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층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놀이터는 빗물이 고여 작은 웅덩이 같다. 이틀 전 내린 폭우로 놀이터 곳곳에는 채 빠지지 않은 흙탕물이 고여 있다. 여자가 걸터앉은 시소의 반대쪽도, 아이가 매달려 있는 ‘구름 사다리’ 아래도 물이 고여 있다.
여자는 콩깍지를 까고 있다. 깍지를 비틀 때면 벌어진 껍질 사이로 얼룩무늬의 강낭콩 알들이 나란히 나타난다. 여자의 손가락은 풋내가 물씬하다. 깍지에서 튄 콩이 모래밭 위로 날아가면 여자는 허겁지겁 엉덩이를 공중으로 쳐들고 콩을 줍는다. 여자가 걸터앉은 시소가 무게중심을 찾아 위로 조금 떠오른다. 아이의 체중은 철봉에 매달린 오른손에 실려 있다. 사내아이는 지금 셋째 칸에서 넷째 칸으로 건너가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다. 발을 적시지 않고 마른 땅으로 내려오려면 어쩔 수 없이 구름 사다리를 다 건너가야만 한다. 흘러내린 바지와 오른팔 쪽으로 치켜올라간 윗옷 사이로 드러난 맨살에 눈이 부시다.
여자는 남자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남자에게는 여자의 구부린 등과 모래밭에 놓인 플라스틱 바구니만이 보일 뿐이다. 어느덧 바구니에는 강낭콩이 수북이 쌓인다. 오늘 저녁 강낭콩 밥을 지으시게요? 남자는 여자에게 넌지시 말을 건다. 하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여자에게까지 남자의 목소리는 가 닿지 않는다. 그 맛을 어떻게 잊겠어요? 이 사이에서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일품이죠. 저에게도 좀 나눠주시겠어요? 남자는 베란다 창가에 선 채 계속 입술을 달싹거린다. 콩깍지를 덮고 있는 가실가실한 솜털의 촉감과 콩깍지의 틈을 벌리느라 엄지손톱에 낀 섬유질까지 전부 다 상상할 수 있다. 다행히 여자는 아까부터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녀는 지금 콩에만 열중하고 있다. 수학 문제를 푸는 학생 같다. 아이는 건너편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여전히 철봉에 매달린 채 이를 앙다물고 있다.
남자는 바지 뒷주머니에 끼고 있던 수첩을 꺼낸다. 엉덩이에 눌린 수첩은 완만하게 구부러들어 있다. 한 장을 넘기려니 덩달아 다른 장까지 붙어 넘어간다. 갈피 사이에 음식 찌꺼기가 묻은 채 그대로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콩깍지, 시소, 구름 사다리, 사내아이, 물 웅덩이.
남자는 그 여자를 기억할 만한 몇 개의 단어들을 적는다. 콩을 까고 버린 콩깍지는 수많은 쓰레기 봉투 가운데서 그 여자를 식별하는 유일한 단서가 될 것이다. 남자는 그 여자가 몇 호에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남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다행히 한 동뿐이지만 모두 90세대의 가구가 살고 있다.
오늘 아침 뉴스에서 기상 캐스터는 노란 비옷에 노란 우산을 받쳐들고 일기예보를 보도했다. 저기압 전선이 서해안과 경기 일대에 걸쳐 크게 발달하고 있다고, 일 주일 내내 들쭉날쭉 봄비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4월에 때이른 한여름 더위가 찾아온 것은 엘니뇨 현상의 일종이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더위와 습기 찬 날씨가 이렇게 계속된다면 남자의 일은 더욱 장애를 받게 될 것이다.
벽을 건너오는 새된 여자의 목소리에 남자는 눈을 떴다. 새벽 두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유리가 깨지면서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발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여자가 연신 소리치고 있지만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다. 507호와 면한 남자의 방 벽에는 장롱과 오디오 따위들이 놓여 있다. 남자는 침대에서 일어나 장롱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인다. 507호의 현관문이 열리면서 사정없이 벽에 부딪힌다. 밖으로 밀려나온 누군가가 엉덩방아를 찧는다. 뒤이어 현관 밖으로 던져진 냄비 뚜껑이 저 혼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다 멈춘다. 다시는 내 앞에 얼씬거리지 마. 여자의 격앙된 목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이중으로 잠금쇠가 돌아간다. 남자는 발소리를 죽여 현관으로 다가가 감시경 너머를 들여다본다. 불이 꺼진 바깥은 동굴처럼 음침하다. 이제 곧 조간 신문을 배달하는 아이가 들이닥칠 시간이다. 문이 닫히고도 삼십 분이나 지나서야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구두의 뒤를 꺾어 신고 있는 모양이다. 나막신 소리가 난다. 남자는 발소리가 계단을 다 내려가 아파트 광장으로 나설 때까지 기다린다.
반평 남짓한 다용도실에 들어서자 남자의 양 어깨가 벽 사이에 바듯하게 낀다. 남자가 버린 쓰레기들이 습한 공기 속에서 벌써 역한 냄새를 풍기며 부패하고 있다. 선반에서 플라스틱 양동이를 꺼내든다. 고무장갑을 끼고 플라스틱 양동이를 든 채 발소리를 죽이고 계단을 내려간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계단참 천장에 달린 전등은 일부러 켜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도 계단은 익숙하다. 여덟 개의 계단과 층계참 그리고 다시 여덟 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지는 이 기역자 계단은 1층까지 모두 72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둠 속에서 발을 더듬거리면서 다음 계단으로 내려서지 않아도 될 만큼 남자의 발폭은 계단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가운데 두번째 계단은 유독 다른 계단들보다 깊이가 깊다. 처음 얼마 동안은 이 계단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발목을 삔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곳에 이르면 남자의 본능이 단번에 알맞게 발을 내딛는다.
원통 욕조 크기만한 대형 고무 쓰레기통이 통로 앞의 화단에 한 개씩 놓여 있다. 가로등 불빛이 가 닿지 않는 단풍나무 이파리들에 그림자가 고여 있다. 광장에는 아무도 없다. 쓰레기통 뚜껑을 밀치고 쓰레기통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선다. 쓰레기통은 거의 비어 있다. 가슴패기에 닿을 만큼 깊은 쓰레기통 안에서 쓰레기 봉투를 꺼내기 위해 허리를 잔뜩 구부려야 했다. 쓰레기 봉투에서 새어나온 오물이 고무통 안에 고여 역한 냄새를 풍기면서 썩고 있다. 오늘 아침에 구청에서 나온 쓰레기차가 쓰레기를 싣고 가 쓰레기통 안에는 한 개의 봉투가 들어 있을 뿐이다. 남자의 양동이는 20리터들이 쓰레기 봉투 한 개가 바듯하게 담겨지게 되어 있다. 맨 처음에는 양동이 없이 쓰레기 봉투를 옮겼다. 다음날 출근길에 남자는 쓰레기 봉투에서 새어나온 물이 계단을 따라 이어져서 남자의 현관 앞에 멈춰 있는 것을 발견했다. 쓰레기 봉투는 묵직하다. 두 손으로 봉투를 들어내자 조심했는데도 슬리퍼를 신은 남자의 발등 위로 썩은 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비좁은 목욕탕을 개조하면서 욕조를 들어내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지은 지 15년이 된 이 낡은 아파트로 이사를 들어오면서 남자는 벽지와 장판은 물론 싱크대도 새것으로 갈았다. 도기로 만든 욕조와 변기는 군데군데 금이 가고 깨져 있었다. 짙은 감색의 타일은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었다. 떨어져나가거나 움푹 파인 타일 틈에 물때가 끼어 있었다. 세수를 하고 물을 받은 세면대의 마개를 뽑았다. 하수관으로 흘러내려가야 할 세숫물이 남자의 발 위로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배수관의 트랩 이음새가 어긋나 있어 그 사이로 물이 새어나온 것이었다. 수리공은 때가 잘 끼지 않고 가벼운 플라스틱 소재의 세면대로 바꾸어 달면서 욕조를 떼어내라고 권유했다. 이렇게 작은 목욕탕에 욕조가 굳이 있어야겠느냐고 욕조를 떼어내고 샤워 시설만 다는 것이 요즘 추세라며 끈덕지게 남자를 설득했다. 하지만 남자는 수리공의 말을 무시하고 욕조를 떼어내지 않았다. 수리공이 돌아간 그 저녁, 남자는 수리공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욕조는 터무니없이 작아 평균치의 키인 남자가 들어가 앉아도 물이 흘러넘쳐 겨우 엉덩이에서만 찰랑거릴 뿐이었다. 게다가 길이도 짧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려는 생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어깨를 물 속에 담그려면 두 발은 욕조 밖으로 내뻗어 벽에 기대어야 했고 두 발을 담그려면 엉덩이를 욕조 밖에 걸쳐야 했다. 이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욕조는 수리공의 말대로 골칫덩어리가 되었다.
욕조 속에 들고 올라온 쓰레기 봉투를 집어넣는다. 벌써부터 냄새는 틀려 있다. 여름이 되면 이 일도 더이상 할 수 없을 것이다. 15평 아파트 안은 락스로 꼼꼼하게 닦아내고 레몬향의 방향제를 뿌렸지만 덜 마른 생선에서 나는 냄새가 배어 있다. 쓰레기 봉투는 묶는 선을 훨씬 지나쳐서 꾸역꾸역 집어넣어 반쯤 터진 옆구리로 내용물이 비어져 나왔다. 매듭은 단단하게 묶여 있다. 좀처럼 매듭이 풀리지 않아 욕조 안으로 허리를 굽히고 선 남자는 엉거주춤 일어서 허리를 주무른다. 누군가 호되게 묶어놨군. 고무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매듭을 풀어보려 하지만 쉽게 풀리지 않는다. 풀기 어렵도록 쓰레기 봉투를 야무지게 묶어 버린 누군가를 원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버린 쓰레기 봉투가 다시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남자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었다.
쓰레기 종량제가 시작된 것은 1995년 1월 1일이었다. 남자는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일요일 하루를 누워 있어야만 했다. 초인종이 울렸다. 남자를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감시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오래 된 아파트의 감시경 유리는 뿌앴고 할 수 없이 현관문을 열어주어야만 했다. 이 아파트의 부녀회라고 밝힌 여자들이 현관 앞에 몰려와 있었다. 한눈에도 열 명이 넘는 숫자였다. 비좁은 현관 앞에 서 있지 못한 여자들은 계단 아래에까지 서 있었다. 얼굴에 검버섯이 핀 나이 든 여자가 옆의 젊은 여자를 어깨로 떼밀었다. 지금 수지침을 배우고 계신가요? 다짜고짜 젊은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다. 그제서야 한번도 열어보지 않고 장롱 위에 얹어둔 상자가 떠올랐다. 사무실을 찾아온 세일즈맨에게 어쩔 수 없이 사들인 수지침 용구와 책자가 든 상자를 남자는 한번도 열어본 적이 없다. 어떻게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수지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일까. 젊은 여자는 까만 눈동자를 한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물끄러미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서 있었다. 수지침 협회에서 한 달에 한 번 보내오는 정보 신문이 우편함에 꽂혀 있고는 했다. 그렇다면 남의 집 우편물을 훔쳐본 겁니까? 남자는 슬그머니 울화통이 일었다. 드디어 범인을 잡았네. 여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것 봐요. 성과가 있잖아요. 못 보던 얼굴인데. 여자들이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젊은 여자를 밀치고 검버섯 여자가 나섰다. 방귀 뀐 놈이 되레 성낸다더니만, 여기 이런 사람이 또 있네. 손에 손을 거쳐 올라온 묵직한 봉투를 검버섯이 받아 남자의 발밑에 던졌다. 봉투가 뻥 소리를 내며 터진다. 장터 쇼핑 배달 가능이라고 쓰인 붉은 글씨들이 띄엄띄엄 드러나 있다. 한눈에도 남자가 이틀 전 쓰레기통에 버린 쓰레기가 틀림없다. 댁을 찾아내느라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 줄 알아요? 이 쓰레기들을 이 잡듯 샅샅이 뒤졌다구요. 지성이면 감천이지. 결국 우리의 눈에 이 봉투가 발견된 거지요. 검버섯이 우편 봉투를 남자의 코앞에 대고 흔들어댄다. 수지침 협회라고 한자로 쓰인 봉투다. 봉투에는 남자의 이름과 주소가 깨끗한 타자 활자로 찍혀 있다. 봉투에는 이미 김치 가닥이 여기저기 붙어 너저분하다. 규격 봉투를 사용해야 한다는 걸 설마 몰랐다고 발뺌하지는 않겠지? 계단 아래에서 누군가 큰소리쳤다. 이런 비양심적인 사람 때문에 이 나라가 이 꼴이 된 거라구요. 격앙된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아홉 살 때 우리 아버지 따라 대동강을 건너온 이래로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남의 집 쓰레기를 뒤진 것은 처음이야. 검버섯이 한숨을 길게 내쉰다. 남자는 어렴풋이 쓰레기 종량제에 대해 들은 것이 기억이 난다. 한번만 다시 이런 짓을 했단 봐라. 여자들이 하나, 둘 계단을 내려간다. 뒤처진 젊은 여자가 일행을 따라 내려가다 말고 남자를 쳐다본다. 어머, 혼자 계시나보죠? 이해하세요. 요새 이런 일이 어디 한둘이라야지요. 쓰레기 봉투 값이 얼마나 된다구. 아예 깊은 밤에 몰래 쓰레기를 갖다 버린다니까요. 쓰레기차도 이런 건 수거해가지 않아요. 몇 계단 아래에서 검버섯이 소리친다. 게서 뭐하구 섰어? 얼른 내려오지 않구선. 다른 봉투를 뒤져야지. 젊은 여자가 내려가면서 말한다. 10만원이에요, 벌금이요. 이번만 봐드리는 거예요. 저 아줌만 관절염을 앓고 계세요. 다시 5층까지 올라오게 한다면 난리가 날 거예요.
시멘트 바닥으로 내던져지는 통에 옆이 터진 봉투에서 쓰레기들이 꾸역꾸역 밀려나오고 있었다. 계단을 따라 쓰레기 봉투에서 흘러내린 진물 같은 썩은 물이 점선으로 남자의 현관 앞에까지 이어져 있다. 현관 바닥에 흩어진 쓰레기들을 주워 모으기 위해 고무장갑을 끼었다. 푸른 곰팡이가 핀 밥알들과 사놓고 먹지 않아 버린 곪은 감자알들은 집어들기가 무섭게 손 안에서 물크러진다. 고약한 냄새 때문에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했다. 분명 자신이 버린 쓰레기들인데도 쓰레기들은 낯설었다. 쓰레기를 주워담다가 꼬깃꼬깃 구겨진 편지지들을 발견한다. 편지지는 이미 어느 정도 반듯하게 펼쳐져 있다.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가며 여자들이 이 편지를 읽었을 것이 틀림없다. 편지를 읽으면서 킥킥거렸을 여자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자신의 글씨체조차 낯설었다.
당신이 결혼하려는 그 사람은 결코 당신의 배우자가 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난 그 사람을 당신보다도 훨씬 먼저 알았습니다. 당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그늘진 모습을 나는 종종 보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내 충고를 듣지 않고 결국은 결혼 날짜를 택했더군요. 오늘 회사에서 당신과 그 남자가 나란히 부서를 돌아다니면서 청첩장을 나눠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당신 눈에는 그 남자의 허물이 보이지 않는 건가요. 당신 말대로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가요.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내 몸보다도 사랑합니다.
어느 편지 하나 끝을 맺은 것이 없었다. 남자는 만취해서 새벽까지 편지를 쓰고 또 썼다. 결국 그 편지는 부치지 못했다. 봉투를 들자 터진 틈으로 소줏병 뚜껑이 쏟아져나와 바닥에서 튕기친다. 안주로 끓여놓고 젓가락도 대지 않은 라면 가닥이 퉁퉁 불어 완성하지 못한 또다른 편지지에 엉겨붙어 있었다.
가까스로 매듭이 풀린다. 매듭이 풀리자마자 쓰레기 한 움큼이 튀어올라 욕조 안에 흩어진다. 먼지가 엉킨 머리카락과 담배 꽁초가 한데 뒤범벅이 되어 있다. 낚시 의자를 가지고 와 욕조 앞에 펼쳐놓고 걸터앉는다. 남자는 다시 고무장갑을 끼고 쓰레기들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한다. 목욕탕의 백열등은 얼마 전 100와트짜리로 바꾸어 끼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목욕탕 안은 밝다. 머리카락의 길이는 20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것들이다. 필터 끝까지 타들어간 담배꽁초를 집어든다. 필터 끝에마다 잇자국이 나 있다. 욕조 안에 펼쳐놓은 쓰레기를 들여다보면서 무릎을 포개고 그 위에 수첩을 펼쳐놓는다.
4월 23일 오비라거 맥주 뚜껑, 풀무원 콩나물, 신라면, 코카콜라, 참나무통 맑은소주…….
남자의 수첩에 글씨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숨은 그림 찾기에서 찾아야 할 항목들처럼 보인다.
남자는 망가진 시계 부속품을 핀셋으로 집어올리는 시계 수리공처럼 자못 진지하다. 꼼꼼하게 쓰레기들을 뒤지다가 간혹 멈추고 수첩에 글씨를 적는다. 박하향의 쿨 담배다. 쿨 담배. 고무장갑 손가락 끝에 묻은 오물이 수첩에 묻지 않도록 볼펜의 끝을 쥐고 글씨를 쓰기 때문에 글씨의 획은 어느 것 하나 반듯한 것이 없다. 즉석용 라면 용기가 두 개 포개져 들어 있다. 모두 수프에 건조 새우가 첨가된 우동이다. 오뚜기 바몬드 카레. 카레에 사용되었을 감자 껍질과 양파 껍질이 속속들이 발견된다.
20리터 봉투 한 개의 쓰레기는 헤쳐놓으면 욕조의 반이 찬다. 배춧잎과 감자 껍질이 미끈덩거리면서 고무장갑에서 달아난다. 냄새가 제일 지독한 것은 단백질류다. 생선 내장과 머리, 먹다버린 닭 조각들이 썩는 냄새는 새록새록 더욱 심해진다. 닭뼈가 붙은 고무장갑이 딸려나온다. 오른쪽 고무장갑이다. 핑크색이고 팔목에 마미손이라고 눌린 글씨가 보인다. 남자는 수첩을 뒤적여서 며칠 전 쓰레기 봉투에서 발견한 왼손 고무장갑이 적힌 페이지를 찾아 뒤적인다. 5월 3일. 제일제당 비트(750g), 쿨 담배, 코카콜라, 농심 새우탕면, 마미손 고무장갑(핑크, 왼손)…… 상표와 색깔까지 똑같다. 이렇게 되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집으로 묶는다.
그 또는 그녀는 오비라거와 코카콜라를 즐겨마시고 쿨 담배를 피우며 새우탕면을 좋아한다. 그 또는 그녀는 왼손잡이고 머리카락이 긴 여자거나 혹은 장발의 남자다. 이렇게 추론하는 것은 쉽다. 초콜릿이나 과자 봉투, 종이 기저귀 따위가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집에는 현재 아이가 없다.
남자는 지난 겨울부터 지금까지 통틀어 100개가 넘는 쓰레기 봉투를 뒤졌다. 쓰레기를 뒤지는 동안 자연스럽게 이 아파트에 사는 90가구의 취향을 조금씩이나마 알게 되었다. 15평의 이 작은 아파트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산다. 남자처럼 독신이거나 아니면 신혼부부인 한 부류와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난 후 큰 집을 되팔고 이사를 들어온 노부부가 그 한 부류이다. 텔레비전에서 선전하는 신제품의 상품들에 민감한 것은 언제나 젊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아직까지 모험심이 남아 있다. 포장이 화려하고 열대 지방의 과일이 섞인 펀치류의 음료수도 망설이지 않고 구입한다. 양이나 크기에 비해 값비싼 물건들을 구입하는 것도 그들이다. 그 동안의 자료를 가지고 통계를 낸 적도 있다. 이 아파트에 사는 여자들은 손을 보호하는 성분이 들어간 고급 트리오를 쓰고 직장 여성이 많은 까닭인지 샴푸와 린스 겸용의 샴푸를 쓰며 양 날개가 달린 생리대를 쓴다.
남자는 욕조 안에 흐트러진 쓰레기를 다시 봉투 안에 쓸어담는다. 물기가 빠진 쓰레기는 그 사이 더욱 부피가 줄어 있다. 매듭을 묶은 쓰레기 봉투를 들고 다시 일층으로 내려가 쓰레기통 안에 집어넣는다.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문다. 그 여자의 쓰레기를 볼 수만 있었다면 남자는 그 여자의 숨은 성격에 대해서 알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까닭없이 코발트색에 약하고 입심이 좋고 단정한 옷차림의 남자에게 끌린다는 것을 알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여자는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 여자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남자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 집의 집들이에 갔다.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앞치마를 두른 그녀가 태연스럽게 남자의 옆자리에 끼어 앉았다. 미스 김, 아니 이젠 미세스 박이라고 불러야겠지? 어떻게 미스터 박에게 끌린 거야? 술자리가 무르익자 누군가가 그렇게 물었다. 그 여자는 배실배실 웃으면서 그 남자가 입고 있던 코발트 색깔의 와이셔츠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 여자와 결혼한 후로도 그 후배는 변한 것이 없었다. 후배와는 아직도 경리부서의 같은 사무실에 앉아 있다. 같은 대학의 2년 선배인 남자가 진급이 빨라 후배의 바로 뒤 책상을 쓰고 있다. 풀을 먹인 것처럼 빳빳한 와이셔츠와 주름 없는 양복을 입은 후배의 뒷모습을 볼 때면 타자를 치던 그 여자의 길고 하얀 손가락이 떠오른다. 젠장, 만날 그 여잔 코발트 색깔의 와이셔츠만 사들이는 거야. 이젠 코발트의 코자만 들어도 진저리가 쳐진다니까. 자동판매기 앞에서 후배가 동료들에게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후배가 신입 여사원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것도 목격했다. 그 여자는 지금은 남편이 된 후배의 실체에 대해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다.
계단으로 올라서다가 남자는 신문 배달을 하고 계단을 급하게 뛰어내려오는 아이와 어깨가 부딪힌다. 아이가 남자에게서 멀어지면서 코를 감싸쥔다. 흐릿한 백열등 아래에서 아이의 앳된 눈동자가 고무장갑을 낀 남자를 힐끗거린다. 아이도 신문 꾸러미를 들지 않은 한 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있다. 신문 투입구에 손을 넣다보면 팔 안쪽의 여린 살갗에는 쇠독 때문에 붉은 반점들이 생겨났다. 쇠독을 방지하기 위해 신문과 우유 배달부들은 고무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아이는 긴 다리로 겅둥거리면서 다음 통로로 뛰어간다. 욕조와 목욕탕 타일을 락스를 진하게 탄 물로 헹궈내지만 어느새 남자의 집 안에는 쓰레기 냄새가 배어 있다. 아이가 스위치를 켜놓고 내려온 계단참의 자동 타이머 전구들이 차례로 꺼지기 시작한다. 벌써 새벽 네시가 지나 있다.
초인종이 울렸을 때 남자는 찢긴 청구서의 조각을 방바닥에 늘어놓고 조각을 맞추고 있었다. 어젯밤 쓰레기 봉투에서 발견한 청구서 조각들이다.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놓은 청구서는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다. 가끔씩 구겨지지 않은 청구서가 발견될 때도 있다. 오물에 젖어 있지 않다면 더더욱 좋은 일이지만 음식 찌꺼기로 범벅이 된 것이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흐르는 물에 재빨리 씻어내린 후 다리미로 다리면 그럭저럭 글씨를 읽는 데는 지장이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잘게 찢어버린 청구서들은 아이들의 퍼즐 게임처럼 이렇게 일일이 조각을 맞추어야 한다. 겨우겨우 이름이 나타난다. 김○훈. 없어진 한 조각을 찾기 위해 방바닥을 살피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린다.
벨을 누른 사람은 문에 등을 대고 기대서 있는 모양이다. 문을 밀쳤지만 문 뒤에서 완력이 느껴진다. 문은 꼼짝하지 않는다. 사내는 남자의 문에 기대서 두 다리를 지렛대처럼 버티고 서 있다. 몇 번이나 밀친 후에야 미동을 느낀 사내가 뭉그적거리면서 비켜선다. 사내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만취되어 있다. 한 손에는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있다. 양복 바지춤에서 빠져나온 와이셔츠 단이 식탁보처럼 사내의 두터운 다리를 가리면서 치렁거린다. 안니다. 곰처럼 거대한 사내의 몸이 남자의 어깨를 덮치듯 쓰러진다. 사내의 체중을 이겨내기 위해 남자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팅긴다. 어림짐작으로도 100킬로그램에 가까운 몸무게다. 남자는 거대한 곰에게 잡힌 원숭이처럼 허우적거린다. 사내가 남자를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중얼거린다. 안니다. 사내의 입에서 나온 역한 입냄새가 남자의 얼굴 위로 고스란히 쏟아진다. 사내는 계속 남자의 몸을 짓누르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절거린다. 곰곰이 되새겨보니 ‘미안하다’는 말인 것 같다. 가까스로 눈꺼풀을 뜬 사내가 사시처럼 따로 돌아가는 눈으로 남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남자는 러닝 셔츠 바람이다. 사내의 눈이 번쩍 뜨인다. 어? 당신 누구야? 왜 이 집에 있는 거지? 막무가내로 현관 안으로 들어서는 사내를 떠다민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한밤중에. 집을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힘으로는 도무지 사내를 상대할 수 없다. 무슨 소리야? 난 눈감고도 찾을 수 있다구. 너 어디 있어? 숨어 있지 말구 이리 나와. 큰소리를 치던 사내가 별안간 한 발자국 물러서며 걷잡을 수 없이 구토를 하기 시작한다. 현관에 벗어놓은 남자의 구두 위로 바닥에서 튄 토사물이 엉겨붙는다.
여기 507호 아녜요? 삼광 아파트 507호.
술이 조금씩 깨기 시작하면서 사내의 혀도 되돌아오고 있었다. 계단 천장에 달린 백열등은 깨어진 지 오래였다. 507호에 살던 사람이 이사를 나가면서 나르던 장롱이 백열등을 깬 모양이었다. 깨진 백열등 안으로 필라멘트가 들여다보였다. 507호와 508호의 벨은 나란히 붙어 있었고 어둠 속에서 사내는 507호의 벨을 누른다는 것이 508호의 벨을 잘못 누른 것 같다.
아, 이거 미안합니다. 토사물과 남자를 번갈아보던 사내가 계단에 가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사내가 흘린 토사물에서 시큼한 산 냄새가 풍긴다. 남자가 물을 퍼다 붓고 빗자루로 쓸어내는 동안 사내는 발을 차례로 들어올리면서 507호의 초인종을 누른다. 507호는 비어 있다. 며칠 동안 아무런 인기척을 느낀 적이 없다. 누군가 안에 있었다면 이 소동에 밖을 기웃거렸을 것이 분명하다. 사내는 507호의 초인종을 계속 눌러댄다. 간격을 두고 문 안에서 전자음의 뻐꾸기 울음소리가 자지러진다. 문이 열리지 않자 사내는 권투 글러브 같은 커다란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며 소리친다. 미안하다구 했잖어. 이 문 좀 열어.
김○훈. 방바닥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각 한 개는 찾을 수 없다. 아마도 다른 쓰레기에 묻어나간 모양이다. 콩깍지가 들어 있던 쓰레기 봉투에서 발견한 청구서다. 수첩을 뒤적인다. 콩깍지, 시소, 구름 사다리, 사내아이, 물 웅덩이. 쓰레기 봉투 속에는 프로필렌수지의 바스락거리는 과자 봉투들과 함께 살을 잘 발라먹은 닭뼈가 한 움큼 들어 있다. 손이 여러 번 가는 음식을 마다 않는 바지런한 여자임에 분명하다. 칫솔모가 사납게 누운 낡은 칫솔도 발견되었다. 다시 초인종이 울린다. 사내가 남자에게 덥썩 꽃다발을 안긴다. 장미 꽃다발이다. 옆집에 이 꽃다발을 좀 전해주세요. 오늘이 생일이었거든요. 사내가 벽에 몸을 부딪히면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붉은 장미 송이를 세어보니 서른 송이다.
507호 베란다의 빨래줄에는 며칠째 노란 양말 한 켤레가 달랑 걸려 있다. 양말의 발꿈치와 발가락이 닿는 부분에 비누로도 지워지지 않은 검은 때가 그대로 남아 있다. 흙물이 새어든 것도 같다. 사내가 다녀간 지 사흘이 지나고 있다. 하지만 남자는 아직까지도 옆집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 인기척이라고는 느낄 수 없다. 남자는 아파트 뒷길로 한 바퀴 돌아온다. 축대 밑에 선 채 507호의 창문을 올려다본다. 베란다의 창틀에는 깨지고 남은 유리가 간신히 걸려 있다. 그 층에 불이 꺼진 곳은 507호와 508호뿐이다. 요즘 들어 야근이 잦아지고 있었다. 부가가치세 신고 기간만 지나면 종전처럼 제시간에 퇴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창가에 걸어놓은 장미 꽃잎은 끝부터 검게 타들어가며 마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507호와 508호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다. 남자는 507호 안방과 맞닿아 있는 벽에 놓인 가재 도구들을 반대편 벽 쪽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장롱을 분해하고 반대편으로 옮겨 다시 조립하는 데 일요일 반나절이 지나가버린다. 장롱이 있던 자리에 침대를 옮기고 눕는다. 벽의 두께는 기껏해야 20센티미터를 넘지 못한다. 손바닥으로 벽을 쓰다듬어본다. 남자는 벽을 향해 모로 눕는다. 귓바퀴가 벽에 닿는다. 밖에서 작은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남자의 온몸에 날이 선다. 5층까지 올라오는 사람은 남자를 제외하고는 두 사람뿐이다. 그 여자 혹은 그 사내. 안방문을 열어두면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들도 모두 들을 수 있다. 남자의 소망과는 달리 매번 발자국은 아래층에서 끊긴다. 민들레 홀씨처럼 어디선가 날아온 호기심의 씨앗이 남자의 속에서 이미 싹트고 있다.
열쇠 구멍 속으로 열쇠가 꽂히고 걸림쇠가 딸깍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도 같다. 그 순간 남자의 현관에 뚫린 신문 투입구의 덮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열리고 붉은 고무장갑을 낀 손이 조간을 밀쳐넣는다.
버스 정거장에서부터 일부러 아파트 뒷길로 돌아온다. 507호의 베란다를 올려다본다. 빨래줄에 걸려 있던 노란 양말이 걷힌 것을 본 후에야 남자는 여자가 돌아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507호 여자 때문에 남자는 쓰레기를 뒤지는 일을 중단하고 있었다. 냄새가 새어나갈 것을 염려해서 항상 목욕탕 문을 닫은 채로 작업을 했다. 밀폐된 목욕탕 안은 울림통 같아서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조차도 크게 울린다. 문을 닫은 목욕탕 안에서 밖의 동정을 살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자는 이른 저녁을 먹은 후부터 벽에 사타구니를 바싹 붙인 채 줄곧 침대에 누워 있다. 화장실에 간 사이 여자가 돌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까부터 요의도 참고 있었다. 아랫배가 뻐근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남자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난다. 목욕탕에서 나오다가 우연히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구더기 한 마리를 발견한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직 구더기가 슬 만한 시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락스 물에 빤 걸레로 온 집 안 구석구석을 몇 번이나 훔쳐내기까지 했다. 구더기는 아주 조금씩 꿈틀거리면서 어딘가를 향해 이동하고 있다. 휴지로 구더기를 들어내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린다.
또다른 구더기가 발견된 곳은 안방의 문지방 틈새다. 남자는 엎드려 기면서 방과 부엌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한다. 장미 꽃다발이 걸린 창가로 다가온다. 벽의 모서리를 타고 끊임없이 구더기들이 내려오고 있다. 벽에 붙어 있지 못한 것들은 방바닥으로 떨어져 동그랗게 말린다. 장미 꽃다발을 싼 투명한 비닐 안에 수많은 구더기들이 꿈틀거린다. 남자는 베란다 창문을 열고 장미 꽃다발을 뒤뜰로 내던져버린다.
면도를 하고 있는데 현관문 밖으로 인기척이 느껴진다. 남자는 후닥닥 안방으로 뛰어들어가 바지를 발에 꿰면서 현관으로 나온다. 너무도 서둘렀기 때문에 되레 바지를 입는 시간이 길어진다. 여자를 만나야 한다. 사내가 찾아왔었다는 것과 사내가 전해주었던 장미 꽃다발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다급히 현관문을 밀쳤지만 이미 계단은 텅 비어 있다. 계단 아래쪽에서 또각거리는 구두징 소리가 조금씩 멀어진다. 황급히 계단의 난간 아래를 내려다본다. 5층까지 반복되는 계단의 손잡이들 사이로 무언가 반짝 빛나며 사라진다. 노란 나비 한 마리가 순식간에 날아오른 것 같다. 그것은 여자의 베란다에 걸려 있던 노랑 양말이었을까. 남자는 그제서야 신발을 신지 않은 자신의 맨발을 내려다본다. 여자는 언제 집에 돌아온 것일까. 어제 남자는 새벽 세시까지 깨어 있었다. 그때까지도 5층까지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애시당초 여자는 외출도 하지 않은 채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빈 계단의 공기 속에는 그 여자가 흘리고 간 향기만이 흐릿하게 남아 있다. 사무실 여직원들 사이에 한창 유행했던 ‘독약’이라는 이름의 향수는 아니었다. 은은하면서도 코끝을 톡 쏜다. 남자는 폐가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도록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도대체 그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 그 여자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다.
스테인리스의 신문 투입구를 들어올리자 안에 또다른 덮개가 나타난다. 덮개를 밀치자 엽서만한 사각 구멍 속으로 507호의 현관이 들여다보인다. 시멘트 바닥에 닿은 한쪽 뺨이 시리다. 현관에 가지런하게 벗어놓은 비닐 실내화가 보인다. 겨자색의 발등 덮개 위에 조잡한 바느질로 꽃이 수놓여진 실내화다. 투입구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바닥을 더듬거린다. 실내화는 손에 닿지 않는다. 단지 직감으로만 실내화를 찾아야 했기 때문에 더더욱 힘이 든다. 출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서려면 대충 10분 정도의 여유가 있을 뿐이다. 조금씩 안으로 밀어넣은 팔이 어느새 겨드랑이까지 들어가 투입구에 살이 낀다. 현관문에 닿은 얼굴이 짓눌린다. 팔을 빼고 다시 안을 들여다보고 거리를 가늠한 후 다시 팔을 넣어야 했기 때문에 일이 더뎌진다. 생각 끝에 옷걸이를 낚시 모양으로 길게 만들어 투입구 안으로 집어넣는다. 옷걸이의 고리에 걸린 실내화가 남자 쪽으로 끌려온다. 드디어 실내화 한 짝을 손에 넣는다. 프리 사이즈의 실내화는 낡고 낡았다. 발바닥이 닿는 부분에 눌린 인조털로 가늠해보면 그 여자는 겨우 230밀리미터 사이즈의 작은 발을 가지고 있다. 발등의 비닐이 뜯겨지고 탈색되어 있다. 겨자색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짙은 노란색이었던 것 같다. 남자는 실내화를 자신의 신발장 깊숙한 곳에 숨긴다. 이것 참, 또 지각이군. 남자는 입술을 오므리고 한숨을 내쉰다. 뜻밖에도 경쾌한 휘파람이 흘러나온다. 어? 내가 휘파람을? 남자는 경쾌하게 계단을 뛰어내려가 버스 정거장까지 내달린다.
보름 만이다. 그 동안에도 남자는 계속해서 쓰레기 봉투를 5층으로 날아올리고 있다. 청소차는 이틀에 한 번씩 쓰레기통을 비워간다. 하루라도 거르면 영영 그 여자의 쓰레기는 찾을 수 없다. 보름째 되는 날, 남자는 쓰레기 봉투 안에서 여자의 나머지 한 짝의 실내화를 발견한다. 꽃 자수의 실내화. 쓰레기 봉투는 헐렁하다. 매듭도 헐겁게 매여져 단번에 풀린다. 여자는 보름 동안 꽃 자수의 실내화 나머지 한 짝을 찾기 위해 방과 신발장 안을 샅샅이 뒤졌을 것이다. 기어코 오늘에서야 쓸모없어진 한 짝의 실내화를 버렸다. 꽃 자수의 부분에 보라색 과일물이 들어 있다. 남자는 신발장에서 나머지 한 짝의 실내화를 꺼내 나란히 두 짝을 맞춰놓는다. 두 짝의 색깔은 차이가 날 정도로 다르다. 비닐 바닥의 헤진 틈으로 스펀지 조각이 섞인 솜이 비어져나오고 있다. 남자는 쓰레기 봉투를 벌리고 쓰레기들을 집어올린다. 녹차의 티백 찌꺼기와 두터운 오렌지 껍질, 다이어트 코카콜라. 모두 다 저열량의 음식들뿐이다. 돌돌 말린 비닐 팩을 들어낸다. 미모사 향의 섬유 유연제다. 미끌미끌하게 썩은 밥풀들이 달라붙어 있지만 시큼한 악취 가운데서도 비닐 팩에서는 상큼한 향기가 난다. 남자가 복도에서 맡았던 그 냄새다. 쓰레기 봉투 맨 밑바닥에 손도 대지 않은 생크림 케이크가 문드러져 있다. 하얀 우윳빛 생크림이 군데군데 벗겨진 사이로 포도 시럽이 잔뜩 발린 삼단 케이크가 드러나 있다. 그 위에 하늘하늘하게 곰팡이 꽃이 피어 있다. 체리가 얹혔던 자리에는 생크림 위에 붉은 테두리가 남아 있을 뿐이다. 여자는 체리와 파인애플, 귤만 골라먹은 것 같다. 아스피린 포장지, 작은 쪽지 하나도 꼼꼼히 펼쳐본다. 구례행 무궁화 열차표 한 장. 지리산을 종주하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여자가 신은 노란 양말에 흙물이 밴다. 전화번호로 생각되는 일곱자리 숫자들이 적힌 쪽지. 연체된 호출기 사용료 청구서가 들어 있다. 생크림을 닦아내자 여자의 이름과 호출기 번호가 드러난다. 최지애. 012-343-7890.
남자는 노란색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들고 거대한 쇼핑 몰에 서 있다. 장바구니 속에는 미모사 향의 섬유 유연제와 럼주병처럼 손잡이가 달린 대형 락스병이 들어 있다. 사람들이 잘 구입하지 않는 물건들이 쌓인 선반에는 뽀얗게 먼지가 앉아 있다. 화장품 코너 앞에서는 마네킹처럼 짙은 화장을 한 판촉 사원이 지나치는 사람들을 붙들고 설문지를 나눠주며 같은 말을 반복한다. 신제품 판촉회입니다. 설문지에 응해주신 분께는 소정의 사은품을 드립니다.
모든 기업은 한 해에 수십 가지의 신제품을 내놓는다. 남자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신제품 개발실의 직원들도 농심의 새우깡처럼 히트 상품을 제조하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는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수천만 장의 설문지를 전국에 뿌린다. 남자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취향을 한눈에 꿰고 있다. 쓰레기장을 조사하여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실태를 알아보는 ‘가볼러지’라는 사회학의 수법이 있다는 것을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애매모호한 설문지보다는 쓰레기장을 뒤지는 것이 더욱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쓰레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쓰레기야말로 숨은 그림 찾기의 모범 답안이다, 남자는 진열대 사이사이를 돌면서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5층 계단 위에 사내가 앉아 있다. 사내의 커다란 몸집이 계단을 막고 있어 남자는 할 수 없이 사내가 비켜설 때까지 계단참에 서 있어야 했다.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든 사내가 한눈에 남자를 알아보고 손을 내민다. 권투 글러브처럼 두툼한 손아귀의 힘이 느껴진다. 사내의 두 눈에는 핏발이 서 있다. 사내가 앉았던 계단에는 커다란 케이크 상자가 놓여 있다.
미안합니다. 꽃다발은 전하지 못했어요. 도무지 만날 수가 있어야지요.
여행을 갔었답니다.
그럼 만나셨군요? 그 여자분을.
사내는 양미간을 찌푸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세수하듯 세차게 부빈다.
아뇨. 친구를 통해 들었지요. 아 이건…….
남자가 사내의 뒤에 놓인 상자를 힐끗거리자 사내가 상자를 들어 남자에게 내민다. 자꾸 부탁만 해도 될는지 모르겠어요. 이것 좀 전해주시겠어요? 오랫동안 집을 비웠으니 당분간은 집에 있을 겁니다. 한 손에 들린 쇼핑 봉투 때문에 나머지 한 손으로 상자를 건네받는다. 상자가 조금 흔들리자 사내의 핏발 선 눈이 조금 커진다. 조심해서 드셔야 해요. 상자가 움직이면 모양이 찌그러지거든요. ‘찌그러지거든요’라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넓적한 사내의 얼굴이 덩달아 찌그러진다. 생크림 케이크인가봐요? 체리나 파인애플 같은 생과일이 얹힌?
사내가 소리 없이 웃는다. 생크림 케이크를 무척 좋아하지요. 물론 저야 생크림광이지만요. 사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같이 케이크를 먹게 될 날이 올까요?
사내는 남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생크림 케이크는 묵직하다. 현관문을 여는데 3층에서 사내의 가벼운 탄성 소리가 들린다. 3층의 도드라진 계단을 헛짚은 것이 틀림없다. 저, 이봐요. 남자는 계단 난간 아래를 내려다본다. 몇 계단 아래에서 사내의 커다란 얼굴이 남자를 올려다본다. 그 여자분 말입니다. 혹시 알고 계세요? 남자는 말을 하려다 멈춘다. 사내는 여자가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그들의 결별은 생크림 케이크로부터 연유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이 사실을 오해 없이 사내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쓰레기를 뒤졌다는 사실을 말한다면 남자는 단번에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여자의 입을 통해 직접 들었다고 말한다면 사내는 두 사람 사이를 오해할 것이 뻔하다. 무슨 일이라도? 사내가 남자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본다. 만약에 말입니다. 또 며칠 동안 만나지 못한다면…… 남자는 말끝을 얼버무린다.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다. 그땐 그냥 형씨가 드십쇼. 사내의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여자는 지금 다이어트중이다. 여자가 증오하는 것은 사내가 아니라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사내의 몸집일 뿐이다. 여자는 남자가 좋아하는 생크림 케이크를 억지로 먹어주는 데 지쳤고 남자는 여전히 여자가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믿어버린 데서 생긴 오해가 그들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사내가 한 번쯤이라도 여자의 쓰레기를 훔쳐볼 수 있었다면 그들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케이크는 냉장고 안에서 조금씩 굳어가고 있다. 남자는 아직도 여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매번 엇갈리고 있다. 남자가 뒤쫓아 나갔을 땐 이미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미모사 섬유 유연제 향기만이 그윽하게 풍길 뿐이다. 남자는 수첩을 펼친다. 최지애. 012-343-7890.
7890으로 호출하신 분이세요? 전화 속의 여자는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나른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 케이크를 전해드려야 하는데요. 도무지 만날 수가 없군요. 여자가 껌으로 풍선을 분다. 풍선이 터지면서 여자의 입가에 들러붙는다. 무슨 소리예요? 여자가 혀를 돌리며 달라붙은 풍선껌을 떼어내 다시 질겅거린다. 최지애씨 바로 옆집에 사는 남잡니다. 여자가 발끈 화를 낸다. 정말 미치겠군. 한동안은 어떤 남자가 계속해서 이상한 말만 녹음해두더니만. 이봐요. 난 뭐냐, 최지애라는 여자가 아니라구요. 이 번호 바뀐 지 한 달도 넘었어요.
507호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남자는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들고 허겁지겁 507호 안으로 들어선다.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가 도배를 하고 있다. 가재도구를 들어낸 집 안은 생각보다 넓어 보인다. 알싸한 본드 냄새가 집 안 가득 고여 있다. 풀칠한 도배지를 들고 사다리를 올라가던 중년 남자가 현관에 선 남자를 쳐다본다. 왜요? 도배하시게요? 싼값에 해드려요. 풀이 뚝뚝 떨어지는 솔을 들고 중년 여자가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커다란 유리를 든 두 명의 인부가 계단 위로 올라서면서 남자는 507호 현관에서 물러섰다. 인부들은 베란다로 나가 깨진 유리를 떼어내고 새 유리로 갈기 시작한다.
사내는 뒤뜰에 들어가 무언가를 찾고 있다. 남자가 알은체를 하자 피가 몰린 얼굴을 들며 가쁘게 숨을 내쉰다. 남자는 뒤뜰로 들어간다. 웃자란 잡초들이 무릎 높이에 닿는다. 미안합니다. 케이크는 제가 먹고 말았어요. 그걸 다 먹어치우는 데 꼬박 일 주일이 걸렸지요. 사내의 한 손에는 부러진 나뭇가지가 들려 있다. 그 여자분은 이사를 갔어요. 물론 아셨겠지요? 사내는 연신 풀더미 사이를 나뭇가지로 두들기면서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런데 여기서 뭘 하십니까?
지난 여름에 제주도로 휴가를 갔었어요. 지애는 바다를 좋아하죠. 사내의 눈은 추억을 회상하기라도 하는 듯 흐릿하다. 최지애가 좋아하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산이었다. 사내는 먼 곳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계속 중얼거린다. 그때 하루방을 샀었죠. 왜 제주도 기념품 있잖습니까? 구멍이 숭숭 뚫린 돌인형 말예요. 그날 그 소동이 있었을 때 지애가 별안간 그 인형을 유리창 밖으로 던졌죠. 여기 어디쯤에 떨어졌을 텐데.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어요.
남자와 사내는 100미터 길이의 뒤뜰에 서 있다. 무성한 풀숲에서 작은 인형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 서로 양쪽 끝에서부터 다시 뒤져봅시다.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나무 막대기를 찾는다. 바쁘시지 않으세요? 남자는 막대기를 주워들고 뜰의 가장자리로 걸어가면서 말한다. 제게 남아도는 건 시간뿐이죠. 막대기로 풀을 치면서 땅바닥을 살핀다. 얼핏 고개를 들어보니 사내가 벌건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팔소매로 닦아내고 있다. 후텁지근한 날씨다. 한낮의 기온이 섭씨 28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오늘 밤, 마지막으로 딱 한 개야. 딱 한 개만 하고 그만둘 거야. 남자는 넥타이를 풀어 양복 주머니에 넣는다. 도대체 알 수가 없다니까. 진실이란 것은 쓰레기 봉투 속에서 썩어가고 있으니 말야. 남자는 다시 풀숲을 막대기로 사정없이 휘두르기 시작한다.
첫댓글 동인문학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