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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권근영
관심
“추상은 말이 없어 좋다”고 했던 그의 전시를 처음 본 외신기자는 “여기선 말을 잃게 된다”고 했습니다.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 유영국(1916∼2002) 얘기입니다. 그 고요한 그림들이 지금 베네치아에서 전시 중입니다.
16세기 건물의 내부와 정원을 카를로 스칼파와 마리오 보타가 리모델링했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룬 공간, 퀘리니 스탐팔리아 재단 1층 유영국 전시장 입구. 사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생전에 내 그림은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첫 구매자는 이병철 삼성 회장이었습니다. 이건희컬렉션·리움미술관부터 미술 애호가 RM까지 일찌감치 그를 알아본 이들이 간직한 그림도 베네치아에 왔습니다. 지난해 뉴욕에서 해외 첫 개인전을 연 데 이어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기간 중 유럽 첫 개인전을 엽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퀘리니 스탐팔리아 재단에서 열리는 '유영국: 무한세계로의 여정' 도입부. 사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영국 테이트모던 등 주요 미술관 인사들이 전시 개막을 찾았고, “눈부시게 밝고 매혹적이며, 기이한 균형이 있다”(아트뉴스), “산이 많은 한국 지형을 짙은 파랑, 대담한 주황, 풍부한 빨강의 아름다운 그라데이션으로 보여준 한국의 마크 로스코”(프리즈)라는 현지 호평이 이어졌습니다. 왜 지금 유영국일까요.
1. 고기 잡고 양조장하던 생활인
베네치아 퀘리니 스캄팔리아 재단 입구에 걸린 유영국의 20대 때 사진 옆으로 곤돌라가 유유히 지나간다. 사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사진 속 카메라를 멘 청년은 뭘 보고 있을까. 1940년 전후, 도쿄 유학 시절의 유영국이다. 자유로운 학풍의 문화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일본의 전위예술가 그룹인 자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하던 무렵이었다. 현상소를 차려 생계를 꾸릴 생각으로 사진학교도 졸업했다. 그러나 식민지와 전쟁 와중에 개인의 계획이란 얼마나 나약한가. 이후 한참 동안 화단에서 고립된 채 생활 전선에서 고군분투하게 될 줄을 유영국은 몰랐을 거다.
글 싣는 순서
1. 고기 잡고 양조장하던 생활인(읽는 시간 140초)
2. “금논도 싫고, 금산도 싫다. 화가 되겠다”(여기까지 190초)
3. “내 추상화 평생 안 팔릴 것”… 첫 컬렉터는 이병철(260초)
💍남은 이야기. “결혼만이 사는 방법이 아니다”던 아버지(290초)
식민지에 태어났어도 그는 자유인이었다. 18세에 고교를 자퇴했다. 경성제2고보(지금의 경복고) 4학년 학급장으로서 학생들의 비행과 동향을 밀고하라는 일본인 담임교사의 강권에 따르지 않은 대가다. 유영국은 여러 차례 구타를 당하다가 5학년 진급을 앞두고 스스로 학교를 그만뒀다. 마도로스가 돼 오대양 육대주를 자유롭게 누비리라 했다. 일본의 상선학교에 가려 했지만 중퇴한 학력이 발목을 잡았다.
일본서 아방가르드 그룹 활동을 하던 초기 3년간 유영국은 감각 있는 추상 부조를 내놓았다. 1940년 자유미술가협회전 출품 엽서로만 남아 있던 '작품 404-C'는 2002년 재제작했다. 사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재능을 눈여겨본 경성제2고보 미술교사 사토 구니오의 권유로 도쿄 문화학원에 들어갔다. “교복이 없고 자유로운 분위기여서” 선택한 학교였다. 동갑내기 김병기(1916~2022)와 동기였고, 이중섭(1916~56)보다 2년 선배였다. 고보 시절에도 “미술수업만으로 충분하다. 미술반 활동하며 몰려다닐 필요 없다”고 여겼다는 유영국이다. “남이 안 하는 걸 하고 싶어서” 일찍부터 추상화에 심취했다.
차준홍 기자
1943년 태평양전쟁의 전운이 짙어지자 그가 출품하던 미술창작가협회는 ‘일본민족 번영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전시를 연다. 유영국은 활동을 그만둔 채 귀국했다. 새로운 삶을 기치로 내건 추상미술을 일제는 불온하다고 여겼다. 당시로서는 오지였던 고향 울진에도 특별고등경찰의 감시가 미쳤고, 일본 유학생 유영국이 할 수 있는 건 고기잡이뿐이었다.
1940년대 거리를 걷고 있는 유영국(왼쪽)과 김환기. 사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결혼했고, 두 딸을 얻었다. 1948년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과 교수로 부임해 상경했다. 김환기(1913~74)의 제안이었다. 그와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 추상화가로 활동을 이어갈 참이었지만 6·25 발발로 좌절됐다. 유영국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기간에도 리어카를 빌려 교외에서 장작을 패다 파는 등 생활력을 발휘했다. 그해 가을 장남이 태어났다. 1·4 후퇴 때 고향 울진으로 피란 와 선친이 하던 양조장을 수리해 운영을 시작했다.
울진에 묻혀 지내면서 유영국이 잡은 소재는 산이었다. 1957년의 초기 추상 '산'(100x81㎝). 사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현실에서 붕붕 떠 있을 것 같은 추상화가였지만, 유영국은 생활인이었다. 양조장에서 남은 술지게미로 돼지까지 쳤다. 사업가 기질에 창의력도 발휘했다. 직접 상표를 디자인한 ‘망향’ 소주는 지친 피란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탱고를 잘 췄고, 술이 들어가 기분이 좋아지면 휘파람을 불었다는 키 큰 멋쟁이. 그러나 4남매의 가장으로 생활이 우선이었고, 팔리지 않을 추상화를 그리려면 돈을 벌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영국에게는 동시대 여느 화가들과는 다른 실용감각과 책임감이 있었다.
2. “금논도 싫고, 금산도 싫다. 화가 되겠다”
1952년에야 양조장 한 귀퉁이에 화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동시대 미술에서 홀로 떨어진 그는 산에 평생을 걸었다. 동해의 깊은 바다, 높은 산, 그 사이로 뜨는 해…. 추상이지만 어딘가 자연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그림이 여기서 시작됐다.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고 했다. 1955년 양조장이 자리를 잡자 돌연 상경했다. “잘 되는 양조장을 왜 남에게 맡기느냐” 주위에서 걱정하자 “금(金)논도 싫고, 금산도 싫다”고 일축했다. “서울에 가야 한다. 나만 여기서 뒤떨어지고 있다”고 조바심내며 서른아홉까지 울진에서 지낸 끝이었다.
유영국의 전성기 추상화들로 꾸린 베네치아 전시. 맨 오른쪽 '작품'(1968)은 미술애호가 RM 소장품이다. 사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회화의 순수성을 추구한 그의 전성기는 1960년대. 48세에야 첫 개인전을 열었다. “추상화도 그림이냐”고 동료 화가마저 코웃음치던 시절, 홀로 화면과 싸운 결과물이었다. 원색의 조화 속에 깊이감을 획득하며 장식적 도안을 넘어섰다. 자연에서 비롯한 한국적 추상의 탄생이다. “색감에 생생한 감동이 가득하다”(김영주), “원색의 구사와 다이내믹한 구성에서 생동감을 형성했다”(오광수)는 호평이 쏟아졌다. 그림 그리다 막히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던 유영국이었다.
창작 과정에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나는 항상 뚫고 나갈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작품은 다음 작품을 위한 과정이고, 계속적으로 작품을 해야 되는 근거가 된다.
1966년에 홍대 교수로 부임했다.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한 뒤 미국에 눌러앉은 김환기의 후임이었다. 그러나 4년 만에 그만둔다. 어렵게 돌아온 그림인 만큼 전념할 시간이 필요했다.
3. “내 추상화 평생 안 팔릴 것”…첫 컬렉터는 이병철
“평생 안 팔릴 거”라면서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래서 팔렸을 때, 인정받았을 때 더없이 기뻐했다. 그의 추상화를 처음 산 것은 삼성 이병철 회장이었다. 1975년, 유영국이 59세 때 일이다. 미술관 개관을 위해 그림 한 점에 100만원씩 화가들에게 사들일 때였다. 그림을 사고 판다는 생각도 부족하던 시절, 화가들에게 적지 않은 돈이었다. 아내 김기순(104)의 회고다.
‘미술관 한다면 100만원 아니라 50만원이라도 내가 (그림을) 내놓았을 텐데’ 하셨어요. 이병철씨가 그림을 보더니 ‘추상화도 이만하면 괜찮군’ 그러셨다는 걸 전해 듣고 너무 기뻐서. 추상화를 그림이라고 생각지도 않던 때였고, 이병철씨는 고미술에 조예가 깊으신 분이라 추상화는 생각도 안 하던 분이니까, 그 한마디가 너무 기뻐서요. (2004년 김기순의 회고, 「유영국 저널」8집)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도 일찌감치 그를 알아봤다. 1975년 현대화랑 개인전에 나온 ‘일월도’를 구입했다. 산과 해가 있는 듯해 이런 제목이 붙었다.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초대전에 나온 대작 ‘정상’(1966)도 전시가 끝난 뒤 홍 전 관장이 구입했다.
부인 김기순씨는 "1975년 현대화랑 개인전에 내놓은 '일월도'(105x146㎝)는 홍라희씨가 사갔다'고 돌아봤다. 사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건희컬렉션으로 기증된 ‘정상’은 베네치아에도 전시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이건희컬렉션 중 유영국의 작품이 187점으로 제일 많다. 회화가 20점, 판화가 167점이다. 1990년대 중반 이건희 회장이 “삼성 임원이라면 사무실에 원화 한 점, 판화 두 점 정도는 있어야 한다”며 이우환·박서보·김창열·유영국 등의 동판화를 파리의 공방에서 주문 제작하면서다.
유영국, 정상, 1966, 캔버스에 유채, 130x162㎝.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예순 살까지는 기초를 좀 해보겠다”던 그림도 궤도에 오르고, 알아주는 이들도 생겼지만 건강이 따라주지 못했다. 2년 뒤인 1977년 심근경색, 또 뇌출혈로 여러 차례 쓰러지면서 열네 차례 가까이 수술을 받았다. 언제 쓰러질지 몰라 그는 초조했다. 기계처럼 그리고 또 그렸다.
베네치아 퀘리니 스탐팔리아 재단에 전시된 유영국의 판화들. 사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오전 7시반에 깨어 8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8시 반에 화실로 건너가 그리다가 11시40분쯤 나와 손 씻고, 12시 땡 치면 점심이 차려져 있어야 했다. 오후 1시쯤 화실로 돌아가 6시에 저녁 식사하러 나오고, 그 뒤엔 낮에 낭비한 시간만큼을 다시 화실에서 벌충했다. 팔리지 않으리라는 그림에 평생을 건 화가의 시계 같은 삶을 아내가 지켰다.
1979년 6월 '유영국 초대전'이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앞에서 아내 김기순(오른쪽)과 함께. 사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시간이 멈춘 듯한 그의 추상화는 실은 시간에 대한 집착이 낳은 결과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통과한 10년의 공백 탓에 ‘남들보다 못 그린 시간이 많다’며 스스로를 재촉했다. 여기 언제든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더해졌다.
‘시간 없다. 나는 참 시간이 없는 사람’이라면서, 86세까지 산다는 건 미처 몰랐겠죠.” 아내의 말이다.
💍남은 이야기. "결혼만이 사는 방법이 아니다"라던 아버지
1960년대 서울 약수동 집 앞마당에서 작업중인 유영국. 사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직업 자유업, 침실에서 화실로 칼같이 출퇴근-.
아버지는 농부처럼 그렸다. 여름에 웃통 벗고 땀 흘리며 그리는 걸 좋아했고, 그림 못 그리는 겨울엔 전시를 열었다. 난방유가 비쌀 때라 화실이 추워서다. 차녀 유자야(76)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이사가 기억하는 유영국은 서울 약수동 집 우물가에서 머리를 감겨주던 다정한 아버지였다.
1950년대 유영국과 막내 아들 건. 유건씨는 아버지 권유로 건축가가 됐다. 유영국은 아들이 지은 방배동 집에서 만년을 보냈다. 사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시간에 집착하며 자신에게 철저했던 유영국은 4남매, 특히 두 딸에게만큼은 너그러운 신식 아버지였다. 울진에선 국민학교에 들어가는 큰딸 리지(1945~2013)를 위해 자신의 양복을 손수 코트로 수선해 입혔다.
1977년 장녀 유리지(왼쪽부터), 유영국, 차녀 유자야. 유영국은 그해 2월 심근경색, 10월에 심장박동기 부착 시술을 받았다. 사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학년 초마다 가족들은 “자유업이다” “추상화가다”, 아니 “모던 아트라고 해라”, 아버지 직업란에 뭐라고 쓸지 왈가왈부했다. 그러나 세상이 뭐라 부르든 매일 같은 시간 화실에서 일하는 아버지 직업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항상 집에 계셔서 좋고, 다른 집도 그런 줄 알았다”고 유 이사는 돌아봤다. 산처럼 굳건하던 아버지는 후에 딸들이 전공과 직업을 택할 때 얼핏 속내를 드러냈다.
‘순수미술은 참 힘들다. 자기가 노력한 만큼 그때그때 보답을 받지 않고 사는 데는 대단히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대가를 받으면서 일하는 게 훨씬 좋다고 하셨어요.
딸들은 아버지 권유로 응용미술을 택했다. 큰딸은 유리지 서울대 디자인학부 금속공예 전공 교수, 1세대 모더니즘 공예가다. 둘째 딸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섬유디자인을 공부하고, 귀국 후 제일모직을 거쳐 칠보 은기 제작사업을 했다. 결혼하지 않는 두 딸을 걱정하는 아내에게 유영국은 “결혼 안 해도 괜찮다. 제 일을 하면 된다. 결혼만이 사는 방법이 아니다”고 했다.
1990년대 방배동 집 화실의 유영국. 사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와인을 마시다 딸들에게도 권하자 놀라는 아내에게 유영국은 내버려 두라고, 뭐 그리 빡빡하게 사냐고, 살다 보면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싶을 때가 있을 거라 했다. “추운 겨울날 얼음이 쨍하고 갈라지는 패기가 느껴진달까. 아버지는 단호했지만, 또 다정한 분이셨어요.” 유자야 이사가 기억하는 마지막은 이렇다.
돌아가시기 두 달 전, 입원 중이던 병원의 응급차로 함께 회고전에 갔어요. 그때 함께 본 그림이 ‘일출’, 옛날 바닷가에서 고기 잡을 때 생각을 하셨을 거예요. 그건 배 타고 바다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거든요.
장남 유진 KAIST 명예교수를 이사장으로 자녀들이 운영하는 유영국미술문화재단의 과업은 공공기관에 작품 200점을 기증해 미술관을 건립하는 것. 주변을 깔끔하게 단속했던 아버지가 “미술관은 가족이 아니라 기관에서 할 문제”라고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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