구의(解垢衣)언정 수능향외과정진(誰能向外誇精進)가 또 이런 이야기를 해놓고, 다문다불신이란 말을 해놓고, 또 당신이 깨달은 그 경지를 어떻게 자랑할 수도 없는거죠.
자랑할 수도 없고, 자기 속에 이렇게 참 「증도가」나 이렇게 지어서 읊조리면서 스스로 음미할 뿐이지, 그걸 뭐 크게 밖으로 내보일 일이 아니다. 내보인다고 해서 통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제 이런 말이 나오는 거지.
다만 회중에 가슴 가운데 스스로, 다만 스스로 내 가슴속에 해구의라, 때 묻은 옷을 벗어버린다. 번뇌를 벗어버린다는 거죠. 때묻은 옷이란 게, 벗어버릴지언정
誰能向外誇精進가
(수능향외과정진가)
누가 능히 밖을 향해서 정진을 자랑할 것인가.
수능향외과정진(誰能向外誇精進)가 누가 능히 밖을 향해서 정진을 자랑할 것인가?
내가 정진하고 내가 어떤 깨달음의 경지 그걸 내 속으로 그냥 내 때 묻은 옷을 벗어버리고 내 어떤 도의 낙을 즐기는 것이지 그걸 뭐 어떻게 자랑하고 자시고 할 그런 처지는 아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밖으로 자랑할 게 아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또 영가스님의 마음을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애요.
참 고생고생해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는데 그걸 말하자면은 자랑도 하고 싶겠죠. 자랑도 하고 싶고 누가 좀 알아줬으면도 싶겠고. 아직은 중생으로서의 어떤 그 보통 인간으로서의 업(業)이라든지 습(習)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있을테니까.
그래서 조사스님들은 부처님을 약야산중봉자기(若也山中逢子期)런들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리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도를 깨닫고 밖으로 시내로 내려와 가지고 뭐 베나레스에 와가지고, 녹야원에 와가지고 뭐 알아달라고, 설법한 것은 결국 자기 알아달라고 하는 소리라 이렇게 표현하는 조사들이 있어요.
약야산중(若也山中) 도를 깨달을 때 만약에 산중에서 봉자기 (逢子期) 자기라고 하는 사람은 종자기라고 해서 지음자죠.
말하자면은 거문고를 잘 타는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종자기라고 하는 사람이 잘 알아주었다. 그와 같이 자기의 깨달음의 경지를 알아줄 사람이 있었더라면 석가모니도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거예요.
황엽(黃葉), 황엽이라고 하면은 경전이거든요. 경전을, 어찌 황엽을 가지고 산에서 내려왔겠는가?
‘약야산중봉자기(若也山中逢子期)런들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리요.’
아주 조사스님들이 부처님의 하산, 도 깨닫고 하산한 데 대한 어떤 평이라고 할까, 찬이라고 할까, 평이라고 해도 좋고 찬탄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조사스님들이 하는 말은 평도 찬이요 찬탄도 또 평이 되거든요.
제대로 평한 것은 또 좋은 찬탄이 됩니다 사실은.
그래서 비판이라는 말은 잘 안 쓰지요 그냥 평이니 평찬이니 또는 찬탄이니 이런 말은 씁니다.
그렇듯이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누가 알아주는 것, 그거 참 필요한거 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영가스님의 그런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뭐 오직 고생했었어야죠. 밤낮없이 경전을 뒤척이기도 하고 천태종에서 아주 깊이 교학을 연구하기도 하고 참 뼈를 깎는 정진을 하기도 하고, 그렇게 했으니 이런 말이 나올 본도 하죠.
그러면서 또 자위하는 말로 단자회중(但自懷中)에 해구의(解垢衣)언정 내 가슴속에 때묻은 옷을 처리하는 일이지 뭘 그걸 또 정진이라고 자랑할만한 것이 있는가 이런 말 자체가 벌써 그런 어떤 인간적인 감정과 연관이 있는 표현들이죠.
從他謗 任他非하라
(종타방 임타비하라)
다른 사람이 비방하고 헐뜯는데 맡겨 두어라.
종타방임타비(從他謗任他非)하라 파화소천도자피(把火燒天徒自疲)로다, 사람들이 또 젊은 사람이 깨달아 놓으니까 또 천태종, 지금 같이 그렇게 종파가 심하게 갈라져 있는지 어쩐지 지금이야 뭐 크게 심하게 학문적인 걸 가지고 크게 심하게 따지지는 않습니다만 옛날에는 그런 것을 사상적으로 굉장히 따졌어요.
어떤 경우에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이다 또는 수화상봉(水火相逢)이다 물과 불이 서로 만난 격이다, 그러니까 종파가 다르고 서로 사상이 다른 사람들끼리 만나면은 불교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수화상봉이다 물과 불이 서로 만나면 서로 죽는 도리다 이거예요.
그런 입장으로 말하자면 사상의 대립, 그런 대립에 대해서 아주 첨예했던 그런 시기가 많이 있었어요. 사실은.
왜 그런고 하니 모든 것을 다 인간적인 것을 포기하고 이 분야에 열중하는데 그것이 틀렸다 하고 또 그와 서로 상반되는 어떤 사상을 가진 집단과 그런 사상가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날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어요.
그건 왜 출가한 사람이 아량을 갖고 수용하지 못하느냐 이런 생각도 할 수가 있는데, 모든 것을 다 포기했기 때문에 거기에 모든 전 삶의 가치가 달려 있기 때문에 또 그렇게 첨예한 대립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것도 우리가 이해하려면 하는 거죠.
그래서 이분도 천태학의 아주 촉망받는 후계자였다고나 할까요, 사상가였었는데 선종에 가가지고서 깨달았다 해가지고 육조스님 제자가 턱 돼 놓으니까 얼마나 비난이 많았겠습니까?
욕설도 많고, 지가 깨닫기는 뭘 깨달았어, 깨달았으면 깨달았지 배은망덕하게 뭐 별별 소리가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 종타방임타비(從他謗任他非)하라. 저 딴사람이 비방하는데 종(從) 맡겨둬라, 또 타비(他非) 다른 사람이 그르다 하는데, 저 방(謗)자는 무턱대고 하는 비방이라면은 요거는 이 사람이 잘못됐다고 하는 말, 그 주장이거든요.
비(非)자는 그르다, 저사람이 잘못됐다 큰일났다, 라고 이렇게 치부해 버리는 그런 입장을 비(非)라고 그렇게 이제 봅니다. 저기는 그런 것 관계없이 무조건 비방하는 입장이고.
그래서 비방하는 사람은 비방하는 대로 맡겨두고 나보고 잘못됐다고 하는 사람은 잘못됐다고 하는데 맡겨두라.
그래봤자 그들이 하는 일은
把火燒天徒自疲로다
(파화소천도자피로다)
마치 불로써 하늘을 태우는 일이라 스스로 피로할 뿐이로다.
파화소천도자피(把火燒天徒自疲)로다 마치 불을 잡고 하늘을 태우는 격이다. 파화소천(把火燒天)이다 이거야, 불을 잡고 하늘을 태우는 격이다. 그래봤자 하늘이 탈 리도 없고 그러니 태우는 사람만 피로할 뿐이다, 한갓 스스로 피로할 뿐이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도 그랬거든요. 참, 삼십오세에 깨닫고 베나레스라고 하는 부다가야에서 베나레스, 바라나시라고도 하는데 거기에, 종교의 도시거든요.
지금이나 삼천년 전이나 똑같이 거기는 종교의 도시입니다. 뭐 인도 전역이 참 다종다양한 종교가 많지만은, 특히 그 베나레스는 종교의 지도자급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거든요.
그래 부처님도 거기에 왔다고요. 거기에 와서 빛을 봐야 비로소 종교가로서 인도에서 성공하는 거야.
이걸 불교적으로 또 전통적으로 부처님을 뭐 우상시 하는 아주 신성시하는 그런 입장으로 그려놓은 데는 그런 사회적인 어떤 입장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표현을 했지만은 우리가 또 어떤 역사성을 가지고 관찰을 하면은 그런 면이 있거든요.
이 불교라고 하는 것도 인류문화사적인 차원에서 보면은 어떤 정신문화의 많은 정신문화 속에 그 중에 하나라고요 사실은.
인도에서는 소위 인도에 있는 모든 종교를 합해 가지고 힌두교라 인도교라 그러거든요. 그럼 그 속에 불교가 다 들어 있다고요. 재판까지 했잖아요. 불교가 힌두교 안에 있는 거냐 아니면 독립된 특정한 종교냐 재판까지 한다고요 인도에서는.
지금도 힌두교에서는 불교가 힌두교 안의 한 부분이다 라고 그렇게 이제 봅니다.
그런 정도로 인도에서는 많은 종교가들이 아주 그 육십, 칠십, 팔십대 아주 기라성 같은 대종교가들이 많았는데 서른 다섯 살 먹은 새파란 청년이 깨달았다고 하고서 많은 제자들이 또 운집을 하고, 또 거기서 나오는 사상은 어떤 종교가의 사상보다도 뛰어나고 그래놓으니까 비난 많이 들었습니다.
아주 비난도 듣고 별별 모함도 당하고요.
자기 제자들을 전부 뺏어가는 경우도 다 있고, 그걸로 뺏어가는게 아니라 그쪽으로 다 기울어지니까.
또 어떤 경우는 스승이 부처님께 귀의 하니까 제자들도 한꺼번에 귀의하는 경우, 목련존자든지 사리불 같은 이가 그런 예거든요. 오백 명 제자를 한꺼번에 이끌고 부처님께 귀의했다든지 하는 그런 경우입니다.
그야말로 참 출중한 분이었죠 그 당시에서도.
그래서 많은 비난과 모함을 그렇게 받았는데 그때 하도 많이 그런 걸 받아 놓으니까 남 비난 듣는데는 아주 이골이 나가지고서 경전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많거든요.
어떤 외도가 와가지고 자기 제자들을 많이 이쪽으로 귀의시켜놓으니까 많이 뺏겼다는 거지 그래서 별별 욕을 다하는데 부처님이 묵묵히 가만히 듣고 있거든.
듣고 있다가, 또 가만히 듣고 있으니까 이 그 외도는 신경질이 나가지고 또 욕을 해쌌고 그러니까 나중에 이제 부처님이 이야기를 한마디 하는 거죠.
예컨대 손님이 되어서 당신 집에 초청을 받아 갔다. 그런데 당신은 손님에게 내놓는다고 음식을 아주 잘 차려 내놨다. 그런데 마침 손님으로 간 사람은 식사를 하고 간 뒤라서 당신이 차려놓은 그 식사를 한 젓가락도 먹을 수가 없는 처지다. 그랬을 때 그 차려놓은 음식은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이렇게 이제 외도에게 묻습니다.
그러니까 외도가 화가 나가지고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고, 손님이 안먹었으면 당연히 주인의 음식이지 주인이 차려낸 그 음식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그렇다고.
마치 당신이 나한테 퍼부운 비난과 욕설도 그와 같아서 나는 한마디의 비난도 내가 받아들인 것은 없어.
당신이 비난을 했을 뿐이지 비난을 받은 사실은 없다. 그러니까 그렇게 이해를 하라고, 그런 이야기도 경전에 나옵니다. 워낙 많이 받아놓으니까 아주 사실 그렇거든요.
비난 하는 사람은 있어도 비난 받는 사람은 없을 수가 있어요.
비난 했다고 해서 받는 게 아니예요.
그건 받는 사람이 정말 받아들였을 때 그게 받는 거지 밥차려 낸다고 다 먹나요 그게? 차려낸 사람이 있지만 안먹는 사람이 많거든요. 그와같은 거예요, 사실.
마음에 동요가 없으면 그건 아무 상관이 없는거죠.
그리고 뭐 입에다 피를 한 입 물고 상대를 향해서 뿌리는 거와 같다, 남을 향해서 비난하는 것은 그와 같은 것이다, 라고 아함경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죠.
그 입을, 피를 남에게 뿌리기 전에 벌써 자기 입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그러니까 그게 상대에게 피가 튀어가든지 안튀어가든지 그건 그 다음 문제야. 안 튀어 갈 수도 있어 얼마든지.
그러나 자기의 입속에는 이미 더러운 피가 가득히 들어있다, 이렇게 까지 부처님이 경고한다든지, 또 바람을 거슬러서 흙먼지를 뿌리는 거와 같다. 그 흙먼지가 결국은 어디 가겠는가?
뿌리는 사람 얼굴에 뿌린 사람 옷에 다온다는 거예요.
그런 어리석은 짓을 왜 하느냐? 이렇게 부처님이 어떤 분노라든지 분노를 통한 비난이라든지 모함이라든지 이런 데에 대해서 아주 많아요 경전에 그런 이야기가.
여기 영가스님도 역시 이제 그런 것을 많이 겪었습니다. 배경상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파화소천도자피(把火燒天徒自疲)라, 불을 잡고 하늘을 태우려고 하는 거와 같아서 스스로 피곤할 뿐이다. 한갓 스스로 피로할 뿐이다. 자기만 피로하다 이말입니다. 도(徒)자가, 하는 사람 그 사람 자신만 피로할 뿐이다.
我聞恰似飮甘露하야
(아문흡사음감로하야)
나는 비방하는 말을 들으니 흡사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아서
아문흡사음감로(我聞恰似飮甘露)하야 소융돈입부사의(銷融頓入不思議)로다, 내, 내의 경우는 나는 그것을 들으니까 마치 감로를 마시는 거와 같다. 감로수를 마시는 거와 같아서 아주 속이 시원해.
그건 억지소리가 아니예요 이건. 다 근거가 있는 소리입니다.
銷融頓入不思議로다
(소융돈입부사의로다)
깡그리 녹아서 모두 사라지니 참으로 불가사의하도다.
소융돈입부사의(銷融頓入不思議)로다, 녹아서 부사의(不思議)한 마음의 경지에 돈입(頓入) 다 들어간다 소융(銷融) 녹아가지고 전부 융화가 되어가지고 전부 부사의한 마음속으로 다 들어간다. 부사의한 경지에 들어간다 이런 말인데 이 부사의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가 심장하지요.
말하자면은 『금강경』에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한다면은 『금강경』을 열심히 읽었는데 왜 사람들로부터 공덕의 어떤 그 칭찬을 받지 않고 비난을 받는 경우가 많으냐?
그게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이거든요. 능히 업장을 소멸하는 거다.
당연히 당신의 업장으로써 악도에 떨어져야 옳겠는데 비난을 듣는 것으로써 그 업이 다 소멸한다 업이 소멸한다.
그러니까 비난 듣는 것이 참 좋은 거예요.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 사람 업장 소멸하는 거예요.
안그러면 비난을 안들으면은 다른 어떤 과보로 당하게 돼 있어. 그런데 비난 듣는 것으로써 전부 때우니까 얼마나 좋아요?
비난 그건 뭐 그야말로 욕이 배따고 들어가는 게 아니니까. 뭐 해치는 것도 아니고 당장에 뭐 몸을 다치고 하는 것 같으면 안좋지 그런데 비난 듣고 자기가 잘 소화만 하면 되는거야.
소화만 하면은 업장이 아주 소멸이 되는 거예요. 많이 녹는다고 여기 그 말이라.
아문흡사음감로(我聞恰似飮甘露)라 마치 감로수를 마시는 거와 같아가지고 얼마나 기분좋은지 모른다 이 말이예요.
영가스님만 하더라도 인간으로 살아온 오랜 세월 동안 업장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알게 모르게 지은 업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런 업을 우정 자기가 녹히려고 해야 할텐데 남이 비난함으로해서 그게 녹아지니까 아주 기분이 좋아한 거예요.
그래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다 까지 했으니까.
감로수(甘露水)는 뭡니까? 이게 불사약(不死藥)이거든요 불사약. 불교에서 감로수라 함은 불사약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문을 말하는 거예요. 부처님 법문은 삶과 죽음을 초탈하는 그런 묘약이기 때문에 그래서 법문을 감로수라, 불사(不死), 번역하면 감로는 번역하면 다른 뜻으로는 불사약이라고 되어 있어요. 죽지 않는 약이다.
단순하게 단이슬이다 설탕물처럼 그렇게 단 것이 아니고. 불사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몸 속에 들어와 가지고 내 정신 속에 들어와 가지고 녹아 들어와서, 녹아 들어와서 얼마나 그 참 좋은 일을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觀惡言 是功德이니
(관악언 시공덕이니)
악한 말을 가만히 살펴보니 이것이야 말로 공덕이라.
관악언시공덕(觀惡言是功德)이니 차즉성오선지식(此則成吾善知識)이라, 그랬잖아요.
악언을 관하는 것이 악언이 이 공덕인 줄 관한다. 나에게 퍼붇는 악한 말들이 전부 아주 좋은 공덕이 된다. 공덕이 된다.
此則成吾善知識이라
(차즉성오선지식이라)
이렇게 되면 악한 말을 하는 이가 곧 나의 선지식이로다.
차즉성오선지식(此則成吾善知識)이라, 이것은 곧 나의 선지식을 이룬다. 나에게 선지식이 된다 이거예요. 너무너무 좋은 일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유교에서도 군자들은 자기에게 과분한 칭찬 듣는 것은 오히려 꺼려했고 근거 없는 비난 듣는 것을 오히려 좋아했어요.
그리고 문왕 같은 이들은 비난을 한다든지 충고를 하면은 꼭 꿇어앉아가지고 받아들였다, 절을 하고 받았다 하는 그런 기록도 있고 그렇습니다.
좀 생각이 제대로 된 사람들은 다 그랬었어요.
그렇다면 그런 이야기는 오히려 좋은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이 되는 거지 기분 상할 까닭이 없는 거예요.
사실 요거 한 생각만 돌이키면 되는데 우리들은 그게 안되지. 욕들으면 당장 그거 그냥 발끈해가지고 내가 말이지 안그런데 왜 나보고 그렇게 모함을 하느냐? 그렇게 비난을 하느냐? 그 말만 쫓아가 가지고 당장에 그냥 발끈하지요.
그런데 거기서 조금 한 생각 늦추어서 생각을 하면은 사실 이게 관악언시공덕(觀惡言是功德)이라, 악언이 공덕이라.
그리고 내 업장을 소멸하는 게 돼서 아문흡사음감로(我聞恰似飮甘露)야,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아서 더해라 더해라 비난 더해라. 나에게는 얼마나 그게 복이 되는지 모른다. 안그러면은 내가 업장이 많아가지고 뭐 일도 잘 안풀렸는데 니가 나에게 욕함으로 해서 내 일이 앞으로 잘 풀린다, 이렇게 우리가 소화를 해야 된다구요.
불교 공부해가지고 고거 하나만 제대로 하하하 소화하면은 뭐 그 이상 더 바랄 게 없죠 사실은.
그 문제 하나만 그렇게 우리가 풀 줄을 안다면은 더 바랄 게 뭐 있겠습니까? 그이상, 참 대단한 공부죠 그정도면.
아문흡사음감로(我聞恰似飮甘露)소융돈입부사의(銷融頓入不思議)라, 녹아서 그냥 부사의 속으로 우리의 부사의한 마음속으로 술술 들어가는 거죠.
그 속에는 업이니 공덕이니 하는 그런 모든 것들이 불가사의한 마음속에 다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래되면은 어떻게 돼? 악언(惡言)이 공덕(功德)이 돼버려 악언이. 그게 불가사의거든요. 불가사의가 바로 그런 도리입니다. 그게 또 기적입니다 기적.
발끈하고 화를 낼 순간에 야 이 참 내 업장을 소멸하는 일이다 더해라 더해라 그렇다고 대놓고 더 해라 하면 또 그렇고, 그냥 가만히 잘 듣고 있는 거예요.
응 그러냐? 들을 만한 일이 있는가 보다. 금생이 아니면 전생이라도 들을 일이 있는가보다.
내가 당장에 니한테 어떤 그런 어떤 일을 한 적은 없지만은 아마도 비난 받을 빚을 많이 지었나보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있지 하고 그렇게 받아 들인다면은 화가 나가지고 욕설이 나갈 순간에 속으로는 아주 빙긋이 웃는 거예요.
아주 넉넉한 그런 웃음을 웃을 수 있으니까 이건 완전히 기적이죠. 그거보다 더 큰 기적은 없는 거예요 사실은.
바로 그게 기적이라고요. 불교의 기적은 뭐 그겁니다. 다른 것 아니예요.
기도를 했더니 무슨 뭐 밤에 황금을 한보따리 갖다 줬다. 이런 기적이 아니고 바로 이거야 말로 기적입니다.
악언을 공덕으로 관하는 것, 또 선지식이라고.
자기 자신에게 선지식으로 생각하는 것.
톨스토이도 뭐 자기 악처 때문에 그런 유명한 철학가가 됐고, 뭐 톨스토입니까? 톨스토이 부인이야? 소크라테스인가? 아 소크라테스 하하 소크라테스.
크산티페인가? 이름이? 소크라테스도 그렇게 관악은 시공덕으로 그렇게 받아들였던 모양이예요. 그러니까.
그런 경우 많죠. 명심보감에도 있죠.
‘도오선자(道吾善者)는 시오적(是吾賊)이오
도오악자(道吾惡者)는 시오사(是吾師)라.’
나를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짜 스승이고 나를 좋은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나의 적이다 그런 말도 있듯이.
그래 군자는 본래 과분한 칭찬 듣는 것은 오히려 꺼려했고, 근거없는 비난 듣는 것은 오히려 달갑게 달게 여겼다 그런 말이 있죠.
不因訕謗起怨親이면
(불인산방기원친이면)
비방을 인해서 원수와 친한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 아니면
불인산방기원친(不因訕謗起怨親)하면 하표무생자인력(何表無生慈忍力)가 산방(訕謗)을 인해서 원친(怨親)을 일으키는 일이 아니면은 어찌 무생자인력(無生慈忍力)을 표하리요.
이건 뭔말인고 하면 산방은 다 비방한다는 말이요.
산방에 원친을 일으키는 일을 인하지 아니하면 뭐 산방으로 인해서 원친 일으키지 않는 건데 내용은, 그러나 이제 글이 그렇게 됐어요.
산방으로 원친 일으키는 것을 인하지 아니하면.
요건 뭔 말인가 하니 그 비방을 해도 원친을 일으킨다, 거기에서도 원친을 일으키지 않는다, 원(怨)한과 친(親)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요건 비방 하나라구요.
비방을 가지고 원망을 하든지 아니면 그걸 오히려 좋게 생각하든지 그래서 이제 원과 친이라.
그런게 아니면은 거기에서 말하자면 공부한 효과가 나타나야 된다 이말이예요. 공부한 효과가.
우리 불교 믿는 효과가 거기에서 나타나야지 거기에서도 안 나타나 가지고야 되겠는가.
첫댓글 _()()()_
우리 모두 상사(上士)가 되어 일결일체요(一決一切了)의 지혜를 증득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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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惡言 是功德이니 此則成吾善知識이라...악한 말을 가만히 살펴보니 이것이야 말로 공덕이니, 이러한 즉 악한 말을 하는 이가 곧 나의 선지식이로다...꽃물들다님! 수고하셨습니다.._()()()_
八解六通心地印이라 (팔해육통심지인) 팔해탈과 육신통도 본래로 마음 땅에 모두 있네..... 악한 말을 하는 이가 곧 나의 선지식이로다....물들다님 아름다운 밭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_()()()_
從他謗任他非 銷融頓入不思議 觀惡言是功德 此卽成吾善知識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 수리수리바하수리수수리사바하...
관악언시공덕(觀惡言是功德)이니 차즉성오선지식(此則成吾善知識)이라.ㅡ악한 말을 가만히 살펴보니 이것이야 말로 공덕이라 이렇게 되면 악한 말을 하는 이가 곧 나의 선지식이로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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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惡言 是功德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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