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를 만나러 가는 숲 속에는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정조는 평생 가슴 속에 간직한 아버지 사도세자이다.죽어서도 그는 아버지 곁에 묻혔다.
"과인의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선왕이 종통을 중히 여겨 나로 하여금 효장세자의 뒤를 잇도록 명핬던 것인데,
내가 전일 선왕께 올린 글월을 보면 불이본(不貳本)에 대한 내 뜻을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예(禮)를 비록 엄밀히 지키지 않으면 안 되지만 정(情) 역시 풀지 않고는 안되는 것이니,
제사 모시는 절차를 당연히 대부의 예대로 애야 할 것이나 태묘(太廟)의 예와는 달라야 하고,
혜경궁 역시 당연히 경외에서 공헌하는 바가 있어야 하나 차등을 두어야 할 것이다."
정조가 즉위 당일 내린 말씀 윤음((綸音)이다.
홍살문이 왕릉의 시작임을 알리고 있다.사악한 것들이 왕릉의 침범하지 못하게 막아주고 있다.
정자각 남쪽 참도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이 있는 것이다.
건릉의 참도 좌우에 정자작까지 박석을 넓게 깔아놓은 것이 다른 왕릉에서 볼 수 없는 구조물이다.
동쪽에 두 개의 계단이 있다.
하나는 수려한 구름무늬를 새긴 소맷돌과 삼태극 무늬를 한 북 모양의 둥근 돌 고석(鼓石)을 꾸민 화려한 계단이다.
여기에도 신성한 세계와 세속 세계를 구분하는 원리가 숨어 있다. 화려한 계단은 선대 임금의 영혼이 땅을 떠나
구름을 밟고 하늘로 올라가는 상징이다. 왕릉 입구 홍살문의 삼태극과 상통하는 고석의 삼태극은 참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기호이기도 하다.
동쪽의 올라가는 계단이 2개이다.화려한 문양을 한 왼쪽 계단은 영혼이 오르는 계단이다.
오른쪽 계단은 검소하다. 임금이 정자각에 오를 때 이용하는 계단이다.
정자각은 참배자가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오도록 설계됐다.
이는 참배자가 정자각 뒤 봉분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도록 해 왕릉의 위엄과 권위를 배가하는 효과를 낸다.
또 해가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지듯 동쪽은 시작과 탄생, 즉 양(陽)을 뜻하고 서쪽은 끝과 죽음, 음(陰)을 뜻한다.
자연의 섭리를 인공적 건축물에 구현한 것이다.
서쪽의 내려오는 계단은 하나밖에 없다. 누군가는 올라갈 수만 있고 내려올 수 없다는 뜻이다.
서쪽 계단은 임금이 제향을 마치고 내려오는 계단이다.
내려오지 못하는 선대왕의 영혼은 정자각 뒷문을 통해 봉분으로 올라간다.
"어찌 이와 같이 하늘이 내린 땅이 있겠는가. 반드시 인공적으로 만든 산일 것이다"
기보는 조선 왕릉의 특징인 사초지 강(岡)을 보고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 왕릉의 사초지는 절대 인공적인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9할은 자연적이고 단지 1할 가량이 보토(補土)로 조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인공적인 사초지일 때에는 풍수상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매립지의 경우 생기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풍수서에 "부토자기지체(夫土者氣之體)요, 유토사유기(有土斯有氣)"라는 구절이 있다.
흙은 생기의 몸이기에 흙이 있는 곳에 생기가 있다는 말이다.
사초지인 강은 생기의 몸이며, 생기를 저장하고 있는 탱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강을 인공적으로 조성할 수는 없다. 생기가 발하는 지점을 혈(穴)이라고 한다.
=장영훈의 책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에서=
건릉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다.그밖의 상설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의 예를 따르고 있다.
융릉과 마찬가지로 합장릉임에도 능침 앞에 혼유석을 1좌만을 설치했고 장명등도 융릉의 것과 같다.
또한 등신대에 가까운 문인석과 무인석의 조각은 매우 사실적이며 문인석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입고 있다.
순조 22년 정조의 능을 옮기면서 지어 올린 천릉지문(遷陵誌文)의 한 대목이다.
왕은 늘,요순(堯舜)을 본받으려면 당연히 조종(祖宗-조선의 국왕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해왔는데
왕으로 말하면 도량이 넓기는 태조(太祖)를 닮았고,찬란한 문장은 세종을 닮았으며,
명민하고 용맹스럽기는 광묘(光廟-세조)와 같고 지극한 행실은 효릉(孝陵)-인종) 같았으며,
자나 깨나 국운이 기운 것을 슬피 여겨 대의(大義)를 늘 앞세운 것은 효묘(孝廟-효종)와 같았다.
현자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몰아내는 데 위엄과 용단이 있었던 것은 숙조(肅祖-숙종)의
그것이었으며,만민이 우러러보는 표준을 세우고 세신(世臣)들을 잘 보호했던 것은
영고(英考-영조)의 마음 그대로였다.'서경(書經)'에 이르기를,'위대하여라 문왕의 교훈이여,
잘도 계승하였다 무왕의 빛남이여'했는 데 그것은 왕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한우의 군주열전] 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