孤山(고산)선생께서는병자호란( 인조임금)때 환궁한 인조임금을 호종(扈從)하지 않았다는 반당의 무고와 어처구니없는 모함으로 1638년 6월에 영덕에 도착하여 약 8~9개월간 유배생활을 하다 이듬해 2월에 고향인 海南(해남)으로 돌아가셨다. 고산께서는 3번이나 유배되었는데 영덕이 2번째이다. 선생께서는 이곳에서 적거(謫居)의 시름을 달래면서 주옥같을 20여편의 시를 남겼다.
경상북도 영덕(盈德)군에서는 고산 선생(先生)의 흔적을 되살리고 선생께서 남긴 문학(文學)의 향기(香氣)를 전하고자 푸른 동해(東海)가 내려다보이는 영덕풍력단지내에 지난 06년3월11일에 시2수가 담긴 고산 선생 시비를 세웠다. 이 시비에는 새로운 거처에서 중추를 맞는다(新居對中秋月)는 2수의 시로 되어 있는데 재경 향토서예가 초당(艸堂) 이무호 선생게서 초서체로 휘호한 보기 드문 역작이다. 시비의 무게는 약15톤으로 시비로서는 국내 최대의 규모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충남 보령산 오석(烏石)으로 제작 되었다.
초당선생께서는 조실부모하고 필묵이 없어 칠보산에 소를 먹이러 다니면서 싸리 꼬챙이로 땅바닥에 쓰던 데서 비롯된 태극서법은 법이 녹아내려 음양조화를 이룬 초당 특유의 서체로서, 중국의 갑골문과 청동기 시대 종정문, 육조해서, 한예, 진, 당, 해행초서 등 400여 종류의 서체를 임서하고 손과정과 회소 광초의 일인자인 장욱의 필의에 바탕을 두었다.
전(前) 일수(一首)는 동해의 달빛이 교교하니 더욱 망향의 쓸쓸함을 달래는 당시 고산선생의 심정을 그리려 했고, 이어지는 이수(二首)의 운소풍정의 대목에서는 그의 억울한 처지를 생각할 때 격분이 치밀어 올라 힘차게 내려치는 브라질 이과수 폭포의 장엄한 힘을 연상케 하는 듯하며 청유라고 빌어보는 대목에서는 고산 선생의 맑은 기품이 엿 보인다.
종구에서는 고산선생의 애달픈 심정을 표현 한 것 같으며, 시비에 달모양과 조화된 초서체를 택한 것은 해맞이공원과 야간 달빛 산행을 위해 풍력 발전 단지를 찾는 분들의 낭만을 배가시킬 수 있도록 하고 시의 내용과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서체인 것으로 생각되며 시비석도 반달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후면(後面) 글씨는 목간서체로 썼고 번역문은 한글 민체에 중국의 찬보자비 필의를 담아서 만든 창작체이며 시비건립기문은 판본체와 한문 광개토대왕비 서체를 섞어 썼다.
去歲中秋在南海 지난해 중추에는 남해에 있으며
茅簷待月水雲昏 수운이 저물녘 모첨에서 달을 맞았네.
那知此夜東冥上 어찌 알았으라, 이 밤 동해 바닷가에서
坐對淸光憶故園 맑은 달빛 마주한 채 옛 동산 그리워할 줄
雲消風定絶纖埃 구름 잦아들고 바람 가라앉아 먼지 끊어지니
正是幽人玩月來 바로 숨어사는 이 달구경하러 오는 때로다
敢爲淸遊煩黙禱 청유를 위해 힘들이며 말없이 비는데
龍鐘應被海仙哀 늙고 병든 모습 해선께 불쌍히 여겨지리.
錄 孤山先生詩二首 艸堂樵夫書
- 新居對中秋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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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남구 사식동 오우가 부산 기장군 일광면 안삼성대 시비(2005)

마로니공원의 기념비(1991년) 부산시 성지공원 오우가

마로니공원의 오우가(1991년) 명동성당입구 표석(1998년)

춘천시 상사댐 오우가 영암 월출산 천왕사지구 오우가(1986년)

완도 보길도 어부사시사 종로구 연지동 연지공원내 오우가(2002년)

해남군 녹우당의 어부사시사 영암 월출산의 오우가(1986년)

남양주시 수석동 시민체육공원 몽천요(1999년) 고산윤선도선생의 영정
●윤선도(尹善道, 1587-1671, 고산 孤山)
◦ 서울 생. 본관 해남
◦ 조선 중기의 뛰어난 문인, 여러 차례 유배와 만년의 은거(隱居) 생활을 통해 시조 창작
26세 때 진사, 30세때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경원유배(31세), 이어 기장 유배, 인조반정 때 유배 해제, 의금부도사
◦ 42세 때 별시문과 장원, 왕자(봉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됨
◦ 43세 때 공조좌랑, 형조정랑을 거쳐 한성 서윤 역임
◦ 47세 때 증광문과 급제, 예조정랑 역임
◦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덕 유배, 곧 풀려 금쇄동에 은거
◦ 66세 때 왕명으로 예조참의, 서인의 참모로 은거
71세 때 동부승지, 당쟁으로 삼사의 탄핵. 효종 승하시 복식 문제로 3년설을 주장(남인), 서인의 세력에 밀려 삼수에 유배, 광양으로 이배됨
◦ <어부사시사>를 비롯한 77수의 작품을 남김.
◦ 문집 : [고산유고(孤山遺稿)]
● 廣開土大王陵碑(광개토대왕릉비)의 書體(서체)와 比較(비교)

廣開土大王陵碑文 詩碑의 建立記

고산윤선도선생시비건립위원님과 함께(2006.2.11) 좌로부터 담당공무원 임성장, 문화원사무국장 이완섭, 영덕향교전교 윤병목, 영덕군수 김병목, 재경향우회장 이은식, 초당 이무호선생, 영덕군예술협회장 김도현, 군의원 이태희, 전문화원장 신득용, 문인협회 조종문.(시비건립위원회가 구성된지 불가 30일만에 시비제막식을 갖게 되었다)

좌로부터 석명도 노인회장님, 윤형식 고산선생종손님, 초당이무호선생님, 해남윤씨대종회장님, 김병목군수님(06.3.11)

보리향기독서회 권영애님께서 고산선생의 시를 낭송

해남군청에서 방문한 해남부군수님과 김병목군수님(2006.4.11)

재경향토서예가 초당 이무호선생님(사진의 왼쪽에서 2번째)은 현재 한국,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지아, 이탈리아, 브루나이, 미국, 브라질, 인도네시아 9개국으로 구성된
世界文化藝術發展中心會長 (세계문화예술발전중심회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국내에서 보다 외국에서 더 알려지신 분이다. 또한 지난 6월2에는 세예가로서는 최초로 성균관(成均館)의 전의(典儀)로 임명되었다.성균관에는 관장, 부관장, 전의의 순으로 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