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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솔사엔 어금혈봉표가 있다... 원문보기 글쓴이: 인산
유홍준 교수의 봉암사 답사기
이 글은 유홍준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창작과비평사, 1993, 11쇄)에 실린 봉암사에 관한 글입니다.
고딕체로 된 큰 글씨는 저자가 붙인 중간 제목이고, < >에 들어있는 소제목은 제가 읽으면서 붙여두었던 것입니다. 보충해서 친 부분에는 소제목이 없습니다.
원래는 필요한 부분만 공부하기 위해 쳐두었던 것인데, 올리기 위해서 빠진 부분을 다시 보충했습니다. 여러분의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83세의 나이에 지증대사적조탑비를 새겼다는 혜강 스님을 생각하면서.
2001년 4월 2일, 성심여고 역사교사 이창호 적음.
12. 문경 봉암사(1)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오고(상)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 부도와 비
촬영금지와 출입금지
답사를 다니면서 나는 어디를 가든 특별한 연줄이나 알음알이 없이 여느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입장료를 열심히 내면서 다녔다. 특출나게 전문가라고 내세울 형편도 아니었지만 유별난 특별한 혜택을 받는 것이 겸연쩍기도 했고 그렇게 한들 내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대접받아서 될 일이라면 만인이 똑같이 누릴 수 있는 대접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지금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런 식의 오기 아닌 오기 때문에 나는 그동안 무수한 불편과 수모와 억울함을 당해야만 했다. 답사처 어디를 가든 따라붙는 저 일방적인 통보의 붉은 색 표지판, 촬영금지와 출입금지 때문이었다. 관계자를 찾아가 양해를 구하면 뜻밖의 호의를 받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는 싸늘한 문전박대가 일쑤였다. 동사무소나 경찰서에 가서 느끼는 일이지만 대개 장사꾼 아닌 다음에는 사람을 많이 대하는 사람일수록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건수로 처리하는 습성이 있다.
4년 전엔가 경주 안강의 옥산서원에 있는 회재 이언적의 서재였던 독락당에 들렀는데 그 후손이라는 자가 자물쇠로 잠가놓고는 출입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군청 문화재과나 유림의 허락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이 예닐곱 번 되었지만 이런 일이 없었고 오늘은 일요일이며 지금 같이 온 답사객이 역사교사모임이라고 사정했지만 그는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나는 그 대 땅속의 회재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모든 미술관들이 전시장에서 촬영을 금지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세계의 모든 유수한 미술관들은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촬영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나는 외국에 나갔을 때 이 점이 퍽 신가하게 생각됐다. 하도 많은 금지를 당하고 살아온지라 개방되었다는 것이 차라리 이상스러웠던 것이다.-마치 요즘 서울에서 차가 안 막히고 잘 빠지면 이상스러운 것처럼.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움의 관계자를 만났을 때 촬영 허가에 대한 그들의 아이디어를 물었더니, 플래시를 사용하면 자외선이 유물 보존에 나쁘고 도 다른 관객을 방해하므로 금지하는 것이며, 상업적으로 이용할 사진은 어차피 특수 조명을 해야 하니까 일반 관객이 찍어가는 사진은 박물관 홍보에도 좋다는 것이었다.
모든 문화재의 소유자는 그것의 재산권과 관리 의무가 있을 뿐이며, 그것의 인문적 가치를 공유할 권한은 만인에게 있다는 생각이 보편화될 때 우리는 문화적으로 민주화의 길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1983년 가을 어느 날, 나는 저 유명한 지증(智證)대사의 비와 부도를 보기 위하여 문경 봉암사(鳳巖寺)를 찾아갔다. 문경에서 가은을 거쳐 봉암사까지 가는 저 엄청난 비포장길은 시외버스도 두 시간 남짓 걸리는 캄캄한 산골이었다. 아침에 서울을 떠나 저녁 나절에 당도해보니, 아뿔사! 봉암사는 1982년부터 80여 명의 납자가 결제와 산철 없이 정진하는 청정도량으로 되었기 때문에 일반인 출입이 군대보다 더 엄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불자는 아니지만 나는 이 숭고한 뜻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래도 뜻이 있으면 길이 있으리라 믿고 경비 아저씨에게 갖은 엄살과 애교와 궁상을 번갈아 떨며 애원하며 달라붙었더니 자신은 권한이 없고 저기 오는 스님에게 말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옥에 가서 부처님이라도 만난 듯한 기쁨과 희망으로 사정을 말했다. 그러나 그 스님은 내 말을 대충 듣고는 절집은 부처님 모신 곳이지 미술사의 대상이 아니라고 자기식의 논리로 훈계만 하고는 나를 떠밀 듯 내쫓았다. 최소한 안됐다는 표정이라도 지어줄 줄로 알았던 내가 잘못이었으까.
답사를 다니면서 내가 크게 배운 것은 참는 것이었다. 이럴 때는 싸우는 것보다 참는 것이 낫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참지만 속으로 치미는 울화까지 참을 정도로 인격이 수양되지 못하여 여관 한 채 없는 원북마을에서 막차를 타고 나오면서 나는 그 중이 가엽다고 생각하면서 나의 허망함을 달랬다. 사실 내가 좀더 인품을 갖추려면 “인연이 닿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풀었어야 했을 것이다.
무너진 환상의 절집 봉암사
그러하여 봉암사는 나에게 꿈속의 절집으로 언제나 남아 있었다. 천하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지증대사의 비를 쓰면서 묘사한 봉암사의 모습은 나의 상상속 환상의 절집이 되었고 그래서 나는 인연을 찾으려고 기회 있을 때면 봉암사 타령을 노래하듯 했다. 극작가 안종관 형이 명진스님이 거기 있어서 몇 번 가보았는데 정말 좋다고 하였으나 명진스님은 이미 서울 개운사에서 대승불교승가회를 하고 있었고, 신륵사 원경스님께 사정을 말했더니 음력 칠월 하순에 보름간 해제 기간이 있으니 그때 같이 가자고 했으나 양력으로 살다보니 그 날짜를 맞추지 못하고 또 몇 년이 흘렀다.
1990년 늦겨울 어느날, 정말로 인연이 닿으려고 해서인지 문화유산답사회의 한 열성회원이 봉암사에서 큰 선방을 짓는데 낙성식이 있어 초대받았으니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열 일을 제쳐두고 따라가서 10년의 한을 풀 수 있게 되었다. 환상의 절집 봉암사! 그러나 내가 정말로 행복할 요량이었다면 그때 봉암사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회학자 아도르노는 음악에 대단한 소양이 있어서 음악사회학이라는 저서를 남긴 일도 있는데 그가 평소 하던 말이 “베토벤의 교향곡은 어느 심포니가 연주하는 것보다 악보를 읽으면서 내가 머리 속으로 그려내는 것이 더욱 아름답다”고 했다는데, 나에게 있어서 봉암사야말로 글 속의 봉암사라야 아름답다.
봉암사에 다녀온 후 나는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강우방선생을 만날 일이 있어서 얘기 끝에 봉암사에 다녀왔다고 했더니, 강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게 절이야 다 망가졌어, 나는 다시는 안 갈 거야”라고 한탄어린 푸념을 계속하였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우리 나라의 모든 절집들이 최근 10년 사이에 모두 이렇게 망가졌고, 망가져가는 중이다. 그 원인은 돈 때문이다. 불경기에도 현찰 장사 되는 곳은 교회와 절밖에 없다더니 요즘 절집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엄청난 중창불사(重創佛事)는 한적한 산사에 으리으리한 법당을 짓는 일을 예사로 벌어지게 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은 고려하지 않고 크고 화려해야 발전된 것이라는 생각, 세속에서 전라북도 진안 마이산 산골동네에도 고층아파트가 생기는 일, 이런 모든 것이 모든 절집을 파괴하고 봉암사를 오늘의 저 모양 저 꼴로 만들고 만 것이다.
그러나 답사객들이여, 그렇게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나나 당신들은 그 옛날의 봉암사를 보지 못했으니까. 나는 봉암사가 일년에 한번,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만은 축제의 현장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허용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알고는 바로 그해(1991)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제7차 답사로 다시 다녀왔는데, 한 답사회원의 표현을 빌리건대 경관이 맑고 빼어나면서도 마음의 평온을 안겨다주는 가장 넉넉한 기품의 절집이다. 그리고 올 봄 부처님 오신 날 나는 또다시 봉암사에 갈 거다.
최치원이 쓴 지증대사비
<봉암사의 창건과 지증대사비>
봉암사를 창건한 분은 신라 말기의 큰스님 지증대사였다. 지증대사의 일대기와 봉암사의 유래는 최치원이 지은 지증대사비에 소상하게 실려 있고, 그 비석은 1,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글자를 다 읽어볼 수 있을 정도로 온전하게 남아 있는데, 서예가 여초 김응현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남한에 남아 있는 금석문 중에서 최고봉”이다. 글씨에 대하여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이 비문의 맨 끝에는 “분황사 스님 혜강이 83세에 쓰고 새겼다(芬皇寺 釋慧江 書幷刻字 歲八十三)”고 했으니 그 노스님의 공력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뭉클한 감동을 받게 된다. 비문의 정식명칭은 「유당 신라국 고봉암사 교시 지증대사 적조지탑비명(有唐 新羅國 故鳳巖寺 敎諡 智證大師 寂照之塔碑銘)」이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과 지증대사비>
최치원의 지증대사비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성주사 낭혜화상비, 쌍계사 진감국사비, 경주 숭복사비 등과 함께 이른바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로서 특히 이 지증대사비에는 신라시대 선종이 유래하는 과정을 말하면서 지증대사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기 때문에 하대신라의 선종을 연구하고 설명하는 논문에 이 글이 빠져 있다면 그 글은 보나마나 엉터리일 것이다. 이우성선생의 「신라시대의 왕토(王土)사상과 공전(公田)」이라는 논문은 곧 이 지증대사비문의 고찰이었으니 이 글의 역사적 가치는 알고도 남음이 있다.
<최치원의 문장>
그런 중에 나는 비록 번역본이 옆에 있어야 원문을 이해하는 턱없는 한문 실력이지만, 천하의 대문장가 최치원의 글맛이 이 비문보다 더 잘 나타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글의 구성은 도도한 강물의 흐름처럼 막힘이 없고 이미지의 구사는 그 스케일이 클 뿐 아니라 비유와 비약이 능란하여 낭만적 과장을 엿보게도 하지만 그것이 감상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진중한 사물의 성찰과 세계에 대한 인식에 기초한 것인지라 그 흐름, 그 무게, 그 감성의 번뜩임이 나를 몇 번이고 놀라 자지러지게 한다. 그래서 내 상상의 봉암사는 최치원의 문장력 때문에 더욱더 꿈속의 절집처럼 각인되었는지도 모른다.
선종의 수용과 지증대사의 생애
지증대사의 시대적 배경
<선종의 성립과 초기의 선사들>
최치원이 쓴 지증대사 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의 글머리는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을 유장하게 풀어가는 것으로 서서히 시작하여 9세기에 들어서면 도의(道義)선사가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종을 배워 전파하는 대목부터 목청이 높아진다. 도의의 설법을 경주의 귀족들은 마귀의 소리라고 비웃게 되자 그는 “동해의 동쪽을 버리고 북산의 북쪽”(경주에서 설악산 진전사)에로 은거하였다며 이후 선종의 전파과정을 설명하는데 그 내용은 바로 훗날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고 지목되는 것인 바, 남원 지리산의 홍척, 곡성 동리산 태안사의 혜철, 강릉 굴산사의 범일, 보령 성주사의 무염 등을 일일이 열거해 간다. 이런 선종 사상의 정치 사회적 의미는 이 책 「하늘 아래 끝동네」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진보성을 띠고 있는 것이었다.
<도당 유학승의 활동과 선종의 토착화>
그런데 이 구산 선문의 초기 개창조들은 거의 다 당나라에서 유학한 귀환승들이었다. 이 새롭고 진보적이고 혁명적이기까지 한 신사상을 배우고 익히는 데는 그 원산지인 당나라 유학이 필수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1950년대, 60년대의 인문사회과학자로서 해외를 경험하지 않고 서구의 모더니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왠지 지적 불안을 가져올 수도 있었던 형상 같은 것이다. 새로운 서구의 신사조가 우리 현대사를 휩쓸고 가듯이 하대 신라의 도당(渡唐) 귀환승의 사상은 9세기 사회의 청신제 역할을 했던 모양이다. 그것을 최치원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들 도당 귀환승은) 진리의 샘이 되어 저 넉넉한 덕은 중생에게 아버지가 되고, 높은 깨침은 임금의 스승 된 사람들이었으니 옛말에 이른바 이름을 피해 달아나도 이름이 나를 따른 분이었다. 그리하여 그 가르침은 중생 세계에 덮였고 자취는 부도와 비석에 전해졌다.
이리하여 점점 “좋은 형제가 생기고 자손이 풍성하게 되어” 온 나라에서 이 신사상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는 굳이 당나라에 유학하지 않아도 당당한 선사가 배출될 수 있는 기틀이 생겼다는 것이다. 마치 80년대 이후에는 지식인들이 굳이 외국 유학을 할 필요가 없다는 각성이 일어난 것과 같은 분위기의 성숙이다. 그것은 외래 문화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수용할 만한 문화 능력이 배양되었음을 말해주는 문화적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최치원은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하였다.
별도로 지게문을 나가지 않고 들창을 내다보지 않고도 대도(大道)를 보았으며, 산에 오르지 않고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도 최상의 보배로움을 얻음이 있었으며, 저 언덕에 가지 않아도 이르렀고 이 나라를 엄하게 하지 않았어도 다스려졌으니 그 누구와도 비정하기 어려운 그분이 지증대사이다.
<지증의 법맥>
이어 최치원은 지증의 법맥을 얘기하고 있는데, 선종이 처음으로 신라에 소개된 것은 도의선사보다도 150년 전인 7세기 중엽에 법랑(法郞)스님이 중국 선종의 제4대조인 도신(道信)에게 전수받은 것이었는데, 당시로서는 크게 선풍을 일으킬 문화적 성숙이 없어서 지리산 단속사의 신행(信行)에서 준범, 혜은스님으로 명맥만을 유지해오다가 드디어는 고손제자 되는 지증대사에 와서 큰 빛을 발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봉암사의 선풍(禪風)은 구산선문 중 해외파의 남종선이 아닌 국내파의 북종선 전통을 지닌 것이었다. 이게 어디 보통 중요한 일일까 보냐.
지증대사의 일대기
<지증대사의 일대기-최치원의 비문>
지증대사(智證大師:824~882)의 이름은 도헌(道憲)이고 자는 지선(智詵)이며, 지증은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이 존경과 애도의 뜻으로 내린 시호이다. 속성은 김씨로 경주사람이었는데 키가 8척에 기골이 장대하고 말소리가 크고 맑아 “참으로 위엄있으면서 사납지 않은 분”이었다고 한다.
최치원은 스님의 일대기를 쓰면서 그분의 일생에 있던 기이한 자취와 신비한 얘기는 이루 다 붓으로 기록할 수 없다며 여섯 가지 기이한 일과 여섯 가지 올바른 일[육이(六異)와 육시(六是)]로 추려서 적어 나갔다. 나는 이것을 독자를 위하여 다시 일대기로 정리하여 엮어가고자 한다.
<탄생>
어머니가 잉태할 때 큰스님을 낳을 태몽이 있었는데 400일이 지나도 출산하지 못하더니 사월 초파일에 비로소 태어나게 되었다. 아기는 태어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젖을 먹지 않고 목이 쉬도록 울기만 했는데, 어느 도인이 “어미가 매운 것과 비린 것을 먹지 말아야 한다”고 일러주어 탈없이 기를 수 있었다.
<출가와 어머니의 허락>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이 되겠다고 했으나 어머니가 어리다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지증은 석가모니도 부모 말 듣지 않고 성벽을 넘어갔다며 영주 부석사에 가서 중이 되었다. 그후 몇 년이 지났을 때 집 나간 아들을 그리워하다가 어머니가 큰 병을 얻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으로 돌아와 간병을 열심히 하니 어머니는 부처님께 내 병을 고쳐주면 아들을 당신께 보내겠다는 치유서원을 내어 어미는 병이 낫고 자식은 다시 중이 됐다. 이 모든 설화가 지증이 예사로운 인물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부석사의 경의․혜은에게 배우고 나무꾼의 깨침으로 수석사에서 법회를 열다>
17세(840)에 부석사 경의율사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나중에는 혜은스님에게서 선종의 교리를 배우니 이는 법랑의 5대제자가 되는 셈이었다. 이후 운수행각으로 명성을 쌓아가는데 지증은 고행(苦行)을 몸으로 실천하여 비단옷과 솜옷을 입지 않고 가죽신을 신지 않으며, 노끈과 가는 실도 반드시 삼과 닥나무실을 사용했다고 한다. 남을 가르치기보다도 스스로 깨치기롤 더 좋아하였으나 어느날 산길에서 돌연히 나무꾼이 나타나 “먼저 깨친 사람이 나중 사람에게 배운 것을 나누어주는 데 인색해서 안된다”고 꾸지람하고 사라진 뒤부터 계람산 수석사(水石寺)에서 법회를 여니 찾아오는 대중이 갈대밭, 대밭처럼 빽빽하였다.
<경문왕의 초대 거부>
지증의 명성이 이처럼 높아지자 경문왕은 정중한 편지를 내어 서라벌 근처 아름다운 곳에 절집을 지어 모시고 싶다면서 “새가 자유로이 나무를 고르듯 훌륭한 거동을 아끼지 말아주십시오”라며 간청하였다. 그러나 지증은 이 영광된 부름을 거부하면서 “진흙 속에 편히 있게 하여 나를 예쁜 강물에 들뜨게 하지 마십시오”라는 답을 보냈다. 이후 지증의 명성은 더욱 온 나라에 가득하게 되었다.
<단의장 옹주의 초청으로 현계산 안락사에서 주석하다>
41세(864) 때는 과부가 된 단의장 옹주가 자신의 봉읍[읍사(邑司)]에 있는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에 주석을 부탁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44세(867) 때는 단월옹주가 농장과 노비문서를 절을 위해 바치자 이를 받아들였으며 훗날 헌강왕은 이 재산 증여를 공식으로 인정하였다.
봉암사의 창건과정
<봉암사 창건-심충의 토지 기증>
이처럼 덕망높은 스님으로 세상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지증에게 하루는 문경에 사는 심충(沈忠)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제가 농사짓고 남은 땅이 희양산(曦陽山) 한복판 봉암용곡(鳳巖龍谷)에 있는데 주위 경관이 기이하여 사람의 눈을 끄니 선찰(禪刹)을 세우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지증은 심충의 부탁이 하도 간곡하고 또 완강한지라 그를 따라 희양산으로 향했다.
<희양산의 위치와 모양>
희양산(998m)은 문경 새재에서 속리산 쪽으로 흐르는 소백산맥의 줄기에 우뚝 솟은 기이하고 신령스러운 암봉이다. 오늘날에도 일 없인 발길이 닿지 않는 오지 중의 오지로 희양산 북쪽은 충북 괴산군 연풍이 되고, 남쪽은 문경군 가은읍이 된다. 가은읍에서 봉암사 쪽으로 꺾어들어서면 제법 시원스런 들판 저 멀리로 희양산 영봉이 신령스럽게 비친다. 북한산 백운대 인수봉과 진안 마이산을 합쳐놓은 것처럼 불쑥 솟은 봉우리가 기이하기 짝이 없다. 최치원의 표현으로는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이라고 했다.
<희양산 봉암사의 지세>
다시 지증은 나무꾼이 다니는 길을 따라 지팡이를 짚고 희양산 한복판 계곡으로 들어가 지세를 살피니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물은 백 겹으로 띠처럼 되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였다.” 이에 지증은 감탄어린 어조로 탄식하여 말하기를 “여기는 스님의 거처가 되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세상은 변했어도 지세는 변치 않아 지금 봉암사 절집 마당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깊은 산속에 이처럼 넓은 분지가 있다는 것이 차라리 이상할 정도이며 손발을 담그기에도 미안스러울 정도로 맑고 넓은 계곡은 바위에 바위를 넘으며 장중한 음악을 연주한다. 나 역시 봉암사에 당도하여 넋을 잃고 먼 데 산봉우리를 보고 또 보니, 낙성식에 온 한 ‘아지매 보살’이 넋빠진 나를 넋을 잃고 보다가 “좋체예, 우리 할배가 카던데예, 봉암사는 열두판 연꽃봉우지에 뺑하니 뒬러 있다 캅디더. 그라고 절집은 꽃봉우지 화심이라 카던더예. 좋체예”라고 말하고는 잠시 아는 척한 것이 스스로 좀 쑥스럽게 생각됐던지 얼른 등을 돌리고는 종종걸음으로 돌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속으로 그집 할배 문자속이 최치원보다 나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최치원 글의 큰 단점은 저처럼 사랑스럽게 달려와 안기는 맛이 전혀 없었던 점, 그래서 옹혼한 이미지의 구사가 때로는 너무 현란하다는 점이라는 내나름의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봉암사의 창건과 도적의 감화>
이리하여 881년, 지증은 기와처마 네 귀를 치켜올려 거친 지세를 누르고, 철불상 2구를 주조하여 이를 호위케 했으며, 절이 완성되자 헌강왕은 관리를 내려보내 절의 강역을 구획하여 장생(長栍)을 표시케 하고 절이름을 봉암사(鳳巖寺)라고 지어 내렸다.
지증이 봉암사에서 포교를 시작하자 산(山)백성으로 도적떼[야구(野寇)]가 된 자들의 항거가 심했으나 수년 만에 감화시켰으니 이것은 마산(魔山)의 기세를 누른 지증의 공력 덕이라고 최치원은 말했다.
“이것이 이것이니 그 나머지는…”
<헌강왕의 초대에 응함>
지증이 다시 현계산 안락사로 돌아왔을 때 나라에서는 왕이 바뀌어 헌강왕이 등극하면서 “나쁜 풍속을 일소하고 진리로써 마른 땅이 적셔지기를 희망한다”며 지증대사에게 정중한 초대의 편지를 보냈다. 지증대사는 처음엔 별로 응할 뜻이 없었으나 “좋은 인연은 온 세상이 같이 기뻐하고, 먼지구덩이는 온 나라가 같이 걱정해야 한다”는 구절에 감동되어 서라벌 반월성 월지궁(月池宮)으로 향하여 산에서 내려오니 거마(車馬)가 베날듯이 길에서 맞이했다. 대사가 궁궐에 도착했을 때 반월성 월지의 정경은 아주 평온하였다. 최치원의 표현을 빌리면,
때는 담쟁이덩굴에 바람이 불지 않고, 빈청(賓廳) 뜰에는 바야흐로 밤이 다가오는데, 때마침 달그림자[금파(金波)]가 연못 복판에 단정히 임하였다.
대사는 고개 숙여 조용히 이 정경을 바라보더니 왕에게 하는 말이 “이것이 이것이니 그 나머지는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즉 저 평온한 정경, 그런 마음, 그런 자세, 그런 세상살이면 된다는 뜻이었다. 임금은 염화시중의 미소 같은 이심전심으로 이 말을 알아듣고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스님께 절을 올리고 망언사(妄言師)로 삼았다.
얼핏 듣기에 정신 나간 사람들의 행실 같아 보인다. 큰스님이라고 모셨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이것이 이것이니 그 나머지는 할 말이 없다”고 하고, 왕이란 자는 그걸 듣고 놀린 얘기가 아니라 크게 기뻐했다고 하니 도저히 우리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우리 시대와는 달라서 이런 계시의 접촉 반응제를 통해 열 권 책의 분량보다도 더 큰 마음의 양식을 찾았으니, 이를 함부로 비과학적이라고 가벼이 볼 일이 아닌 것이다.
헌강왕은 계속 스님을 곁에 모시고 싶었으나 “토끼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나뭇줄기를 떠나게 하고, 물고기를 탐내는 사람에게는 그물 만드는 법을 배우게 하였으니” 스님은 이제 또 도를 닦기 위해 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쉬움을 금치 못한 헌강왕은 여러 신하에게 전송을 명하고 눈얼음이 길을 막으므로 병려나무로 만든 가마를 하사하였다.
<헌강왕이 하사한 가마를 타지 않고, 안락사로 돌아와 세상을 떠나다>
그러나 스님은 평소 멀고 가까움, 험하고 평탄함을 가린 일 없고, 사람의 일을 말이나 소로써 그 노고를 대신한 일이 없었으니 그것을 타고 갈 리가 없었다. 스님은 심부름 온 신하에게 말하기를 “세속의 똑똑한 사람도 가마를 사용 않는 일이거늘 하물며 삭발한 스님으로서 타겠는가. 그러나 왕의 명령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빈 가마로 가다가 병자가 생기면 도와주는 도구로 삼자”고 했다.
그리하여 빈 가마를 앞세우고 가는데 얼마 가지 못하여 다른 사람 아닌 지증이 발병이 나서 지팡이를 짚고도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증은 할 수 없이 병자로서 그 가마를 타고 현계산 안락사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안락사로 돌아온 지증대사는 이듬해인 882년(헌강왕 2) 12월 18일 드디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세수 59세, 법랍 43년이었다.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인간의 최후-특이한 죽음들>
이 고매한 스님 지증대사의 입적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큰스님의 최후는 언제나 큰스님다웠다.
작년에 타계하신 해인사 조실 자운스님은 열반에 드는 날 저녁에 4행시를 지었는데 맨 끝 구절은 “서쪽에서 해가 뜬다(西方日出)”이었다. 서산대사는 운명 직전에 당신의 초상화를 가져와서는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고 적고는 입적하셨다. 또 수덕사 만공스님은 저녁공양 후 거울을 보면서 “만공, 자네는 나와 함께 70여년 동고동락했지. 그동안 수고했네”라고 말하고 떠났고, 인조 때 걸출한 스님 진묵대사는 제자들을 불러놓고, “얘들아, 내 곧 떠날 것이니 물을 것 있으면 빨리 다 물어나 보아라”하고는 한두 마디 대답하더니 앉은 채로 열반했다고 한다. 단재 신채호의 수필 중 비뚤어진 험악한 세상에서는 차라리 이단을 택하리라는 내용의 글이 있는데 청주의 어느 스님이 제자들을 보고 “얘들아, 앉아서 죽었다는 사람 보았느냐?”고 물으니 “예, 있습니다”고 답하자 “그러면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고 묻자 “들어보진 못했으나 있을 법은 합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스님은 “거꾸로 서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였더니 제자들은 “그건 불가능할 것입니다”라고 답하자 그 스님은 그 자리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는 죽어버렸다고 한다. 모두가 죽음을 알아차린 분들의 이야기들이다.
세속에도 그런 분들이 적지 않다. 나의 학부 때 은사 학보(學步) 김정록(金正祿)선생은 당신 운명 일주일 전에 파주 광탄에 가서 묘자리를 준비해 놓고, 운명 이틀 전에는 생전의 강의록을 모두 불태우면서 “내 연구를 후세에 남기기 부끄럽다”고 했다고 한다.
<지증대사의 최후와 최치원의 애도>
그러나 지증대사의 죽음은 이런 예감도 기발함도 아니다. 평온과 안락 그 자체였다. 세속에서 편안한 죽음은 고통 없이 잠자다 떠나는 것이라고 한다. 내 친구 어머니는 노인학교에 가서 재미있게 강의 듣다가 눈을 감았으니 주위에서 모두 복받은 운명이라고 했는데 내 친구 아버지는 친구들을 불러 고스톱 치다가 광 팔아 선불 받고 잠시 쉬는 사이에 운명했으니 세상엔 함부로 최고라는 말을 쓸 게 못 된다.
지증대사는 저녁 공양을 마치고 제자들과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하던 중 가부좌를 튼 채로 돌아가셨다. 그런 분이 바로 지증이었다. 최치원은 지증대사적조탑비를 쓰면서 이 대목에 이르러 마땅히 감탄사를 붙이는 탄식의 애가를 불렀다. 무어라고 했을까? 인도의 네루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아시아의 큰 별이 떨어졌다”는 표현을 명언이라고들 했는데 천하의 대문장가 최치원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다.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로 빠졌다.
(嗚呼 星廻上天 月落大海)
그 높은 덕으로 온 세상을 밝게 비춰주던 스님이 세상을 떠나니 하늘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암흑 같았다는 뜻이리라. 이런 장대한 이미지 구사가 나올 때 최치원의 글은 제격이었다.
<장례와 헌강왕의 시호 추증, 최치원의 비문 명(銘)>
스님이 돌아간 이틀 후 현계산에 임시 빈소를 차리고 1주년이 되었을 때 드디어 희양산 봉암사로 모시어 장사지냈다. 헌강왕은 사람과 제물을 보내 스님의 입적을 애도하였고, 시호를 지증, 부도탑 이름을 적조(寂照)라 내렸다.
옛 비문 형식에는 명(銘)이란 것이 있는데, 비문 끝에 부기하여 그분의 삶을 기리는 시구로 씌어지는 것이다. 글쓴이가 명을 썼으면 존경의 뜻이 있는 것이고 없으면 그저 부탁에 응한 것이었다. 그러니 최치원이 지증대사에게 바치는 명문이 없을 수 없는데 그 또한 장문인지라 나는 그중 지증대사가 해외유학파가 아니고 국내파라는 부분을 강조한 구절만을 인용하면서 지증대사의 일대기를 여기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다복쑥은 삼대에 의지하매
능히 스스로 곧았으며
구슬은 옷 안에서 찾았으니
옆으로 구함이 없었다.
1993. 2.
13. 문경 봉암사(2)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하)
-정진대사 부도와 비/마애보살상/야유암
절이란 마음을 내리는 것
꿈에도 그리던 봉암사 절집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식에 서둘러 답사채비를 하는데 집사람이 넌지시 물어왔다.
“이번에는 어디를 가슈?”
“10년 전에 갔다가 낭패 본 봉암사에 내일 선방 낙성식이 있대.”
“성심이 있어 인연이 닿았나 보구려.”
나의 집사람은 독실한 불자(佛子)이다. 남편인 나도 잘은 모르지만 한때는 금강경 윤독회에도 열심히 나갔고, 봉은사 구역법회의 법륜보살을 맡아 일한 적도 있다. 부부 사이지만 우리는 인생의 공유(公有)와 분유(分有)를 명백히 한다는 묵시적 원칙이 있어서 서로의 신앙을 간섭하지 않는다. 그녀의 신앙은 불교이고, 나의 믿음은 한국미술사이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회사(廻寺)를 막지 않으며 그녀는 나의 답사길을 막지 않는다. 1년이면 두세 달을 나가 자도 끄떡없었던 것은 이런 비결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신앙과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는데 집사람이 반칙을 하고 나왔다.
“당신 절에 가면 부처님께 절이라도 한번 해보구려.”
“내가 미치기 전에야 돌덩이, 쇳덩이 앞에 엎어져 빌겠어. 그런다고 소원성취 되는 것도 아닌데.”
“절이라는 것이 소원성취 해달라고 비는 것인 줄 아세요.”
“그러면, 망가지게 해달라고 빈담?”
“그런 게 아녜요.”
“그러면 뭐야.”
“절이란 돌덩이, 쇳덩이 앞에서도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자기의 겸손을 보여주는 것이예요.”
함께 살아가면서 대개는 내 주장이 이기는데 가끔은 이렇게 결정타를 맞는 것이 나의 가정생활이다.
하심(下心)! 마음을 내린다는 것! 그것은 불자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며, 가히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런 건 책에 다 나와요
낙성식에 참가한 뒤 나를 안내한 분이 기왕이면 주지스님을 만나뵙고 다음 답사 때 편의를 부탁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여 나는 내 생전 처음으로 주지스님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안내자의 얘기가 스님 뵈면 절을 해야 되는데 할 수 있겠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선선히 그러마고 답했고 주지스님에게 차마 삼배는 할 수 없고 일배에 반배만 올리고 방석에 앉았다.
주지스님은 내가 봉암사에 오게 된 내력을 듣더니 요다음에는 사월초파일에 회원들과 함께 오면 연락 없어도 되고 절밥도 먹을 수 있다면서 봉암사 안내기라는 작은 책자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받은 자리에서 대충 훑어보는데 부실하기 짝이 없는 안내서였다. “도량 안에서는 정숙해야 합니다”라는 글로 시작되는 국민학생 취급하는 경고는 그렇다치고 지증대사의 일대기나 유물의 해설은 고작해서 한두 마디로 그만이다.
지증대사비를 모신 비각 앞에는 문화재관리국에서 비문을 한글로 축역해서 동판에 새겨놓은 간결한 일대기가 세워져 있다. 그 글은 금석학의 태두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 선생님이 번역한 것으로 문장도 유려한 것이었다. 그것만이라도 이 봉암사 안내기에 전재해놓았으면 오죽이나 좋았으랴마는 그런 성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봉암사의 이런 아둔함이 측은하게 생각되어 주지스님에게 다음번에 안내책 만들면 그 글을 꼭 실으라고 충고 아닌 부탁의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주지스님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런 건 중요한 것이 아녜요. 여긴 참선도량이기 때문에 스님들이 도 닦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 글 읽고 싶은 사람은 다른 책을 보면 다 나와요.”
이런 대답에 내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서둘러 주지실을 나와 댓돌 위의 신을 질질 끌고 나와 뜰로 내려와 그런 중한테 절까지 했다는 것이 너무도 억울했다. 여편네 꼬임에 넘어가 부처 아닌 중한테까지 절을 했는데 절값으로 받은 말이 고작 자기 조상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한국 불교에서 최고 가는 청정도량이라는 봉암사가 이럴진대 한국 불교의 현황이 어떤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일이 아닌가. 스님들이여! 당신들이 어떻게 해서 이땅의 절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는가를 한번만 생각해보라. 자아를 발견하고, 자기를 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법이다.
봉암사 경내를 둘러보고 절집을 떠날 때 나는 천년을 두고 우뚝한 지증대사비와 열두판 꽃잎처럼 감싸안은 희양산 연봉들이 파란 하늘을 향해 손짓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기회가 오면 당신들을 대신해서 내가 저 비문과 산세를 말하면서 봉암사의 안내기를 써주리라 마음먹었다. 결국 이 글은 내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경륜의 지식인에게 보내는 경의
<지증대사의 삶의 의미>
지증대사는 그 일대기에서 엿보이듯 원효나 의상 또는 훗날의 지눌 같은 위대한 불교사상가는 아니었다. 그저 스님으로서 한세상을 성실하게 살아갔던 분이니 그분의 사상이라고 별도로 내세울 것은 없는 분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로 결정한 출가, 나무꾼의 꾸짖음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자신의 지식을 대중과 나누어 쓰는 자세, 왕의 부름에 쉽게 응하지 않는 고고한 기품, 봉암사를 창건하는 과정, 가마를 타고 가지 않는 어짐, 그리고 평온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스님으로서, 또는 한 지식인으로서 지증의 삶에서 우리가 느끼고 배울 바가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 시대의 지적 풍토>
인간의 영원한 스승은 위대한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에 있다. 뛰어난 사상 체계 속에서 얻는 것보다도 주어진 현실 속에서 부단히 자기를 실현하는 인간적 노력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은, 더욱 생생한 인생의 철리와 인간적 가치를 배우게 된다. 그것은 스님의 세계나 속세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시대의 지적 풍토에서 역사 속의 인물에 대한 관심은 대개 한 시대의 사상가, 그것도 그 인물이 아니라 사상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 시대를 성실하게 살아갔던 인간에 대하여는 야박할 정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실천적 지식인과 경륜의 지식인>
그리고 실천적 지식인상을 찾을 때면 으레 변혁의 계절에 굳센 의지로 살아갔던 인물에 국한될 뿐 세상을 풍요롭게 가꾸어간 경륜의 지식인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지난 30여년 군사독재의 ‘개발독재’ 상황에서 우리는 그 억압을 뚫고 나아가야 하는 세월의 간고함 때문에 경륜의 지식인에게 함부로 경의를 보내지 못했다. 제도권 속에서 경륜을 편 지식인상을 부각시킨다는 것은 곧 어용적 행태로 오해받거나 이용당할 소지가 많았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커다란 덕성을 바탕으로 하여 대범하고 슬기로운 인생을 살았던 황희, 이원익, 유척기, 채제공 같은 명정승의 삶 속에 배어 있는 훈훈하고 윤기있는 삶의 정서를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나는 지증대사를 그런 경륜의 지식인상으로서 이해하며 존경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불타는 봉암사
<지증대사비의 건립 과정>
지증대사가 세상을 떠난 것은 882년, 헌강왕 8년 12월이었고, 이듬해 봉암사에서 다비하여 부도를 세웠다. 지증의 법통은 제자인 양부(楊浮:?~917)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3년 뒤 헌강왕은 최치원에게 대사의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면서 시호는 지증(智證), 부도의 이름은 적조(寂照)라고 내려주었다. 원고 청탁을 받은 최치원은, 그 자료를 찾는 어려움과 그 방대한 자료를 소화하기 힘든 무능과 게으름으로, 무려 8년이 지나서 탈고를 했는데 그때는 헌강왕은 이미 죽고 진성여왕 6년인 892년이었다. 그리고 이 비가 세워진 것은 다시 33년이 지난 924년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늦어졌을까. 이 비석의 돌이 저 멀리 남해바다에서 캐온 대리석이었다고 하니 요즘처럼 일 떨어진다고 후딱 해치우는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너무 긴 세월이었다. 그것은 지증대사 임종 후 신라사회는 이내 후삼국시대라는 일대 혼란기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견훤이 전라도 광주에서 반기를 든 것은 바로 최치원이 비문을 완성한 892년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비문이 늦게 세워진 것보다도 그런 시국의 혼란 속에서도 이런 대역사(大役事)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당시 봉암사의 위세를 엿볼 수도 있는 것이다.
<후삼국 시대의 혼란>
그러나 지증대사의 비가 세워진 지 5년도 못되어 봉암사는 불바다가 되고 일찍이 지증대사가 절이 아니면 도적의 소굴이 될 거라 한 예언대로 도적의 소굴이 되고 만다.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 나라에 싸움판이 벌어질 때면 문경 새재는 언제나 전략의 요충지였고 치열한 격전장이 되었으니 새재의 우익에 위치하여 병사의 주둔지, 군량미의 비축장으로 안성맞춤인 봉암사가 몸 성할 리 없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6‧25동란 때도 그랬듯이 후삼국시대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삼국사기에 견훤이 가은땅을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돌아간 것은 929년 10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전투상황이 어떠했는지에 대하여 더 이상의 기록이 없다. 다만 문경 가은땅의 전설에 의하면 그때 경순왕이 봉암사로 피난왔다는 것이다. 희양산 중턱의 성골[성곡(城谷)]이라는 성터가 바로 경순왕의 피난처로 지금도 그 성터에는 수백명이 들어가는 굴이 있다고 한다. 또 봉암사 원북마을의 동네 이름에는 경순왕이 견훤의 난을 피해 왔을 때 아침을 먹은 곳을 아침배미[조야미(朝夜味)], 저녁을 먹은 곳을 한배미[일야미(一夜味)]라고 하며, 난을 피해 돌아갈 때 백성과 원님이 환송하던 곳을 배행정(拜行亭)이라고 하는데 여기는 바로 봉암사 초입이다.
<긍양이 왔을 때의 봉암사>
이 와중에서 언제 봉암사가 누구의 손에 의하여 불타게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그로부터 6년 뒤인 935년, 봉암사를 다시 일으키는 정진(靜眞)대사 긍양(兢讓)이 봉암사에 당도했을 때 모습이 그의 비석인 ‘정진대사 원오탑비(靜眞大師圓悟塔碑)’에 이렇게 씌어 있다.
대사가 봉암사에 이르러 희양산 산세를 둘러보니 천층만첩의 깍아지른 벼랑들이 보였다. 때는 도적들이 불지르며 다니던 시절인지라 계곡의 모습은 의구해도 절집의 뜰과 스님의 거처는 태반이 무너져내리고 가시덤불 쑥대만 무성하였다. 오로지 우뚝 솟아 보이는 것은 비석을 지고 있는 돌거북이와 그 비석에 새겨져 있는 지증대사의 덕이며, 도금한 불상이 신령스런 빛을 비추고 있는 것이었다.
견훤의 고향 땅 가은
<견훤-난세의 영웅>
여러 정황을 볼 때 봉암사를 황폐화시킨 장본인은 견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견훤의 고향은 바로 이곳 가은 땅이었다. 가은읍 길동의 아차마을이 그가 태어난 곳이며 농암면 궁기(宮基)마을은 그가 후백제의 왕이 되기 전에 살던 곳으로 이곳 사람들은 견훤궁지라고 부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견훤이라는 인간상은 대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나오는 열전에 근거를 둔 것으로 그는 횡포한 인간으로 묘사되면서 왕건의 자비스러움에 대비되어 있다. 그러나 김부식의 견훤상에는 자못 악의적인 구석이 많다. 칼을 쥔 자, 붓을 쥔 자의 일방적 폭력은 그렇게 나타나곤 하는 것이다.
어쩌면 견훤은 난세에 태어난 걸출한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이 첩첩산골 출신으로 이미 인심을 잃어버린 나라에 대항하여 반기를 들고 한때 그 힘은 어느 호족보다 강성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울 정도였다. 덕이 모자란 것이었는지, 시운이 맞지 않았던 것인지 끝내는 자식에게 유폐되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지만 그가 역사 속에서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별로 잡히는 것이 없다. 그저 패자였을 뿐이다.
<견훤 전설의 왜곡>
가은땅에는 견훤에 대한 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탄생설화에서 용맹에 이르는 이 전설들은 처음에는 난세의 영웅을 기리는 얘기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전설들도 견훤을 비하시키기 위하여 어떤 식으로든 왜곡되어 있다.
아차동의 한 부유한 가정에 규중처녀가 있었는데 밤이면 가만히 처녀방에 이목이 수려한 초립동이 나타나서 처녀와 같이 정담을 나누고 동침하다가 새벽이 되면 흔적이 없이 사라지고 밤이면 나타나고 하기를 무릇 수개월에 처녀가 잉태하여 배가 부르게 되니 처녀가 부모에게 사실을 실토하였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딸에게 말하기를 그 사나이가 오거든 평상시와 같이 잠을 자다가 그 사나이 모르게 옷소매에 바늘로 실을 꿰어매라고 말을 하고 밤에 가만히 엿보니 과연 이목이 수려한 초립동인지라 하회를 기다리기 위하여 그대로 방치하고 새벽에 초립동이가 사라진 후 실을 따라서 찾아가 보니 금하굴로 들어간지라 굴속에 들어가 보니 커다란 지렁이[대구인(大蚯蚓)] 몸에 실이 감기어 있었다. 그후로는 초립동이 나타나지 않고 10개월이 지난 후에 처녀는 옥동자를 순산하였으니 그가 견훤이라고 한다.(문경군지에서)
그게 왜 큰 지렁이였겠는가. 전설이 되려면 그것은 용이거나 최소한 큰 뱀이어야 된다.
또 궁기마을 입구의 충암절벽에는 마암(馬岩)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전설은 이렇게 꾸며져 있다.
견훤이 후백제왕이 되기 전 궁기에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용추변 마암을 소요하고 있는데 갑자기 오색무운이 자욱하면서 마암 쪽에서 말 우는 소리가 들린다. 견훤은 이상히 여기고 마암 위로 올라가니 표활하게 생긴 용마가 주인을 맞이하는 듯 반가와하므로 한손으로 말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나는 장차 후백제왕국을 세울 몸인데 하늘이 왕업을 돕기 위해 용마를 보내셨구나 하면서 말에게 말하듯 훈계하니 용마는 힝힝거리며 좋아하는 기색이다. 견훤은 표연히 말등에 올라 채찍을 가하니 말은 주홍 같은 입을 벌리면서 질주한다. 견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용마의 걸음이 빠른가 화살이 빠른가 시험해보자 하면서 적지산으로 화살을 쏘고 말을 몰아 적지산에 이르니 화살은 어디에 떨어졌는지 알 수 없다. 견훤은 대노하여 이것이 무슨 용마냐고 하면서 칼로 용마의 목을 베어버리자 삐웅하는 소리가 나며 화살이 땅에 떨어진다. 이에 견훤은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면서 “세월의 불리함이여, 장차 어찌할거나(時不利兮 將次奈何)”라고 하여 탄식했다고 한다.(같은 책에서)
나는 지금 견훤의 인간상을 올바로 복원해보고자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럴 능력도 그럴 성심도 없다. 다만 지금도 칼 쥔 자의 일방적 횡포 속에 어린 백성들이 속아넘어가고 있는 처참한 현실이 이와 무관치 않음을 상기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칼 쥔 자의 횡포>
봉암사에 갈 때마다 나는 문경 시내를 거쳐야 했다. 이화령고개를 넘어 시내로 들어가는 로터리 맞은편 건물에는 언제나 관제 현수막이 걸려 있다. 한번은 그 현수막에 과소비 추방과 카톨릭의 “내 탓이오”운동이 적혀 있었는데 “내 탓이오, 내 탓이오, 과소비현상 내 탓이오-한국자유총연맹 문경지부”이었다. 나는 속으로 저들도 실수해서 올바른 소리할 때도 있구나 싶어서 통쾌한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한번은 “민주위장 좌익세력 간첩인가 다시 보자-문경군청”이었다. 이런 식의 용공음해가 자행되는 가운데 지난번 대선을 치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결코 그런 속임수를 속지는 않을 정도의 문화적 성숙을 이룩하고 있다. 승자는 역사 속에서 정사(正史)라는 이름 아래 허구를 치장하겠지만 패자는 야사(野史) 속에서 위대한 전설을 남길 것이다.
봉암사의 흥망성쇠
<긍양과 봉암사>
935년, 폐허가 된 봉암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정진대사 긍양(兢讓:878~956)은 정치적 수완이 대단했던 스님이었다. 고려초의 문장가였던 이몽유(李夢遊)가 찬한 그의 비문에는 대사의 행장이 아주 상세하다.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서 처음에는 유학(儒學)을 공부하다가 한계를 느껴 20세에는 계룡산 보원정사에서 중이 되고, 이듬해에는 서혈원(西穴院) 양부선사의 제자가 되니, 양부는 지증대사의 제자였으므로 훗날 그가 봉암사로 오게 되는 계기를 여기서 맺었던 것이다.
23세 되는 900년 중국에 유학하여 24년 후인 924년에 귀국하여 스승 양부선사가 주석하던 강주(康州:오늘날 晉州) 백엄사(伯嚴寺)에 있다가 935년 봉암사로 오게 되었다.
<긍양의 명성>
그의 명성이 어떻게 퍼지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경애왕은 그에게 봉종(奉宗)대사라는 별호를 올리며 초빙하였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자 부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찾아가 불교정책을 자문하고(936), 혜종이 즉위하자 경하의 편지를 보내고(943), 정종이 즉위하자 초대를 받으며(945), 광종이 즉위하자 왕사(王師)가 되어 사라선원(舍那禪院)에 머물게 되었으며, 956년, 79세의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나니 그는 후삼국 혼란기에 다섯 임금의 귀의를 받은 영광의 스님이었다.
<긍양의 죽음과 긍양선사비의 건립>
스님의 죽음에 광종은 시호를 정진, 부도명을 원오라 내리고 그 비문은 이몽유가 짓고 글씨는 한림원 박사를 지낸 당대의 명필 장단열(張端說)이 쓰게 했으니 그 부도와 비가 지금 봉암사 동쪽 언덕 비선골에 세워져 있다.
이런 능력있는 정진대사였기에 봉암사의 중창은 거대한 것이어서 「봉암사지」에 의하면 법당이 10채, 승당이 16채, 행랑․누각이 14채, 부속건물이 10여 채, 산내 암자가 9채였다고 한다. 이때가 사실상 봉암사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봉암사는 여주 고달원, 양주 동봉원과 함께 광종의 직지(直指)를 받은 고려 삼원(三院)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 전기의 봉암사-함허선사의 중수, 임란때 전소>
그러나 봉암사의 영광은 거기에서 끝나고 만다. 「봉암사지」에는 보조국사 지눌이 여기에서 도를 닦았다고 하지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며, 확실한 것은 함허(涵虛:1376~1430)선사가 조선왕조 세종 13년(1431)에 중수하였다는 것이니 이 말을 역으로 해석하면 벌써 전, 어쩌면 몽고란 때 황폐화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함허스님의 부도는 「함허당 득통지탑(得通之塔)」이라는 탑명이 씌어 있는 아담한 팔각당 형식으로 봉암사 동쪽 기슭에 있다. 득통은 그의 아호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상의 주도적 이데올로기가 성리학으로 대체되니 봉암사 같은 구산선문의 오지 사찰들은 거의 폐사가 되기에 이른다. 그래도 지세의 힘이 있었는지 그 명맥만은 유지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봉암사는 다시 전소되고 문경지방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거처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봉암사-환적선사, 신화화상의 중건, 설봉선사비>
임란 이후 조선불교에 새로운 중흥기를 맞게 된자 봉암사에는 다시 환적(幻寂:1603~1690)선사 같은 큰 스님이 주석하게 된다. 그분의 부도는 함허당 부도 곁에 그와 비슷한 형식으로 탑명만 「환적당 지경지탑(智鏡之塔)」이라고 씌어 있다. 지경은 스님의 어릴 때 이름이었다.
이후 봉암사는 현종 15년(1674), 이른바 갑인년 화재로 거의 다 소실된 것을 신화(信和:1665~1737)화상이 중건하였고, 설봉(雪峰:1621~1707)선사가 이곳에 주석하여 경전에 주석을 달고 목판본을 찍어내기도 하였는데 계미년(1703) 화재로 모두 타버리고 만다. 설봉의 부도는 환적당 부도 곁에 있는 초라한 석종형 부도라고 생각되며 봉암사 일주문 옆 계곡 위에 절반이 동강난 비가 그분의 비석이다. 그리고 그 비는 당대의 명필 백하(白下) 윤순(尹淳)의 글씨로 되어 있다.
<근현대의 봉암사와 관련 스님>
이후 봉암사의 내력은 알 길이 없다. 다만 구한말에 다시 의병의 본거지가 되어 전투 속에 일주문과 극락전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고 한다. 일제시대를 지나 봉암사가 다시 한국불교사에 부상하게 되는 것은 8‧15해방 직후 만신창이가 된 한국불교의 자체 정화를 위하여 뜻있는 중견 스님들이 일종의 참선결사를 단행하게 되면서였다. 그때는 스님들이 참선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닦는 일을 게을리하던 시절이었기에 이에 대한 자정운동을 별였던 것이다. 그때의 스님이 봉암사 조실 서암(西庵), 불국사 조실 월산(月山), 작년에 타계한 해인사 조실 자운(慈雲), 조계종 종정 성철(性徹), 그리고 연장자로서 청담(淸譚) 등이었으니 이 참선결사가 현대불교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1955년 봉암사 대웅전이 다시 중건되고, 1982년부터는 서암스님의 주도 아래 옛 구산선문의 참선도량으로서 전통을 부활하여 일반인 출입을 통제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봉암사의 보물 다섯 점
<봉암사의 유물과 보물>
폐허와 중창을 이렇게 반복한 봉암사이기에 지금 남아 있는 유적이란 모두 석조물일 뿐이며, 목조건축은 18세기에 지은 극락전 한 채뿐이다. 지증대사가 창건 당시 주조했다는 철불 2구, 그것은 정진대사도 보았다는 것인데, 봉암사 안내기 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구는 땅속에 묻혀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근간에는 금색전에 있던 반파된 불상을 생각이 부족한 스님들에 의해 고물로 처리한 애석한 일이 있었다.
봉암사 석조유물 중 나라에서 보물로 지정한 것이 다섯 개 있는데 그것은 삼층석탑(보물 제169호), 지증대사 부도와 비(보물 제137호, 보물 제138호), 정진대사 부도와 비(보물 제171호, 보물 제172호)이다.
<봉암사 삼층석탑>
삼층석탑은 지증대사의 봉암사 창건 당시 유물로 추정되는데, 전체높이 6.3m의 아담한 명작이다. 9세기 지방 사찰의 대부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국사 석가탑을 모본으로 하면서 그것을 경쾌한 모습으로 다듬으면서 지붕돌의 곡선미를 살려낸 것이다. 특히 이 삼층석탑은 기단부가 훤출하게 커서 늘씬한 미인을 연상케 하는데 그 난리통에도 상륜부가 온전하게 남아 있어서 유물로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지증대사 부도>
지증대사의 부도는 하대신라의 대표적인 부도들과 마찬가지로 규모가 장중하고 돋을새김의 조각이 힘차고 아름답다. 특히 기단부의 공양상과 비파 연주상은 그것 자체가 완숙한 평면 회화미를 보여주며, 팔각당의 자물쇠 새김은 단순하면서도 기품과 힘이 넘쳐 흐른다. 그러나 지붕돌 반쪽이 파손되어 그 원형을 잃어버렸고 지금은 어두운 보호각 속에 갇혀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깝고 답답하게 한다.
<정진대사 부도>
이에 비하여 정진대사 부도는 절 바깥 언덕배기에 있고 상태도 온전하여 그 주변 경관과 함께 시원스런 유물과의 만남이 보장되어 있다. 부도의 형태도 지증대사의 그것을 그대로 본받았으니 그 안정감과 기품은 나라의 보물에 값할 만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답사를 인솔할 때면 여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곤 한다. 그러나 조형미를 따질 때 이것은 지증대사의 그것에 감히 견줄 상대가 못된다. 느낌을 근수로 잴 수 있다면 아마도 반도 안될 것이다. 만고불변의 진리인바, 창조적인 것과 모방과는 그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지증대사비와 정진대사비의 글씨>
지증대사의 비문은 혜강스님이 쓰고, 정진대사의 비는 장단열이 썼음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은데 그 글씨에 대한 후대의 평은 한번 들어 볼만 하다.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을 보면, 글씨에 관해서 “서청(書鯖)”과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이라는 인용문이 계속 나오는데, 이 두 글은 누가 쓴 것이며 원문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아직껏 알 수 없지만 그 정곡을 찌르는 단 한마디씩의 평이 서예사 내지 서예비평의 귀감이 될 만한 것이다.
지증대사비의 혜강 글씨는 “서청”에서 “글자와 획이 단정하면서 굳세다(端健)”라고 하였고, 정진대사비의 장단열 글씨는 “동국금석평”에 “안진경체로 씌어졌는데 고졸하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런 식의 비평이 오늘의 서화에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구현돼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봉암사 주변의 절경과 유적
진짜로 멋있는 유물들
<봉암사의 정요석>
사람들은 국보나 보물이라는 명칭 때문에 문화유산의 가치와 멋을 그런데에서만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정문화재란 유물의 연대, 희귀성, 보호의 필요성 등을 따진 것이지 미적․조형적 가치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봉암사에서 진짜로 멋있는 유물은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한 쌍의 노주석(爐柱石)이다. 정요석(庭燎石) 또는 순한글로 불우리라고 하는 이 돌받침은 야간에 행사가 있을 때 관솔불을 피워 그 위에 얹어 마당을 밝히던 곳이다. 이런 불우리를 봉암사처럼 옛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는 곳은 흔치 않다. 평범한 구상으로 그 형태도 단순하지만 둥근 받침돌이 위로 오므라드는 긴장된 맛과 그 위에 얹힌 판석의 듬직스러움이 한 시대의 멋스러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대웅전 건물이야 20세기 후반의 것이니 그렇고 그런 것이지만 그 돌축대만은 9세기 지증대사 창건 당시의 모습이다. 특히 이 돌축대에서 맨 아래쪽 기단부를 보면 우묵하게 홈을 판 돌받침을 앞쪽으로 길게 깐 것이 있는데 이것은 지붕의 낙숫물이 마당을 파놓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물받침 홈통인 것이다. 옛 사람의 철저함과 멋스러움이 여기서도 감지된다.
<백운대와 마애보살상>
봉암사 경내를 벗어나 계곡을 따라 희양산 쪽으로 1km쯤 가노라면 백운대(白雲台)라고 불리는 넓다란 바위 암반이 온다. 겨울이면 이 암반 위가 얼음으로 덮이고 해빙이 되면 항시 맑은 물이 그 위로 흘러 내려 봉암계곡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으로 손꼽힌다. 암반 위쪽에는 집채만한 바위에 귀엽게 생긴 보살상이 돋음새김으로 새겨져 있어서 이 백운계곡은 더욱 성스러워 보인다. 전하는 말로는 환적선사가 평소에 발원 기도하던 원불(願佛)이라고 하는데 그 조각의 됨됨이를 보면 고려시대 말의 솜씨이며 문경새재 너머 월악산 미륵리에 있는 석불처럼 친숙한 느낌을 주는 이곳 지방양식이 반영된 것이다. 마애불 아래쪽 암반은 그 아래가 또 암반인지라 어느 곳은 자갈로 두드리면 퉁퉁 하고 목탁소리를 낸다. 그래서 이 자리는 이미 움푹하게 파여 있는데 그 모든 것이 자연과의 어울림이니 봉암사의 명소중 명소가 될 만한 곳이다.
마애불 한쪽에는 호쾌한 필치로 ‘백운대(白雲台)’라고 새겨놓은 것이 있다. 이것을 사람들은 최치원 글씨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멀쩡한 거짓말로 글씨체로 보아 조선후기 어느 선비의 솜씨임이 틀림없다.
<야유암과 취적대>
봉암사 입구 원북마을 버스종점이 있는 계곡에는 버스 대여섯 대가 주차할 수 있는 넓적한 너럭바위가 있어서 그 위에 평상을 놓고 촌로들이 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너럭바위 아래쪽 단면에는 문짝만한 글씨로 ‘야유암(夜遊岩)’이라고 새겨놓은 굳센 필치의 각자가 있고, 그 위로는 다 뭉게졌지만 ‘취적대(取適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또 개울 건너 마을 쪽으로 가면 ‘고산유수 명월청풍(高山流水 明月淸風)’이라는 단정한 해서체의 각자도 있다. 그리고 이것이 모두 최치원 글씨라고 전한다. 그러나 이 역시 지증대사비의 최치원이 와전 내지 과장되어 생긴 말이며 모두 조선후기 선비들의 글씨이다. 이런 각자(刻字)로 미루어볼 때 조선시대 봉암계곡의 주인공은 수도하는 중이 아닌 팔자 늘어진 양반 문인이었던 것이다.
그중에서 나는 야유암, ‘밤에 노는 바위’라는 그 말의 풍류와 호쾌한 글씨체가 맘에 들어 전지 두 장을 붙이고 탑본을 하는데 갑자기 영감님들이 몰려와 자신들은 경주 최씨로 최치원유적보호회 사람이라며 탑본을 못하게 하였다. 이 또한 싸워서 될일이 아니라 그날은 포기하고 그 다음번에 가서 탑본을 하여 내 연구실에 한동안 걸어놓았는데, 농담 잘하는 친구가 와서 하는 말이 내 연구실 지하의 룸싸롱에 납품해보라는 것이었다.
술이 익어갈 때는
<술의 숙성원리와 참선의 원리>
봉암사가 일반인 출입을 금지하고 참선의 도량으로 된 것을 나는 속으로 경하해 마지 않는다. 한때 정부에서 속리산 국립공원을 확장하여 희양산 일대를 편입시키려고 했을 때 봉암사의 반발과 저항으로 그것을 저지시킨 것을 아름다운 일로 생각하고 있다.
잘은 모르지만 참선의 터전은 그런 청정도량이라야 제 몫을 다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참선에 대한 나의 생각은 육조단경이나 마조어록 같은 선종의 고전이나 성철스님의 백일선문 같은 지침서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답사회원 중 술을 빚는 여인에게서 계시로 받은 것이었다.
‘가양주 9단’이라고 할 이분이 한번은 매실주를 가져와 저녁 회식에 선사했는데 그 향기로움에 취한 회원들은 그 비결을 배우고자 하였다. 이 과묵한 가양주 9단은 느린 어조로 이렇게 설명해갔다.
여름에 매실을 사서 채에 받쳐 물로 서너 번 헹군다. 이때 손으로 비비면 매실의 본성 다치므로 단지 물로 먼지나 농약을 씻어내야 한다. 그것을 술과 6:4의 비율로 하여 오지독에 넣고 잘 봉한 다음 땅속에 묻으면 제일 좋고, 그렇지 못하면 지하실 같은 어두운 곳에 놓는다. 3개월이 지나면 오지독에서 매실은 건져내고 다시 오지독을 어두운 곳에 두었다가 1년이고 3년이고 시간이 지난 다음 꺼내 마시면 되는데 그 기간은 오랠수록 좋다. 왜냐하면 술이 숙성하는 것은 매실을 건진 다음부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마신 것은 5년이 지난 것이다.
가양주 9단은 다시 회원들에게 복분자술, 사과술, 마늘술 등을 차례로 설명한 다음 질문을 받게 되었다. 한 회원이 왜 술독을 두는 곳이 어두운 곳이어야 하냐고 물었다. 술 담그는 집에 가 보면 유리병에 넣어서 장식장 위에 쭉 늘어놓곤 하는데 어떤 근거로 어두운 곳을 강조하느냐고 따진 것이었다. 그러자 이 조용한 가양주 9단은 느린 어조로, 그러나 단호한 자세로 반드시 어두운 곳이어야 한다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대답하였다.
술은 자기가 변해가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것은 술의 숙성원리이자 학문의 숙성원리이고 참선의 원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영원한 스승은 인간 자체인가 보다.
* 이 책의 초판이 발간된 후, 정암사 홍선스님으로부터 내가 봉암사를 찾아간 때는 선방의 낙성식이 아니라 상량식이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가르침을 주신 스님께 감사드리며 본문과 사진설명 모두를 정정한다.
* 이 책의 초판이 나온 지 일주일 남짓 되는 사월초파일(5월 28일), 나는 예정대로 답사회원들과 함께 봉암사를 다녀왔다. 봉암사는 그 사이 몇 채의 당우를 새로 세우고 절 입구의 계곡은 자연석을 들어내고 방죽을 쌓듯 거창한 축대로 치장하였다. 대웅전의 축대도 개축하면서 내가 본문 중에서 상찬하였던 기단석의 낙숫물받이도 없애버렸다. 그윽한 맛도, 청정한 분위기도 사라지고 번잡스런 대찰로 변해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봉암사는 더이상 그 옛날의 봉암사가 아니었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창작과비평사, 1993, pp.237~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