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밤은 좀 쌀쌀한 편이었지만 관중은 그 정도의 추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제플린도 열기가 절정에 달했다. 제플린에게는 미국 연주여행 이후 실로 2년만에 서는 연주였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서는 제플린에 대한 관중의 환호성은 2년 전보다 조금도 쇠퇴해지질 않았다. 이 스테이지에서는 코펜하겐의 무대에서처럼 신곡 2곡이 선을 보였다. 'In the evening'이 연주될 때 관중은 황홀함에 도취되었고 'Hot dog'은 로커빌리를 연상케하는 빠른 템포의 곡이었다. 연주시간은 3시간 30분, 약 20곡을 연주한 뒤 또다시 앵콜로 3곡을 연주했기 때문에 청중은 더욱 열광했다. 연주가 시작되고 'Nobody's fault but mine'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제플린은 2년전 능숙하던 기량을 완전히 되찾고 있었다. 이날 연주된 곡은 'Since I've been loving you', 'Hots on for nowhere', 'No quarter', 'Misty mountain hop' 등이었는데 'Candy store rock'에서는 중앙의자에 앉아있던 지미가 솔로연주를 보여주었다. 'Achilles last stand'에서 보여준 조명효과는 그야말로 무대예술의 극치를 연출했다. 이어서 'Dazed and confused'에서는 지미가 바이올린과 깁슨기타를 가지고 등장, 마술사와도 같은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그동안 레이저 광선은 피라밋형으로 조명을 비쳐 더욱 황홀한 무대를 연출했다. 최후의 앵콜곡 'Heartbreaker'가 끝났을 때 집으로 가질 않고 연주장 주변에 텐트를 치고 그다음 공연날까지 그대로 기다리려는 인파들도 상당히 많았다.
In through the out door
Knebworth festival은 많은 사람에게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특히 처음으로 제플린을 대한 젊은 팬에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되었다. 콘서트에는 세계도처에서 관중이 몰려왔는데 참석자 한사람 한사람은 그 나름대로의 강렬한 인상으로 그들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것은 제플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멤버들은 스테 이지에 섰을때 우선 모여든 관중의 수에 압도당했다. 그 많은 군중 한사람 한사람 이 모두 제플린에 대해 기대와 지지를 보낸다고 생각할 때 새삼 무거운 책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버트는 너무도 관중을 의식한 나머지 신경과민이 되어서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제플린에게 Knebworth festival은 하나의 시련이기도 했고, 큰 교육의 현장이기도 했다. 제플린은 또 이 콘서트와 시기를 같이해서 기념 싱글을 내 놓기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지미와 로버트가 이미 예고했던 것인데 결국은 약속대로 되지 못했다. 새로운 싱글계획은 중단되고 만 것이다. 8월 20일 새로운 앨범 In through the out door가 전세계로 동시에 발매되었다. 재킷의 디자인은 Hypnosis가 담당했고 지미와 피터 그랜트도 이 계획에 참여했다. 담황색으로 된 이 재킷 표지에는 앨범의 타이틀과 그룹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첫째장의 표에는 bar의 정경이었고 둘째 레코드의 커버는 흑백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바의 커버에는 6종류의 그림이 그럴듯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이 앨범은 9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양국에서 차트 1위로 뛰어오른 것이다. 특히 미국의 앨범으로서는 최초로 7주동안 계속 No.1으로 버티었다. 이러한 대히트는 제플린의 모든 앨범에까지 파급되었다. 제플린이 지금까지 내놓은 모든 앨범이 빌보드 선정 탑 앨범 200에 들어갔다. 이러한 사태는 레코드 사상 처음있는 일이었고 심한 불황으로 도산 직전에 있던 미국의 레코드계를 돕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동안 제플린은 영국 경제계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여러차례 영국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은 바 있는데 정작 제플린에게 표창을 해야할 사람들은 미국의 레코드 조합의 회원들이었다. 새로운 앨범에 수록된 곡이 팬으로부터 받는 반응은 지난번의 앨범때와 거의 같았다. 로버트, 지미, 존 폴, 존은 자기의 기량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발휘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일은 지난번의 앨범과 그다지 크게 변한 게 없는데도 팬들은 지루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지루함을 느낄 그런 여유를 제플린 그룹이 주지 않은 탓인지도 몰랐다. 미국에서는 이 앨범에 대해 음악적 다양성과 녹음기술의 세련됨이 크게 평가되었다. 특히 기술적인 분야에 있어서 새 앨범의 초정밀 감각의 레코딩 수법은 1979년도에 있어 제일 가는 것이라고 호평을 받았다. 또 이 앨범은 존 폴 존스의 뛰어난 음악적 창조력과, 존 보냄의 음악적 주체성을 여지없이 과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칭찬을 받은 존 폴은 "나는 그냥 로버트를 따라서 스튜디오에 들어간 것 뿐이고 그저 하라는 대로 했을 뿐" 이라고 겸손해 했다. 'Fool in the rain'이 미국에서 싱글 커트되어 차트 20위까지 올라갔으나 제 2탄의 싱글로 예정되어 있던 'All my love'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흐지부지되어 세상에 나오질 못했다. 11월 25일 로버트는 또다시 Wembly Empire 의 축구에 참가했다. 그리고 며칠 뒤 멜러디 메이커지가 수여하는 1979년도 인기 투표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레드 제플린은 7개 부문에서 탑을 차지하고 있었다. 멜러디 메이커의 상이란 상은 마치 모두 제플린에게 주기위해 창설된 것만 같았다. 수상식에는 지미를 제외한 전원이 참석했다. 상패를 수여한 Michael씨는 이렇게 상을 휩쓸어 갔다가 혹시나 다른 뮤지션들한테 강도라고 불리게 되면 어떻게 하겠 냐는 농담도 했다. 12월 26일 BBC라디오 런던은 90분짜리 Echoes를 보냈는데 여 기서 지미와 로버트는 나란히 출연, 새 앨범도 소개하면서 지루하지 않은 대담을 보내주었다. 본래 이 방송용 테입은 10월에 제작한 것으로 크리스마스를 겨냥해서 미리 제작해 놓은 것이었다. 이 대담프로에서 두 사람은 제플린의 음악에 있어서 그 뿌리를 상세하고도 친절하게 설명을 했다. 제플린이 갖고 있는 약점과 장점을 조금도 거짓 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방송을 듣고 제플린을 얕잡아 평가할 수 없르리만큼 아주 정감있게 대화를 나누었다. BBC에서는 또다시 제플린의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1969년에 생방송으로 나간 바 있는 In concert란 프로그램의 녹음테입을 재방송한 것이다. 이 재방송은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 방송 되었는데, 젊은 팬들은 왕년의 제플린 연주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12월 29일 에는 영국의 Hammersmith Odeon에서 개최된 UNICEF의 캄보디아 난민구제를 위한 자선 콘서트에 출연했다. 제플린이 출연한 것은 하룻 밤뿐이었고 Wings가 주 연급으로 출연하고 있었다. 로버트는 Dave Edmunds와 Rockpile과 더불어 옛날 엘비스 프레슬리의 넘버 'Little sister'를 노래했고 뒤이어 앵콜에는 'Let it be'등을 연주했다.
Led Zeppelin over Europe concert
1980년 1월 16일, K-tel레코드는 국제아동 연금을 기념해서 13곡이 들어있는 자선모금 베스트앨범을 내놓았다. 이 앨범에는 제플린의 곡 'Candy store rock'도 수록되어 있었는데 재킷에는 앨범의 계획에 동의하는 제플린 멤버들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은 제플린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냈다. 잡지 Cream과 Circus에서 음악분야의 대부분의 상을 제플린에게 주기로 한 것이었다. 두 잡지사에서 수여하는 상이란 상은 거의 제플린이 맡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Stairway to heaven'은 70년대의 넘버원 송으로 꼽았다. 제플린에게는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던 상이었고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떨어진 격"이었다. 2월 로버트는 버밍엄에서 Rockpile의 게스트로서 스테이지에 섰다. 그리고 3월 상순 존 보냄은 TV영화의 테마뮤직을 작곡하기도 했다. 4월이 다 갈 즈음, 제플린은 런던에 있는 Rainbow theatre에 들어가 며칠간의 연습을 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중도에 보도되어서 이들은 또 다른 장소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제플린의 유럽 연주여행 뉴스가 공식화 되었다. Harvey Goldsmith에 의해 기획된 이 연주여행은 5월초 비엔나에서부터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연습이 이럭저럭 늦어져서 공연날짜는 뒤로 미루어졌고 6월 6일에야 첫 공연을 하게 되었다. 연주여행 첫 무 대는 독일의 Dortmund였다. 연주여행의 일정을 보면 18일 - 케룬, 20일 - 부랏셀, 21일 - 로테르담, 23일 - 브레멘, 26일 - 빈..이러한 순서로 진행케 되어 있었다. 이렇듯 타이트하게 짜여진 유럽 순회연주가 끝나면 곧 미국으로 향해서 다시 미국 내 연주여행을 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스테이지는 보통 2시간에서 2시간 30분 정도의 공연 스케줄이었다. 유럽각지에서의 평균 청중수는 4천명에서 1만명사이였다. 연주여행 도중 지미는 언제나 처럼 녹색의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각멤버의 헤어스타일은 1969년때의 그 모습이었다. 그런데 우연인지는 모르나 오프닝 넘버가 또 으레 1969년대의 것이었다. 가는 곳마다 팬들로부터 절찬을 받은 제플린의 연주는 어딘가 조금 변한 것이 있었다.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들이 나타났는데 그중의 하나가 스테이지의 변화였다. 지금까지의 스테이지는 호화판 일 변도였는데 이번에는 상당히 소박해져 있었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조명이라든가 'Trampled under foot'에서 관객을 향해 온통 조명을 비치는 조명은 여전했다. 이렇게 휘황찬란하던 조명이 'No quarter'가 시작되면서 부터는 모두 사라지는 것 이었다. 오직 비치는 곳은 바이얼린을 연주하는 지미에게만 Scoop 라이트를 쓰는 것으로 조명방법이 달라져 있었다. 연주 곡은 보통 13곡으로 스테이지에서는 'All my love'가 처음으로 레코딩에 적합하게 연주되고 있었다. 이번 연주여행에서는 모든 것이 중간정도의 규모였다. 규모가 적어졌기 때문에 멤버와 청중사이에는 친 밀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지미는 이러한 무대생리가 마음에 드는지 그는 여느때보다도 무대 위를 많이 돌아다니면서 연주를 했다. 이번 연주회에서 또하나 전에 볼 수 없었던 광경은 지미가 곡이 바뀔때마다 곡목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그 나라의 언어로 곡목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지미의 발음이 정확치는 않았지만 무척 애교가 있어 보였다. 이러한 곡목의 소개는 그 나라 청중을 한층 더 기쁘게 해 주었다. 그런데 청중들의 반응이 굉장했는데도 영국의 신문, 잡지들은 제플린의 유럽여행 소식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반면에 유럽의 많은 매스컴 들은 제플린의 활동을 소상하게 그리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Steve Gheft는 뮌헨에서의 제플린의 공연실황을 멜러디 메이커지에 실었다. 페이 지의 사진을 곁들여 보도한 기사가 근대 제플린에 대한 보도의 전부였다. 스티브가 쓴 뮌헨 공연에 대한 기사를 보면 제플린 멤버가 청중과 혼연일체가 되어서 정말로 즐거운 연주여행을 하고 있다고 썼다. 그런데 제플린은 독일 Nurenberg에서는 3곡만을 연주하고 공연을 중단했다. 존 보냄이 무대위에서 쓰러진 것이다. 놀란 것은 멤버뿐 아니라 청중도 마찬가지였다. 장내는 한때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진 존 보냄은 응급조치를 받았다. 정신을 차린 존 보냄은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의 선고는 무거웠다. 쓰러진 원인은 극도의 피로가 겹친데에 있었다. 이틀뒤 스위스의 Zurich에서는 존 보냄도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뒤 그는 심한 복통을 호소했다. 1980년 유럽의 여름은 몹시도 무더웠다. 낮뿐 아니라 해가 진 뒤에도 무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한 밤에도 비지땀을 흘려야 했고 에어컨을 가동시킨 방에서도 더위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무더위는 공연장에서도 역시 고약했다. 특히 지미는 땀을 대단히 흘려 지미가 머리를 흔들 때마다 그 땀이 객석으로 튀어가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이 연주여행을 소재로 한 책이 2권 발행되었다. 한권은 Viva rock이라는 일본어로 된 사진 화보집이었는데 유럽연주여행의 모습을 칼라와 흑백사진으로 엮은 다큐멘터리였다. 그리고 또 한권은 제플린의 유럽공연을 동행한 Dave Lewis 가 쓴 기행문이었다. 이 책에서 데이브 루이스는 유럽연주여행을 하고 있는 제플린과 그 멤버들의 소상한 생활을 숨김없이 기술했다. 로버트가 그 어느 연주여행 보다도 뜻있게 보냈다는 내용으로 시작해서 각 멤버들의 습관, 기습, 식성에 이르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화제도 많이 담고 있었다. 이즈음에도 존 보냄의 위통은 자주 나타났다. 한번 위통이 일어나면 그는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고통을 겪는 것이 었다. 주변에서 근본적인 치료를 해야할 게 아니냐고 물으면 그는 별로 근심할 정도가 아니라면서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웃음뒤에는 몹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었다. 유럽순회공연은 Knebworth festival 이래 처음 열리는 큰 것이었으나 웬일인지 연주 프로그램은 제작되지 않았다. 프로그램 대신 연주여행 출발에 앞서 촬영된 대형 칼라 포스터가 스완 송 레코드 회사 발행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이밖에 제플린의 심벌마크가 새겨진 뱃지가 나왔고 제플린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페넌트가 팔리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품들은 제플린이 가는 곳이면 어디서든 날개돋힌 듯 팔렸다. 연주여행이 끝나자 로버트 플랜트와 존 폴 존스와 존 보냄은 각기 가족과 함께 단란히 지내기 위해 가정으로 돌아갔다.
John Bonham의 죽음
1980년 9월 25일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이날 정말 뜻밖의 사고가 일어났다. 제플린 멤버의 한 사람인 존 보냄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그가 시체로 발견된 집은 Windsor에 있는 저택인데 8월에 지미가 영화배우 Michael Caine으로부터 90만 파운드의 거액을 주고 산 저택이었다. 존 보냄의 시체를 살펴본 담당의사는 처음에는 사인을 규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혹시나 그가 자살하지 않았나하는 의혹도 있었지만 그 역시 분명치 않았다. 뒤이어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사체해부를 했다. 그럼에도 사인은 규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10월 8일 Daily Express지는 "존의 사인은 과도한 알콜중독이었다." 고 보도했다. 존 보냄은 평소 심하게 술을 마시지는 않았으나 죽기 전날 과음을 한 사실이 밝혀져서 결국 그의 사인은 "술 때문" 이라고 결론이 났다. 나중에 소상히 밝혀진 바에 의하면 존 보냄은 죽기 직전 까지 연속 2시간 이상을 보드카를 오렌지에 타서 마셨다고 한다. 강한 보드카를 연거푸 마셨기때문에 그의 혈중 알콜농도는 보통사람의 3.5배에 달해 있었다. 해부를 맡았던 병리학자 에드먼드 박사는 법정에서 알콜로 인한 사망임을 증언했다. 그는 배심원들 앞에서 존 보냄이 무슨일 때문에 많은 술을 마셨는지는 모르겠으나 너무 많은 술을 마셨기 때문에 의식을 잃었고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 그대로 깨지 못하고 영원히 잠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존의 운전수겸 비서인 Rex Kim은 사망하기 하루전의 존의 행동을 증언했다. 그는 죽기 전날인 9월 24일 점심을 먹은 뒤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처음 마시기 시작한 곳은 존의 자택 근처인 자그마한 스탠드 바라고 한다. 그는 이 술집에서 아주 진한 보드카를 오렌지 쥬스에 섞어 마셨는데 5잔쯤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리허설에 참가하기 위해 원 저로 향했다. 그는 계속 리허설 스튜디오에서도 술을 마셨다. 그리고 지미의 집으 로 향했는데 지미의 집에서도 또 보드카 오렌지를 한시간에 2-3잔 꼴로 마셨다. 새벽 0시경 존은 몹시 취해 소파에 잠들어 버렸다. 이것이 존의 마지막 잠이었다. 소파에서 곤드레가 되어 자는 존을 킴과 지미 페이지의 비서인 Rick Hobbes가 맞들어 2층의 침실로 옮겨다 눕혔다. 6시간 뒤 제플린의 매니저중의 한 사람인 루이스가 지미의 집에 도착, 존을 깨우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이래서 그는 처음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되었는데 의사를 불렀을 때 존 보냄의 시체는 이미 싸늘해 진 뒤였다. 이러한 비극은 제플린의 장래에 대해서 여러가지 억측을 낳았다. 한편, 각 매스컴은 그의 보도를 크게 실었다. 멜러디 메이커에서는 록의 커다란 별이 떨 어졌다고 애도했고 Record mirror에서는 존 보냄은 결코 잔재주를 피우는 뮤지션이 아니었다고 애도했다. Rolling stone지는 존 보냄은 놀랄만한 재능을 가졌던 천재였고 그를 능가할 뮤지션은 다시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각 매스컴은 이미 페이지도 존 보냄없이는 그의 전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존 보냄의 장례식은 보냄의 농장근처의 작은 교회에서 있었다. 제플린과 고인의 가족들은 보냄의 장례식을 극비리에 갖기로 했다. 그리하여 10월 10일 금요일 오전에 장례식이 있었는데 하늘도 슬펐던지 비가 내렸고 장례식을 알고 찾아온 팬은 겨우 8명뿐이었다. 영국의 일간지들은 존 보냄이 죽은 뒤 제플린은 해산할 것 같 다고 보도했다. 그런가 하면 또 며칠뒤에는 새로운 존의 후임자가 곧 발표될 것이 라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12월 4일 목요일 레드 제플린은 유명신문에 다음과 같이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다정했던 친구의 죽음에 즈음해서 고인의 가족에 깊은 애도의 뜻을 밝힘과 동시에 우리와 그리고 매니저들이 지니고 있던 화목함과 연대감을 다시 확인하면서 더이상 활동을 계속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팬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제플린이 해산한 뒤 항간에는 여러가지 억측이 나돌았다. 지미 페이지는 기타 워크의 프로젝트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고 보도되었다. 제플린이 해산한 뒤에도 또다시 재출발할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러한 풍문은 어쩌면 팬들의 바라는 바가 너무 컸기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었다. 팬들은 자신들이 제플린의 해산을 반대하는 소리가 높아지면 제플린은 어쩔수 없이 다시 모일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열렬한 팬들의 성화도 제플린 멤버들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존 보냄에 대한 애도의 마음은 그만큼 멤버들 마음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존 보냄, 그는 영국을 대표하는 드러머였다. 그가 없었더라면 제플린의 초기의 성공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제플린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드럼은 지미 페이지의 기타플레이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의 드러밍을 보면 누구나 흥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는 평소 맥주를 즐겨 마셨다. 그러나 취할 정도로 마시는 날은 거의 없었다. 그에게 혹시 언짢은 일이 있다면 그는 술을 마시는 대신 드럼을 두들겼다. 그런데 불행중 다행으로 그가 죽은 뒤, 그의 죽음을 장사로 이용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John Lennon, Elvis Presley, Jimi Hendrix, Marc Bolan, Brian Jones등은 그들이 죽은 뒤 재산다툼과 그들의 죽음에 편승한 상혼이 고개를 쳐들었는데 존 보냄이 죽은 뒤에는 그런 저열한 추태는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1980년 12월 뉴욕 자택앞에서 존 레논이 사살된 이래 제플린의 멤버들은 제각기 신변보호에 철저를 기하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호신책때문에 제플린 멤버들의 뒷소식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존 레논 사건을 계기로 살아남은 제플린 멤버들의 사생활은 짙은 베일에 싸이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제플린의 재결성 소식은 끈질기게 나오고 있다. 잠잠한 가운데 심심찮게 나오는 제플린의 재결합 설, 과연 이루어질 것인지. 전능하신 신만이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