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분별하라
누기복음 12:49-59
예수님은 혼인집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의 비유를 통하여, 종들이 성실한 태도로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때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다른 비유를 들면서, 집주인이 도둑을 막기 위해 깨어있어야 하는 것처럼, 성도들이 성실한 마음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1. 땅에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12:49) 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해석상의 쟁점이 되는 것은 '불'의 의미에 관한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1) 성령, 또는 성령의 능력(Grundmann, Ellis). (2) 영적 활동(Bengel, Vincent). (3)심판 (Schlatter, Grasser). (4) 로마의 침략(Clark). 이 가운데 어떤 견해가 정확한 것인지를 판별하기란 어렵지만 앞의 비유와의 연관성을 고려하건대 (3)의 견해가 타당한 듯합니다.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이 문구에 대한 해석 역시 다양합니다. (1) 내가 어찌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하고 바라리오(Bleek, Wette). (2) 내가 무엇을 하리요?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Alford, Meyer, Stier). (3)이 불이 붙었으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뇨 (Plummer). (4) 이 불이 이제 붙어지기를 내가 얼마나 바랐는가?(Marshall). 이 가운데 "이 불이 이제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로 번역하고 있는 공동번역 성서에 따라 (3)과 (4)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본절 전체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심판을 내리러 오셨는데 그 불이 결정적인 의미에서는 아직 타오르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은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12:50)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세례'는 십자가에서의 즉음을 의미하며(막10:38), 바울도 이 사실을 재차 확언하고 있습니다(롬6:4).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텔레오'는 '완성하다'의 의미이며 이는 예수님이 인식하고 있고 맞아들이려고 하는 그의 죽음이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취해야할 사명에 의한 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Kline).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완성되어야 할 사명으로 인식하고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그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그 일은 결코 일시적 결단이나 가벼운 노력에 의해 성취될 성질이 아니라 실로 고통스러운 도전이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이 점점 가까와 옴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닥치는 인간으로서의 고뇌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12:51)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궁극적으로는 평화를 위한 것이지만 (2:14; 사 9:6), 그 평화는 선과 악을 분리하는 심판을 선행 요건으로 하는 것입니다(49절). 따라서 예수님의 오심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진리와 비 진리간의 갈등과 분열을 필연적으로 동반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화평이 아니라 검(劒)을 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마 10:34).
예수님은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12:52-53) 라고 말씀하십니다.
“분쟁하되”라는 말씀은 앞에서 언급한 '분쟁'의 성격을 밝혀주는 것으로 그 비극의 심각성과 비참성을 잘 보여줍니다. 이것이 최악의 상태인 까닭은 분쟁이 가족 안에서까지 일어나며 그 결과는 천륜이라 할 수 있는 혈연 관계마저 깨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10:21과 막 13:12와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당하게 될 고난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데,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신자와 비신자라는 형식 때문에가 아니라 신자의 진리성과 비신자의 비진리성의 충돌로 인해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앞 절에서 언급한 '다섯 사람'이 구체적으로 열거되고 있습니다. 이 집은 아버지, 어머니, 결혼한 아들내외, 그리고 아직 출가(出嫁)하지 않은 딸로 이루어진 5인 가족입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짝 말들은 미 7:6 에서 온 것으로 가족의 비극적 분열을 강조하기 위하여 서술된 표현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은 예수님과 가족들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하며 그것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될 것입니다(마 10:36; 눅 18:29).
2. 날씨를 분별하면서도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들
예수님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12:54-55)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이 제자들에서 무리들에게로 바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팔레스틴의 지리적 조건에서 비롯되는 기후의 상태를 알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즉 팔레스틴에서의 비는 지중해의 습도 높은 바람에서 기인하는바 서쪽 다시 말해서 지중해쪽에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은 곧 비가 올 것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남풍이 부는 것을 본면 심히 더우리라’는 말씀 역시 팔레스틴의 지리적 조건에 의한 일반적인 현상으로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곧 아라비아 광야 방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뜻하며 따라서 이 열풍은 더운 날씨를 예고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12:56) 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지의 기상'에 대비되는 '이 시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선교 활동과 관련된 사건들, (2) 인간들의 결단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행위(Marshall). (3)예루살렘의 멸망 또는 그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종말(Jeremias). 본문은 이러한 여러 견해들을 종합하여 이해되어야 옳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시대적 징후를 분별하지 못한 유대인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시대를 분별하여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진지성이 결여된 태도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3. 옳은 것을 판단하지 않는 자들
예수님은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12:57) 라고 말씀하십니다.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는 말씀은 유대인들이 시대의 징후를 분별하려 하지 않음을 책망하는데 그치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스스로'가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일반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행동하지 않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같은 거짓 지도자들의 판단에 의존하려 한 것이 자의(自意)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그 책임에 대해 변명될 수 없음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특히 '판단치 못하느냐'가 아니라 '판단치 아니하느냐'라는 표현은 그들의 자의적인 불성실함을 분명하게 드러내줍니다.
예수님은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12:58) 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의 핵심은 법정에 서기 전에 화해를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화해하기를'(아팔라쏘)은 '벗어나다' '떠나다'의 의미를 갖는 법률 용어로 고소자로부터 벗어나 자유한 상태에 놓인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이 말이 지시하는 최종적 의미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촉구하는 것입니다(Hendriksen, Liefeld). 채무자가 법정에 서기전에 어떻게 해서든 채권자와 화해하는 것이 감옥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법정에 서기전에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늦기전에 시대의 징후(徵候)를 분별하여 회개하고 바로된 삶을 사는 것을 의미입니다. 한편 '길에서 라는 표현은 화해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음을 암시하며, 기회가 있을 때 즉 늦기 전에 속히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2:59) 라고 말씀하십니다.
'호리'(려톤)는 유대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를 가리킵니다.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 '두 호리'에 해당하는'코드란테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찮은 액수라 할지라도 갚지 않고는 감옥에서 나올 수 없음과 마찬가지로 일단 주어진 기회를 상실하여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하여 심판을 받게 되면 그 결과를 되돌리기가 불가함을 뜻합니다.
적용: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를 얻는 삶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설명하시면서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 고 말씀하시고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대상자인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의미를 이해하고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해야만 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분의 사역을 방해하고 끝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데 사용된 십자가가 오히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날씨는 분별하면서도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구원사역의 결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도 이 시대를 살면서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를 얻고 그 지혜로 살아가야할 것입니다.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를 얻으려면 몇가지 묵상해야합니다.
첫째, 자신의 지혜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야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던 유대인들은 무지한 자들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능통하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만 자랑하며, 이미 구약의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때에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나사렛 목수 출신이라며 무시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에 의해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부르심을 받은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성령의 감동으로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제자들에게 소개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자는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를 받으려면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해야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있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를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1:25).
둘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어리석은 자로 여겨야합니다. 사도바울은 스스로 지혜있음을 자랑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헤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고전 3:18). 왜냐하면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3:19).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자로 여길 때 비로소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하나님의 지혜만을 구하게 되고 그 결과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