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던히도 지루하고 덥기만 하던 여름이 드디어 지나가고 어느 새 가을이 되었다.
온 들판의 벼들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추수하는 농부들의 검게 그을린 얼굴이 수확의 기쁨으로 충만해 보이는 것을 보니 덩달아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흡족해진다.
내가 어릴 때는 봉림고모집에 한번 가보는 것은 마치 요즘 사람들이 우주 여행을 꿈꾸는 것 만큼 어렵고도 흥분되는 일이고 고모집에 대한 막연하면서도 가슴이 떨리는 동경과 기대감에 부풀러서 기회가 있는 대로 고모집에 가보려고 억지 주장 같은 떼를 써보기도 하지만 끝내 막내인 나한테는 그 기회가 좀 처럼 오지않고, "더 커면 가거라"하는 말씀에 또 다시 다음을 기약 해야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시간이 야속스럽기만하였다
.아마도 그것은 매년 여름 할아버지 제사 때마다 오시는 고모님에 대한 반가운 그리움과 더불어 할머님께서 강가에 앉아 건너편 신작로를 지나가는 버스를 하루종일 기다리시는 따님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반가움이 우리들께로 그대로 전해져서 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우리는 고모님이 오실때 이번에는 무엇을 사서 오실까 하는 기대감과 여러 딸들 중에서 어떤 따님을 데리고 오실까 하는 기대를 하게 하시기 때문에 마냥 가슴 설레며 기다렸던 기억이 지금은 눈물이 나도록 그립다.
그 인자하시던 모습과 환하게 웃으시며 친정의 어린 조카들을 어루 만져주던 모습을 이젠 뵐 수는 없지만 아직도 점잖은 모습과 그 목소리는 잊을수가 없다.
그러나 기다리는 자에게 기회는 반드시 찿아 오는 법인것 처럼 나에게도 드디어 고모집에 가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6학년 말에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던 시기에 덕현에 살던 고모님의 큰사위 김서방(김만석)자형이 처가에 가시는 길에 나를 데리고 가시겠다는게 아닌가.
그때의 기쁨과 환희는 "아 이젠 나도 다 컷구나"하는 일종의 안도감에 충만하였고 따라가고야 말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경옥이 때문에 혹시 나까지 못가게 될까봐 갖은 감은이설로 동생을 달래느라고 진땀을 뺐던 기억이 새롭다.
"경옥아,고모집에가면 전기불도 없고 자갈길을 20리는 걸어야하고 또 밤엔 통시 각시가 나온단다.
특히 낮선 가시나를 보면 잡아 먹는 문딩이 동네를 지나야 하기 땜에 니는 절대로 안된다는 엽기적인 공갈을 쳐서 겨우 말려 놓고는 나는 자형과 함께 진영까지 걸어가서 마산행 버스를 타고 창원고개를 넘어가는데
촌놈이 오랫만에 탄 버스라서 그런지 꼬불 꼬불 창원고개를 넘기 시작하자 속이 메슥거리고, 얼굴이 노래지면서,이마에 땀이 나고 멀미가 나며, 머릿속이 어지럽고,아무생각이 안났지만 사나이 체면상 내색은 고사하고 나약함을 보이면 다음 기회를 놓칠까봐 꾹 참고 이윽고 39사 앞에 당도하여 주저앉듯 내리니 불어오는 초겨울 북서풍이 이렇게 시원하고 반가울수가 없더라.
내 노 란얼굴을 보고 자형이 놀려댔지만 대꾸할 힘도 없었든게 사실이었고,이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고모집에 가는 것이 너무 좋아서 묵묵히 20여리의 길을 걸어서 이윽고 고모집에 당도하니
백년지객의 환대에 나는 별 존재도 없었지만 두분 고종누님(희순,순덕)과 나보다 나이가 네살이나 많은 예쁜질녀(귀임)의 잘왔다는 격려에 지금까지 의 멀미 휴유증은 간데없고
사람좋은 형수님의 진수성찬에 해 짧은 이른저녁을 먹고는 밤참으로 삶은 고구마에 콤콤한 김치를 척척 걸쳐서 배가 터지는 줄도 모르고 먹은것 까지는 좋았는데,잠자리에 들고 얼마 있지 않아서 아뿔사 난리가 난 것이다.
전깃불은 이미 나가고 없고 변소 위치는 대강 밖에 모르는데 급하게 당장 변소를 가야하는데 고모님을 깨울수도없고 누님들은 작은방에서 자고 있지 싶고,배는 점점 더 급해오고,죽을 판인데 낑낑대는 기미를 눈치 채셨는지 고모님이 일어나셔서 호롱불을 쥐어주시며 통시를 가르쳐 주시며 갔다오란다.
우선 살겠다 싶어서 아랫채 뒷켠을 돌아가는데,뒷켠 대나무밭에서 불어오는 "쏴"하는 바람소리에 머리끝이 쭈빗거리고 발밑만 비춰주는 등불의 존재는 이미 있으나마나 하는데 찿아 들어간 헛간의 통시는 큰 독을 묻어서 아가리를 벌리고 나를 기다리는데 두서너어자 되어 보이는 판자 두쪽이 삐딱하게 어깃장을 놓을듯이 누워있고
그속은 아예 보이지를 않고 익숙한 냄새만 나를 반기며 있는데 겨우 두발을 올려놓고 바지춤을 내리고 앉으니 참고 참았던 볼기짱이 요란한 아우성과 함께 시원해지는 것과 동시에 ㅇ물이 몇방울 튀어 오르며 사정없이 엉덩이를 적신다.
이때는 겁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다.튀듯이 일어나니 한번 빠지면 못 나올 것 같은 시커먼 잇빨도 없는 아가리가 서서히 눈에 보이고 다시는 앉을 용기가 없어서 휴대한 신문지 반장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호롱불을 들고는 부리나케 헛간을 탈출한 기억 밖에없다.
다행히 그날은 통시각시가 다른데 볼일이 있었는지 기별이 없었고 무사히 기다시피 방으로 들어와서 잠을 청하지만 쿵쿵 거리는 마음을 안정시키느라 잠이 올리가 없고 엄마 옆에 있을 경옥이가 부러워지면서 갑자기 집이 그립고 왈칵 눈물이 쏟아지면서 엄마가 보고파서 참을수가 없었다.
고모님이 뭐라고 달래는 것 같았는데 그럴수록 눈물이 더 나고 내일은 집에 갈까보다 결심을 해보지만 처음 고모집에와서 하룻밤만 자고 갈수 없을 것 같아서 그야말로 눈앞이 캄캄해진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하고 아침에 일어나니 인정 많은 형수님이 아예 며칠을 놀다가라고 붙잡을 기세다.
큰일이다. 죽을 각오로 하루밤만 더 자고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은 가야한다는 굳은 결심을하고 나니 왜 이리 시간이 안가고 더딘지 미칠것만 같고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무엇 보다도 밤이나 낮이나 변소를 안가기 위해서는 적게 먹어야 하는데 고모님은 우리동네는 귀한 고구마를 종일 삶아 주셔서 내 약한 식신의 의지로는고구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행여나 하면서 먹고야 만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또 한밤의 난리를 어김없이 치루고,엄마가 보고싶어 밤새 눈물을 찔금거리다가
이틀째의 아침이 밝아오기가 무섭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집에 가고야 말리라는 결심을하고 점심을 먹고나서 나서려는데 갑자기 대문 바깥이 왁자하고 시끄럽더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들고보니 퇴촌리에 살고 계시는 고모보다 훨씬 연세가 많으신 우리 둘째 이모님이 대문에 들어서시면서 집이 떠나갈 듯이 큰소리로
"야! 이놈,기식아,고모집에서 이틀자고는 이모집에는 안 자고 갈라 했더냐?이놈이, 아부지가 보고 싶으면 고모를 보면 되고 엄마가 보고 싶으면 이모 보면 된다는 옛말이 있는데 고모집에는 자고 이모집에는 안 자고 갈려고 했냐?
엎어지면 코 닿을 우리집인데 이놈아,당장 날 따라 우리집에 가자."하시며 으름짱을 놓으시며 길을 잡으시니
고모님이랑 형수님 누님들은 그저 웃으시며 인사하기에 바빠 나의 낭패함에는 관심도 없다.
내쫒기듯(?)이 고모집을 나와 강아지 마냥 따라가는데 아무리 반갑기 그지 없는 이모님이지만 엄마를 만나는 것이 하루 늦어진다는 생각에 따라가는 걸음걸음마다 속으로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세상에 아무도 그때의 내 심정을 모를 것이다.뱐가운 이모님이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이모님이 원망스러울 수가 없더라.
아마도 어제 마디미(현 창원시 상남면 전통시장)5일 장에서 고모님이 이모님을 우연히 만나셔서 기식이가 왔다고 말을 하니까 이모님이 막내 여동생의 막내 아들을 그냥 보내면 우리 할머님께 예의가 아니라고 여겼던거 같았던거 같다.
이모집에서도 이종사촌누님의 환대를 받으며 하룻밤을 지냈는데 생전에 처음으로 엄마를 사흘씩이나 떨어져서 지냈더니 사모의 정이 어찌나 애절한지 또 눈물로 하룻밤을 새우고 났는데도 하루 더 자고가라는 이종사촌 누님(덕순)과 형님(춘이 형님)의 따뜻한 정을 뿌리치지 못하고는 결국 사모의 정을 감내하면서 울며 지새웠던 그때가 지금은 왜이리 그리운지 모르겠다.
이모님집에서 이틀밤을 자고 나설떄 등에 지워주던 고구마 한짐이 어린 나에겐 꽤 무거웠지만 할머님께서 좋아하실거란 생각에 힘든줄도 그저 기쁘서 빨리 가고파서 대낮에도 여우가 나타난다는 부치 고갠지 손목고개를 부리나케 넘어서 오던 생각이 난다.
고개를 넘을 때 기다려주던 봇짐장수 아줌마들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젠 그때의 고모님,이모님 형수님과 어른들은 한분도 안계신다. 하지만 아련한 나의 추억속에는 아직도 그분들의 모습과 목소리는 귀에 쟁쟁하다.
아!이제는 나도 어느새 칠십을 바라본다.
첫댓글 걷고 걸어서 부처고개 올라서 딸이 사는 동네 굽어보시고 돌아오시던 울 할메 오빠는 그래도 큰집이라 가볼 기회나 있었지유 우리는 명함도 못내밀었지요 고모집 가는일이 축복이였습니다 멀어도 인정 넘치던 옛일이 생각나서 울컥합니다 오빠 여기 추석엔 집안 두루 편안합니다 건강 하시고 행복하시길요
별일없나? 그렇제 너거는 어릴적에 고모집에 못갔구나.나는 하룻밤도 못견디고 엄마가 보고 싶어서 대창문에 코를 박고 하염없이 울었던 생각이 어제 같다.이제 그런 시간은 영원히 없겠제? 보고싶다.모두다!
신촌막내고모집에서 우암초등다닐때 진영을 보면서 엄마가 보고싶어 울었던~~지난해에 멀리 떠나신 엄마가 많이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