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과 격변의 시대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시대와 민족을 달리하며 반복되어 왔다. 집단의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개인의 삶이 무참히 희생되는 가운데에서도 누군가는 사랑하고 누군가는 살아갔다. [닥터지바고]의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뮤지컬 [닥터지바고]는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태어나 부족할 것 없이 자랐지만 1905년 러시아 혁명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볼셰비키 혁명을 겪으면서 평생을 표류하고 방황하고 혼란을 겪어야 했던 시인 의사 유리 지바고의 파란만장한 삶과 열정적인 사랑을 노래한다. 특히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은 러시아인들의 모든 것을 뒤바꿔 놓은 사건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차르의 절대왕정과 레닌의 공산주의, 백군파와 적군파, 우파와 좌파, 귀족과 평민, 그리고 지주와 노동자 사이의 전쟁이었지만, 두 계층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역시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혁명의 격변기 속에서 자신의 삶과 사랑을 희생해야 했다. 지바고 역시 마찬가지. 가족과 자신의 모든 것을 상실해가는 역경을 겪으면서도 그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문학과 예술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열정을 불러일으키며 시적 영감을 안겨준 운명의 연인 라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떠나 보내면서도 그는 시를 통해 라라를, 굴복하지 않은 아름다운 정신을 부활시켰다.
제공 : 오디뮤지컬 컴퍼니
전쟁과 혁명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에 대한 사랑과 동경, 아름다움을 놓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그 시대가 남긴 흔적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지식인의 전형인 유리 지바고는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분신이었다. 연인 라라와 헌신적인 부인 토냐는 실제 연인이었던 올가 아빈스카야와 부인 지나이다를 연상시킨다. 1890년 예술학교 교수이자 화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작곡과 철학을 공부하다 1914년 [구름 속의 쌍둥이]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등단 이후 거의 매년 시집을 발표하며 왕성한 창작력을 보였지만 1934년 소련 작가동맹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조한 후로 자신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피하기 위해 모스크바 근교에서 칩거 생활을 시작했다. 창작보다는 아내와 두 아들의 생계를 위한 번역일에 매달리던 그는 57세가 되던 해인 1946년 35세의 미망인 올가 이빈스카야를 만나 연인으로, 문학적 동반자로 마음을 나눴다. 그녀에게 영감을 얻어 자신의 마지막 창작열을 불태운 작품이 바로 [닥터지바고]다.
[닥터 지바고] 호주공연 장면 – 제공 : 오디뮤지컬 컴퍼니
그는 자신이 직접 겪었던 혁명과 내전 전후의 역사와 시대 상황, 아내 지나이다와 이빈스카야 사이를 오가며 나눈 사랑, 우랄 지방에서 보낸 경험 등을 바탕으로 글을 써내려 갔다. 전후 사상투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자유와 예술, 개인의 삶에 대해 노래하는 그를 막기 위해 스탈린 정부는 그의 연인 이빈스카야에게 스파이 누명을 씌우고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지만 파스테르나크는 자신의 의기를 꺾지 않았다. 작품을 쓰기 시작한 지 10여년 만인 1956년에 완성한 [닥터지바고]는 볼셰비키 혁명의 본질을 왜곡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자국에서의 출판이 금지됐다. 파스테르나크는 1957년 이탈리아에서 번역본으로 발표했고,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자유와 열정을 쏟아낸 지바고의 삶을 시적으로 극화시킨 작품은 단숨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 세계 18개국에서 번역 출판된 작품은 1958년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작으로도 지명됐지만, 러시아 작가동맹에서 제명되고 정부로부터 추방 협박을 받은 파스테르나크는 ‘조국을 떠나는 것은 내게 죽음’이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보내며 노벨상 수상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에 영감과 용기를 준 이빈스카야와의 연인관계는 1960년 암으로 숨질 때까지 지속됐다. 파스테르나크가 남긴 유일한 장편 소설 [닥터지바고]는 1987년에야 고국에서 발간 됐고, 그의 사후에 만들어진 데이비드 린의 영화 [닥터지바고] 역시 1994년에 이르러서야 러시아에서 상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0년간의 준비를 마치고 무대로
[닥터지바고]를 뮤지컬로 옮기는데 앞장 선 이는 [저지 보이스]의 연출가로 잘 알려진 데스 맥아너프였다. 1983년 미국 샌디에이고 라 호야 플레이하우스의 예술 감독으로 취임한 이후 수많은 작품들을 선보였던 그가 자신이 고교시절부터 좋아했던 소설 [닥터지바고]를 뮤지컬로 옮기고 싶어 한 것이 계기가 됐다. 라 호야 플레이하우스는 뮤지컬 [토미], [성공시대], [모던 밀리], [저지 보이스]와 [멤피스] 등의 작품들이 브로드웨이 진출을 앞두고 작품 완성의 기반을 닦았던 비영리 단체. 데스 맥아너프에게 토니상 연출상을 안겨준 [빅 리버]와 [토미] 역시 이곳에서 출발했다. 그는 먼저 1991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시크릿 가든]의 작곡가 루시 사이먼에게 [닥터지바고]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지바고]의 제작 계획을 전했다. 뜻밖에도 [닥터지바고]는 그녀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동거 중이었지만 결혼 의사가 없었던 남편이 데이비드 린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를 보자마자 그녀에게 청혼을 했기 때문이다.
비록 주인공의 죽음으로 이야기는 끝나지만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유와 예술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았던 유리 지바고의 예술 세계 또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영화 [헤어], [랙타임] 등의 작가 마이클 웰러와 뮤지컬 [그레이 가든스]의 작사가 마이클 코리, [더 게임], [선셋 대로]의 작사가 에이미 포워스 등 뜻 맞는 창작자들을 프로젝트에 불러 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1년 라 호야 플레이하우스의 작품개발 프로그램인 ‘페이지 투 스테이지(Page To Stage)’ 워크숍 프로덕션의 일환으로 본격적인 작품개발이 시작됐다.
[닥터 지바고]의 호주 공연 장면 – 제공 : 오디뮤지컬 컴퍼니
지바고의 파란만장한 삶과 열정적인 사랑을 그린 대서사극을 뮤지컬로 옮기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1903년 소년 지바고가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여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1929년 모스크바의 혼잡한 거리에서 심장 발작으로 사망하기까지(에필로그까지 합치면 그 시대는 1943년까지 연장된다)의 이야기가 러시아 격동기의 대서사와 함께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복잡한 역사적 배경과 지바고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 간의 관계, 지바고가 남긴 예술가로서의 삶 등 원작 소설의 방대한 이야기 가운데 어떤 부분을 뮤지컬의 드라마로 가져올 것인지 결정하는 데에만 18개월이 걸렸다. 데스 맥아너프와 창작자들은 유리 지바고와 라라, 토냐, 파샤, 그리고 코마로프스키 등 다섯 인물에게 집중된 드라마에 초점을 맞췄다.
시대적 배경이나 역사적인 사건을 전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550페이지에 달하는 원작의 이야기를 2시간 내외의 뮤지컬로 옮길 수 있을까에 대한 작곡가 루시 사이먼의 고민을 해결해준 것은 소설 마지막 챕터에 실려 있던 지바고의 유고시였다. 원작의 방대한 이야기를 25편의 시로 전할 수 있었다면 음악으로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 그녀는 극 중 캐릭터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로맨틱하면서도 감성적인 음악들을 써내려 갔다. 4년여를 공들인 뮤지컬 [지바고]는 2005년 7월 워크숍 무대에 올라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또다시 수정•보완 작업에 들어갔다. 6년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지바고]는 원작의 이름을 딴 [닥터지바고]로 공연명이 바뀌었고, 미국과 호주, 한국의 프로듀서들이 공동 제작하는 글로벌 프로젝트로 확대되었다. 2011년 2월 호주 시드니에서 성공적인 초연 무대를 가진 [닥터지바고]는 2012년 한국 공연에 이어 2013년 웨스트엔드 공연이 확정되었고, 2014년 브로드웨이 진출과 함께 전 세계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사랑을 노래하는 뮤지컬
원작의 줄거리를 그대로 따르는 뮤지컬 [닥터지바고]는 러시아 혁명보다는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데이비드 린의 영화와 비슷하다. 하지만 뮤지컬은 두 사람뿐만 아니라 라라를 사랑하는 파샤와 코마로프스키, 그리고 유리를 사랑하는 토냐의 마음까지 함께 담아낸다.
1막에서는 등장인물 정보와 역사적 배경 설명을 포함해 많은 사건들이 전개된다. 8세의 나이에 고아가 된 유리 지바고가 그로메코 가에 입양되고, 토냐와 결혼 후 제1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해 간호사로 합류한 라라와 재회하고, 볼셰비키 혁명 정부가 수립된 후 모스크바를 떠나 토냐의 고향 유리아틴 행 열차에 오르는 순간까지, 13년에 이르는 세월이 축약되어 펼쳐진다. 특히 유리 아버지의 장례식 장면부터 유리가 자신의 정조를 뺏은 코마로프스키를 죽이기 위해 파티장을 찾은 라라를 처음 본 순간까지를 그려낸 첫 신은 매우 숨 가쁘게 지나간다. 총상 입은 병사가 남긴 편지를 읽던 유리와 라라가 처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전쟁터에서(‘Now’), 스스로 적색파가 된 군인들을 실은 기차로(‘Blood On The Snow’), 공산당원이 점령한 그로메코 가의 저택('The Perfect Wold')으로 연이어 전환되는 무대 역시 속도감이 넘친다. 오토메이션으로 움직이는 네 쌍의 무대 벽과 극 중 시대를 기록한 영상을 활용하기 위한 샤막, 철도 플랫폼 세트 등이 이러한 다이내믹한 장면 전환을 돕는다.
박진감 넘치는 러시아 혁명기의 전투 장면 – 제공 : 오디뮤지컬 컴퍼니
2막은 역사적 사건들을 속도감 있게 진행하는 1막과 달리 각각의 인물들에 초점을 맞춘다. 적색파의 우두머리가 된 파샤는 라라의 순결을 빼앗은 부르주아(코마로프스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진정 그녀를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믿고, 코마로프스키 역시 마음 한켠에 라라를 잊지 못하고 있다. ‘사랑이 당신을 찾았어(Love Finds You)’는 유리아틴에서 재회한 라라와 유리, 라라를 그리워하는 코마로프스키와 스트렐니코프(파샤), 유리를 사랑하는 토냐가 각기 다른 공간에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곡이다. 빨치산에게 납치된 유리의 소식을 알 길 없는 토냐와 라라가 서로를 향한 부러움과 유리를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It Comes As No Surprise’, 혁명의 잔인함과 환멸을 느낀 지바고가 빨치산 부대를 탈출하며 부르는 ‘Ashes And Tears’, 유리와 라라가 마침내 서로의 진심을 털어놓는 듀엣 ‘On the Edge of Time’ 등 듣는 이의 감성을 자극할 만한 곡들이 차례로 이어진다.
어지럽고 불안정한 러시아 사회를 반영하는 무대미학은 [닥터지바고]에서 눈여겨 볼 부분이다. 4.4도로 경사진 무대와 오래된 러시아 건물들에서 착안한 기하학적 패턴을 덧입힌 무대 바닥은 전체 무대를 실제보다 훨씬 더 크고 깊어 보이게 하는 효과로 원작의 대서사극을 소화해낸다. 무대 세트의 크기를 작게 만든 것 역시 착시 효과를 염두에 둔 것. 혁명 전 부르주아들의 화려한 일상과 혁명 후의 암울한 상황을 완벽하게 반영해주는 240여벌의 의상과 시공간적 배경을 보여주는 영상(유리가 시를 쓰는 장면에서도 사용된다), 450개가 넘는 조명과 80여 개의 LED장치, 마지막 장면인 눈 오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20개의 스노우 머신 등 웅장한 무대를 빈틈없이 활용해 극적 효과를 높인다.
시놉시스 8세의 나이에 고아가 된 유리 지바고는 그로메코 가에 입양되어 성장한다. 의사가 된 그는 그로메코 가의 딸 토냐와 장래를 약속하지만 운명의 여인 라라와 마주친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라라는 어머니의 정부 코마로프스키에게 정조를 빼앗기고, 원치 않는 관계가 지속되는 데 환멸을 느끼고 새해 전날 밤 무도회장에서 코마로프스키에게 총을 겨눈다. 이를 지켜본 유리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호기심을 느끼지만 사라져 버린 그녀를 뒤로한 채 토냐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다. 2년 후. 혁명가인 연인 파샤와 결혼한 라라는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고 이에 상처받은 파샤는 군에 입대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군의관으로 참전한 유리는 남편을 찾아 종군간호부가 된 라라와 우연히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전쟁터에서 함께 보내면서 사랑에 빠지지만 전쟁 후 유리는 모스크바로, 라라는 고향 유리아틴으로 떠나면서 이별하게 된다. 전쟁은 끝났지만 혁명정부가 수립된 러시아에서 더 이상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유리와 그의 가족은 토냐의 고향인 유리아틴으로 떠난다. 라라가 유리아틴의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유리.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도덕적 양심 때문에 그녀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했던 그는 운명의 이끌림을 거역하지 못하고 라라를 찾아가고,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토냐와 라라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던 유리는, 사진의 존재를 숨기고 빨치산 간사가 된 파샤의 지시로 빨치산 캠프로 끌려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빨치산들과 함께 생활하는 동안 자신의 끔찍한 모습을 깨달은 유리는 그곳을 벗어나는데 성공하고 다시 라라의 곁으로 돌아온다. 그 사이 유리아틴은 적색파가 통제하고 있고, 유리의 생사를 알 수 없었던 그의 가족은 이미 러시아를 떠났다. 이제 단 둘뿐인 유리와 라라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유리는 라라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곁에서 떠나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