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는 인물
1. 아버지:광렬의 양부, 6.25학도병. 다리를 전다.
2. 어머니:광렬의 모. 일운 스님과의 사이에서 광렬을 나음.
3. 광렬:일운의 아들. 80년대 중반 운동권 학생
4. 미영:광렬의 여자친구. 디스플레이어
5. 일운:승려. 광렬의 생부, 자비원 원장. 10.27 법난에 고문 후유증으로 죽음
6. 만화:승려. 일운의 도반, 큰스님
7. 목우:승려. 고문 후유증으로 실어증에 걸림
8. 법륜:승려. 일운의 상좌승. 뒤에 자비원 원장
9. 수사관:권력의 속성을 상징하는 인물. 일운과 광렬을 고문하는 자.
10. 공양주:문수암의 전라도 고향의 보살.
11. 주지:어느 주요 사찰의 주지
장소는 자비원 법당 안이다. 법륜 스님은 밖에서 아침 (또는 저녁) 예불을 시작하기 위해 법고를 치고 있다. 목어, 운판, 법종 소리가 차례로 들리고 일운 스님, 정갈한 가사장삼을 입고 예을 올리기 위해 부처님 앞에 앉아 있다가 열반에 든다.
[법륜] 스님, 스님! (일운 스님을 흔들어 보다가 일운 스님의 열반을 확인) 스님, 스님 (일운스님을 향하여 경건하게 삼배를 올린다. 고조되는 예불소리, 암전) 가정의 거실이다. 경상 앞에 앉아 있는 어머니. 낡은 종이를 마음으로 더듬고 있다. 딩동딩동
[어머니] (시를 읽다가) 열렸어요!
[아버지] (거실로 들어서며 술에 약간 취해 어머니 눈치를 보며) 당신, 언제 들어왔소?
[어머니] 뭐 대단한 일 한다고 지금 들어와요?
[아버지] 오늘 큰 재판 건이 하나 승소해서 직원들과---
[어머니]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직원들 해봤자 변호사님 빼고 둘 밖에 더 되요? 젊은 남녀 직원 둘에 회식자리에 당신이 꼴사납게 왜 껴여. 남부끄럽지도 않나, 자식 같은 애들하고.
[아버지] 미스 양이랑 박군이랑 날 잘 따라요.
[어머니] 그거야 당신이 (남편의 하체를 쳐다본다) 안타까워 그러는 거겠죠.
[아버지] 내가 뭐 어때서. (언성을 약간 높이다가 부인을 쳐다보며 풀이 죽는다)
[어머니] 됐어요. 그만해요. (무엇인가 불현듯 생각나) 다음달 5일 정임이 결혼식인데 뭘 해요?
[아버지] 우리가 하긴 뭘해. (의자에 앉는다. 어머니도)
[어머니] 아니 큰아버지가 되어 가지고 어떻게 조카딸 결혼식을 몰라라 해요. 더구나 그 집엔 우리가 늘 상 신세만 졌잖아요. 뭐라도 해야지.
[아버지] 거긴 잘 살잖소. 결혼식 하객만 해도 굉장 할텐데.
[어머니] 우리가 밥 굶어요?(사이) 전에 광렬이 구속되었을 때도 삼촌 덕에---
[아버지] 그때 고맙다고 선물 했잖소? 오대산까지 가서 구해오고. 내 생전 그런 물건 보기도 처음 했는데.
[어머니] 그럼 삼촌이 웬만한 선물로 되겠어요?
[아버지] 당신 말이 맞아. (갑자기 생기가 돌며 뿌듯한 마음으로) 그놈 어릴 땐 공부도 못하고 해서 내한테 참 많이 맞고 자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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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또, 또, 또 옛날 얘기. 그만 할 수 없어요?
[아버지] (놀래며) 아--- 알았소. 그만 하리다.
[광렬] (밖에서) 어머니! (들어오며) 아머니!
[어머니] (놀래며) 아니 얘가--- (너무 반갑다는 듯 광렬의 손을 꽉 쥔다)
[아버지] 광렬아
[어머니] 전화라도 하지, 공항으로 나가게.
[광렬] 제가 어린애인가요? (어머니를 껴안다가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 고생 많았지.
[광렬] (아버지 쪽으로 걸어가며) 아버지 잘 지내셨죠.
[아버지] 그래, 그래 (손을 잡는다)
[광렬] 두분 다 건강하시고요?
[어머니] 우리야 별일 없다만 그래 너는?
[광렬] 보세요. (팔을 벌리며) 건강하죠. (다리를 쳐다보며) 아버지는 요?
[아버지] 그래, 그래. 괜찮다. 네 엄마가 마음 고생이 많다. 너 지난번에 다녀갔을 때도 (부인을 보며) 보시게 이렇게 든든한 놈을 (몸을 쓰다듬는다.)
[어머니] (광렬의 손을 잡고 애정을 표시한다.) 그래. 이제 영 나온 게지? 이 꼴이 이게 뭐냐? 수염은 또 뭐고?
[광렬] 생각해 보고요. 근데 정임이 결혼날짜는---
[어머니] 응 다음달 5일이다. 너 안 올까봐 걱정했다. 널 좀 따랐니.
[아버지] 에미는 너 어디 멀리 가있는 걸 못 견더 하는 것 같구나.
[어머니] (아버지를 보며) 학교 다닐 때도 자취한다고 집나가선 데몬갈 한다고 그 난리를 치고. 인도는 또 뭐 하러 가는지.
[광렬] (얘기하기 싫다는 듯 어머니를 달래며) 어머니.
[어머니] 그래, 그래 알았다. 자 앉자.
[아버지] (연신 광렬이를 생각하며 자리에 앉히려고 한다.) 앉아라.
[광렬] 예, 아버지. 아버지도 앉으세요. 그리고 절부터 받으셔야죠.
[아버지] 절은 무슨 절.
(광렬 뒤로 물러서서 큰절을 한다.)
[어머니] 아 받아요. 하나뿐인 자식 멀리 갔다 왔는데.
(광렬 절을 마친다)
[아버지] 이리 이리 앉거라.
[광렬] 예. (자리에 앉는다)
[어머니] 그래 저녁은 먹었어?
[광렬] 예.
[어머니] 어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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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렬] 기내에서요.
[아버지] 그걸로 되나?
[어머니] 내 차려오마.
[광렬] 됐어요, 어머니.
[아버지] 그럼, 술한잔 할까?
[어머니] 당신은 밖에서 먹고 또 드실려고 그래요?
[아버지] 오랫만에 부자상봉, 모자상봉인데 뭐 어때?
[광렬] 아참, 아버지 선물--- (양주 한 병을 꺼낸다.) 자, 받으세요.
[아버지] 이거 비싼 것 같구나.
[광렬] 좀 들였어요.
[어머니] 나는 없니?
[광렬] (선물을 건네며) 왜 없겠어요?
[어머니] 니가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걸 사오고 그러니? 어떤게 더 비싼 거니?
[아버지] 이거야 마시면 다 없어지는 건데.
[어머니] (펴보며) 아이, 곱다, 고와. 내 곧 차려오마. (상차리러 나간다.)
[광렬] 편지에--- 집에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버지] 일은, 정임이 결혼식도 되었고, (머뭇거리며) 그리고
[광렬] 그리고요.
[아버지] 네 엄마가 너 보고 싶어서 그랬겠지. 너 글피에 시간 좀 내도록 해라. 어머니 모시고 어딜 좀 갔다 오도록 해라.
[광렬] 어디를 요?
[아버지] 가보면 안다.
[광렬] 그러죠.
[아버지] 그래, 갔다오도록 해라.
[광렬] 지난번에 들릴 때와 똑같아요. 집이 (집안을 쳐다보며)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요.
[아버지] 그래, 늘 적막 강산이지. 광렬아. 이제 집에 있거라. 일찍 들어와도 내 혼자뿐이니.
[어머니] (상을 차려 들어오며) 아니, 내가 들어오기 싫어 그래요? 가게가. 요사이는 더구나 결혼 철이고 툭하면 밤일인데. 당신 가져오는 쥐꼬리만한 돈으로 어떻게 우리가 살아요.
[광렬] (짐짓) 어머니, 오늘은---
[어머니] 알았다.
[광렬] 어머니. 글피 저하고 어딜 다녀 오자구요?
[어머지] (순간 멈칫) 그래. (아버지를 보며) 49재도 얼마 안 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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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49제가 벌써? (날짜를 생각하듯)
[광렬] 49제라뇨? 누가 죽었는 가요?
[아버지] 응, 그래
[광렬] 누구---
서로의 시선이 교차되는 순간, 의아한 광렬의 얼굴위로 조명이 엷게 꺼진다. 무대는 법당 안이다. 법당보다는 그 한쪽 제를 지내는 영단에 주목해야 한다. 영단 가운데는 사진이 안치되어 있다. 무대는 상징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일운의 죽음과 어머니와 인연관계를 상징적으로, 제 의식을 중심으로)
[광렬] 이곳이 어디입니까?
[어머니] 니가 태어난 곳. 너의 감춘 곳.
[광렬] 저의 감춘 곳이라뇨?
[어머니] (사진 쪽을 가리키며) 저 곳을 보려므나.
[광렬] 저분이 누구십니까?
[어머니] 잔이나 한잔 올리려므나.
[광렬] 제가 왜?
[어머니] 기뻐 하실게다.
(광렬, 어색한 자세로 잔을 쥐고 어머니를 바라본다.)
[어머니] 오늘은 일운 스님의 7.7제일. 이제 육신으로 가진 모든 인연은 정리되고 다음의 인연을 찾아 떠나실 분.
[광렬] 그게 저와 무슨 관계란 말입니까?
[어머니] 아는 것만이 좋으랴?
[광렬] 어머니는 분명하신 분입니다. 이런 엉뚱한 짓을 시키지 않는 분입니다.
[어머니] 저마다 존재하는 모든 것. 인연의 속 앓음을 지니고 있는 것.
[광렬] 저 사진 대체 누구입니까? (여운을 가진 채 암전)
광렬 어머니의 처녀 시절로 구성된 옆 무대다. 어머니와 생부의 젊은 시절.
[어머니] 아부지, 문 칸 방에 잘생긴 총각이 한 분 계시네예.
[할아버지] 서울서 온 니 사촌오빠 기동이 친구라 카드라. 전장 끝난지 몇 년도 안돼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글쟁이가 뭐꼬?
[어머니] (기쁜 둣이) 아부지, 글쓴다 캅니까? 시 쓰는가 예, 소설 쓰는가 예?
[할아버지] 아니 이년아, 니가 그거 알아서 뭐하노? 기동이 친구라카 밥이나 먹어라
칸다. 살 배달이나 하고 있으라 칸다.
일운, 경상 위에서 원고를 쓰고 있다.
[어머니] 저 주무십니꺼?
[일운] 아닙니다. 아버님이 저 찾습니까?
[어머니] 언지예, 감자--- 가져왔는데
[일운] 안 그래도 출출했는데.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아니 네 이년.
[어머니] 아부지, 허락해 주이소.
[할아버지] 이 천하에 몹쓸 놈이 보리 고개에 밥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남의 딸을 넘봐?
[어머니] 오빠가 그런 난봉꾼 아닌 줄 아부지도 아신다 아닙니꺼?
[할아버지] 글이 밥 먹여 줘? 절대 안 된다. 하나 밖에 없는 딸, 그런 집도 절도 없는 놈한테 줄 수 없어. 내 이놈을 당장!
[어머지] 아부지
(암전)
다시 현재의 거실이다. 빗소리가 들린다. 창가에 서있는 아버지.
[아버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성품 잘 알지?
[광렬] 예.
[아버지] 그 성품 때문인가. 일운스님은 너의 어머니를 남겨두고 또 다시 역마살의 길을 떠났단다. 니 엄마가 너 어디 멀리 가는 것 싫어하는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광렬] 아버지, 대체 무슨 얘기를---
[아버지] 니 얘기다. 네 엄마. 그리고 에비인 나의 얘기고.
[광렬] 그럼 오늘 영단에 그 스님이---
[아버지] (힘겨운듯) 그래. 내 평생, 아니 6.25때 다리를 다치고 어려운 시절 너와 내 에미를 만났을 때 그리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릴 때. 정말, 더없이 기뻤었지. 근데, 니가 커가면 커갈수록 이 일은 잊어지는 게 아니라 더 내 가슴을 억눌렀고 니 애미 젊었을 때 고왔었다. 하지만 이런 다리 병신인 나와 살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이 싫어 저런 억척스러운 사람이 되었다.내 탓이지.
[광렬] 아버지, 대체 무슨 얘기세요?
[아버지] 어렸을 때 동생 가지고 싶다고 했지. (괴로운 듯) 우린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였어.
[광렬] 아버지.
[아버지] 옛날 얘기했었나? (웃으며) 후후--- 니 애미가 결혼 후 들려준 얘기이다. 그 잘생긴 문학청년. 니 생부는 니 에미가 너를 낳고 1년 후쯤, 너 돐이 지난 후야 편지가 왔더란다. 모든 방향을 끝내고 출가한다고.
[광렬] (울음을 삼키며) 아버지.
[아버지] 한쪽 다리를 절며 살아온 나한테 네 애미와 너를 만난 건 내 인생의 새로움이었어. 아니 다 였어. 당시 너의 할아버지도 반대하셨다. 우리 결혼을. 당신 자식이 병신인 줄은 생각지 않고 며느리는 양가집 처녀이기를 바랬지. 양쪽 다 어른들이 반대한 형편없는 결혼이었지만 나는 좋았다. (사이) 광렬아, 늦게 얘기해 미안하구나. 그때 그 문학 청년, 니가 오늘 처음 인사드린 일운 스님, 너의 생부란다.
[광렬] 아버지, 그게 사실, 사실입니까?
[아버지] 그래.
[광렬] 그럼 (심정이 괴로워 우물쭈물 한다.) 그렇다 하죠. 그리고 아니, 그래서, 그래서 저보고 어쩌란 겁니까? 그분이 어떻게 제 아버지란 겁니까? 살아있는 얼굴도 아닌 것이, 죽어 사진으로 본 그분이 제 아버지라뇨.
[아버지] 그냥 이 애비처럼 묻어 두자꾸나.
[광렬] 묻어 둔다뇨, 아버지. 어떻게 어떻게요.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얘기를.
[아버지] (나가며) 미안하다.
[광렬] 아버지가 왜---
[아버지] 비가 많이 오는 구나.
잠시 침묵이후 광렬 혼자 생각에 잠긴다.
[광렬] 불을 꺼라. 무엇이 보이거나 들리는가?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이 소리가 들리느냐? 들립니다. 어떻게 들을 수 있느냐? 귀를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럼 너의 귀가 없을 땐 이 소리는 있느냐, 없느냐?--- 묻지 않느냐. 모르겠습니다. 굳어버린 앎을, 고정된 지식을 그리고 타는 갈애를 버려라. 그것에 너의
자유가 있다. 이튼 날 아침 거실이다.
[아버지] (의자에 앉으며) 광렬이는
[어머니] 새벽에 들어 왔어요.
[아버지] 그럼 깨우지 말구려.
[어머니] 1년만에 집에 와선.
[아버지] 무른 척 해요.
[어머니] (한숨을 짧게 쉬며) 그렇게 하죠.
[아버지] 깨어나거든 해장국이나 끓여주고 가게 나가세요. 인도에서 곡기만 먹고 지내 속이 비었을 텐데.
[어머니] 부전자전이라고. 술먹는 건 어찌 그리 닳았어요. 당신과
[아버지] (웃으며) 아들자식이 애비 닮지. 그럼 애비 닮나요. 내 출근하리다.
[어머니] 여보.
[아버지] (나가려다 돌아보며) 왜 할 얘기 있어요?
[어머니] 늦게 가도 괜찮쟌아요. 일어나거든 얼굴이나 보고 출근하세요. (어머니 딴 짓을 한다.)
[아버지] 응, 그래도 출근 시간이 (시계를 보며 작은 갈등)
[어머니] 제대로 다니는 직장도 아닌데 오늘 같은날 하루 집에 있으면 어때서. 이때 광렬 잠자다 일어난 모습으로 거실로 들어온다.
[아버지] (반색을 하며) 응, 일어났구나.
[광렬] 출근하시려고요?
[아버지] 그래, (광렬을 쳐다보며) 술 한잔했구나. 괜찮아?
[광렬] 예.
[어머니] 뭣 좀 먹을래?
[광렬] ---
[아버지] (광렬을 보며) 니 애미 보고 해장국 끓이라 했다.
[광렬] 신경 쓰지 마세요. 아버지. 출근하세요.
[아버지] 응, 그럴까? 그럼 내 다녀오마.
[어머니] (말을 끊으며) 출근하는 게 뭐 그리 대수예요? 애 밥이나 먹는 거 보고 가시던지.직장 같지 않은 직장을
[광렬] 어머니.
[어머니] (가법게 말을 던지 둣) 내 말이 틀렸나? 니 삼촌 덕에 이름만 직장이 무슨 직장이니. 내가 언제 월급봉투 갔다달라기를 했나.
[아버지] (어색함을 깨고) 그래, 씻고 밥 먹어라. 내 차나 한잔하고 출근 할께.
[광렬] 아니 예요. 아버지 출근하세요.
[아버지] 그래 (우물쭈물하며) 그럴까?
[어머니] 어여 씻어라. 밥 차리마.
[광렬] (아버지를 쳐다보며) 출근하세요. 어머니와 할 얘기도 있고.
[아버지] 그래, 그러려무나.
(어머니는 부엌으로 가려고 하고 아버지는 출근하려 하고 어색한 순간)
딩동딩동
[어머니] 이른 아침에 누가? (모두들 문 입구를 바라본다.) 누구세요?
만화와 법륜 들어서며
[만화] 집은 바로 찾아왔군요.
[어머니] 만화스님께서.
[아버지] (합장으로 인사하며) 스님. 오랫만에 들르셨습니다.
[만화] 그런것 같습니다.
[어머니] (황망하게) 스님, 이리 앉으시죠. (만화 자리에 앉는다. 광렬에게) 인사드려라. 만화스님이시다. 장곡사에 계시는
[광렬] (마지못한 표정으로 인사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법륜] 법륜 입니다.
[만화] 아, 이 청년이--- 광렬이라고 했던가?
[아버지] 예, 아들놈입니다.
[어머니] 스님 차라도.
[만화] 아닙니다. 그냥 잠시 얘기만
[어머니] 그래도
[만화] 허 괜찮습니다, 보살님. (아버지를 보며) 처님도 바쁘시지 않으시면 앉으시죠.
[아버지] 예, 스님. (어머니 아버지 자리에 앉는다.)
[만화] (광렬을 보며) 많이 컸구나. 중학생 때였던가, 잠시 본것이. (어머니를 바라보며) 7.7제에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머니] 당연한 것을요.
[만화] 일운스님을 보내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법륜이 그러더군요. 은사스님을
생각하니 도닦은 것이 너무 초라해 보인다고요. 야단을 쳤지만---
[아버지] 그래도 수행자의 그림자가 남지 않겠습니까?
[광렬] 일운 스님을 아십니까?
[만화] (광렬을 보며) 그래, 내하곤 30년이 가까운 도반이란다. 여기 있는 법륜의 은사스님이기도 하고.
[광렬] (만화를 보며) 언제 한번 찾아 뵙겠습니다.
(광렬, 인사도 않고 휑 나가버린다. 모두들 놀란듯 쳐다본다. 법륜 일어선다.)
[어머니,아버지] 광렬아. (둘 다 만화의 눈치를 본다.)
[만화] 집안에 무슨 일이--- 법륜아 앉거라.
[아버지] 그게--- 자식놈에게 일운 스님에 대해
[만화] 아직 몰랐단 얘기입니까?
[어머지] 제가 인도에 있는 자식놈을 돌아오게 했습니다. 일운 스님이 입적하신 며칠 후 연락을 받고 그날 꿈에---
[아버지] 꿈이라니
[어머니] 광렬이가 일운 스님을 고문하고 괴롭히는--- (어머니는 잠시 몸을 떨며 괴로워한다.) 저한테도--- 하옇든 너무 끔찍했어요. 꿈이 무섭기도 하고, 해서---
[아버지] 당신답지 않은
[만화] 꿈이 현실이죠. 현실이 꿈이 아니라고 꿈이 현실 아닌 것은 아니죠. 잘 하셨습니다. 언젠가 일운당이 처사님 얘길 하더군요. 평생을 빚진거 같다며
[아버지]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습니다.
[만화] 허허, 참 좋은 도반이었죠. 저같은 굽어 쓸데없는 나무는 남아 있고, 올곧은 나무는 베어버리니 우리가 사는 곳이 사바는 분명한가 봅니다. 한 7,8년 전쯤이었나 (과거를 생각하는 둣) 일운이 모진 수모를 당한 지금의 자비원으로 떠나기 전 일운당이 기거하던 암자에 들렸죠. 때마침 짐을 챙기고 있었는데--- 옆에서 보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20년이 넘는 승려생활에 그가 옮길 짐은 가사 장삼과 옷 두어 벌, 발우 뿐이었습니다. 그런 수행자였죠. 단촐한 것을 좋아하더니 어제도 일운답게 남긴 모든 것을 태우는데는 채 몇 분이 걸리질 않더군요.
[아버지] 참, 스님.
[만화] 제가 쓸데없는 넋두리를--- 이제 앞으로 법륜 상좌가 자비원을 계속해서 운영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힘이 되어 주십시요.
[어머니] 지금까지도 잘 해오셨는데요, 뭘.
[아버지] 스님, 전 출근시간이---
[만화] 처사님, 그러시죠.
[아버지] 여보, 다녀오리다. (부인 어이없다는 둣이 쳐다보고, 만화스님 착찹한 심정으
로 아버지를 쳐다본다. 암전)
무대는 술집이다. 광렬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다. 무대 한쪽에서 미영 들어온다.)
[미영] (광렬을 요리조리 장난끼를 가지고 반갑게 쳐다보고 광렬은 미영의 등장을 모른다.) 아니 대단한 요기가 되어 온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네, 언제 온거야?
[광렬] (미영을 쳐다보고 술을 들이키며) 며칠 됐어.
[미영] 인도 가서 편지 한통 딱 붙이고 연락 끊더니 웬술?
[광렬] 미안하다.
[미영] (자리에 앉으며) 참 편하네, 말 한마디에 다 해결되니.
[광렬] 미안하다.
[미영] 언제나 미안, 미안하다. 그 말 좀 안 할 수 없어?
[광렬] 그래 (술을 들이킨다.) 나 지금---
[미영] 지금 뭐?
[광렬] 지금 그런 시비하고 싶지 않아.
[미영] 흥, 어련하겠어. 언제나 형 중심인 사람인데. 내가 또 착각했지. 불쌍해라 정미영--- 지금 내 심정, 아니 형 떠나고 부터 내 심정 알기나 해? 학교 다닐때도 그랬지. 운동권이랍시고 툭하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가 그리고 지치고 지치면 날 불러내. 군에 가서도 편지 한통 전화 한번 제대로 했어? (조소띤 눈으로 광렬을 보며) 하기는 했지. 휴가 와서 만날 사람 다 만나고 귀대하는 날. 세상에, 귀대한다고 전화하고. 매사가 그랬지.
[광렬] 오해 마라. 학교 다닐 땐 네가 그런 일에 끌려들어오는 것이 싫었을 뿐이야.
[미영] 고맙기도 해라. 그럼, 그 후는.인도에 갈 때도 언제 나와 진지한 얘기 한번 한적 있었어?
[광렬] (계속 술을 마시며) 그런 얘기하지 말자.
[미영] 그럼 무슨 얘기?
[광렬] (술을 계속 마신다) 미안하다.
[미영] 제발, 그 미안하단 얘기 좀 하지마. 그 말 할 심정이면 미안 안하게 하면 되잖아. 전생에서부터 나한테 죄만 짓고 살아온 사람 같잖아.
[광렬] 그래. 세상을 살아가는데 미안하고 죄스러운 게 하나 둘이겠어?
[미영] 술은 왜 그리 마시는 거야?
[광렬] 그냥.
[미영] (어이가 없다는 듯) 그냥? (술잔을 빼앗으며) 형, 이런 스타일 아니잖아. 나도 한잔 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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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렬] 너하고 대화가 없다고 했지? (사이) 전에 힘든 일은 지금 생각해보니 대화로 풀 수 있었던 일이야.
[미영] 무슨 얘기야 그게?
[광렬] 넌 말해도 믿기지 않는---
[미영] 무슨 일 있어? 말 안 할거야?
[광렬] 내가 중의 사생아래.
[미영] 뭐?
[광렬] 중이 낳은 아들이라고.
[미영] 무슨 얘긴지 모르겠네. 형 아버님이 전에 스님이었다는 거야?
[광렬] 아니.
[미영] 그럼.
[광렬] 내 생부가 따로 있대. 그분이 중이란다. 이름도 고상한 한 구름 일운 스님 내 생부란다.
[미영] (믿기기 않는 둣 광렬을 보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럼 그 생부라는 분은 어디에 계시는 거야? 만나봤어?
[광렬] 만났지. 영단 사진으로. 어머니의 급한 연락을 받고 와서 어제 절에 갔는데 웬스님의 사진이 영단에 있었어. 그 사진, 어딘가 낯이 익은--- 내 생부래.
[미영] 그럼, 저번에 어머니가 부탁해서 형 인도편지 내가 부친거--- 그 편지가 그 내용이야?
[광렬] (머리를 끄덕인다.) 아마 그럴 거야.
[미영] 왜 돌아가신 거야. 살아 계실 때형이 한번도 뵌 적이 없어?
[광렬] 얼굴을 본적이 있냐고? (괴로워한다.) 얘기도 들은 적 없어.
[미영] (눈치를 보며) 미안해.
[광렬] 그 이상은 나도 몰라. (자조하듯)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 대체 무슨 일인지. (광렬 쓰러진다.)
[미영] 형, 왜이래. 형.
무대는 광렬의 집이다. 거실에 어머니가 근심스러운 감정으로 앉아 있고 아버지 들어온다.
[아버지] 도대체 이놈의 나라는 왜 이리 시끄러운지?
[어머지] 어디 갔다 오셨어요?
[아버지] KAL기 사건 합동 위령제에.
[어머니] 당신이 거길 왜 가요? 감투가 생겨요, 뭐가 생겨요? 그저 아무데나 나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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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고.
[아버지] 석준이 아버지가 사무실로 계속 전화하고 극성이라, 그리고 상이군경회에서 결의한 내용이요.
[어머니] 집안이 시끄러운데 가장이란 분이. 남 일에 갈 정신 있으면 집안 꼴이나 좀 챙기시지.
[아버지] 집에 무슨 일. 다큰 광렬이 하고 다 알아서 하는 당신이 있는데 (자리에 앉는다.)
[어머니] 광렬이가 다 켜요? 대낮부터 어디서 술을 잔뜩 먹곤. 아이고--- (머리를 치며 힘들어 한다.)
[아버지] 광렬이도 힘들지 않겠소. 지 잘못도 아니고---
[어머니] (갑자기 남편을 쏘아보며) 당신 말씀 속에 뼈가 있어요.
[아버지] 뼈는 무슨---
[어머니] 어이구 내 팔자. (한숨을 크게 내쉬며) 내가지를 어떻게 키웠는데.
[아버지] 그건 그래요. 광렬이에 대한 당신의 애정을 남달랐지. 그래도 품안에 자식이지, 저라다 말겠지.
[어머니] 걔가 와서 뭐라는 줄 아세요? 제가 무섭대요.
[아버지] 당신이 왜.
[어머니] 어떻게 그런 사실을 이때까지 숨겼냐고요? 또 당신이 안타깝대요.
[아버지] 그게 무슨 말이요. 난 그런거 없어요.
[어머니] 세살박이 지놈 안고 처음 서울 올라와 남대문에서 팥죽 팔아가며 키운 놈인데--- 이제 술 마시고 와서 이젠 눈을 치켜 뜨며 대드니. 흑흑 (운다.)
[아버지] 여보---
사무실의 분위기다. 미영 전화를 받고 있다.
[미영] 페인트칠은 안 된다니까요. 천으로 카바 해야죠. 내 그래요. 실증 나고 전체가 저급하게 느껴 질 것 같아요. (광렬, 들어온다. 미영 광렬을 본다.) 예--- 그럼 다시 기획 안 정리하시고 결제 나는 대로 연락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전화 끊는다.)
[미영] 형 어서와.
[광렬] 무슨 일로 오라고 했어?
[미영] (약간 어색한 감정으로) 그냥--- 형, 내 사무실 구경 못했잖아.
[광렬] 그래. (사무실을 훑어보며) 왜 집에서 작업해도 되잖니?
[미영] 그냥, 집에서 작업하면 생활에 리듬이 너무 없어서. 작업실에 나오면 뭔가 긴장이 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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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렬] (웃으며 농담조로) 현대인들은 모두 스트레스 병자라든데, 스트레스의 원인 중에 하나가 긴 장 아니냐?
[미영] 그런 긴장하고는 좀 안 다르겠어? (발랄하게 얘기하다가 갑자기 어려워하며) 근데 형, 저 번에 형이 얘기 했던거.
[광렬] 무슨 얘기?
[미영] 아버님 얘기--- (눈치를 보다가) 법명이 일운 스님 이랬지?
(광렬, 공개를 끄덕인다.)
[미영] (서랍을 열고 봉투 속에 카피를 한 종이를 몇 장 내놓는다.) 창호형 알지? 그 형이 지금 신문사 종교담당파트에 근무하거든. 형 얘기 하다가 문득 생각나서 그 스님 얘기를 했더니 창호형이 잘 알고 있대. 이거 창호형한테 받은 자료야.
[광렬] (놀라며) 무슨 자료?
[미영] 10.27 법난. 형이 얘기한 일운 스님. 그 당시 구속 된 분이래.
[광렬] 구속? 그래서
[미영] (머뭇거리며) 혹시 도움될까 싶어서 가져왔는데 괜한 일 한 것 같아.
[광렬] (미영에게 급히 자료를 뺏듯이 낚아채고 카피한 자료를 읽는다.) 부패한 승려. 관광지역으로 개발되는 땅을 구입하여 땅 투기를 했다. 은처 승이라. 출가해서 자식을 숨기고 사는 승려란 말이지. (기가 차다는 듯이) 허. 어머니를 버리고 출가해서 한 짓이 겨우 이런 거란 말이지.
[미영] 형.
[광렬] 무엇하러 이런 짓을 했어. 내가 시켰어?
[미영] 미안해. (광렬의 눈치를 보다가) 근데 창호형 얘기가 당시의 수사에 문제가 많다대. 창호형이 지금도 자세히 정리되지 않은 우리 현대사의 질곡된 문제라고 했어.
[광렬] 그래, 너 창호선배한테 온갖 나발을 불어댔어? 내가 은처 승의 자식이라고. 아예 신문에 광고를 내지.
[미영] 무슨 말이야. 창호형에게 그런 얘기하지 않았어. 그리고 형도 자세한 내막을 모르잖아.
[광렬] 내막? 무슨 내막. 이렇게 신문에까지 난 내용을. (언성을 높이며) 제발 그러지마. 내일에 너무 관계 마.
[미영] 형 심정 이해해. 근데 너무 민감해 형, 사춘기 아니잖---
[광렬] 이해해? 어떻게. 니가 내 심정 어떻게 알아. 애초에 나에게 아버지란 무능력자였어. 우리 아버지. 억척스런 어머니에 치여 살은 흔치 않은 구세대야. 이유는 불구 하는 그것 때문에. 어릴 때부터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은 어머니 몫이 였지. 신학기가 되어 새 가방을 살 때도 명절에 옷을 사 입힐 때도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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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지 몫 이였어. 아버지는 언제나 외톨이 방관자였고. 난 그런 힘없는 아버지가 싫었어. 그렇지만 지금 익숙해 졌어. 이해도 하고. 아니 나이가 들어선 외려 아버지에게 더 깊은 정도 들었고. 후후--- 근데 난데없이 생부가 나타나더니 안 그래도 삐뚤어진 나의 아버지 상에 (서류를 보며) 봤지. 난 왜이리 아버지 복이 없어. 니가 어떻게 이해해.
[미영] 미안해. (사이) 창호형이 자료를 주며 그랬어. 언론을 믿지 말라고. 사실 자체가 왜곡된 시절이었다고.
[광렬] 그래서 어쩌란 거야! 이렇게 뒤섞어 버린 (말을 하다가 끊는다.) 그만 하자.
[미영] 창호형이 자비원에 가보래.
[광렬] 자비원?
[미영] 일운 스님이 부도 탑을 세우는 49제날에 불교계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을 건가봐.
[광렬] 부도 탑을 세우는 49제일? 이런 스님에게도 부도 탑을 세워주나? 무슨 그런 종교단체가 있어?
[미영] 그리고, 문수암도.
[광렬] 또--- 온갖 얘기를 다 주고받았구나.
[미영] (결심하는 듯) 그곳에 10.27 법난에 끌려가 일운 스님처럼 고문휴우증을 앓고 있는 스님이 한 분 계시대.
[광렬] 관심 없어. 고문--- 후유증. 후후후--- 그런거 나도 있어. 그런 관심 (사이) 인도로 떠나면서 모두 잊어버리기로 했어. 이데올로기, 학생운동, 변혁운동,
그런 것들 좀더 안다고 내 힘든 것 달라지지 않아.
[미영] 아니, 난 관심이 생겼어. 형은 늘상 그랬어. 언제나 도 아니면 모야. 학교 다닐 때도 내게 운동권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했지. 난 관심 있었어. 그건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야. 사물에 대한 막혀버린 내 심정을 헤쳐나갈 방법이었어. 근데 형이 말렸어. 그러던 형은 어쨌어? 구속된 후 형이 친구들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사실 하나로 일언반구 없이 인도로 떠나버렸어. 언제나 그런 식이야. 난 그런 거창한 세계 알지 못해. 하지만 내게 부딪힌 이런 문제들. 관심 있어. 우리의 삶이 그런 거창한 형식으로만 설명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광렬] 자본주의 최첨단 직업에 운동권 시각이냐?
[미영] 왜 말을 빗대?
[광렬] 그만 하자.
[미영] 형이 가지 않으면 혼자라도 가 볼거야. (눈물이 맺힌 듯 뚫어지게 광렬을 쳐다본다.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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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박한 음악이 나오며 일운과 법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일운] 무슨 짓이요?
:조용히 따라 가시죠?
[일운] 저 저, 법당에 군화 발을.
:끌어내 차에 실어.
[법륜] 스님, (뜯어말리 듯) 이러지 마십시오. 대체 무슨 일로?
:이 젊은 중도 같이 끌고 가.
:예.
(음악과 적절한 음성의 조화가 필요하다.)
무대는 현재의 법륜 방이다. 법륜 악몽이다.
[법륜] (잠을 자다가) 스, 스님. (놀래며 눈을 휘둥그래 뜬다. 주변엔 아무 것도 없고 벽 한쪽에 일운의 사진이 있다. 법륜, 일운의 사진을 본다. 사진 앞에 무릎을 꿇으며) 또, 또 기억하기 싫은 꿈을 꾸었습니다. 스님---
(음악 깔리며 사이)
[수사관] 계십니까?
[법륜] (낮은 목소리로) 누구시죠. (좀 크게) 야밤에 누구십니까? (불을 켠다.)
[수사관] (안으로 들어서며) 늦은 시간에 결례 같습니다.
[법륜] (일어서며 합장으로 인사한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수사관] (방안을 훑어보고 일운의 사진을 묘하게 쳐다본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분, 일운 스님 맞죠?
[법륜] 그렇습니다만 아시는 분인가요?
[수사관] 일다 마다요. 아주 잘 알죠.
[법륜] (쉽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 근데 무슨 일로.
[수사관] 아하, 다른 것이 아니고 그 무슨 부도 탑인가를 조성한다고
[법륜] 예, 그렇습니다.
[수사관] 그 부도 탑 조성하는데 시주랄까. 그런 것도 좀 하고.
[법륜] 시주면 시주지. 그런 것이라뇨?
[수사관] 하하하. 그렇죠, 시주죠. (사이) 근데 그날 이곳에 스님들이 많이 오시겠죠?
[법륜] 그렇습니다만 그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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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관] 아 다른 건 아니고. 순수한, 아주 순수한 종교적 행사만 치뤘으면 하고요. 그 무엇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법륜] 당신 누구요? 무슨 일로 왔소?
[수사관] 뭐 그런 건 알 필요 없고. 이 곳 자비원이 원래 말이 많았던 곳이고, 아마 얼마 전까지 복지 원 인가가 나지 않아 정부 보조금도 없이 어렵게 운영된 걸로 아는데. 요사인 풍족하시죠. 전체 예산의 60%지원이면 굉장한 액수일텐데.
[법륜] 이제 보니. 그래, 그날은 억울하게 입적하신 우리 스님을 기리기 위해 많은 스님들이 오실게요. 올 정도겠습니까? 당신네 들, 이때까지 입다물고 있은 모든 진실을 밝힐 것이요.
[수사관] 진실. 아직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스님이시구만.
[법륜] 그래. 잘 몰라. 하지만 너희 같은 인간에게 협박당하진 않소. 애초에 빈손으로 출가한 사람이니 아니 우리 스님처럼.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을게요. 또 잡아 가둘래 면 잡아가 보시요.
[수사관] 아, 그런 뜻은 전혀 없소. 정부로써는 이 자비원이 정말 잘 되길 원하고, 그러려면 (법륜을 보며) 스님이 너무 지난 일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싶고.
[법륜] 지난 일? 사람을 두 번, 세 번 죽이고선 지난 일을 잊자고? 잊읍시다. 하지만 진실은 밝혀야겠소.
[수사관] 그럼 곤란하죠. 왜, 시끄러우니까. 그리고 엄밀히 얘기하면 우리가 죽인 것이 아니죠. 출가 전에 낳은 자식인줄 알았다면 우린들 뭐 허물을 잡았겠소? 저도 자식 기르면서 사는 사람이데.
[법륜] 이 가증스러운. 너희들이 정말 몰랐단 말이야? 이 더러운 (법륜 달려들어 수사관의 멱살을 잡는다.)
[수사관]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소. 일운 스님을 추모한다. 그런 좋은 일이겠죠. 시주도 하겠다니까. 하지만 정부를 상대로 엉뚱한 일 벌리는 건 곤란합니다. 왜냐, 그 사람은 신문에 발표된 것처럼 은처 승이요, 지금 자식도 버젓이 살아 있고, 유가족들은 이런 사실이 까발려 지는 것을 원치 않을 텐데.
[법륜] 그런 협박, 공갈에 넘어갈 것 같소?
[수사관] 유가족들은 그러지 않을 껄요? 남아 있는 유가족을 생각하셔야지. 스님에, 은사스님의 유가족들인데---
[법륜] 이, 이 나가시오, 당장.
[수사관] 우리도 침묵 할테니, 아니 도와 드리리다. 조용히 (손을 입에 대며) 행사를 마쳤으면 싶소. 정말 조용히.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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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무너지듯 주저 않는다. 사이.
[법륜] (걱정스러운 듯) 스님
일운 스님이 나타난다.
[일운] 이제 기초 작업은 어지간히 끝났어.
[법륜] 예, 장마가 지나면 토목 공사를 할 수 있겠어요.
[일운] 그래, 내년이면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부처님 품속에서 생활하게 될거야.
[법륜] (근심스러운 듯) 헌데 스님
[일운] 왜 얼굴 표정이 그러냐?
[법륜] 이곳 진입로 공사를 막겠다고 한 사람들---
[일운] 아, 이 아래 별장 가지신 분.
[법륜] 온 동네를 다니면서 스님 험담을 하고 있다는데요.
[일운] 그래 나도 얘기 들었다. 걱정 마라.
[법륜] 이곳에 부랑자들을 모을 꺼라고 얘기하면서--- 마을사람들이 주변의 땅값이 내려간다고 난 리예요.
[일운] 쯧쯧. 돈 가진 사람이 무섭다더니. 법륜아. 우리 사회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결손이 있는 사람들을 격리 수용시키려고 하지. 근데 그런 방식은 좋지 않아. 육체나 정신이 결함이 있는 사람일수록 자연스러운 것이 좋아. 사람과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그러면서 자연의 정서를 쉽게 느낄 수 있는 이런 공간. 이런 곳은 외려 넉넉함이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양보해줘야 될 곳이야.
[법륜] (고개를 끄덕인다.) 밑의 별장 주인의 동생인가 하시는 분이 높은 자리에 있는데 그 분에게 얘기를 했다는데요. 절대로 자비원이 완성되지 않을 거라면서. 동네에 파다해요.
[일운] 높은 자리라. (웃으며) 우리가 그런 사람을 만날 일이 있겠니. 큰 일에 바쁜 사람일텐데.
[법륜] 우리 자비원만 없으면 이곳 땅값이 튈 거라고 몇몇 사람들이 동요해서 투서를 했대요.
[일룬] 투서? (호탕하게 웃음소리로) 허허허 허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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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문수암이다. 한쪽은 문 장치가 필요하고 도량엔 장작나무를 옮기는 보살 이, 옆에는 지게를 옆에 두고 쉬고 있는 불목한이 있다.
[미영] 저 아주머니.
[공양주] (전라도 사투리로) 어째 그라요?
[미영] 이 암자에 목우 스님이라고 계신다던데.
[공양주] 목우 스님 말씀이요. 아가씨가 목우 스님을 뭣땜시 찾소? 아시는 분인게라?
[광렬] (앞으로 나서며) 잠시 뵐 수 없겠습니까?
[공양주] 아 만나 뵐수야 있지만 만나서 어쩌겠소? 말을 못하시는 분인디. 그리고 주지스님이 남사스럽다고 외부 인들과 만나지 못하게 했으라.
[미영] 아주머니, 어느 방인지 가르쳐만 주세요. 잠시만 뵙고 나오겠습니다.
[공양주] 오메 이 아가씨. 절에 처음 오는 감씨. 아주머니라 부르지 마쇼.
[광렬] 그럴 어떻게---
[공양주] 보살 님이라 하소. 절에서는 머리 기른 남자를 처사, 여자를 보살 님이라 한당께. (미영, 광렬 서로 쳐다보며 웃는다.)
[광렬] 예, 보살 님.
[공양주] 저기 (미영, 광렬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본다.) 저 방이요. 뭣 땜시 찾아뵐려고 하는지 모르지만 내 생각엔 그냥 가는 게 좋은 거 겉은디---
[미영,광렬] (합장하며) 너무 걱정 마십시오. 잠시만 뵙고 나오겠습니다.
[공양주] 아참, 주지스님께서 아시면 경을 칠테니께 내가 안내했다고 하지들 마시오. 나도 두 처녀총각 본적 없구만요.
[광렬,미영] 예, 보살님.
[광렬] (목우 스님의 방문 앞에서) 스님, 스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미영을 쳐다보며) 안계신가?
(미영 광렬에게 손짓으로 문을 열어보라고 한다. 광렬 문고리를 당기고 잠시 후 어두운 방에 앉아 있는 목우 스님을 보고 흠칫 놀란 표정이다. 목우 스님 퀭한 눈으로 광렬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광렬] 목우 스님이십니까?
[목우] (괴로운 듯) 크이윽
[미영] 말씀을 못하신다고 들었어. 고문으로 실어증이 걸리셨대.
[광렬] 스님, 왜 이렇게 되셨는지 좀 알고 싶은데--- 참, 말씀을 못하시지.
[목우] 으으으, 켁켁켁
[미영] 법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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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 어억
[광렬] 왜 고문을---
[목우] (큰 소리로) 으, 으
[공양주] (급하게 장작을 든 채로 뛰어온다.) 왜 그러쇼? (방으로 들어가 목우 스님을 달랜다.) 스님, 별일 아니라요. (광렬과 미영을 쳐다보며) 문 닫아요. 내가 찾아 뵙지 말라고들 말 않캈소?
[광렬,미영] (미안한 듯이) 말씀을 전혀 못하시는 가요?
[공양주] 모르겄소. 말씀은커녕 간간히 이런 발작도 일어나고.
[목우] 아으으...
[공양주] 무슨 말씀인지?
(목우스님 공양주의 손바닥을 잡으며 글씨를 쓴다.)
[공양주] 법--- 난. 당신들 스님께 법난 얘기를 하셨소?
[미영] (죄송한 듯이) 예.
[공양주] 당신들 기자요? 아니면
[광렬] (말을 가로채며) 기자 아닙니다. 관에서 온 것도 아니구요.
[공양주] 그런디 어째 그라요?
[미영] 10.27 법난에 대해서 좀 여쭤볼게 있어서, 그런데 스님이 이 정도 중증인줄은 몰랐습니다.
[공양주] 중증? 흥! 고문 후유증으로 얼마 전에 죽은 스님도 있다 안하요.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목우 스님을 뉘 운다.) 스님, 잠시만 누워 계시요. (광렬, 미영을 보며) 나가시오. (같이 나오며 문을 닫는다.)
[광렬]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저런 끔찍한---
[공양주] (한숨을 크게 내쉬며) 다 업보지라. 우리 같은 무지랭이가 어찌 알겠소만. 스님이 저리 되기전엔 성격도 괄괄하고 탐욕이 좀 많았소. 그래 여기 살러 왔던 부전 스님들 뒷바라지도 제대로 하지 않고 해서 다들 떠나곤 했소. 출가한 스님이 욕심 많은 것도 보기 좋털 않더구만. 그래, 몇 년 전 가을이었우. 아침 공양을 하기 전이니까 막 동이 틀 무렵인데. 이 암자에 군인들 대 여섯 명이 총을 들고 안 왔다요. 그러더니 냅다 암자 식구들을 다 모으라는 거요. 모두들 놀래 법당 앞에 나왔는디. 아 글씨 그 군인들이 사람을 찾는다고 법당에 군화를 신은 채로 안 들어갔소. 그래 목우 스님이 고함을 질러 버렸지라.
[미영] 법당엘 신발을 신고요?
[광렬] 그래서요.
[공양주] 아따, 말도 마씨요. 그 즉시 군인들이 스님 팔을 돌리더니 억압을 쳤지라. 저희들은 말리고, 헌데 문제는 그 다음 이었당께. 그 때 이 암자에 신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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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분이 한 명 있었는데 그 학생이 아마 무슨 데몬갈 하다가 이곳에 왔나봐요. 우리야 그저 신도 아들이 수양왔나 짐작 했는디 하여튼 목우 스님과 그 학생이 끌려갔어요. 놀래서 큰절에 내려갔더니---
[광렬] 큰절에도 요?
[공양주] 큰 절, 암자 할 것 없었지라. 하여튼 그날 난리가 아니었당께.
[미영] 그럼 스님께서 어디로, 끌려가신 건가요?
[공양주] 어딘 줄 우리가 어찌 알겄소. 스님들은 서로 쉬쉬하고, 헌데 한 보름 후쯤 이른 아침에 스님이 오셨는데 근디 (갑자기 울먹인다.) 어디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조렇게 되어선 (계속운다.)
[미영] 아니, 어떻게 했길래 실어증이 걸리도록
[공양주] 더 힘들었던 건 스님이 온 후 였으라. 저 아래 보이지라. (손으로 가리킨다.)
[미영] 예. 절 아래 마을 말씀인가요?
[공양주] 원래 목우 스님이 평이 안 좋은데다 그날 이후로 소문이 흉흉해 신도가 뚝 떨어져 버렸소.
[광렬] 왜?
[불목한] 평소에 목우 스님이 입이 좀 험했지라. 마을 사람들이 산에 나무를 하다 들키면 경을 치고 했는디, 이 암자가 깡패스님이 사는 곳이고 빨갱이 있는 곳이라고 소문이 났당께.(퇴장)
[광렬] (어이가 없는 듯이) 빨갱이 절이요?
[공양주] 다 업보지. (사이를 두고) 작년 이맘때 법당에 인기척이 있어 문을 열었드니 (목우스님 방을 바라본다.) 스님이 어찌케 혼자 들어갔는지 부처님 앞에 엎드려 있었어. 나가 목우 스님 하고 불렀드니 (사이) 스님이 고개를 들었는디 울고 게셨어라. 내 가슴이 너무 갑갑해서, 저리 되기 전에 덕 좀 쌓고 살 일이시지.
[미영] 일상 생활은 하실 수 있나보죠?
[공양주] 처음엔 대소변도 받았는디 지금은 말만 못하시지 간단한 생활은 하시오.
[목우] (갑자기 문을 쾅 연다.)
[미영,광렬,공양주] (놀래 뛰어가며) 스님
(암전)
어머니 일운이 쓰던 경상을 놓고 염주를 돌리며 반야심경을 외우고 있다.
[어머니] (합장으로) 스님, 어서오십시요.
[법륜] (어색한 듯) 잘 계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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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자리를 권하며 서로 의자에 앉는다.) 앉으시죠.
[법륜] 예.
[어머니] 근데 어쩌신 일로---
[법륜] 은사스님 유품을 정리하다가 (걸망에서 무언가를 꺼낼 듯)
[어머니] 스님 유품이야 다비식에서 다 태우지 않았습니까?
[법륜] 다 태웠지요. 헌데 이것 (조그만 노트를 건낸다.) 보살님에게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어머니] (노트를 받아보고 펴본다.) 이게 무엇입니까?
[법륜] 젊은 시절 은사스님의 일기장이랄까. 간단한 메모 노트입니다. 보살님에대한 얘기가 많아서.
[어머니] 제 얘기---
[법륜] 드려야 될 것 같아서요. 그래야 저도. 은사스님도 이 악몽에서 벗어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비원의 후원금도 죄송하지만 받지 않을 생각입니다.
[어머니] 스님, 무슨 이유라도.
[법륜] 신도회에서도 말이 많은 것 같고 또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은사스님의 죽음은 보상님과의 인연이 그 출발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보살님과 또 아드님의 일을 평생의 빚처럼 안고 계셨으니까요. 아니 업보의 덩어리라고나 할까요? 결국 그일 때문에 돌아가시기도 했지만.
[어머니] 무슨 말씀 이신지. 왜 일운 스님이 저와 저 자식 때문에 돌아가셨단 겁니까?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법륜] 지나친 것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스님이 자비원을 운영할 생각을 한 것도 당신이 지은 업보에 대한 참회심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어머니] (말을 가로채며) 참회심 이라뇨? 제가 아니 제 자식놈이 언제 일운 스님에게 원망스럽다고 얘기 한 적이 있었습니까? (사이) 힘들었죠. 하지만 세월 속에 다 씻어 보냈습니다. 어이가 없군요. 가장 아파해야 될 사람이 어쩌면 저인지 모르는데 제가 원성의 대상 같습니다.
[법륜] 힘드셨겠죠. 스님과 보살님의 그 인연이 저에게도, 돌아가신 저의 스님에게도 점점 감당할 수 없는 멍에를 씌웁니다.
[어머니] 멍에요? (웃으며) 저도 할 얘기 좀 해볼까요? 법륜 스님 젊으시죠. 일운 스님은 돌아가셨죠.
[법륜] 예 그렇습니다.
[어머니] 전 (감정을 격하게 하며) 스님보다 훨씬 더 어린 곱디고운 시절, 한 남자를 좋아했다는 이유로 머리를 잘리고, 그 잘린 머리채로 자식놈을 낳았어요. 그가 떠나고 난 뒤 자식놈을 가지고 부터 몇 년간은 지옥, 그래 물 빠지고 열 받은 자갈만 남은 화탕지욕 같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세월 속에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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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하고 삼키며 살았어요. 그분이 출가 하셨다는 말을 듣고 걷지도 못한 지금의 제 남편, 광렬이 때문에 없는 것보다 낫다 싶어 결혼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친정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랬는지 모르지요. 그때 (눈물을 훔친다.) 친정에 더 있었으면 그 갑갑함에 자식놈과 저는 미처 죽었는지도 모르니까요. 그게 제 젊은 시절이었어요. 지금까지 누구한테도 나눠 짊어지게한적 없습니다. 누구한테도.
(법륜, 괴로운 표정이다.)
[어머니] (조소하듯) 절 이해 하신다고요? 법륜 스님이?
[법륜] 그건 은사스님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언젠가 그러셨습니다. 이 세상에 인과보다 무서운 게 없다고. 그때는 늘상 듣는 경전의 한 구절처럼 흘렀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당신 스스로에게 한 말씀이었습니다.
[어머니] 근데, 왜 절 찾아와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겁니까?
[법륜] 죄송합니다. (사이) 우리의 이런 인간적인 얘기와는 상관없이--- 전, 보살님과 은사스님의 인연을 끊고 싶습니다.
[어머니] 인연을 끊다뇨. 그것이 칼로 줄 끊듯이 끊어지는 건가요? 그렇다면 벌써 끊었죠.
[법륜] 그래도 끊을 겁니다. 끊지 않으면 저희 스님도 또 죽음을 당할 뿐 아니라. 이 가정에도 자비원에도 또 다른 큰 어려움이 생길지 모릅니다.
[어머니] 또 다른 큰 어려움이라니, 일운스님이 또 죽는다니
[법륜] 그들은, 그들은 스님을 또 죽일 수 있습니다. 그 여파가 다시 보살님에게도.
[어머니] (약간 역정을 내며) 무슨 말씀이십니까?
[법륜]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만. (합장하며 밖으로 나간다.)
[어머니] 스님. (일어났다 다시 앉으며) 법륜스님. (괴로운 듯 자리에서 잠시 앉았다가 텃텃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일기장을 본다. 잠시 후 조명이 변하고 무대의 한쪽에 일운 스님이 나타난다.)
[어머니] (놀랜듯 깨어나며) 스님.
[일운] 당신을 찾아 올 때는 늘상 이 모양이요.
[어머니] 언제나 그랬죠. 스님께서는 제가 다가간 만큼 언제나 떨어져 계셨죠. 왜인가요?
[일운] 영원한 가까움이란 게 어디 있겠소. 우리들의 욕심이지.
[어머니] 일기장을 봤어요.
[일운] 그 때 당신이 광렬이를 가진 줄은 정말 몰랐소. 진심이요.
[어머니] 그러시겠죠. 하지만 언젠가 돌아오실 줄 알았어요.
[일운] 미안하오. 내 역마살 때문에 안정된 직장을 가지면 찾아 갈려고 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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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왜 오지 않으셨어요?
[일운] 당신도 알다시피 그 땐 난 망나니 백수였소. 당신 집에 가지전까지. 웬간 업이란 업은 다쌓은. 참 철없던 시절이었어. 당신은 너무 고왔소. 어쩌면 돌아가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때묻은 내가 당신에게 너무 큰 죄를 짓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오.
[어머니] 지금 보고 계시죠. 이 이상 더 어떻게 괴롭힌단 거예요. 지금의 제 남편, 당신의 아들 광렬이 그리고 저. 모두 당신으로 인한 굴레를 겪고 있는데.
[일운] 나도 인연이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소. 당신과 헤어진 1년 후 편지를 보냈소.
[어머니] 그날을 잊을 수가 없죠. 어찌 잊겠어요. 막 광렬이 백일을 앞둔 날이 었는데. (울먹이며) 집안의 온갖 눈초리를 받으며 (괴로운 웃음으로) 그리고 보면 광렬이도 불쌍하죠.
[일운] 당신이 잘 키웠잖소.
[어머니] 물론 애를 썼죠. 하지만 그 아이는 백일, 돌, 아니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 제대로 무엇 하나 챙기지 못했어요.
[일운] 미안하구려.
[어머니] 그땐 (웃으며) 정말이지 당신이 돌아왔어도 만나지 않았을 거예요.
[일운] 그래서 부처님 그늘로 가지 않았소. 언젠가 내 도반 만화당에게 당신과 광렬이를 본 후 얘기를 한 적이 있었소. 그 때 만화당이 그러더군. 스스로의 업보는 부처도 어찌 못한다고. 그 말이 맞았소. 나의 업보인 것을.
[어머니] 당신의 업보만인가요?
[일운] 그 땐 나도 어쩔 수 없었소. 당신이 광렬이를 낳은 것을 안 것은 광렬이가 중학교 때였소.
[어머니] 기억나고 말고요. 초파일날 광렬이를 데리고 등을 달러간 그 절에서 십 수 년만에 만난 당신은. 그날 등을 달며 기원했죠. 저와 광렬이의 염원을 담아 정말 훌륭한 수행자가 되기를 바라는.
[일운] 당신에게나 광렬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수행자의 생활을 보여 주려고 했소.
[어머니] 이렇게, 이렇게 가신 것이 부끄럽지 않다고요?
[일운] 내가, 내가 더 이상 어찌 했어야 한단 말이오.
[어머니] 당신이 고문당한 얘기를 만화스님한테 들었어요.
[일운] 실없는 친구 같으니. 그 친구 언제가 내게 이런 말을 했소."땅으로 인하여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나야 한다"고. 나와 당신 아니 모든 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오.
(일운, 조명이 엶어 지며 퇴장한다. 어머니, 일운에게 다가가나 없다.)
[어머니] (큰소리로) 스님, 또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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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암에 다녀오다 비를 패해 건물의 후미진 처마 밑에 광렬, 미영 다정하게 서있다.
[미영] 가을 비 좋지?
[광렬] 그래, 좋지 가을비. 참 오랜만이구나. 밥에 내리는 가을비. 인도에선 이런 비가 없어.
[미영] 비가 안와?
[광렬] 안 오긴. 쏟아 붓지. 한번 내리면 최하가 몇십미리야.
[미영] 이런 가을틱한 맛은 없겠네.
[광렬] 그래도 쏟아 붓는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내 이 복잡함 씻어 내리는---
[미영] 목우 스님--- 어땠어? 난 태어나 그렇게 그로테스그한 모습 처음 봐.
[광렬] 자기 과보겠지.
[미영] 자기 과보? 아니 우리 모두의 과보 같아.
[광렬] 우리 모두의 과보라니?
[미영] 그런 생각이 들었어. 문수암, 조그마한 암자야. 스님 한 두분이 기도하고 지내는. 내가 보기엔 목우 스님이 세속적 욕심이 좀 있다 해도 그런 고문당할 만큼의 욕심은 아닌 것 같아.
[광렬] 작은 욕심이 큰 욕심돼.
[미영] 그럴 수 있겠지. 작은 욕심은 목우스님, 큰 욕심은 권력. 누가 그랬던가? 사랑은 모든 것을 태우고 권력은 모든 것을 삼킨다고. 해일과 같은 권력 이 삼키고 간 언저리의 모습 같았어.
[광렬] 그럴 수 있겠지.
[미영] 형, 자비원을 가봐. 일운 스님도 어쩌면 피해자 일수도 있어. 공양주 아주머니가 그랬잖아. 고문 후유증으로 얼마 전 죽은 스님도 있다고. 일운 스님 같아.
[광렬] (독백처럼) 일운 스님. 나을 낳아 준 분. 그리고 나와 어머니도 버린 분. 출가한 분. 그리고 죽어 내 앞에 나타난 분.
[미영] (분위기가 어색한 듯) 나 형 때문에 요번 백화점 건도 놓쳤어. 물질적으로 엄청난 피해야. 보상해야돼.
[광렬] 그거 작업은 계속 있어?
[미영] 있으니까 살지.
[광렬] 언제 너 디스플레이 한거 한번 봤으면 좋겠다.
[미연] 언제든지.
[광렬] 늦어서 바래다주기 힘들겠는데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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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늦었으니까 바래다 줘야지. 하옇튼 형은 못말려. (머뭇거리다가) 형, 묘 한데가 있어.
[광렬] (웃으며) 뭐가 묘해?
[미영] 훗훗, 나 좋아해?
(광렬, 미영을 바라보다가 손을 잡고 당긴다.)
[광렬] 그래.
[미영] (광렬이 입을 맞추려고 하자 가볍게 밀며) 오늘은 싫어.
(광렬,또 당긴다.)
[미영] (광렬을 밀쳐내며, 광렬의 코에다 입 바람을 분다.) 술 냄새. 주 냄새나.(광렬, 어이가 없다는 듯) 그리고 (광렬의 손을 살며시 놓으며) 역마살, 운스님의--- 언제 또 떠날지 모르잖아.
[광렬] 무슨 얘기야?
[미영] 가봐. 어머니가 기다리실 거야. 어쩌면 형보다 더 힘드실지 모르는 분이야.
(미영, 돌아서며 광렬에게 손을 흔들며 사라진다.)
[광렬] (잠시 생각하다 낮은 목소리로) 어머니. (암전) 광렬 현관문을 들어온다.
[어머니] 어디 갔다 이제 오니?
[광렬] (대꾸하지 않고 방으로 걷다가) 아버지는요?
[어머니] 약주를 한잔하시고 오시고선 좀 전에 잠이 드셨다. 근데 너 왜 그러니?
[광렬] 주무세요. (제방으로 가려는 듯)
[어머니] 너 왜 그러니?
[광렬] 제가 어때서요.
[어머니] 그만 두자.
[광렬] 제도 애쓰고 있어요.
[어머니] 애쓴다고? 너 1년만에 집에 왔다. 근데 집안이 왜 이러니. 아버지 아까 들어 오셔서 너 찾으셨다. 얼굴 보기 힘들다고 그러셨어.
[광렬] 알았어요. 일찍 들어오도록 할께요. (방에 들어가려 한다.)
[어머니] 왜 그리 어둡게 대답하니. 이 집에 무슨 식구가 그리 많다고. 자식이라곤 너 하나뿐이다. 모습이 무슨 저승사자한테 끌려가는 것 같구나.
[광렬] 저승사자요? 저는 요사이 어머님이 그렇게 느껴져요.
[어머니] 광렬아.
[광렬] 어떻게 그런 일을 감추고 살으셨는지--- 그리고 아버지한테 잘하세요.
[어머니] 내가 뭐 어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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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렬] 어머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어머니] 그래, 모두들 온통 애미를 못 잡아 먹어 난리냐. 내가 뭘 어쨌게.(사이) 광렬아, 넌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된다.
[광렬] 그런 부담스런 말씀하지 마세요. 어머님이 저한테 잘하시는 것 압니다. 이제 그 이유도 명백히, 아주 분명히 알았고요.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있어 도대체 어떤 분이예요.
[어머니] 그래, 남들도 다 그렇게 얘기하지.(사이) 너 어릴 때 나 이렇게 억세지 않았다. 너 아버지, 너 그리고 이 애미, 아무 인연 없는 서울에 올라와 엔 너 아버지 하나 믿고 살았어. 근데 시가에 물려받은 재산 사업 입네 하고 다 말아먹고 빚쟁이한테 쫓기고 그 와중에 저렇게 술만 먹고 집에 쌀 한바가지 가져오지 않았어. 그때 너 삼촌 아니었으면 벌써 우리 다 죽었어. 시골서 자라 지금 너보다도 훨씬 어린 내가 뭘 알았겠니. 오죽했으면 처 한 장사가 너 굶기기 않으려고 팥죽파는 걸로 시작했다. 그 엄동설한에 얼어붙은 팥죽, 손이 갈라지며 새벽에 깨뜨려 녹여서 시장통 손님들에게 팔았다. 다 팔지도 못했지. 너하고 니 아버지 몫으로 남겨 오느라고. 그렇게 살아 왔는데 내가 어찌 억세지지 않았었겠니. 너도 이제 어른이니 생각해 봐라.
[광렬] 어머니, 아버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어머니] 넌 아버지만 안됐고 이 애미는, 이 애미는 그렇게 밉냐?
[광렬] 그런 얘기 아니잖아요. 아버지. (사이) 나도 어릴 때 싫었어요. 국민학교 때 어머니 매일 가게 때문에 집 비우시고 학교에서 부모님 모셔 오란날 아버지 다리 저시는 저 모습 정말 싫었어요. 말씀도 안드려 선생님한테 혼이 나기도 했죠. 하지만 아버진 그때도 늘상 제게 잘 해주셨어요. 어머님이 없이 집에서 그나마 제가 얘기할 사람은 아버지뿐이었죠.
[어머니] (조심스럽게) 너, 혹시 이 애미를 부정스럽게 생각하니?
[광렬] 모르겠어요. 어쨌든 아버지한테 잘해주세요.
[어머니] 어떻게, 어떻게 그런 생각을. 그래 너의 친아버지는 일운 스님이다. 이 애민 그때 20살 쳐녀 였고 그를 좋아했고, 철없이 너를 가졌다. 그게 죄라면 죄다. 그게 내 운명이라면 어떻게 하겠니? 나도 피하고 싶은 운명이야. 누구나 처럼 꿈도 많았고.
[광렬] 제가 얘기하는 게 그게 아니잖아요. (정색을 하며 큰소리로) 왜 그 후에 일운 스님과 인연을 또 가졌어요. 자비원은 왜요. 제가 말해볼까요. 어머니의 마음속에 아버지가 없었어요. 오로지 일운 스님뿐이었죠.
[어머니] (놀란듯) 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니. 그 분은 스님이시다. 너를 넣아 주신 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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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렬] 그렇죠. 제 아버지일 수 있죠. 하지만 어머님의 남편은 일운 스님이 아니잖아요.
[어머니] 그런 말을--- (휘청인다.) 내과보다 이런 일을 (사이, 음악이 흐른다. ) 오늘 낮에 법륜 스님이라고 일운 스님의 상좌스님이 왔다 갔다.
[광렬] 무슨 일로요?
[어머니] 이 일기장 전해주고 갔다.
(광렬, 뺏듯이 가로챈다.)
[어머니] 니 아버지에겐 미안한 말이다만 일운 스님도 이 얘미도 자식 복이 없구나. 하나뿐인 아들도 하나뿐인 상좌도 서로 우리를 욕 만하니.
[광렬] 그럼 두 분을 다 이해하도록 하죠.
[어머니] 이해 해? 니가 어떻게. 나이 스물 하나에 너를 낳고, 아니 낳지 않으려고도 했다. 같이 죽어버릴까 생각했으니까. 내 심정을 이해하며, 법륜 스님이 어떻게 30년을 걸망하나만 갖고 수행한 아니 업보까지 짊어졌었지. 일운 스님 을 이해해. 그게 정말 이해가 되니?
[광렬] 일운 스님이 고행해요? 그런 걸 고행이라면 길가는 어린아이도 하죠. 어머니는 신문도 보지 않으세요? (광렬, 카피한 신문을 던져 보인다.) 왜 저를 가졌을 때 같이---
[어머니] (카피한 종이를 보며) 이런 분은 아니다. 이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알잖니.
[광렬] 제가 어떻게요. 또 어디서 저도 어머니도 모르는 어떤 자식을 두었는지.
[어머니] 광렬아.
[아버지] (문을 확 열며) 이놈, 광렬아.
(암전)
무대의 한쪽 끝에 주지승과 수사관 서있다. 옆 무대는 만화와 법륜이 앉아 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 들린다.
[수사관] 여러 가지로 고맙습니다. 주지스님.
[주지] 별 말씀을--- 하옇튼 너무 심려 마시오.
[수사관] 어쨌든 상부에서는 주지스님의 넓은 이해력과 뛰어난 판별력을 크게 믿고 있습니다.
[주지] 판별력이란 게 뭐 있겠소. 어쨌든 우리 정부의 방침인데 내 애써 보리다.
[수사관] 정부에서도 이번 일 오래오래 기억할 겁니다.
[주지] 허허허. 그래 주시면 나론선 고맙죠. 그리고 막말로 시국이 이래 어지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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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우리라도 조용해야 않겠소. 저 시끄러운 세상 버리려고 출가한 사람들인데 승려대회라뇨. 당치 않죠.
[수사관] 맞습니다. 스님들이야 기도 열심히 하시면 존경받죠.
[주지] 존경? 그렇죠. 존경받지 못하는 성직자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요. 헌데 당신들 10. 27 법난 문제는 좀 심했소.
[수사관] 법난 문제는 저희들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나 그때는.
[주지] 그때는.
[수사관] 나라가 너무나, 너무나 어지러울 때 였습니다. (귀에 대고) 주지스님. 불교를 말하면 언제나 이 나라가 어지러울 때 자비의 종교이자 호국불교 아니었습니까?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셔야죠.
[주지] 자비의 종교에 호국불교라. 좋은 말이오. 그렇지. 그건 그렇고 저번에 얘기 한거.
[수사관] 무슨 얘기---
[주지] 어허 벌써 잊으셨다. 그래서 신뢰가 쌓이겠소.
[수사관] 제가 너무 공무에 바쁘다 보니.
[주지] 일운의 처와 자식이 있다는 얘긴 분명하죠. 곧 법륜이 일운의 49제날 승려대회 문제로 만화스님을 뵈로 와있을 텐데.
[수사관] 아 그 말씀. 분명한 얘깁니다. 저희들을 믿으셔야죠. 왜냐, 정부란 공신력. 즉 국민들한테 절대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주지] 공신력. 그렇지. (잠시 생각하며) 일운, 그 양반. 살아 생전에 혼자 고상한 척 했지.
[수사관] (귀에다 대고) 뒤로는 자식을 두고 살았다니까요. 제가 처자식들의 주민등 록번호도 가지고 있습니다. 자료 삼아 드릴까요? 드릴까요?
[주지] (받을 둣 말듯 하다가) 괜찮소. 정부의 일인데 믿으리다.
[수사관] 그런 스님을 추모하는 승려대회라뇨. 말도 되지 않죠. 주지스님, (큰소리로) 정부는 그런 문제를 너무나 너무나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해서 제가 이렇게---
[주지] (수사관의 입을 막으며) 어허. 누가 듣겠소. 내 귀 안 먹었소.
[수사관] 죄송합니다. 너무나 공무에 열중하다 보니.
[주지] 그리고 내 부탁---
[수사관] 부탁. 걱정마시라니깐. 어른의 부탁을 주지스님이 이렇게 애쓰시는데 어른께서 가만 계시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올라가서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노프라블람.
[주지] 노 프로블람. 믿어도 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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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관] 주지스님. (근엄하게) 섭섭합니다. 이 인간 믿어 보십시요.
[주지] 허허허. 그럼 내 믿으리다. 승려 대회건은 너무 걱정 마시오.
[수사관] (주지의 귀에 대고) 믿겠습니다.
[주지] 내 상부에 얘기할 기회 있으면 잘 말씀드리겠소. 훌륭한 공직자라고.
[수사관] (가벼운 차렷 자세) 감사합니다.
[주지] 그럼 공무에 바쁘실텐데 내 연락 드리리다. (합장인사하며 돌아서 간다.)
[수사관] (혼자 독백으로) 공무에 바쁘다. 훌륭한 공직자는 항상 공무에 앞뒤 가릴 것 없이 바쁘지 않겠습니까?
돌아서서 옆 무대로 옮기고 조명이 옆 무대를 비치면 만화와 법륜 앉아 있다.
[만화] (들어오는 주지 승을 보며) 어서 오시죠.
(법륜도 일어나 합장한다.)
[법륜] 그간 잘 계셨습니까? 자주 찾아 뵈야 하는 것을
[만화] 무슨 말씀을. 앉으시죠. (주지 앉고 법륜에게도 앉으라고 얘기한다.)
[법륜,주지] 예.
[만화] (둘을 잠시 보다가) 잘 아시겠지만 요번 승려 대회건 때문에 두 분의 도움이 절실해서.
[주지] 저희들이 무슨 (법륜을 보며) 법륜 스님이 잘 하시겠죠.
[만화] 법륜에게만 맡길 일이 아니라---
[주지]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요번 일운당의 백일제를 조용히 치뤘으면 싶습니다만
[법륜] 아니, 주지스님. 무슨 말씀을
[주지] (법륜을 보며) 일운당의--- 별로 자랑할 일도 내세울 일도 아닌 듯 하고.
[법륜] 자랑하고자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있는 사실을 알리자는 것인데.
[만화] 왜들 이러시나. 그리고 (주지를 보며) 일운당의 삶은 주지스님도 잘 알지 않소. 우리 승가의 사표였소.
[주지] 제가 알기론--- 당시 신문 발표에도 있었지만 풍문엔---
[만화] 풍문이라니
[주지] 이십 여년 간 숨겨놓은 처와 자식이 있었답니다.
[만화] 잘 알고 있습니다. 일운당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습죠.
[주지] 근데 그게---
[법륜] (만화를 보며) 큰스님. (주지를 보며) 있습니다. 자식 있습니다.
[주지] (약간 의아해 하며) 법륜 스님도 알고 있었군요.
[만화] 법륜아, 무슨 얘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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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큰스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런 속에선 모든 것이 무의미합니다. 사실을 얘기해야 합니다.
[만화] 그 사실은 내가 가장 잘 안다.
[주지] 전국의 스님들이 이런 사실을 알면 모이겠습니까? 그리고 정부에서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 막말로 출가한 우리들이야 그저 열심히, 가람 수호하고 정진하면 될 일이지.
[만화] 그렇죠. 정말 열심히 하면 돼죠.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전에는. 이젠 아닙니다.
[주지] 아니라뇨. 큰스님. 수행가풍에 흠이 될까 심려됩니다.
[법륜] 주지스님이 어려우시다면 저희 젊은 사람들만이라도 승려대회를 열까합니다.
[주지] 글쎄, 얼마나 모일려나.
[법륜] 단 몇 사람만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저희 스님에 대한 저의 도리이고. 불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지] 그럴 수 있겠지. 하나뿐인 상좌 님이니까. 그렇지만 불교를 위하는 일은 아니요. 뭣 하러 정부와 부딪친단 말입니까? 이길 수 있을 것 같소?
[법륜] 싸워서 이길 생각 없습니다. 그건 저희 스님의 뜻도 아니고. 다만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지] 진실? 무엇이 진실이란 말이오. 자식을 두고 은처한 일운당의 무엇이.
[만화] 주지스님. (주지를 근엄하게 본다.)
[주지] (약간 움찔하며) 예.
[만화] 나는 믿소?
[주지] 큰스님이야 모두들 존경하는---
[만화] 내 이 손으로 입산하러온 일운당의 무명초를 잘랐소. 오래 전이요. (사이) 나는 일운당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생활을 얘기하지 않는 건 남아있는 그의 인연자 들에게 혹 고통이 따를까 염려되어소이다. 그는 금강계단에 맹세코 사문의 도리를 지킨 사람이라고.
[주지] (머뭇거리며 거부한다.) 그래도---
[법륜] 큰스님. 저희들만이라도 하겠습니다.
[만화] 이놈. 다 일불의 제자들이다. 타의에 의해선 찢겨져도 안으로는 안돼. 무릎을 꿇고서라도 이해시키도록 해야된다. 어찌 젊은 혈기로만 일을 판단하느냐. (주지를 보며) 주지스님, 권력이 무서운 거요, 좋은 것이요?
[주지] 그런 것이 아니고---
[만화] 그냥 사실을 사실만을 얘기하겠다는 것이 저 젊은 스님들의 뜻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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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 그게--- 정부에서 몹시 싫어할 것 같습니다. 뒤 책임이 염려되기도 하고.
[만화] 허허허. 주지스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다. 우리 이 머리, 부모한테 받아 기른 머리를 왜 깎었습니까?
[주지] 무명초라. 무명을 기르는 업장의 풀이라서 자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화] 무명초라. 그렇죠. 그걸 자르면 원래의 두상, 각자의 머리 모양이 나옵니다. 수많은 머리털이 얽혀 있는 것은 인연이 얽혀 있는 것과 같으면 본래의 두상은 진실입니다. 저 젊은 스님들이 진실만을 얘기하겠다는 데 도와드립시다. 누가 무엇을 책임질 일이 있겠소. 그냥 진실을 얘기하자는 데.
[주지] 저한테 좀더 시간을.
[만화] 그러하시죠.
(주지, 자리에서 합장하며 물러난다.)
[법륜] (나가는 주지를 바라보고선) 큰스님. 믿을 수 없는 분입니다.
[만화] 너만이 진실이다라고 하지 마라. 그건 우격다짐이지 진실이 아니야. 법은 그런 게 아니다. 부처만 있는 곳에 진실이 무에 필요하겠느냐. 법륜아. 이곳은 사바다. 정확히 알고도 무르녹아야 인연의 숲을 지나갈 수 있는 게야. 인연의 숲을---
(암전)
무대는 광렬의 집이다. 미영이 소파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아버지] 이 풍진 세상을 큭, 살으니 나의 희망이 무엇 이뇨. (집 거실로 들어온다.)
[미영] 아버님.
[아버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응.
[미영] 약주를 많이 하셨어요?
[아버지] 아니, 쬐끔. (주위를 훑어보며) 내 마누라는. 내 아들 광렬이는.
[미영] 예, 어머니는 연희동 삼촌댁에 급히 전화 받고 나가셨고 광렬씨는 좀 늦을 건가 봐요. 저와 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아버지] 자비원, 좋구나. 저마다 죽은 혼령에 개구리 튀듯 튀니.
[미영] (황망한 듯) 아버님. (다가서서) 이쪽으로 앉으세요.
[아버지] (미영이를 쳐다보며) 이 놈이 내 며느리가 될까? 광렬이 이놈.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아니야, 너 광렬이에게 시집오지 마라. 그 놈은 역마살이 끼었어.
[미영] 알고 있어요. 시집은 가지 않고 며느리만 될께요.
[아버지] 시집은 안 오고 며느리만 된다고. 하하하, 귀여운 놈 (미영의 손을 잡는다. 잠시 있다가 울먹인다.) 아가, 나 오늘 옛 학도병 친구놈들 만나 화풀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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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왔다. 나도 화낼 수 있어.
[미영] 어떻게요.
[아버지] 군이이면 휴전선이나 잘 지키라고. 윽, 왜 도 닦는 스님들 잡아다--- 내 꼴을 봐라.
[미영] 아버님.
[아버지] 술상을 엎어버리고 왔다.
[미영] 다치신데는 없으세요?
[아버지] (손을 저으며) 전에 만화스님이 그러셨지. "땅으로 인하여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나야 한다"고. 근데 나는, 엎어져 있는 나는 어떻게 일어나기가 너무 힘이 드는구나.
[미영] 아버님, 30년 가까이 잘 지내 오셨잖아요.
[아버지] 그래, 너 어머니, 내 아들 광렬이 셋이서 잘 지내왔지.
[미영] 얼마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아버지] 이제 아니야, 이 집 식구 모두 일운의 혼령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집사람이 얘기할 때 내가 말렸어야 했어. 광렬이에게 얘기할 필요가 없었던 일이야.
[미영] (어머니를 보고 놀라며) 어머니.
(어머니 휘청인다.)
[미영] (놀라서 뛰어가며) 어머니, 왜 그러세요. (어머니를 부축한다.)
[아버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여보, 왜 그래?
[미영] (아버지에게) 아버님, 그냥 계셔요. 제가 (어머니를 부축하며 의자에 앉힌다.)
[어머니] 물, 미영아 물 좀 다오.
[미영] (황급히) 예, 어머니. (물을 가져온다.)
(어머니, 물을 들이키고)
[아버지] 여보, 무슨 일로
[어머니] (자조섞인 힘 빠진 목소리로) 당신 또 술이예요?
[아버지] 쬐끔 했어요. 연희 동엔 무슨 일로?
[어머니] 삼촌이 뵙자고 연락이 와서--- 정임이 혼사 건인 줄 알고 갔었어요. 근데, (갑자기 큰 소리로) 다 내 탓이예요. (미영과 아버지 놀랜다.)
[미영]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낮은 목소리로) 그게 다 내 탓이야. 삼촌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어. 그 분이 없었으면 벌써 우리 집안은 풍지 박살이 었을 거야.
[아버지] 그건 그래요. 광렬이 데모하다 끌려갔을 때도 걔가 힘을 썼지. 또 옛날에 먹고살기 힘들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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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어머니 연희 동에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요?
[어머니] 무슨 얘기를 했냐고? 점잖으신 분인데 너무 놀랬다. 삼촌이 그렇게 험 말씀을 하시는 걸 처음 봤어요.
[미영] 어머니.
[어머니] 미영아, 너 무슨 일인지 아니? 진상규명이라니.
[미영]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날, 백 일째 되는 날 불교계에서 일운 스님에 대한 진상규명을 하고 정부에 항의를---
[어머니] 글쎄, 그게 뭐란 말이야?
[미영] 일운 스님이 10. 27 법난때 두 가지 죄목으로 고문을 당했는데 한가지는 지금의 자비원에 관계 된 땅 투기라는 모함이었고, 하나는 어머님과 광렬씨 문제였어요.
[어머니] 광렬이와 내 문제라니.
[미영] 일운 스님이 은처를 했다는 거예요.
[아버지] 은처라니, 처자식이 있었단 말이야?
[미영] 그게 아니라 어머님과 광렬씨가---
[아버지] 무슨 얘기야. 내가 버젓이 있는데. 그리고 광렬이는 내 자식이야.
[미영] 당시에 그들이 일운 스님을 협박하면서 그렇게 기사도 써서 발표했어요. 불교계에서는 그 진실을 지금 밝히려고 하고.
[어머니] 그게 그게 무슨 얘기냐? 내 업보다.
[미영] 아마 서로 자신들의 주장을 확실히 하기 위해 어쩌면 집안이---
[아버지] 그 사실을 내가 잘 알아. 왜 그분이 은처 승이야.
[미영] 아버님이 가장 확실한 증언자이실 거예요.
[어머니] 안돼, 여보. 삼촌의 말씀이 이것 때문이었어요. 무엇을 밝히겠단 말이예요.
[아버지] (놀래며) 당신이 하지 마라면 안하죠.
[어머니] 넌 (미영을 보며) 네 생각은 어떠니?
[미영] 진실이 중요하다 생각해요. 작은 진실을 덮어두려다가 지금 보다 더 큰 인연에 안좋게 휩쓸릴 수가 있어요.
[어머니] 더 큰 인연? 어떻게 이런 일이. 이 때까지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데 또 이런--- 일이 (쓰러진다.)
[미영] 어머니.
[아버지] 여보, 여보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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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거실이다. 아버지는 초췌한 모습으로 담배를 물고 있다. 미영과 광렬, 힘이 겨운 모습으로 들어온다.
[아버지] (둘을 보며) 그래, 병원에서 뭐래?
[광렬] 충격 때문이래요.
[미영] 걱정 마세요, 아버님. 며칠 쉬면 괜찮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아버지] 며칠씩이나? (걱정스럽게) 며칠 후며 확실히 괜찮은 거야?
[미영] 예. 아버님
(아버지, 거실은 걸으며 안절부절 한다.)
[광렬] 아버지.
[아버지] 왜?
[광렬] 대체 왜 그러세요?
[아버지] 내가 어때서. 너 어머니 매일 늦게 와도 며칠간 집 비운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미영] 걱정 마세요. 아버님. 제가 틈틈이 들리고 며칠간이니까 제가 못오면 파출부 아주머니 오시라고 할께요.
[아버지] 응, 그래 그래. 너 집에 얘기하고 와 있으려므나. 내가 집에 전화해주련
(전화기를 황급히 잡으려고 한다.)
[광렬] 아버지, (전화기를 뺏으며) 미영이 안와 있어도 돼요. 제가 며칠 정도는 아버지 식사 챙길 수 있습니다.
[아버지] 니가 어떻게
[광렬] 걱정 마세요.
[아버지] 그래도 미영이가 있는 게.
[미영] 제가 있을께요.
[광렬] (화를 내며) 아버지, 대체 왜 이러세요. 어머니 며칠 안 계신다고.
[아버지] (놀래 두려운 표정으로) 난--- 난--- 광렬아 애미가 없으면 불안해. 너 알잖니. 니 엄마 잔소리하고 대가 쎄기는 해도 이 애비 이나마라도 니 에미 없으면 살기 힘들었다는 걸.
[광렬] (아버지 손을 당기며) 아버지.
[아버지] 너 처음 봤을 때 세 살 박이었는데 이제 이렇게 이 애비 보다 크니.
[광렬] 죄송해요. 하나뿐인 자식인데 도리도 못하고. 이제 아버지도 하고 싶은 말 다 하시고 저랑 어머니한테도 큰소리 치고 사세요.
[아버지] 아니다. 이 애비는 그냥 이대로 좋다. 정말이다. 그저 니 어머니한테 미안하고 또 네가 자랑스러워. 전쟁통에 뒤틀린 삶이지만 네 애미, 아니요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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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광렬이 너까지 힘들게 하는 걸보고 일운 스님에게 크게 고함 지르고 싶었어. 왜 우리를 힘들게 하냐고. 하지만 하지 못했다. 그분은 수행자야. 나한테 욕 얻어먹고 살 그런 분이 아니었어. 이내 힘이 빠져버렸지.
[미영] 아버님, 잘 하셨어요.
[아버지] 나, 초라해 보이지.
[미영] 전 아버님이 좋아요. 약주 많이 하실 때 외에는 요. (아버지에게 다가선다.) 제가 있잖아요.
[아버지] 그래, 그래. (미영의 어깨를 보듬는다.)
[광렬] 아버지. (같이 보듬는다.)
무대의 한쪽에서 법륜, 빨래 거리가 들은 통을 들고 나오다가 자비원을 들어서는 광렬과 마주친다.
[광렬] (법륜을 보고) 이곳이 자비원---
[법륜] 누구신지?
[광렬] 일전에 뵌것 같습니다.
[법륜] (생각이 나는 듯) 성함이--- 광렬씨.
[광렬] 네, 박광렬이라고 합니다. 법륜 스님이시죠.
[법륜] 녜.
[광렬]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 보단 깨끝한 것 같습니다.
[법륜] 원래 은사스님 성품이 그렇습니다.
[광렬] (말을 돌리며 빨래 통을 보며) 옷 같은데 무슨 빨래가---
[법륜] 많습니까? 이 정도 양은 하루 서너번 이 정도 양은은 빨아야 합니다. 살아 생전에 은사스님이 하신 몫이었는데 (광렬을 보며) 헌데, 많이 닮으셨군요.
[광렬] 누구를 요? 일운 스님을요? 전 뵌 적도 없는 분입니다.
[법륜] 만난 적이 없는 혈연의 인연입니까? 이것도 인연이죠. 길은 같이 걸어도 기억나지 않을 우리들도 이렇게 묘한 인연으로 자리하지 않습니까? 한사람은 출가하기 전에 낳은 자식, 한사람은 출가해서 거둔 상좌. 전에 은사 스님으로부터 광렬씨 얘기를 듣고 언젠가 한번쯤 만나 봤으면 싶었습니다.
[광렬] 저를 요?
[법륜] 우스개 소리 같지만 스님의 젊은 모습을 보고 싶어서요. (주위를 가리키며) 자비원 보이시죠. 건물, 저 갈, 저 밭, 너무 단정하죠. 잘 가꾼 화단 같은. 제게 있어 은사스님은 저런 잘 정돈된 어른이었습니다. 틈이 없고 그래서 어려웠는데.
[광렬] 단정하고 틈이 없는 분이라고 여? 제가 아는 일운 스님과 너무 다른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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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법륜] 하하, 제겐 솔바람 같은 분이셨습니다.
[광렬] 허허, 솔바람 같다고요? 스님이 느끼는 솔바람과 제가 아는 솔바람이 다른가 보죠.
[법륜] (의아해 하며) 무슨 말씀을---
(말이 끝나기 전 일기장을 건넨다.)
[광렬] 받으시죠.
[법륜] 제가 어머님께 드린 일기장 같은데
[광렬] 저희 집엔 별로 필요 없는 물건 같아서요.
[법륜] 그건 어머니께 드린 물건인테 왜 광렬씨가
[광렬] 어머님께 자비원과 저희 어머니의 인연을 끊고 싶다며 이 일기장을 드렸다고요. 제가 끊어 드렸으면 해서요.
[법륜] 죄송합니다. 그 일은 돌아와 생각하니 제가 너무 경솔했던 일 같아---
[광렬] 아뇨. 경솔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으니까요.
[법륜] 그일 때문이라면 제가 사과 드리겠습니다.
[광렬] 출가하신 분들이 너무 감상적이지 않습니까? 무책임한 것 같기도 하고.
[법륜] 무책임 하다뇨.
[광렬] 이런 일기장을 주고받으며 왜 저희 어머니를 괴롭히시는 겁니까? 하실 얘기가 있으면 일운 스님이 직접하실 일이지. 법륜 스님께서 왜 전해주시는 겁니까?
[법륜] 말씀이 좀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광렬] 저희 집. 이 일이 있기 전까지 자랑할 만큼 행복하진 않았지만 큰 어려움 없이 지내 왔던 가정이었습니다. 근데 난데없이 일운 스님이 나타나 저도 어머니도 그리고 착하디 착한 아버님도 모두 곤욕입니다. 말씀이 지나치시다고요? 은사스님, 법륜 스님에게는 솔바람 같은 분인지 모르나 저희들에게 아닙니다. 그런 무책임한 과거를 가진 분이 왜 돌아 가시면서까지 우리를 괴롭히시는 겁니까?
[법륜] 무책임한 분 아닙니다.
[광렬] (조소하듯) 무책임한 분이 아니라고요?
[법륜] 그렇게 조소하듯 말하지 마십시요. 돌아가신 분입니다.
[광렬] 돌아가신 분. 돌아가시지 않고 지금 이 앞에서 제 얘기를 들었으면 싶습니다. 닮았다고?왜 제가 일운 스님을. 그분이 지금 이 앞에 있다면---
[법륜] (말을 가로채듯) 이유는 다르겠지만 은사스님, 광렬씨가 생각하는 그런 분 아닙니다. 무책임한 분도 아니고요.
[광렬] 무책임한 분이 아니라고요? 스님은 태어나 처음 본 자신의 아버지가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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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못한 어느 절의 법당에 안치된 초상화였던 사람의 심정을 아십니까? 저희 어머니. 무슨 잘못을 저절렀길래 이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겁니까?
[법륜] 힘드시겠죠. 하지만 너무 광렬씨의 감정만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광렬] 그렇게 말씀하시는 법륜 스님은 왜 저희 어머니에게 인연을 끊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그런건 자신의 감정이 아니고 대비심 입니까?
[법륜] 당신이 은사스님의 아들이라면 나도 당산과 같은 아들입니다. 나도 광렬씨에게 아니 어머니한테 억하심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광렬] 억하심정?
[법륜] 우리 스님이 왜 그 고문을 당했으며, 왜 돌아가셨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입니까?
[광렬] 부패한 승려였으니까? 아니 불가에서 얘기하는 과보 아닙니까?
[법륜] 부패한 승려. 누가. 은사스님은 당신의 아버지입니다.
[광렬] 제가 아는 일운 스님은 그런 분입니다.
[법륜] 누가 그런 얘기를---
[광렬] 온 천하가 다아는 일입니다. 솔바람 같다고요?
[법륜] 당신이--- 그분의 친아들이라고--- ?
[광렬] 제 운명이니까 이해하죠. 하지만 받아들이진 않을 겁니다.
[법륜] 당신은 그렇게 얘기하면 안돼. 광렬씨의 아버지이고 나의 은사스님이요.
[광렬] 맹신하시는 군요.
[법륜] 맹신? 맹신이라고? (광렬이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는다.) 당신이 뭘 알아, 이이---
[광렬] 그 스승에 그 제자입니까?
[법륜] 당신은 그렇게 얘기하면 안돼. 우리 스님이, 이 자비원의 원생들을 두고 어떻게 어떻게 돌아가셨는데.
[광렬] 어서 치시죠.
[법륜] (울분을 참지 못하듯 광렬을 밀쳐내고 광렬, 엉덩방아를 찧고 앉는다.) 이런 자식을 두고 그 수모를 감당하시다니.
[광렬]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법륜] 함부로? 당신이야말로 함부로 얘기하면 안돼. 우리 스님이 당신 때문에 죽음을 당했는데 스님을 또 죽이러 이 곳에 왔단 말이오?
[광렬] 내가 왜 일운 스님을 죽인단 말이오. 태어나 본적도 없는.
[법륜] 인연이구만, 참 형편없는 인연이구만.
[광렬] 말을 돌리지 마십시요.
[법륜] 그래, 얘기해 주지. 얘기해 주고 말고.
(서서히 조명 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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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한쪽, 고문실이 나타난다. 가학적 호모성의 수사관이 있고 일운스님 군복으로 갈아입고 의자에 초췌한 듯 앉아 있다.
[수사관] 호호호, 훈련병 같구만. 군복이 너무 잘 어울려.
[일운] 무지한 것들.
[수사관] 무지해 내가 나 안 무지해. 고등학교도 나왔어.
[일운] 이제 조사할 것은 모두 했잖소.
[수사관] 역정내지마. 당신한테 불만이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일운] 탐욕스러운 것들.
[수사관] 세상에 적이 많으면 곤란하지.
[일운] 권력은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오?
[수사관] 국가시책이야, 관광 특구를 만들래는.
[일운] 별장과 골프장은 지을 수 있으면서 왜 자비원은 짓지 못한다는 거요.
[수사관] 좋지. 자비원이야 많을수록 좋지. 국가의 복지 사업비가 적게 드니까. 하지만 거긴 안돼.
[일운] 난 부처님께 서운했소.
[수사관] 부처? 히히히. 부처는 없어. 여긴 너와 나. 그리고 이 물 방망이만 있지.
(방망이를 들고 내리친다.)
[일운] 으악
[수사관] 난 이 직업이 너무 좋아. (일운의 귀에 대고) 난 잘리기 싫어.
[일운] 그 땅은 내 땅이 아니야. 시주자의 땅이고 이 사회에 버림받고 홀로홀로 생존하기 힘든 사람들의 땅이야.
[수사관] 값을 준다니까? 돈, 돈이 좋지 않아? 이 진술서에 싸인만 해.
(일운, 진술서를 들고 찢어 버린다.)
[수사관] 호호, 아직 기개가 살았구만. 그럼 안돼지. (몽둥이를 후리 친다.)
[일운] 으악, 악
[수사관] (일운의 얼굴을 들며) 너무 고상한 척마. 이까짓 진술서 필요 없어. 당신 꼭 손을 봐야겠다는 분이 좋은 정보를 가져왔어. (종이를 가져오며) 아주 좋은 정보야. 중이 아들이 있구먼. 이름이 광렬이라.
[일운] 그게 무슨 얘기야?
[수사관] 비구승이 자식이 있으면 체탈도첩이지. 쉽게 말해 승복을 벗어야지.
[일운] 왜 수 십 년이 지난 얘기를.
[수사관] 우린 상관없어. (종이를 내보이며) 이곳에 포기 각서를 써. 그러지 않으면 내일 석간에 당신의 기사가 실릴 거야. 타락한 한국불교, 자비원 원장 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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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은 자식이 있다. 아마 국민들이 좋아할걸? 왜, 자기 일이 아니니까. 명분 내세우면 모두들 좋아하지. 왜? 그럴듯하니까.
[일운] 개만도 못한. 절대로 자비원을 포기하지 못해.
[수사관] 과연 그럴까? (괴이 스러운 웃음) 이 튼튼한 몸 (몸을 쓰다듬는다.) 다치면도 닦는데 지장 있지.
[일운] 헉--- 으으 (낮은 목소리로) 참회진언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못자---
[수사관] 무슨 얘기야, 염불이야?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해달라고? (몽둥이로 때린다.)
[일운] 으악--- 악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의자에 광렬, 정신을 잃고 앉아 있다. 취조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는 상징적이다. 약간 호모 성이 있다.
[광렬] (물수건으로 얼굴을 덮혀 있다.) 으--- 제발, 그만
[수사관] 이 새끼가 독재타도 지랄하는구만. 왜 공장에 가서 공돌이들 앉혀 놓고 떠들어. 왜 장군가 북인가 치는 것 가르치며 쓸데없는 짓 해. 니들 민족 통일에 대해 고민한다고. 니들만 통일 원해? 나도 원해. 나도 어릴 때 피난온 이산가족이야. 니들이 전쟁이 뭔지 알아? 빨갱이가 뭔지 알아? 타도 군사정권. 나 군인 아니야. 경찰이야. 하지만 니들같이 책상머리 위에서 공상하는 놈들 니들이 나라 운영할 수 있어? 못해. 대학교수, 다 대통령 해봐. 이 나라 선진국 될 것 같아? 강력한 리더쉽 (차렷 자세를 한다.) 탁상공론 아닌 실천할 수 있는 힘. 지금 이나라는 그런 힘이, 파워가 필요한 거야. (광렬의 목을 한 손으로 조이며) 불어. 견딜 수 있을 것 같나. 내 이 짓으로 너같이 척하는 놈 여러 골병 들게 했지. 니들 선배, 빨갱이, 신부, 목사, 중들도. 불지 않으면 병신될 수도 있어. 3년 전쯤 일이던가? 웬 중 하나는 잘난척하다 장이 터져 이곳을 나갔지--- 히히히, 잘난 척 마. 난 정말 싫어.
[광렬] (공포에 질린 듯) 잘난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사관] 까불지마. 니만 이 나라 걱정하냐. 나도 나도 해. 정말해. 나도 20년 공직 생활에 아직 전셋 방이야. 니들이 뭘 알아. (암전 되며 구타하는 소리)
[광렬] 으악. 얘기하겠습니다. 78학번 김진수, 79학번 박병곤---
[수사관] 그렇지, 그렇지. 너희들은 모조리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어. 니들이 아는 것 보단 훨씬 더 무섭지. 힘있는 정부, 파워 있는 리더쉽. 그건 바로 위대한 정부야. 알겠나? 히히히--- 하하하
[광렬] (고문복장으로 서있는 채) 나는 패배자가 되었죠. 학우들을 배반하고---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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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정신병자와 같은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온 후 나는 친구들과 선배, 그리고 후배들로부터 받아들이기 힘든 눈초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배신자로 몰았고 독재정권은 나를 요주의 운동권으로 이 사회와 격리시키려 했습니다. 그때 제가 돌아 갈곳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는 집뿐이었습니다. 근데 이상한 일이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고문으로 피폐해진 몸으로 집으로 돌아온 저를 본 어머니는 무슨 충격에선지 생업도 포기한 채 앓아 드러누웠습니다. 외려 아버지와 제가 간호를 했죠. 저의 기억 속에 든든하고 강하게만 느껴진 어머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85년 나와 우리집안의 초상화였죠.
[법륜]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죠. 그런 완벽하지 못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이 사회도 결국 통째 어그러져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모순 속에서도 역악하여 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도 하죠. 모순 속의 영악, 모순 속의 조화. 오래 전에 인간에게 있어 힘은 종교에서 나왔죠. 그 힘은 오랫동안 지속되다가 영악해진 인간이 새로운 힘을 만들고 그 이름을 권력이라 했습니다. 그 후 종교와 권력은 우리의 어려움을 지킨다는 명분에 열심이었습니다. 우린 많은 혜택을 입었죠. 하지만 우린 그 가운데서 본이든 타의든 적지 않은 피해도 입긴 했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을 건 전쟁이 계속되기도 하고 권력을 빙자하여 수많은 인류를 곤혹스럽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종교는 끊임없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왜냐고요?우리 각자의 마음 깊은 데서부터 목말라 하는 갈애 때문이죠. 욕망과 힘의 갈애 때문에 권력이, 불확실한 삶에 대한 의지 처 같애 때문에 종교가.
[법륜] 한 달간의 고문이었죠.
[광렬] 왜 출가하기 전의 일이라고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법륜] 그들에겐 필요 없는 일이오. 진실과 거짓이 오직 그들에게만 존재하던 시절
이지요.
[광렬] 그들이 필요한 것이 이 자비원이라면 포기해도 되잖습니까?
[법륜]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 했었죠. 자비원이 문제라고. 그래서 이곳의 문을 닫을 생각이었습니다.
[광렬] 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법륜] 은사스님이 말렸습니다.
[광렬] 왜 말렸습니까? 그 분이 아니라도 이 땅엔 많은 복지시설이 있습니다. 왜 그 분이 모든 짐을 지실려고 하셨나요?
[법륜] 짐을 졌다? 아닐 겝니다. 출가한 승려는 깨달음의 정진만도 더 할 수 없는 큰 짐인데 또 짐을 지다뇨. 그저 더불어 산다는 것이 맞는 말이겠죠.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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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니 은사스님은 대소변도 받아내야 하는 이 원생들을 얘기하며 한번도 불쌍하다고 말씀도 하신 적이 없었던 기억입니다. 다만 인연의 과보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셨죠.
[광렬] 이 자비원은 포기하지 않은 이유가 그럼 무엇이란 말입니까? 저 때문입니까? 사생아로 낳은 자식에 대한 참회심 때문입니까?
[법륜] 처음 잠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어죠. 허나 그것도 아닐 겁니다.
[광렬] 그럼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법륜] 그건 은사스님과 관계없는 일입니다. (사이) 바로 권력의 속성 때문입니다.
[광렬] 권력의 속성?
[법륜] 애초에 이 자비원이 문제가 된 것은 한 두 사람의 물질적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헌데 그것이 권력으로 옮겨졌을 때 이 자비원과 은사스님의 문제는 자연의 생명을 잃고 동물원에 구속되어 보여지는 동물원의 그 무엇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힘을 과시하고 정당화하는데 명분 좋은 소모품을 찾은 것입니다. 은사스님은 그들의 소모품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광렬] 그 사실을 알고도 가만 계셨단 말입니까?
[법륜] 처음엔 몰랐죠. 그들의 속성을.
[광렬] 겁이 나신건 아니고요.
[법륜] 부끄럽지만 그랬습니다. 겁도 났었죠.
[광렬] 그것이 출가자의 말씀입니까?
[법륜] 아니겠죠.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이 사실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어머니와의 인연을 끊을려고 했던 것은 또 다른 피해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광렬] 이해가 갑니다. (조용히 읊는다.) 어머니--- 젊은 시절 한 남녀의 사랑얘기가 이 긴 세월의 인연 속에 이렇게 엄망인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법륜] 중중법계. 얽히고 얽힌 세계. 사바란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누구도 쉽게 얘기 할 수 없는.
[광렬] (조용히 읊조린다.) 일운 스님--- 저의 고통만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분도 힘드셨죠.
[법륜] 힘드셔도 담담히 받아 들였을 겝니다.
[광렬] 담담히 받으셨다고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광렬 손에든 일기장을 보며 손으로 매만져 본다.)
[법륜] 일기장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을 겝니다. 제게도 있죠. 간혹 원생들을 깨우고 난 뒤 텅빈 바에서 하나뿐인 스님의 유품, 그 일기장을 만지노라면 스님은 늘 상 제게 있습니다. 언제나 단아하고 담담한 모습으로.
[광렬] (일기장을 만지며) 단아하고 담담 하셨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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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녜, 그런 분입니다. 제게 있어선 언제나 무대는 만화스님의 방이다. 적당한 곳, 어머니는 방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
[만화] 어떻게 왔다고?
[광렬] 일운 스님을, 아니 아버지를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만화] 나와는 세납으로 열 두어살 차이가 났지만 좋은 도반이었지.
[광렬] 큰스님에겐 좋은 도반이었는지 모르나 저에겐 좋은 아버님이 아니었습니다.
[만화] 너는 일운을 몰랐을 때도 그냥 살아왔어. 따질 것이 못돼.
[광렬]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화] 허면, (광렬을 쏘아본다.) 일운은 너에게 있어 아버지이고 내게 있어 둘도 없는 도반이지. 그와 같이 모든 사물에 있어 저마다의 의미일 수가 있어. 그런 일운을 어떻게 일러달라는 게야.
[광렬] 스님께서는 그런 둘도 없는 도반을 권력의 모함에 죽게 놔 두셨단 말입니까?
[만화] 당시 나는 많은 사람들한테 얘기했었지. 불교계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이 가장 좋다고. 허나 그들은 기다려주지 않았어. 그들한텐 긴 우주의 인연 과보가 필요 없었네. 바로 오늘과 내일이 필요했을 뿐이야.
[공렬] (조소하듯) 그런 태평스런 얘기로 어떻게 저들을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만화] 그럼 그들처럼 싸울까? (사이) 그럴 수도 있겠지. 모든 것이 엉망인 세상이니.
[광렬] 그럼 그렇게 하셔야죠.
[만화] 재미있는 조언이구나. (사이 음악 들어간다.) 밖을 한번 쳐다보거라. 화단 아래 무엇이 보이느냐.
[광렬] 예. 국화입니다.
[만화] 걔나리나 진달래는 아니고?
[광렬] 그건 봄에 피는 꽃입니다.
[만화] 그래, 그럼 저 국화는 저 곳에서 가을에만 핀다는 것이냐?
[광렬] 그렇습니다.
[만화] 일운은 그런 도반이었다. 그는 저 국화가 봄여름에 피지 않듯이 이 가을에 피었다가 이 가을에 지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너와의 관계도 그런 의미에서 일게다. 거부했었고, 거부할 수 있었던 일을 인과의 혜안자 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게다.
[광렬] 그건 패배자의 행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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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저 국화가 마음에 들라고 너는 사시사철 저 화단에 국화꽃을 가꾸려고 하느냐. 그건 너의 욕망일 뿐이야. 일운을 죽게 한 그 무엇들이 있다면 그건 욕망 때문 일게다.
[광렬] 그들은 악한 욕망입니다.
[만화] 선해야지. 하지만 그것도 욕망이야. 일운은 욕망을 따르는 사문이 아니야. 그는 인과를 겸손히 따르는 사문이야.
[광렬] 하면 일운 스님의 억울한 죽음을 스님 스스로 택하셨다는 말씀인가요?
[만화] 일운은 그러했을 수 있는 분이야.
[광렬] 어떻게 그런 모함을 받고
[만화] 오랜 세월 너의 고뇌는 너의 업이자 일운당의 업으로 남아 있을 게다. 일운은 너에 대한 인과를 온 몸으로 받았다. 헌데 너는 아직도 고뇌란 말이냐.
[광렬] (안타까운 듯)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화] 억지의 감정으로 이해되지 않을 게다.
[광렬] 어렵습니다, 스님.
[만화] 작은 욕망으로 작은 아픔이 생기고 큰 욕망으로 큰 아픔이 일어남은 사바의 제일법칙.
(잠시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두 사람 쳐다보고 있다.)
[광렬] 큰스님. 단박에, 한순간에 이 힘 듬을 끊을 수는 없겠습니까?
[만화] 허허허, 있지. (창문을 열고) 광렬아.
[광렬] 예.
[만화] 저 뜰 앞에 잣나무가 보이느냐?
[광렬] (당황하며) 무슨
[만화] 뜰 앞에 잣나무니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