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을 줄이는 동력, 공감
이찬수 목사 /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기 위한 근본적인 능력 가운데 하나는 공감(共感)이다. 사전적 의미로 공감은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해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이다. 함께[共] 느낌[感] 혹은 느낌[感]의 공유[共]라 요약할 수 있다.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함께 느끼고 있는 상태가 공감이다. 이때 핵심은 ‘함께’에 있다.
함께 느낌, 즉 공감에도 두 종류가 있다. 타자의 형편을 먼저 떠올리며 타자에게 나아가는 타자지향적 공감(영어 empathy가 비교적 여기에 어울린다.)과 타자가 자신의 느낌에 맞추어 주기를 바라는 자기중심적 공감(영어로 sympathy가 비교적 여기에 어울린다.)이다. 공감이라는 우리말이나, empathy와 sympathy는 일상 대화에서는 별 차이 없이 쓰이지만, 타자지향적 공감과 자기중심적 공감은 분명히 구분된다. 어떤 공감이냐에 따라 평화에 공헌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가령 지배자들 간 지배의 공감이 커지면 식민주의적 제국주의도 생겨나고, 소비자들 간 소비의 공감이 커지면 경제 구조가 비인간화하고 급기야 지구가 위험해진다. 그저 자신의 입장에서만 공감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적 상황에 일조하게 될 수도 있다. 모방이 자신을 감추고 타자를 따라 하다가 결국 다른 모방자와 같아지듯이, 자기중심적 공감은 다시 자기를 향해 오는 폭력의 부메랑이 된다. 이것을 피하려면 타자의 입장에서 하는 공감, 즉 empathy가 요청된다. 타자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empathy가 sympathy보다 더 평화적이다. 평화에 공헌할 가능성도 더 크다. 평화공부도, 평화운동도 empathy를 기반으로 할 때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를 만드는데 공헌한다.
이러한 공감의 능력은 사실 새삼스러운 발견이 아니다. 이미 수천 년 전부터 공감을 인간다움의 기초로 삼은 종교적 천재들은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삶을 살았고, 또 요청했다. 타자지향적 공감은 세계의 정신적 스승들의 삶의 근간이자 기본 정서이기도 하다. 가령 붓다의 자비, 맹자의 측은지심, 예수의 긍휼 등은 그저 특정 종교인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empathy의 다른 이름들이다. 공감의 능력이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동력이라는 사실을 이들이 잘 보여준다.
물론 아무리 종교적 천재라 하더라도 언제나 측은지심이나 긍휼로 충만해 있을 수는 없다. 자비, 긍휼 등은 그 자체로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원초적이고 즉각적인 감정이다. 고통에 대한 공감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폭력을 대면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다. 고통스럽고 싶지 않은데 고통을 마주해야 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유마경』 「문수사리문질품」)고 한 유마거사의 일성은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의 전형적인 사례다. 정말 공감한다면 중생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붓다도, 예수도 삶이 녹록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자체가 심신의 온 에너지를 빨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 받고 있는 인류를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생각하지 않으리라 그럴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라는 마하트마 간디(M, Gandhi)의 말도 고통에 대해 공감하는 이의 마음 자세와 실천을 잘 나타내 준다. 공감은 얼핏 보면 단순한 마음자세이자 정신 행위인 듯하면서도 그 어떤 신체행위 못지않게 힘들다.
네덜란드의 사회학자 아브람 더 스반(Abram de Swaan)이 세상의 작동원리로 ‘의존’을 꼽았는데, 공감도 서로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통찰하는 이가 보여 줄 수 있는 능력이다. 더 스반은 말한다. “사람은 살아가는 모든 측면에서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 태어나고,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한다. 자기에게 필요하지만 스스로 만들 수 없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어야 한다. 알아야 할 것들과 아직 알지 못하는 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서로가 없이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아브람 더 반스, <함께 산다는 것>).
인간은 상호 의존적 관계다. 실제로 인간은 서로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상호 의존성 혹은 의존적 관계 자체는 가치중립적 현상이다. 상호 의존성에 대한 인식이 타자에 대한 고마움과 타자지향적 공감으로 나타날 때, 상호 의존성은 평화의 근간이 된다. 인간의 원천적 상호 의존성에 대해 통찰한다면, 이웃의 삶에 무관심하기가 어렵다. 각종 정책도 상호 의존성을 인식하고 상호 공조 형태도 구현되었으면 좋겠다고 기대하게 된다. 정책이나 제도가 그에 미치지 못할 경우 비판적 안목으로 현실에 참여하며, 인간의 상호 의존성을 간과하지 않도록 시도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의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통찰하는 이는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어떤 힘에서 생명력을 느끼며, 이것이 사람에 대한 공감과 평화적 인간관계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 사이의 공감은 사람들의 상호 의존성이 내면화되는 데서 오는 자발적이고 성숙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평화와 평화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