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엇 삼벗(Reach Sambath)은 종군 특파원으로서 가장 용감한 사람들 중에 한명이었다. 1990년대 캄보디아의 여러 정파들이 전투를 벌일 때, 그는 '가장 먼저 헬리콥터에 올라타는' 언론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캄보디아가 힘을 합쳐 평화체제를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이 가장 애정을 가졌던 동포들과 나란히 하는 모습을 보였다.
슬프게도 리엇 삼벗은 수요일(5.11) 뇌졸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47세(우리의 추정임).
(사진: ECCC) 리엇 삼벗이 국제법정 대변인으로 활동하던 모습.
2001년 7월 1일, 필자가 'AFP통신'의 캄보디아 지국장으로서 업무를 시작할 무렵, 리엇 삼벗은 이미 자신의 업적으로 인해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의 절친한 벗으로 'AP통신'에서 일하던 께 문팃(Ker Munthit)과 더불어, 이들 콤비는 캄보디아 내 국제언론 기자단의 내국인 기자들 중 만만치 않은 등뼈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기를 살아남았고, 고귀한 진실을 전해주기 이전에 캄보디아 및 해외에서 공부했다.
필자가 프놈펜에 도착할 무렵에, 리엇 삼벗 역시 미국에서 귀국했다. 그는 '콜롬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에서 보다 전문적인 언론인이 되기 위한 공부를 장학생으로서 마쳤다. 그는 캄보디아에 관한 가장 친숙한 책을 발행했고, 직업적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경쟁심도 대단했지만, 그가 가진 것이라곤 오직 크메르인의 넓은 마음 그것 하나 뿐이었다.
우리가 만나서 일한지 불과 3일째 되던 날, '모니웡대로'(Monivong Boulevard)에 위치한 '홍콩호텔'(Hong Kong Hotel) 안에서 폭탄 한발이 폭발했다. 그날은 축축하고 비참한 날이었고, 모니웡대로는 붉은 진흙에 묻혀 있었다. 우리가 현장에 도착한 것은 불과 40미터 앞에서 2번째 폭탄이 폭발하기 불과 수분 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진흙 속에 쓰러졌을 때도 삼벗은 결코 주저함이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명확하게, 완벽하게 꽉 끼는 셔츠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2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했다. 삼벗은 신속하면서도 침착하게 우리 일행을 혹시도 있을지 모를 3번째 폭발에 대비해 피난장소로 이끌어주었다.
내 전임자들에게도 그러한 일화들은 공통적이었다. 전임자였던 매튜 리(Matthew Lee)는 삼벗의 가족들이 사는 집에 지붕을 만들어 주었고, 그 이전의 셰리 프라소(Sheri Prasso)는 1992년에 삼벗을 최초로 고용했다.
그러나 그러한 침착성은 종종 강화된 감수성을 감추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때때로 삼벗은 캄보디아에서 나오는 어리석은 보도들에 깊이 좌절하곤 했다. 기자들은 때때로 센세이셔날한 헤드라인을 추구하면서 편집인을 즐겁게 해줄 목적이나, 혹은 킬링필드(Killing Fields)의 이미지가 주는 노선에 입각하여 자기 자신들의 한을 풀 작정으로 그러한 기사들을 쏟아내곤 했다.
그러한 경향은 홍콩이나 방콕에 있는 편집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데, 그들은 캄보디아를 단순히 태국 외교정책의 확장선 상에서 바라본다든지, 혹은 악몽같이 잘못된 가정들에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을 보여주곤 했다. 이러한 경향들은 현재의 '쁘레아위히어 사원'(Temple of Preah Vihear, 프레아 비히어 사원) 분쟁 보도들에서도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존중이란 덕목을 결여하고 있다.
심지어는 리엇 삼벗 역시 한번은 훈센(Hun Sen) 총리가 자신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다면서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훈센 총리와 삼벗은 삼벗이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에 처음으로 만났다. 삼벗은 들릴만한 거리에서 내게 까칠한 총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그(훈센)는 내가 외국물을 너무 먹었다고 생각해"라고 말했다. 더 이상의 진실은 알 수가 없다.
삼벗은 속보 서비스라는 고되고 신속한 구술작업과 더불어 가족을 부양했기 때문에 매우 힘들었을 수도 있다. 게다가 밤에는 대학 강사로서의 연구도 해야 했고, 세계적으로 걸출한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노력도 해야만 했다.
그가 차가운 맥주를 함께 했던 언론인들이 많긴 하지만, 그가 가장 즐겁게 한 작업은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셋 미단스(Seth Mydans)와 함께 한 작업으로, 그들의 웃음과 정치적 통찰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그와 친교를 나눈 언론인 중에는 <프놈펜포스트>(The Phnom Penh Post)의 창립자인 마이클 해이스(Michael Hayes)와 소속 기자를 지낸 헐리 스크로긴스(Hurley Scroggins), 셋 메익스너(Seth Meixner), 그리고 <캄보디아 데일리>(Cambodia Daily)의 오랜 편집장인 케빈 도일(Kevin Doyle)도 포함된다.
삼벗은 초기에 크메르루즈 재판이라는 구상에 겁을 먹고 있었다. 그는 '정의'라는 이념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님은 모두 폴 포트(Pol Pot) 정권에서 살해당했고, 삼벗 역시 자신을 고아로 만든 크메르루즈 정권에 대해 몸서리를 쳤다. 그 결과 삼벗은 자신의 진짜 생일이나 나이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해외에서 성장한 캄보디아인들에게서 이러한 현상은 매우 흔한 일이다. 오랜 기간 지속적이고 때때로 히스테리를 부릴 만큼 크메르루즈 국제재판을 지켜봤던 업저버들은 자신들의 관심을 '정의'에 두고 있었던 사람들도, 그들이 대변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햇빛을 받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삼벗은 국제재판이 정말로 캄보디아를 다시금 전쟁으로 몰고가는 것이 아닌가 하여 두려워했었고, 자신의 책에서도 복수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고통을 피하면서 자신의 시대에 만났던 언론인들에 대해 기술하는 데 비정상적일 만큼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전직 캄보디아 경찰청장으로서 포악한 악한이었던 고(故) 혹 룬디(Hok Lundy)가 화가나 있을 때, 그를 달래서 차분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리엇 삼벗이 유일한 인물이었다.
여러 캄보디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가 수년 간의 지난한 협상을 통해 '캄보디아 크메르루즈 특별법정'(Extraordinary Chambers in the Courts of Cambodia: ECCC)을 설치하고 크메르루즈 정권 당시의 지도자들 중 생존한 사람들이 용의자로서 체포되어 소환되자, 삼벗의 태도도 변했다. 삼벗은 적기에 ECCC에 매진했고, 결국 자신의 모든 마음을 바쳐 그 일을 받아들였다.
'돗'(Duch)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크메르루즈 정권 당시 보안감옥 교도소장 깡 껙 이우(Kaing Guek Eav) 피고인을 재판하는 ECCC의 '제001호'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 리엇 삼벗은 'AFP통신'을 떠나 뉴욕에 본부를 둔 '독립언론재단'(Independent Journalism Foundation: IJF)을 포함하는 언론기구들의 연합회에서 일하려 했다.
정의의 운명이 요동치는 가운데, ECCC 공보업무 책임자로 임명된 삼벗이 부상했다. 나는 작년에 '돗' 피고인에 대해 동포에 대한 반-인도주의 범죄 혐의로 유죄가 선고되던 날, 삼벗이 보여줬던 미소를 사랑한다.
삼벗은 여러가지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왕립 프놈펜대학'(RUPP)에서 자신의 학생들을 가르칠 때와, ECCC의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트럭들을 타고 찾아온 수천 명의 남녀노소를 안내할 때 가장 행복해 했다.
삼벗의 마지막 시기에, 의사들은 그에게 태국의 병원으로 이송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삼벗은 자신의 조국 캄보디아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부인인 초이 찬티(Chhoy Chanthy) 씨와 짬빠랏(Champaradh), 릿웡(Rithvong), 삼보리억(Samboreak)의 세 자녀를 남겼다. 그리고 그에게 빚을 진 조국과 그에게서 감화를 받은 캄보디아의 젊은 언론인들이란 한 세대를 남기고 갔다. 그는 또한 나의 친구였고, 나는 그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크세 추가내용] 리엇 삼벗은 뉴욕에 본부를 둔 "독립언론재단"(IJF) 프놈펜 연수센터에서 3개월 코스의 언론인 양성과정의 대표강사로서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 많은 신세대 언론인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리엇 삼벗의 활동 및 캄보디아 언론계의 전반적 상황을 이해하려면, 카페 내 다음의 게시물을 참조하다.
* 바로가기 : "[개론] 캄보디아 신문산업과 언론인 양성과정"(비지팅아트, 컬추럴 프로파일) |
첫댓글 한참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에 애석하게 운명을 하셨네요. 삼가 리엇 삼벗 기자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