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라의 『인간 실격』은 <인간 실격>과 <직소> 두 편을 함께 싣고 있다. 두 소설이 서로 의미가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저자의 삶을 조망하지 못하는 지금으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두 편의 글이 어떻든 무슨 넋두리 같다는 생각에서는 동일한 듯하다.
그 중 <인격실격>은 자전적 느낌이 강해 보인다. 이야기는 혼자의 넋두리로 태어나서 글을 마치는 시점까지의 화자의 굴곡 많은 이야기를 일인칭으로 담담하게 그려간다. 시골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으며, 소심한 탓인지 세상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런 세상에 대한 어둡고도 냉소적인 시각은 글머리에서 자기 사진을 설명하는 데서도 잘 드러나 있다. 화자는 세상과 어설프게라도 어울리기 위해 또는 어울리는 척 하기 위해 익살을 떨었지만 실제로는 누구하고도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다자이 오사무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 회의하고 마침내 젊은 시절 공산주의 그룹에 참여하기도 한다. 중학교 시절부터 타지에서 공부를 했는데 특히 고등학교는 도쿄로 진학을 했지만 엉뚱한 친구를 만나 인생을 술과 담배와 여자와 어울려 살게 된다.
특히 그의 외모는 묘하게도 여자들의 감정선을 자극했고 그 바람에 창녀들을 포함해서 여러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동거를 하고 결혼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에 갇혀서 산다.
그는 늘 삶의 끝자락을 배회했다. 한때는 동거하던 여자가 동반자살을 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여자는 죽고 그는 혼자 살아남았다. 그 일로 인해 자살 방조의 처분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죽은 여자를 위해 오열을 하다가도 어느덧 또 다른 여자를 만난다.
담배 가게 아가씨와 결혼을 하기도 하고 약국의 과부와 살을 맞대기도 했다. 마치 그가 유일하게 잘 할 수 있는 일이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는 점차 피폐해져 간다. 언제나 죽음을 매달고 산다.
술값을 벌기 위해 만화를 그리지만 때로는 춘화를 그리기도 한다. 그래도 돈이 떨어지면 옷가지를 팔고 그도 모자라면 동거하는 여자의 옷을 팔기도 한다. 그러다 마침내 모르핀에 빠져들고 패인이 되고 만다.
결국 가족들은 이 소식을 듣고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키게 된다. 그가 언젠가 동거녀와 바다에 뛰어들고 나서 한 말이 바로 여자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했었는데 정신병원이야말로 간호사조차 남자인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그런 곳이었다.
죄인이 아니라 미치광이가 된 그였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가 미쳤다는 데는 강하게 부인했다. 그리고 그는 신에게 무저항이 죄인가고 묻는다. 세상을 한 번도 거스르지 못하고 그렇다고 순응하지도 못한 것이 죄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 비참함에서 그는 스스로에 대해 인간 실격이라고 규정했다. 그 후로 그의 형이 와서 그를 시골 고향으로 데리고 갔다. 생활걱정하지 않도록 해줄 테니 그저 조용히 살라며 시골에 집을 한 채 마련해 주었다. 그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일곱, 젊고도 젊은 나이다.
글을 읽고도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선뜻 알아내기 어려웠다. 자전적 소설이라고 내 지난 과거가 이렇소 하고 별 뜻 없이 실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늘 죽음을 동경하고 있었다. 살지 못해 죽는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 사는 사람 같았다.
또 한편의 글 <직소>는 조금 특이하다. 제목처럼 어딘가를 향해 직접 스스로가 호소를 하는 형식의 글이다. 말미에 그런 호소를 하는 사람이 예수의 제자 중 예수를 팔아넘긴 가롯 유다라고 밝힌다.
그러니까 유다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팔게 되었는지에 대한 나름의 변명 같은 글이다. 기독교 인이면 백이면 백 예수의 입장에서 말하고 생각하거나 그를 찬양하는 글은 허다하지만 유다의 입장에서 변명처럼 예수를 보는 시각의 글은 본 적이 없다.
우리의 고전 중 춘향전이 문득 생각난다. 춘향전은 온통 춘향을 미화하거나 이 도령의 사람됨을 칭찬하는 데 정신이 팔려있지 방자나 향단이의 입장을 헤아리거나 그들의 입장에서 춘향이나 이 도령을 보거나 방자와 향단 사이의 시각에 대해서는 못 본 채 해왔다.
그런 허를 찌른 작품이 <방자전>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스포트라이트 바깥에 있는 자의 시선으로 보면 세상은 또 다른 얼굴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직소>라는 소설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유다가 제 잇속 차리자는 속셈으로 예수를 팔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다의 시선으로 보는 예수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는 짓을 보면 조금은 엉뚱한 구석이 있는 듯 했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때는 조금은 허풍이 있는 듯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정신이 조금 이상한 사람 같기도 했다. 열심히 먹을 것을 챙겨주어도 고맙다는 말도 없을 때는 야속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분명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유다는 예수에 대해 애증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저렇게 허풍을 떨다보면 분명 큰 코를 다칠 것이다. 그럴 바에야 내가 먼저 그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나도 죽을 것이다. 유다는 그렇게 중얼거린다. 그리고 기회를 엿본다.
그러나 예수가 마지막이 된 만찬을 하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바람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가 이 중 누군가가 자기를 배신할 것이라며 자기를 지목하자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그리고 결국 관청으로 달려가 예수를 고발한다.
소설은 그저 뜬금없는 이야기 같지만 성경에 대한 치밀한 이해가 없다면 쓰기 어려워 보일 정도로 치밀하다. 일본은 신사의 나라로 기독교 문화가 그리 발달한 곳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정도의 성격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은 것은 그 나름으로 성경 공부에 매진한 모양이다.
어떻든 두 편의 글은 읽고 나서도 여전히 몽롱하다. 작품 해설을 곁눈질해보면 그는 젊은 나이에 자살을 했다는 정도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니까 그의 삶은 온통 우울했고 자조적이었으며 세상과 타협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짧은 삶을 살았던 시기는 20세기 여명기로 대일본 제국의 광기가 세상을 뒤흔들던 시기였다. 그 암울한 시기에 일본의 젊은이들 누구나 내일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모두가 언제든 천황을 위해 죽을 수 있는 황국의 신민이었을 뿐이었을 테니까.
그 암울한 시기에 세상에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자기 의사를 분명히 드러내지도 못하는 성격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죽음은 그의 주변에서 일상으로 어슬렁거렸다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도 없다.
거기에 패전의 비참함은 진작 함께 죽지 못한 데 대한 후회와 마지못해 살아가는 삶에 대해 깊은 회한이 그를 무력하게 만들자 마침내 스스로가 <인간 실격>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점에서 <인간 실격>은 그의 어두운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자전적 소설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