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저에게 서예회의 인연은 먹물만큼이나 진한 듯합니다. 먼저 789선배님들의 홈피에 글을 올렸다가 등장인물들이 8081이 더 많아 이 홈피에도 올립니다. 간단히 보세요라하면 무례한듯도 하고 수고 하시는 광수형께 힘을 실어드리고도 싶군요. 그리고, 임효의 일상을 엿보는 것도 좀 더 무엇을 읽고 싶다는 욕심을 불러 일이키기도하고
정광수 선생님! 화사한 연두색이 참 좋습니다. 계절의 느낌을 상큼하게 맡을 수 있네요. 종종 미국소식도 전해드릴께요.
서예회 선배님들 안녕하십니까? 정회원이 되지 못해서 열어보지 못했던 글들이 술술 떠오르는데 애들 밥도 안챙겨주고 오늘 몇시간째 선배님들의 글들을 읽었습니다. 괜히 무심한척 반응을-갱상도, 그것도 숭악칸 마-고 아임미꺼- 하던 호일이형도 몬이긴듯 안더니 쟁쟁한 선배님들을 글을 통해 그대로 만날 수있어 제 마우스를 거머지고 반가운 글들을 함께 읽었습니다.
우선 정 용규선배님 감사합니다!!! 많은 글을 남기신 정문임, 엄윤경, 신 정원,차민철, 소성권, 윤 종걸, 신 동준, 성 봉경 선배님들 제게는 어려운 선배님들이신데도 옛 친구를 대하듯 반갑습니다. 글에서 여전하신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신동혁 후배의 서예회의 르네상스가 열리기 시작한다는 말이 마음을 잡습니다. 해서 저도 서예회 와의 진한 인연을 돌이켜보며 글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내친김에 미국에서도 이어졌던 서예회원들과의 인연을 저의 가족의 미국약사와 함께 엮어봅니다.
90년 8월 17일 저희들이 처음 케네디공항에 도착한 날 바쁜 와중에도 공항에까지 나오신 김성배 선배님. 강옥수 선배님이 해주신 미국에서의 첫 식사를 잊을 수 없습니다. 두 분 모두 건강하시지요? 민규, 민지도 많이 컸겠습니다. 그 해 가을이 시작할 려는 어느 날 88년 결혼해서 퀸즈에 살고 있던 동기 이 은미가족을 우리집에서 조촐히 만나고...
추운 겨울이 시작되는 날 즈음 황덕주(80) 언니 가족을 만나고 또 미국 추수감사절을 맞아 성배형 집에서 있은 모임에서 최 선호 (76) 김성복(79) 선배님들도 만났습니다.
91년 : 선호형을 통해 저가 다니게 된 nyu에서 공부하고 계시던 유두선 선배가족을 뵙고 두선이 형 귀국하실 때까지 두분의 쟁쟁한 써클 무용담들로 유학생활에 활기를 얻곤했습니다. 제가 도서관에서 영어문장에 애먹고 있을 때 두선형이 후르륵 단번에 제 글을 교정해 주시기도 했지요-두선 선배님은 영어를 라면 먹듯이 마셔 버리시나봐요. 91년 여름 귀국하신 선호형이 방학 때마다 미국엘 들리면 두선형의 작은 기숙사 방에서 황동규시를 돌아가며 읽던 문학과 예술로 익어가던 밤이 기억나고.
필라로 유학온 이 상제선배 (80) 와 최 희경(81) 가족을 만나 우리의 서예회원의 미국생활은 더욱 풍요로와 지기 시작했습니다. 8월 희경이 만나너 필라에 가서 당시 경기여고 불어선생님이던 희경이의 단짝 황경숙(81)도 만났지요.
92년: 호일이 학교를 rutgers로 옮겨 황덕주 선배가족과 95년 언니네가 귀국하기 전까지 이웃사촌으로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93년: 남편을 따라 온 이 현주(82) 가족과도 조우하고 이 현주의 부군 되시는 성 덕현 의사 선생님은 주 경철 선배님의 고등학교 후배로 경철선배님의 소개로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하니 주공의 안목은 역시...
덕주언니의 중학교 동창생이자 81동기인 박정란(81, 가관과)과 몇 번의 통화를 나누었습니다. 정란이는 경치가 좋은 아리조나주에서 남편과 공부 중이었습니다. 텍사스에 공부하고 있던 부군과 잠시 떨어져 보스턴에 와있던 류방란 선배가 저희 들을 만나러 왔어요. 그때 혼자서 뉴저지 뉴왁 기차역에 엠츠럭 기차를 타고 와서 긴장하고 있던 방란이 언니 얼굴이 선합니다.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에게 흑인들이 대부분인 기차역에 있는다는 것은 좀 긴장되는 일이지요.
94년: 1월초 였던 것같은데 방란이 언니는 부군과 함께 저가 없는 동안-저는 2주일간의 음악켐프에 참가 중이었습니다- 다녀가기도 했지요.--- 저의 친정 부모님께서 결혼식날 뵌 방란이 언니의 남편되시는 안 선생님을 저는 아직 만나지 못 했습니다--- 여름 언젠가 제가 쌍동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애도’를 표한다며 격려(?!)전화를 준 조호정(81)과도 연락이 닿았어요. 호정이는 미국에 살면서 두 돌지난 쌍동이 남자애들한테 치여 지쳐있을 때였지요. 늦가을의 바람이 단풍들을 거의 다 날려버린 11월 12일 가경, 민경이의 부모가 되었습니다.
95년: 한국 떠난지 5년만에 사개월간 친정, 시댁에서 크던 큰애 (가경)를 데리러 둘째애 업고 악기들고 가방끌며 저만 한국에 다녀갔습니다. 광화문옆 교보문고에서 둘째 애 해산한지 한 달밖에 안된 노영주를 만나고 우연히 야근 끝에 그곳을 지나치던 81동기 이종호(동사학과)까지 만나 차 한잔 나누었는데 이 두 사람들은 작년 미국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벗들이 될 줄을 그땐 셋 다 예상 못했지요. 이해 9월 옆에서 음양으로 도움을 주던 황 덕주언니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호일씨는 학업을 그만 두기로하고... 제 삶에 가장 급하게 몰아치며 살았던 시간 들이었습니다. 두시간 간격으로 번갈아 울어대는 쌍둥이 젖주고 우유주고 갈아주고 씻기고 웃겨주고 같이 운.
크리스마스 휴가기간에 연수 유학차 오타와에 있던 안 일환군(81 무역학)이 우리집을 찾아왔지요. 일환군은 제 동기 일 뿐 아니라 호일씨의 고등학교 친구여서 정말 반가운 친구의 방문이었지만 제가 그때 워낙 몸이 아파 저녁한끼 밖에 제대로 대접못한게 내내 마음에 걸려있습니다.
96년: 저희들은 학교 기숙사를 나와 호일씨가 일하게된 columbia univ. 지구과학연구소 근처 북동부 뉴저지로 옮겨왔습니다. 이사하는 날 유펜에서 뉴욕의 columbia univ.로 옮겨와 지리적으로 더 가까워진 상제형, 희경이네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상제형이 10킬로 바나나 상자에 든 책들을 옮기느라 고생 많이 하셨지요. 예나지금이나 호일씨의 책욕심은 애궂은 사람들 고생시켜요, 생고생을. 옮겨와 산 아파트는 저희들이 처음 미국에 살림을 푼 성배형댁과 가까운 곳이라 미국에 처음 왔을 때의 생각들을 하며 묘한 감정으로 지난 날 들을 돌아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파트는 인연이 길어 작년 한해(1/03-1/04) 신재홍(80) 노영주(81) 가족이 산곳이기도 합니다.
97년: 워싱턴 스퀘어에 겹벛꽃이 한창일때 학위를 위한 마지막 졸업연주를 겨우겨우 마쳤지요. 희경이는 제 연주 뒷풀이를 위해 과일 깎아오고 뒷정리 해주고. 희경이 딸 소현이는 세 살이 된 우리 딸들을 봐주기도 하면서. 큰일도 마쳤는데싶은 마음으로 한국을 다녀갔습니다. 동신이 형이 운전해서 돌아본 관악의 순환도로는 참 많이 변했더군요. 영주집에서 학회가 있어 김천 으로내려간 주인장을 기다리며 분당을 구경했습니다. 그 날밤 채화와 아들, 광수형과 큰아들 임효와 임효딸등 80, 81 가족들과 반가운 저녁을 나누었습니다. 보행기에 앉아 캔맥주통을 빨고 있던 선호형 딸 서우도 보고 선호형 집에서 방란언니와 아들도 잠시 얘기도 나누었네요.
겨울여행으로 논문 발표를 하고 직장을 구하고 있던 상제형 가족과 의기투합 저희들의 8년된 7인승 미니밴에 이불, 요까지 꼭꼭 싸서 18시간 걸려 김 진기 형 네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진기형과는 미국에 정착하자마자 연락이 닿았으나 전화 연락으로만 이루어졌기에 정말 소중한 만남이었습니다.
근숙이를 같이 만났다면 오죽 더 좋았을까마는...
정정- 진기형이 재혼직후 어머님 모시고 부인-유페이-과 뉴욕을 여행 오셨을때 만났었군요.
98년: 시어머님 병환으로 쌍둥이들을 데리고 두 번째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삼성의료원에 정기적으로 다니시는 친정어머님을 모시고 2박 3일 서울을 다녀 올 수 있어서 임효를 명동성당에서 만나고 분당의 영주집에 다시 일박을 하는 짧고 깊은 여행을 했군요.
해가 가기전 프랑스에서 공부하며 파트타임으로 한국대사관에서 일하던 황 경숙이 뉴욕에 왔어요. 이 친구는 그 때까지 만해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 적극적이었는데 적극적임이 너무 크고 깊어서 일까요? 지난해 속세를 떠나 봉쇄수녀원에 지원해 구도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수도원은 파리동역에서 30여분 거리에 있으며 방문은 허락되는 곳으로 서예회 분들의 방문을 환영한다고 들어가기전 농담반, 진담반 말을 남겼습니다. 수도원의 사이트는 http://perso.wanadoo.fr/abbayejouarre 이고 주소는
Cecilia Hwang
Abbaye Notre Dame
77640 Jouarre France입니다.
그때는 소호로 그리니치빌리지로 보고 싶어하던 맨허튼 구석구석을 열심히 발로 다녔어요. 언제 수녀복을 입고 곱게 늙어가는 친구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메이기도 합니다.
99년: 둘째 유경이를 낳았습니다. 제 배가 남산 만큼 부를 때 8년여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떠나는 희경이와 상제형 가족을 마지막으로 배웅하며 여자 둘이 많이 울었어요. 희경이는 항상 바르고 이지적인지라 그녀의 눈물은 저를 더욱 흔들어놓았습니다. 아참, 이해 4월 하버드에 안식 연구년으로 와계시던 주경철 선배님댁을 다녀왔군요. 호일씨가 직업보다 열심인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위해서 였습니다. 선배님 가족이 마침 여행을 떠나시는 바람에 도착하던 날 몇시간의 대화만 낭낭히 나누고 우리가족이 집을 독채로 유했습니다. 고마우신 주공!!!
2000년 새해가 열리는 어느날 중앙일보 편집국에서 일하던 동기 이 종호군이 뉴욕으로 발령 받아왔습니다. 종호군 덕분에 이곳에서 한국신문을 구독중입니다. 그는 보수언론인이 대부분인 이곳에 신선한 글로 미국동포 한인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목련꽃이 환히 피기시작한 봄날 장기택 선배님이 부인만 동행하시고 저의 집을 찾아주셨어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엘 구경갔을 때였지요? 삶은 달걀과 집에서 준비한 부실한 샌드위치로 2시간미터기에 세워둔 차안에서 점심을 대신할 때 서예회 수련회 온 듯한 기분이다란 말들을 나누었지만 그 달걀이 참 잘 안넘어 가더라구요. 송구스럽기도하고. 이웃사촌으로 살게된 이은미 가족들과도 함께 시간을 나누었어요. 1981년 지리산 종주때 실신한 은미의 화려한 과거얘기를 기택이형의 강력한 이빨이 재구성하며...
저는 오래동안의 공부를 끝내고 졸업을하고. 졸업식때 마침 뉴욕을 들른 선호형이 같이 자리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유학한 곳에서도 동문선배가 되네요.
2001년 텍사스에서 보스턴으로 다시 자리를 옮긴 장기택 선배님댁을 찾아 갔습니다. 호일씨의 마라톤 참가로... 그 해 마라톤은 저희들과 한국인에게 의미있는 결실을 안겨주었어요. 이봉주선수가 일등을 하고 이봉주선수가 뛰는 모습도 16마일 지점에서 볼 수 있었으니까요. 해가 가기전 황덕주언니 가족이 저희들 침실방 둘의 아파트를 찾아온 마지막 손님이 되셨어요. 승건, 동건 두 아들만있는 언니의 부군(79, 금속공) 은 저희들 쌍둥이들과 후크선장놀이를 즐겁게 하시더니 “captain said, I will be back" 이란 말을 애들에게 남기고 떠나셨어요. ‘회자정리 거자필반’ 이라는 말을 이곳에선 일상생활처럼 느낍니다.
2002년 뒷마당에 10*3미터정도의 텃밭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한국에서 부쳐준 깻잎, 쑥갓, 무, 배추, 상추, 토마토, 호박, 오이 등을 심고 제법 여름 식탁을 파랗게 차려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많은 다람쥐와 사슴, 들짐승 때문에 먹겠다란 욕심을 버리고 있습니다. 올해는 특히 심해서 겨우 파슬리 정도만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사온 집에 찾아온 조은정, 염미란언니... 두 분다 12년만의 해후여서 만남이 각별했습니다. 며칠 꼬박 새다 싶이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2003년 1월 10일 기다리던 신 재홍, 노 영주 가족이 저희 들 사는 근처로 안식년을 보내러 왔습니다. 지금 이글을 쓰게된 동기도 그들과 함께 보낸 꿈같던 일년의 후유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딸들과 재홍이 형네 딸들은 사촌들처럼 저와 영주를 이모라 부르며 가까이 지냈습니다.
옆동네 산엔 일미터의 눈이 내렸던 다음 날 동신이 형이 가족을 이끌고 오셨어요. 재홍이 형 가족, 은미가족들과 복직이 확정된 동신이 형을 축하하며 그간의 마음고생등을 위로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또 함께 밤을 환히 보내었습니다. 지하의 천정에서 물이 뚝뚝 새는 바람에 얼마 눈도 부치지 못하고 물난리를 치루었습니다. 동신이 형, 죄송합니다. 물새는 것 다 고쳤으니 다시 놀러 오세요.
꽃피는 봄 날 잔설이 지천인 미란이 언니가 사는 미동북 끄트머리 메인에서도 끝자락 마키아스에 영주가족과 함께가고 12월이 다가는 무렵 진기형이 사는 아틀란타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7년 뒤 이런 기회를 갖는다면 우리집옆집에 살자란 말도 총총 나누고...
5월엔 장기택 선배님이 제자들을 이끌고 찾아와 주셨고 여름엔 부군따라 프린스턴대에 연구년을 맞아온 한정임가족, 세계은행에 파견근무온 안 일환 가족등 집이 빼곡이 놀았습니다. 쩌렁쩌렁한 재홍이 형의 열변도 여정하고 능글하게 받아 치는 일환군의 말솜씨도 여전하고 정임이 은미, 종호군 모두 20년 전의 모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기범 선배님도 잠시 제가 연주가 있어 늦게 들어오는 여름 날 다녀가셨지요. 12월 중순 즈음 Met. 박물관에서 정종섭 선배님을 우연히 잠시 만났다고 했었죠. 저는 일이 있어 가지 못하였는데-연주회 준비중이었거든요- 호일씨와 재홍선배 남자들만 애들 데리고 갔다가 꿈처럼 만나고 꿈처럼 헤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정 종섭선배님 한국 잘 돌아가셨는지요?
올해는 또 누구가 찾아오실지... 저희집을 서우재로 부를까 합니다. 언제든 미국에 오시면 연락주세요. 이렇게 쓸데없는 저희들 얘기를 뭐하러 썼을까요! 모두들 건강하시고 좋은 글 많이 써주셔요.
박초연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