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만의 더위라고 떠들던 그 뜨거웠던 1983년 7월 13일 25사단 신병교육대에 입대를 했습니다.
친구들 중 비교적 일찍 군대를 가는편이라 의성역에서 입영열차를 타기로 되었었는데 그 전날밤 환송하는 10여명의 친구들과 안동역 부근(의성역앞은 물이안좋다는 소문을 듣고)에서 생난리부르스를 치다가 시간이 늦어서 머리도 못깎고 새벽 두시가 넘어서 어느 미장원 문을 두드려 협박반 공갈반으로 가위를 가지고 대충 빡빡이 머리로 깎고 다음날 아침 의성역으로 이동(엄마, 아버지는 아침에 의성역 도착), 입영열차를 탔었습죠.
101보충데에 들어갔더니 이게 군대인가 싶어 지낼만 하겠더라구요. 더우면 샤워하고 배고프면 엄마가 기저귀용 고무줄 안에 말아서 넣어주신 돈 빼내서 맛있는것 PX에서 값싸게 사먹고... 견딜만 하데요.
이틀후 25사단으로 지명을 받고 함께 가는 동기들과 트럭뒤에 타고가면서 이제 세상 마지막이다 싶어 동기들과 함께 악을 바락바락 쓰면서 '오동잎, 돌아와요 부산항에 를 부르며 25사단 신병교육대를 들어서는데..
햐!! 세상에 그럴줄 몰랐습니다.
군화발길질이 난무하고 아글쎄 야삽으로 그것도 풀스윙 으로 막 머리통을 후려치는데.. 산골짜기 포로수용소 같은 곳에 뭐 이런 세상이 있나 싶더라구요. 선배님들이 들으시면 우스을 수도 있겠지만 요즘 세대가 들으면 희떡 넘어갈 정도로 폭력이 난무했었던 6주간의 훈련이었습니다.
40년만의 더위라 점심먹으면 그래도 한시간 가량의 오침시간이 있었는데 그시간도 거의 기합으로 채워졌고 혹 오침을 하더라도 잠을 깨는게 더욱 괴로웠던 그런 때 였습니다.
6주 훈련중 4주차쯤 되었나요. 뙤약볕아래서 오전에는 행군 오후에는 각개전투 감악산 정상까지 '공격앞으로' 게다가 작은 덩치에 주특기는 104(M60 기관총). 조교가 공격앞으로를 외칠땐 차라리 죽고싶을정도로 괴로웠던 더위였고 목마름이었고 탈진의 상태였습니다.
수통의 물도 떨어졌고 비상용으로 주던 소금알갱이 몇알( 탈진해 있을때 그걸 몇알 먹고 물마시면 그나마 어느정도 회복이 되었었죠.)도 벌써 다 먹어치우고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습니다. "공격앞으로'신호에 논을 넘어서 건너편 야산의 길가에 붙었을때 동기넘 한넘은 길가에 누가 먹다버린 누렇게 마른 사과를 맛있게 주워 먹느것도 보았구요.
이제 산을 올라 고지에 점점 가까워 질때 동기 한넘과 어느바위 아래에 붙었습니다.
아 근데 세상에...
바위주변에 영어가 깨알같이 쓰여진 초록색봉지가 널러리하게 (윗그림 참조) 버려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것은 먹고 버린 빈 봉지였고 그래도 안에 뭔가가 들어 있는 것이 한 열개 쯤 되었습니다. 뜯어보니 요즘 에이스 크래커 처럼 생긴 단단한 과자가 몇개씩 들어있더라구요. 이게 웬 횡재냐 싶어 동기와 미친넘 처럼 먹어댓는데. 그맛이... 월매나 고소하던지요. 근데 짜기도 엄청짰지요. 그래도 아까워 봉지에 있는 소금기까지 쪽쪽 다 빨아먹었습니다.
우리나라 군인들은 소금으로 탈진상태를 해소하는데 양넘들은 그런 과자를 먹는 것 같았습니다.
뜻밖의 행운에 기뻐하면서도 동기와 함께 한 소리가 " *팔! 한국군대*같다. 양넘들은 이런 걸 먹고 있는데 우리는 기껏 소금 알갱이나 빨고 있고.."
어쨌건 기념삼아 빈 봉지를 탄입대에 몇개 넣어가지고 왔고 나중에 그것이 씨레이션이라고 하는 미군들의 휴대용 비상전투 식량이라는것을 알았습니다.
평생에 가장 무더웠고, 동기들 중에 무려 10명 가까이 탈진해서 쓰러졌던 그 힘들었던 날 감악산 중턱에서 주워 먹은 그 씨레이션의 고마움과 맛을 지금도 잊을수가 없어
대선배님의 글에 두서없이 답글을 달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