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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역사 남방 차의 전래 /신라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 BACK
당나라 육우가 쓴 (다경)에는( (신농)의 (식경)에 차를 오래 먹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힘이 있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한다.)고 하여 당시 사람들은 신농황제 때인 BC 2737년 경에도 차가 쓰였다고 믿었
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성이 강씨인 신농은 중국 삼황의 한 사람으로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고 백 가지 풀을 맛
보아 약초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정확한 사료로 전해지는 중국차의 역사는 이천년을 넘는다.BC 59년에 서한의 왕포가 쓴 노비문서인
[동약]에는 (무양에서 차를 사다) 그리고( 차를 끊이다 )라고 한 내용이 있다.
우리차의 정착
우리민족은 7세기에 음다풍속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여러 가지 사료에서 확인된다.
[삼국사기]에 (차는 선덕여왕[632~647년] 때부터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음으로 적어도 647년
에는 차나무나 음료로서의 차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그리고 육우보다 반세기 앞선 다인인
설총은 (차와 술로써 정신을 깨끗하게 해야합니다.)라고 신문왕(재위 681~692년)에게 화왕을 비유
해 간하였음이[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어.차를 일상의 수양음료로 여겼음을 알 수 있고.원효도
굴 속 암자에서 차를 끓여 마셨다. 그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 의하면.661년 신라 문무왕 때 가야
의 종묘에 시절제사를 지내는 음식으로서 떡.밥.과일등과 함께 차가 놓였다. 당시에 토산품이 아닌
수입품을 제사상에 놓았을 리가 없으며.상례나 제례 등의 풍습이 정착되려면 3대 이상 걸림을 생각
할 때 차가 많이 나는 가야에서는 적어도 6세기에 차를 기호음료로 마셨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또한 신라 사선의 전다구와 보천.효명태자의 헌공다례 기록.고구려 무덤에서 발견된 돈차.자장의
제자 조일이 차나무 재배 등도 7세기에 다문화가 정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우리 차의 기원에 대해서 몇 가지 설이 있다
.삼국사기에 단군은 선인이라 했고.최치원은 차를 선인들의 전유 기호물이라 했으며 선인이 단차를
약으로 먹으면 신선이 된다는 기록이 고조선 때부터 전해 내려왔다. 그리고 신라 사선 중 영랑은
단군의 도를 전해받았고.그들의 독특한 음다풍속을 볼 때.삼국시대 이전이거나 고조선 때에도 차를
마셨을 것이다.(당시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와 서쪽으로 중국 북경근처의 난하에서 흑룡강 길림성
을 포함한다.)
②.불교를 중심으로 중국문화가 유입됨과 더불어 차를 마시게 되었다.
③.차를 기록한 신농의 (식경)내용은 한족이 동쪽으로 이동하기 전의 동이문화로써.그 문화권은 황해
를중심으로 한반도. 만주.요동.요서.산동.오월.그리고 파촉 지방이다. 또 신농황제는 우리 조상이므
로 다문화은 본디 우리문화이다
④.차나무가 생겨난 이래로 새나 배. 바다의 조류.지형의 변화 등으로 씨가 옮겨져 계속 번식했으므
로 중국과 가까운 백제와 가야 지방에는 역사이전부터 차나무가 자생하여 약용으로 쓰이다가 음료
로 마시게 되었다.
위와 같은 주장들이 있으나 문화는 사회와 개인에 의해 전파되므로 엄격한 의미의 고유문화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문화적 사대주의나 국수주의를 고집하기보다는.민족이나 개체의 특성과 환경을
존중하며 한국문화로서 끊임없이 가꾸어 나감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야기 차의 역사 ☞ 남방 차의 전래 /신라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 BACK
차를 마시는 일은 인간의 원시적인 본능에서 출발한다. 인체의 80퍼센트가 수분이어서 늘 수분 공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은 인체의 구석구석에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가려서 마셔야 한다.
차는 인간이 최초로 발견한 물을 조심스럽게 마시는 지혜였다. 원시시대의 인류는 동물과 같이 엎드려
서 수면에 입을 대고 마시기도 하고 손으로 떠서 마시기도 하였을 것이다.기구를 사용했다고 해야 속 빈
나무 줄기를 잘라 대롱을 만들어 빨아 마신 정도였을 것이다. 토기는 정착 거주 생활이 시작된 뒤에 생겨
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상고 시대에 가장 강인하고 지혜로웠던 동이족(東夷族)의 주류는 평원으로 이동하다가 좋은 물이 흘러
넘치는 한반도를 택했다.한반도의 차 생활 풍속이 이웃 나라들 보다 폭과 깊이를 갖게 된 것은 그 때문이
다.
신농선차 ( 神農仙茶 )
육우는「다경」에서 차의 연원을 신농씨로 잡았다.신농은 동방이족 (東方夷族)이라고 전해진다. 모친
여와 (女蝸)로 인신반수 (人身半首)의 신농을 낳았다.그는 섬서성 진창에서 제위에 올라 염제 신농황제
로 널리 알려졌다.
그를 염제 곧 불꽃임금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불로 물을 끓여 먹는 방법을 처음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는 음식을 불에 익혀 먹는 방법을 세상에 전했다.
신농씨는 또 농사짓는 법을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고 온갖 초목을 헤치고 다니며 수백종의 식물을 맛보아
약초를 찾아냈다. 산야를 거닐면서 하루 칠십여 가지씩 풀잎, 나뭇잎을 씹어 그 효용을 알아 보았다.
그러다가 독이 심한 것을 맛보고 중독이 되었는데 찻잎을 씹었더니 그 독이 사라졌다.신농씨는 그로부터
찻잎에 해독의 효능이 있음을 알고,이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그 이후 백성들은 약재의 효능을 알게 되고 특히 침독의 해소에 커다란 도움을 주는 차의 발견에 깊이 고
마워했다. 말년에 이르러 산동성 곡부로 도읍을 옮긴 그는 재위 120년에 타계하였는데 백성을은 신농씨
에게 감사하고자 해마다 이른 봄이 되면 처음 딴 찻잎으로 제사를 올렸다.
성이 강씨(姜氏)인 신농씨는 인류 역사에서 첫 다인 (茶人)이었다.
서기 42년에 건국된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은 즉위48년, 꿈에 계시를 받고 김해 별진포로 나갔다.
그곳에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화려한 배 한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도에서 오는 배였다. 그 배에는 아
유타국 (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과 오빠인 황태자 허보옥이 타고 있었다. 그들 역시 꿈에 계시를 받고
가야국의 김수로왕을 찾아온 것인데 그 일행이 스므명쯤이나 되었다. 그들은 여러 종류의 금,은,패물과
비단 그리고 차나무씨를 가져왔다.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대한 기록이다.
많은 국학 저서를 남긴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 에 이렇게 적었다. "김해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다. 세
상에서는 수로왕비인 허씨가 인도에서 올 때 가져온 것이라고 전한다."
일연선사의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의 이야기와 함께 가락국의 역사가 단편적으로 소개되
어 있다.
"수로왕 즉위 칠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가야의 해안에 상륙했다.왕은 그녀를 왕비로 맞이하는데
허 황후는 화려한 비단이며 금,은,주옥과 패물,노리개 들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가져왔다.
왕이 허 황후를 맞이한 다음 어느덧 나라와 집안에는 질서가 잡혀갔다. 왕이 백성을 자시과 같이 사랑하
므로 저절로 위엄이 생겨났다.
수로왕과 허 황후는 몇 년 뒤 태자 거등 ( 巨登)을 낳았다. 그러나 서기 189년 3월1일 허 황후가 세상을
떠났다. 왕비와 사별한 수로왕은 슬픔에 젖어 괴로워하다가 서기 199년에 그도 역시 눈을 감았다. 백성
들은 비통해 하며 대궐 동북방 평지에 거대한 빈궁을 축조하고 수릉왕묘라 하였다. 그리고는 그 아들 거
등왕에서부터 9대손인 구형왕에 이르기까지 330년 동안 해마다 정월 3일과 7일,5월5일,8월5일과15일에
이 무덤에 풍성하고 청결한 제를 올렸다.이 의식에는 초헌 (初獻),아헌 (亞獻), 종헌 (終獻)의 세 차례 헌
작(獻酌),헌다 (獻茶)가 있었다.
한편 허 황후의 오빠이자 아유타국의 황태자인 허보옥은 불도를 밟아 김해군 대청리에 있는 불모산 (佛
母山)에 들어가 장유사 (長遊寺)를 건립하고 일생을 수도하다기 좌면 (座眠)으로 들어가니 그의 사리와
영정을 장유암에 모셨다. 그것은 장유화상이라 하여 현재까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앞의 것은 차의 이야기요 뒤의 것은 선 (禪)의 이야기이다. 차와 선의 불가분의 관계로 보아 가야 시대
'가락국기' 는 한반도에서 차 생활의 시작을 알려 주는 기록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한국의 차나무는 이렇게 중국 전래설과 인도 전래설 그리고 자생설을 갖고 있다.
② 신라 시대 ☞ 남방 차의 전래 /신라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신라 시대 차 생활을 보여 주는 것으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충담 (忠談)의 '안민가(安民歌)에 얽힌
일화가 유명하다.
신라 경덕왕 때 국선(國仙)이자 화랑이었던 기파랑(耆婆郞)은 성품이 고결하고 인품이 좋아 남들이 감히
다를 수가 없었다. 충담은 그를 기리는 노래를 지었다.
헤치고 나타난 달
힌구름 따라 흐르니
새파란 시내에
기파랑 모습 잠기네.
일오천 ( 逸烏川 ) 조약돌에서
랑 (郞)의 지니신 마음 읽으니
아아, 드높은 잣나무가지
서리모를 그 씩씩함이여,
충담이 지은 '찬 기파랑가' (讚耆婆郞歌)는 당시의 유행가가 되었다.임금도 신하도 백성들도 즐겨 노래
했다.
그러던 가운데 경덕왕 23년 (765년 )3월 삼짇날 경주의 귀정문 (歸正門) 누상에서 예전에 없던 다회가
벌어졌다.
그 몇 해 전부터 나라 안팎에 심상치 않은 불길한 일들이 일어나더니 하루는 五岳山 三神 이 밤에 궁전
뜰에 현신했다. 경덕왕은 착잡한 마음으로 문루에 올라 근자에 괴변을 막고 나라를 잘 다스릴 방법을 깊
이 생각하다가 신하들에게 휼륭한 스님을 모셔오라고 명했다. 이에 신하들이 스님을 데리고 오자 왕은
몇 마디 나누지 않고 자기가 찾는 스님이 아니라고 돌려 보냈다. 이 때 남쪽에서 걸어오는 한 스님이 보
였다. 옷은 다 떨어진 누더기요,등에는 걸망을 짊어졌지만 왕은 이 스님을 누상으로 모셨다.스님의 걸
망 속에는 차와 다구가 들어 있었다.
"스님은 누구신가요 ? "
경덕왕이 묻자 스님은 충담이라고 밝혔다.
"기파랑을 지으신 스님이신 스님입니까 ? "
왕은 기뻐하며 예를 갖추고 다시 물었다.
"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 ? "
"소승은 3월 삼짇날과 9월 9일이 되면 언제나 남산 삼화령 (三花嶺)의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합니다.오늘
도 차를 공양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서 자기에게도 그 차를 한 잔 나누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스님은 정성껏 차를 달여 경덕왕에게 주었다. 왕은 그 맛의 휼륭함과 찻잔에서 나는 기이한 향기를 극찬
했다 . 충담은 주위의 신하들에게도 차를 나누어 주었다.
"스님께서는 일찍이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詞腦歌)를 지었는데 그 뜻이 매우 고상하여 온 백성이 즐겨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안민가 (安民歌)를 지어 주십시오 "
그러자 충담은 즉석에서 안민가를 지었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어머니요
백성은 자식이어라.
꾸물거리는 물생
천지를 의지하고 살진저
왕이 왕다웁고 신하가 신답고
백성이 백성다우면
나라는 번영하리라.
경덕왕은 크게 기뻐하며 충담을 왕사 (王師) 로 봉하였으나 충담은 사양하며 끝내 받지 않았다.
신라 경덕왕 시절은 문운의 황금 시대였다. 대렴이 당나라에서 차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는 흥
덕왕 3년 (828)년 보다도 63년이 앞선다. 충담의 기록이 아니더라도 이 때에 차가 불공에 쓰이고 궁정에
서 예폐물로 다루었다는 흔적은 「삼국유사」의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경덕왕 때의 이와 같은 기록들
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흥덕왕 3년조' 에 적힌 내용을 휼륭하게 뒷받침 한다.
"흥덕왕 3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 (大廉)이 차종자를 가지고 왔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어 왔
는데 이 때에 와서 아주 성해졌다."
이로 미루어 보면 차가 우리고유의 것이라는 주장도 가능해진다.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다는 차는 중국차
가 아닌 우리차일 수 있고 야산에 자생하던 차나무가 선덕왕 때 발견되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신라인이 자주 마시던 차를 「삼국유사」는 "전차"(煎茶)라고 전한다. 그러나 「원일록」에는 '점차'
(點茶)라고 적혀 있다. 전차란 엽차를 말하며 점차는 말차 (沫茶)곧 엽차를 갈아서 가루로 만든 차를
일컫는다. 후일의 학자들은 엽차와 말차가 함께 있었으나 엽차보다 말차가 더 성행하였을 것이라고 말한
다.
통일신라 이전에 차는 불타의 공향 (供鄕)과 승려의 마실거리로서 사찰의 귀중품이었다. 술을 마실 줄 모
르는 승려들은 술 대신에 차를 즐겼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불교가 성행했던 고구려와 백제의 차 생활 기록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고구려는 북반
부에 위치하여 차의 재배가 불가능했다손 치더라도 호남의 따뜻한 지방을 영토로 했던 백제에 차를 마시
는 습속이 없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신라의 다인으로 원효대사와 최치원이 자주 등장한다. 최치원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부귀영화를 한낱
뜬 구름처럼 여기고 지팡이를 벗삼아 방랑하며 곳곳에 많은 시와 일화를 남겼다.일찍부터 차를 즐겼던 그
는 중국에 있을 때에 인편이 있을 때 마다 고향의 부모님께 차를 보내드리는 효심을 보였다. 그의 시문집
인 「계원필경」(桂苑筆耕) 18권에는 "오래도록 고향에 가는 인편이 없어 마음 졸이던 중 본국의 사신 배
를 만나 차와 약을 사서 보냅니다."라고 적혀 있다.
신라 인들은 일정한 의식과 관계없이 생활 속에서 차를 사랑했다. 특히 국선이었던 화랑들은 산천경개
를 유람하면서 심신을 단련하는 가운에 차 생활을 즐겼다.강릉 한송정에 다조,석구 같은 술랑선도 (述郞
仙徒)의 유적이 아직 남아 있는 것도 좋은 증거이지만 「삼국사기」'열전'(列傳)에 나타난 설총 화왕계 (
花王戒) 도 참고가 될 만하다.화왕계는 왕이 차와 약으로 정신을 맑게 하고 기운을 내야 간신들을 물리
치고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신라 시대에 화랑들의 차생할이 성행했으며 이것이 삼국을 통일 시키는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음을
말해준다.
신라인들이 차를 마시는데 어떤 예법을 지켰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차는 군자의 기질과 덕을 지니고 있
다고 했고 맑은 인격과 고매한 학덕, 예(藝)를 고루 갖춘 사람을 '다인'이라 칭하는 풍습이 신라 시대에
있었다고 전한다.
③ 고려 시대 ☞ 남방 차의 전래 /신라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 BACK
신라의 차 생활은 고려로 이어지면서 불교 문화의 발전과 함께 더 널리 퍼졌고 가장 사랑받는 기호 음료 가 되었다.
특히 고려 때에는 불교가 성행하여 역대 임금이 불타의 제자를 자처 했던 만큼,임금이 손수 불공을 위한
말차 (沫茶)를 제조 했던 일도 흔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승려들이 즐기는 차는 궁중의 차가 되었고
다시 온 나라 안에 쉽게 번졌다. 모든 국가 의식에 진차 의례 (進茶儀禮,주과식선을 올리기 전에 임금께
차를 올리는 의식) 가 앞섰고 궁정에는 다방 (茶房)이라는 차 전담 관청이 생겼다. 절 주위에는 차농사를
전문으로 하는 다촌 (茶村)이 번성하여 절에서 필요한 차를 가꾸었다.
고려 시대의 차생활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자료로 흔히 「고려도경 」(高麗圖經)이 인용된다. 송나
라 사신으로 고려에 와서 한 달쯤 송도에 머물렀던 서긍의 생생한 고려 견문록이기 때문이다.
서긍은 자신이 어는 관리의 집에 초대를 받아 그 집에서 차를 대접받았던 일을 이렇게 적었다.
"초대 받은 일행이 나란히 앉자 주인의 아들이 다과를 올렸고 예쁜 젊은이가 찻잔을 돌렸다.왼손에 찻주
전 자를 들고 오른손으로 차선을 끌었다. 윗자리부터 차를 따르기 시작하여 아랫자리에 이르는 동안 조
심하여 전혀 난잡함이 없었다."
서긍은 다시 잇기를 "하루에 세 번씩 차를 내오고 차에 이어 더운 물을 내오는데 고려 사람들은 더운 물
을 약이라 하며 손님이 그 차를 다 마시면 기뻐하고 다 마시지 않으면 주인을 방만히 여김이라 하여 불
쾌함을 나타낸다. 그래서 억지로 차를 마신 적이 여러 번이었다."고 술회했다.
「 고려도경 」에는 차 이야기가 이밖에 많다
"고려의 차는 맛이 쓰고 떫어 입에 넣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고려인들은 납차 (臘 茶)와 더불어 송나라의
용봉사단(龍鳳賜團)을 귀히 여긴다. 용봉사단은 송나라 궁중에서 쓰는 고귀한 차로 국제 예물로 오기도
하지만 부족하여 상인을 통해 구입하기도 한다. 고려 때에는 신라 이상으로 말차가 성행했다. 말차를
만드는 기구는 연다마 (硏茶磨) 또는 다마 (茶磨) 라고 불렀다. 그것은 돌로 만든 풀매 종류이나 생김새
는 풀매와는 달랐다. 고려인들은 다마에 고형차를 갈아 가루로 만든 다음 끓는 물에 넣어 마셨다. 기록
에서 돌로 만든 둥근 바퀴를 한팔로 돌리는 광경이나 "풀매를 천천히 돌릴 때마다 옥가루가 쏟아진다"
는 말차를 만드는 모습을 적은 것이다.
물론 요즈음처럼 찻잎을 갈아 분말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찻잎을 쪄서 일단 고형차 (떡차)로 만들어 저
장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다마에 갈아 가루로 만들었다. 고려 성종 8년,최승로의 죽음을 슬퍼하
며 왕실이 보낸 부의에 뇌원차 200각 (角) 이 있었다.문종 때에는 여든 살이 넘은 국로에게 왕실에서 뇌
원차 30각씩 하사했다고 「고려사」가 전한다. 이는 떡차였기에 양을 말할 때 근이나 각으로 표시했다.
고려 시대의 일품차로는 유차 (孺茶)를 빼 놓을 수 없다. 유차는 글자 그대로 어린차라는 뜻이니 작설차
보다도 더 작은 잎이었던 것 같다. 이른 봄 자설 속에 싹튼 새순을 따 만드는 차라 그 향기와 맛이 일품
이었다. 경남 화개 지방 같은 곳에서 따서 정제하여 바로 왕실에 진상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좀처럼
구할 수 없었지만 가끔 큰 승려에게 하사하는 경우가 있어서 다인이자 풍류시인이었던 이규보가 이런
시를 남기게 했다.
인생의 온갖 맛을 즐김도 귀중하니
사람이 사람을 도와 절후 (節候)를 바꾸네
봄에 자라고 가을에 성숙함이 당연한 이치이니
이에 어긋나면 그것은 괴상한 일.
그러나 근대의 습속은 기괴함을 좋아하니
하늘마저 인정의 즐겨함을 따르는 구나.
시냇가 찻잎사귀 이른 봄에 싹트더니
황금 같은 여린 움 눈 속에 자랐네
남방 사람 맹수도 두려워 하지 않고
험난한 무릅쓰고 칡덩쿨 휘어 잡아
간신히 채차 하여 불에 쪄 단차 (團茶)를 만드니
남보다 앞서 임금님께 드릴 진품
선사는 어디에서 이런 귀중품을 얻었는가.
손에 닿자 향기가 코를 찌르고
활활 타는 화롯불에 손수 차를 달여 보니
꽃무뉘 자기에 따라 빛깔을 자랑하네.
입에 대니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
마치 어린 아이의 젖내와도 같아
부귀의 가문에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을
우리선사 이를 얻음이 괴상하고 괴상하구려
남방의 아이들 선사의 처소 알지 못하리.
찾아가 맛보고 싶은들 어이 알려 줄손가.
이는 아마도 구중궁궐에서
고덕한 선사를 대우한 예물인 것을
임금님의 봉물 (封物)중사 (中史) 편에 보내 왔겠지.
나는 세상살이 모르는 쓸모없는 나그네.
좋은 혜산천 (惠山泉)의 물을 감상하긴 했지만
평생 불우하여 만년을 탄식했는데
일품을 감상함은 오직 이것뿐인가 싶네.
이 귀중한 차 마시고 어이 사례 없을손가.
공에게 맛있는 봄술을 빚기 권하노니
차 들고 술 마시며 평생을 보내면서
오며가며 풍류 (風流 )놀이 시작해 보세
이것은 이규보가 운봉에 사는 고승 노규선사 (老珪禪師)로부터 지귀한 유차를 선물 받자 몹시 기뻐 온
갖 찬사를 써서 지은 장편의 유차 예찬시인데 찬찬히 음미하면 고려 새대 차 생활의 풍토를 선명하게
그려 보임임을 알게 된다.
고려 시대에는 거리에 다점 (茶店)이 있어 일반 백성에게 차를 팔았다.주점과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백성들은 약간의 돈을 내고 차를 마시며 휴식을 했다. 다점에서 차를 상품으로도 취급했다. 근세 국학자
인 문일평이 「차고사」(茶故事)에서 "고려의 차는 진일보하여 상품으로 매매할 만큼 수요 공급의 관계
가 보편화하였고"라고 적은 것도 좋은 예려니와 고려 목조이 시중 (侍中) 한언공 (韓彦恭)의 상소를
보고 내린 전교의 요지도 확증을 주는 자료이다.
"시중의 상소를 보니 지금 선조에 이어 돈만 통용되고 거친 베의 상용를 금지시킴으로써 백성들의 원망
을 산다고 한다. 앞으로는 다점,주점 같은 각종 상점에서 물건을 매매할 때 돈도 사용하지만 백성들이
개인적으로 거래를 할 때엔 돈 아닌 토산품도 사용하게 하라."
차 생활이 어디까지 일반화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인들은 인생과 차를 자연스럽게 노래하며 정신
적인 풍류를 누렸다.
④ 조선시대 ☞ 남방 차의 전래 /신라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 BACK
고려 시대까지 그렇듯 풍성하던 차 문화가 조선조로 접어들면서 갑작스럽게 쇠퇴하는 현상을 보인다.
주자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이 숭유억불 정책을 펴자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걸었고 차의 수요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 이유만으로 온 나라 온 백성이 생활속에서 즐기던 차가 갑작스럽게 쇠퇴하였다
는 데에는 의문이 남는다.
조선 시대에 새로 국교로 등장한 유교의 경전, 곧 주자학이 차 문화의 직접적인 쇠퇴 원인이라고 단정
하는 것은 무리이다. 주자의 사상이 바로 차 생활을 통해 닦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주자는 중국 안징성 자원현이 고향으로 그곳은 지금도 차의 본고장으로 불리고 있다.그는 복건성 무이
산에 있는 문공서원 (文公書院)에서 그의 철학을 완성했는데 그곳의 다풍은 매우 검소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주자는 스스로 제정한 「가례」(家禮)속에 차례 (茶禮)로써 조상께 제를 올릴 때의 의례를 담
았다. 말하자면 주자학의 도입이 차의 쇠퇴 동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쇠
퇴와 함께 차도 쇠퇴하였다는 사실은 차의 생산이 사원의 주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
다.
차 문화가 단절되었다고는 하나 고려 때에 성행했던 음차 풍습의 흔적은 곳곳에 많았다. 무엇보다 고
려 시대의 차공 (茶貢)이 조선 중엽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사실은 성종 때의 문신 김종직의 글에
나온다.
"함양에 부임하여 보니 함얃군에서는 나지도 않는 차를 해마다 백성들에게 부과하여 백성들은 멀리
전라도에 가서 비싼 값에 차를 구해온다. 쌀 한 말에 차 한 홉의 비율로 사온다. 그 폐단을 알고는 백성
들을 몰아치지 않고 관에서 구해 상공 (上供)하였다. 내 일찍이 삼국사를 읽었으되 신라 때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얻어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기록을 보았는데 함양이 지리산 아래이니 어찌 신라 때의 것이
남아 있지 않으랴 생각되어 늙은이를 만날 때 마다 물어 보았다.
그결과 엄천사 (嚴川寺)북쪽 대나무 숲에서 차나무 몇 그루를 얻었다
나는 몹시 기뻐서 곧 그곳에다 다원을 설치하고 근방에 있는 백성들의 밭을 다 사서 관전 (官田)으로
보상해 주었다. 몇 해가 안 가 차나무는 잘 번식해서 다원 안에 가득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차의 부세가 함양군에까지 있었으니 그 아래 지역에는 모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특히 호남 지방에 가면 값이 비싸기는 해도 얼마든지 차를 구할 수 있었다. 조선의 숭유 정책
에 밀려 불교와 함께 스러졌다기 보다는 조정에서 생산을 장려하지 않고 착취만을 일삼았기 때문에
차 문화가 쇠퇴하였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다시 (茶時)를 지키는 풍속도 있었다. 사헌부 관원들이 공정한 판결을 위해 매일 매일
일정한 시간에 모여 차를 마시며 의논하였는데 그것을 다시라고 했다.이러한 풍속은 관리 사회뿐만이
아닌 선비 사회에도 있었다. 조선 사회에는 또 야다시 (夜茶時)라는 은어가 있었다. 재상 이하 누구든지
간사하거나 부세를 많이 거두고 백성을 해치거나 재물을 탐내는 사람이 있으면 여러 감찰들이 야다시
를 이용하여 그 사람의 집 근처에 가서 죄를 논하고 흰 판자에다 한 내용을 적어서 그 집 문위에 걸었
는데 이 야다시를 당한 사람은 다시는 의관 반열에 들지 못하는 기물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이 때 차 생활사에 일대 혼돈을 주는 기록이 있으니 명나라 장수 양호에 얽힌 일화이다.
임진 왜란 때에 원군을 이끌고 온 그는 남원에 주둔할 당시 토산차를 발견하고 선조대왕께 진정했는데
그 일문 일답에서 당시의 조선 왕실에 음차 풍습이 없었음을 알려준다.
남원에서 차 두 포를 구한 양호가 그것을 선조대왕께 보이며 진정을 했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차는 남원에서 난 것으로 그 품질이 상품입니다. 귀국에서 이와같이 좋은 차가 있는데 어찌 마시지
않습니까 ? 이 차를 요동에 가져다 팔면 열 근에 은 1전을 받을 수 있으니 차를 팔아서 일 년이면 만여
필의 전마 ( 戰馬 )를 남깁니다."
양호의 진정에 선조대왕은
"조선의 습속이 본래 차를 마시지 않소. 남원의 것은 육안차 (陸安茶)의 종류가 아닌 작설차요."
"이것도 차입니다. 귀국에서는 인삼을 즙을내어 마시는 데 그것은 약이지 차가 아닙니다. 인삼차를
마시면 가슴이 답답해져 차를 마셔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만 못합니다. 귀국의 신하들에게 차를 마시게
하면 몸과 마음이 열기고 기운이 나서 모든일을 절 해낼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에 선조는 여러 신하를 별전에 불러 양호와의 다담을 옮기며 신하들의 의견을 물
었는데 정탁이란 신하가 " 이는 참으로 모욕적인 말입니다.차를 위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 일을
잘 경영하지 않는다고 빗대서 하는 말입니다. 태만한 성질이 어찌 차 마시는 것으로 고쳐질 수 있겠습
니까 ?' 라고 했다.
"이는 「조선 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에 있는 이야기이다. 당시 남원에서 차가 생산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남쪽 지방 일대에 차세 (茶稅)가 있었다는 것과 다시 유속과는 상반되는 기록이다.
차나무가 야생하는 남방 지역의 백성들이 고려 후기와는 또 다른 특별한 고초를 겪는 것은 임진 왜란
때에 비롯되어 병자호란 직후에 절정을 이룬다. 전쟁에 패한 뒤 청나라가 요구한 세폐에는 조선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양의 차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차가 조직적으로 생산되기는커녕 거의 잊혀져 가던
때에 차를 마련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백성들이 차밭을 불질러 버리는 사태가
곳곳에서 빚어 졌다.
☞ 남방 차의 전래 /신라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 BACK
바로 이즈음에 인삼즙,쌍화탕,결명자,구기자,같은 그 때까지 약으로 전래되던 탕과 즙이 「동의보감」
에 힘입어 차의 대용품으로 민간에 퍼졌고 차는 종적을 감춰 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고려조에 비해 조선 시대에 차 생활이 비록 쇠퇴하였다고는 해도 완전히 단절되었
던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차는 전래적인 성격으로나마 민간에 이어져 내려왔고, 그래서 차를 마시지 않으면 대화도 생활도 건
조해지는 타성이 대용차 시대를 열게 했던 것이다. 임진 왜란. 이후 1805년에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인
강진에서 차 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까지 가야,신라 시대부터 민족이 애음하던 차는 깊이 숨어
그 맥조차 끊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1806년 신유사옥으로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된 지 네 해째 되는 을축년 가을 정약용은 혜장선사를 만난
다.
갇힌 생활에서 조금 자유로워진 정약용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마을 노인 한 분을 앞 세우고 삼십리
쯤 떨어진 도암리에 있는 만덕산 백련사를 찾아간다. 그곳 주지인 젊은 스님이 학식이 높은 선비가 있
다는 소식을 듣고 한번 보고 싶다는 기별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백련사에서 혜장을 만난 정약용은 목례를 나눈 뒤 스님이 권하는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시작한다.
두 사람의 화제는 불교에서 주역으로 옮겨지며 날이 저물도록 계속된다. 밤이 늦어 못내 아쉬워하며
헤어질 때 정약용은 말한다.
"차 맛이 너무 좋습니다. 다시 스님을 찾아오면 그 때도 차를 주시겠습니까.?
"역 (易) 에 밝으시니 내일 일을 익히 아시겠지요.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밤길을 걸어 처소로 돌아온 정약용은 혜장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당시 혜장의 나이는 34세로 정약용보다
꼭 십년이 아래였지만 유배 생활에서 벗 없이 오랜세월을 지내 왔던 그에게 말벗이 될 수 있는 혜장의
등장은 반가움을 넘어 충격이었다. 뜨거운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고 잠을 뒤척이고 있을 때 자정이 넘
어 인기척이 났다.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보니 뜻밖에도 손님은 혜장스님이었다. 둘은 서로 껴안고 눈
물 까지 흘렸다.
이 이야기는 강진에서 구전되고 있는데 정약용이 처음 차를 접하게 되는 것은 이 때로서 이것이 조선
역사에 차가 재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해 겨울 정약용은 혜장의 도움으로 동문 밖 주막을 떠나 강
진읍 뒤 고성사 (高聲寺)로 옮기고 그 거처를 보은산방 (寶恩山房) 이라 이름 지었다.
혜장은 이 곳에 자신의 제자를 보내 주었다.그는 늘 정약용에게 차를 달여 주었고 잔심부름도 하였다.
그의 이름은 索性 이었는데 그 때 이미 방대한 화엄경 공부를 모두 마치고, 겸하여 두보의 시를 통독했
을 정도로 학식이 있었다. 정약용이 하루는 색성에게 차 한 잔 마시기를 원했으나 보은산방의 차는 동
나 버리고 없었다. 그는 붓을 들어 소 (疏) 한 편을 단숨에 써내렸다. 소란 흔히 임금에게 써올리는 글
을 말하거니와 불가에서 죽은 사람을 위하여 부처 앞에 명부에 적는 글을 말하는데 정약용은 혜장에게
걸명소 ( 乞茗疏 )를 보낸 것이다.
나그네는 근래 차버러지가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 차의 묘한 법은 육우의 다경 3편을
모두 통달케 했고, 병든 큰 누에는 마침내 다인 노동조차 마시지 못했던 일곱 잔째를 마르게 했소 .
비록 정력이 쇠퇴했다 하나 기모경 (基母炅)의 말은 잊지 않았고, 막힘을 풀고 흉터를 없애기 위해
이찬황 (李贊皇, 李德裕)의 차 마시는 버릇을 얻었소.
윤택할진저 ! 아침에 달이는 차 에 화 (華) 가 일어나니 뜬 구름이 맑은 하늘에 희고 흰 듯하며 낮잠에
서 깨어나 달이는 차는 밝은 달이 푸른 시내에 잔잔하게 부서지는 듯하오. 다연 (茶硯)에서 차를 갈 때
잔 구슬인지 흩날리는 벽성인지 산골의 등잔불에서는 가리기 아득한데 자주뱇 어린 차순의 향내는 그
윽하고 불을 일어 새 샘물 길어다.들에서 달이는 차의 맛은 신령께 바치는 백포 (白袍) 의 맛과 같소
꽃청자 홍옥 (紅玉)의 차완을 쓰던 노동의 호사스러움을 따를 길없고 돌솥 푸른 연기의 검소함은 한비
자 (韓非子)에게 미치지 못하나 물 끓이는 홍취를 게눈, 고기눈에 비기던 옛 선비들의 취미만을 부질
없이 즐기는 사이 용단 (龍團) 봉단 (鳳團) 등 왕실에서 보내주신 진귀한 차는 이미 바닥이 났소.
이에 나물캐기와 땔감을 채취할 수 없는 병이 들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차 보내 주시는 정다움을
비는 바이오
듣건데 . 죽은 뒤 고해 (苦海)를 건너는 다리로서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 (膏液)이 뭏친 차를 몰
래 보내 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말고 베풀어 주소서.
정약용의 " 소 "는 물론 장난이다 . 하지만 그는 혜장에게서 얻은 차를 송나라 때의 황실에서 쓰던
용단 봉단에 비유했다. 그는 혜장을 차의 임금으로 장난삼아 부르면서 소를 통해 차 보내주기를 간청
했던 것이다.
실학의 대가 정약용의 글과 시는 언제나 다분히 현실적이지만 이 걸명소에는 그러한 리얼리즘이 없
다. 이 때 이미 정약용은 차의 세계에서 풍류를 즐겼던 것이다.
얼마 뒤 마을 사람들은 차나무가 많아 다산 (茶山)이라 부르는 마을 뒷산에 초당을 마련하고 그곳에
정약용을 모셨다. 마을 사람들은 다산에 사는 정 ( 丁 ) 씨라 하여 정다산 이라 불렀고 이 때부터 아예
다산을 자신의 아호로 쓰기 시작했다.
1818년 정약용의 강진 생활이 마무리되던 해에 그의 제자들이 다신계 (茶信契)를 조직한다.
귀하다는 사람들은 신의가 있다. 만약 떼지어 모여 서로 즐기다가도 흩어진 뒤에 서로 잊어 버린다면
이는 금수의 짓이다. 우리들 여나믄 사람은 1808년의 봄부터 오늘까지 형제처럼 모여 살면서 글을 읽
었다. 이제 스승께서는 북녘으로 돌아가시고 우리들은 별처럼 흩어지니 이것이 서로를 막연히 잊고
생각치 않는 이별이 된다면 이 또 한 방정맞지 않을손가. 지난해 봄 우리들은 이 일을 미리 염려하고
계 (契) 를 세워서 돈을 모았다.
사람마다 돈 한 냥을 두 해 동안 내었는데 근심되는 것은 출납이 뜻대로 바르고 쉽게 되지 않았다는 것
이다 , 스승께서는 보암의 서촌에 몇 구역의 메마른 밭을 방매 하려고 하였으나 많이 팔 수가 없었다.
이에 우리들은 서른 다섯 냥의 돈을 여행장비에 넣어 드렸다, 이에 스승께서는 서촌의 밭을 다신계라
는 이름의 계를 만드는 데 쓰도록 둠으로써 훗날 믿음을 꾀하라는 밑천으로 삼게 하셨다.
다신계절목에는 모두 18명의 제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후미에는 다산이 직접 기술한 대목도
있다. 다산은 약조에 이르기를 "매년 청명,한식 일에 오든 계원이 다산초당에 모여 계사 (契事)를 치
르는데 운을 내서 시를 짓고 연명으로 작서하여 유산 (酉山,정약용의 아들) 에게 보내라.또 곡우 때 딴
어린 차는 볶아서 엽차 한 근을 만들고 입하 때 딴 늦은 차로서 병차 (餠茶) 두 근을 만들어 시와 서찰
을 함께 동봉하여라 했고 " "가을 국화가 피는 시절에도 초당에 모여 시를 지어 보내라"고 하였으며 "봄
에 차를 따는 노역에 빠지는 계원은 돈 5전을 내서 마을 아이에게 차를 따도록 하라" 고 했다.
그리고 다산은 강진을 떠나 고향으로 갔다.18명의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자상한 훈도를 잊지 않았다.
고향에서도 다산은 저술에만 전념하다가 75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제자들의 정성은 한 해도 거름이 없
었다.
다산과 혜장 이후 조선 시대 차 생활의 맥은 추사와 초의로 이어진다. 1809년 24세 생원이 된 김정희
(金正喜)는 그 해에 동지사로 청나라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가서 당대의 큰 유학자들과 교유
하면서 경학 (經學),금석학 (金石學),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 때에 차 생활의 진수를
몸에 익히고 돌아온다.
귀국 후 그는 고증학의 도입을 시도하면서 많은 친구들에게 차 마시기를 권하며 스스로를 승설학인
(勝雪學人) 이라 칭하기도 했다. 초의가 다산의 아들인 유산의 소개로 추사를 만난 것은 이 때로서 한
양에 초대 받은 초의는 두 해 동안을 장안에 머물면서 유산과 추사를 중심으로 많은 선비들과 교분을
맺었다.
다시 해남으로 돌아온 초의는 그 후 해마다 봄이면 정성들여 차를 만들어 추사에게 올려 보냈다.
어쩌다 한 해 차를 올리지 못하면 추사는 다그치는 편지를 썼다.
"행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과천 (果川) 과 열수 ,용호 백로정 (蓉湖白露亭)으로 새 차를 보내더니 금년
에는 벌써 곡우가 지나고 단오가 가까워졌는데도 두륜산의 한 납자 (衲者)는 소식조차 없으니 어찌 된
일인가. 말꼬리에 매달아 보낸 것이 도중에 떨어진 것인가 아니면 유마병 (維摩病),중생의 아픔으 보고
부처가 앓았다는 병 )이라도 앓고 있는 것인가. 만약 더 지체하면 마조할 (馬祖할 욕질)이나 덕산봉
德山棒.몽둥이질,)으로 그 몹쓸 버릇을 징계하고 그 원인을 다스릴 터이니 그대는 깊이깊이 깨닫게나."
한 뒤에 추사는 "거듭 거듭 차 빨리 보내기를 당부하네"라고 썼다.
그렇게 추사에게 보내진 차는 한양의 지체높은 선비들에게 널리 퍼졌고 차를 마시는 자리마다 초의의
이야기가 전해 졌다.
초의는 이를 계기로 중국의 「만보전서」(萬寶全書)에서 차에 관한 기록을 뽑아 「다신전 (茶 神 傳)
을 썼다.
차나무는 적당한 곳에 종식해야 하고, 그 성질에 알맞는 자양을 주며,차를 딸 때에는 묘 (妙)를 다해
야 하고, 차를 저장할 때에는 습기가 스미지 않도록 유의하고, 물은 진수 (眞水)를 쓰고, 끓는 물은
중정 (中正)을 얻고, 수체 (水體)와 다신 (茶神)은 상화 (相和) 하고 , 신건 (神健)과 수령 (水靈)은 상
병 (相倂) 해야 한다. 이럴 때 다도는 완수되는 것이다.-
무자년 (1828년) 어느 비 오는 날 스승을 따라 지리산 칠불아원 (七佛亞院 )에 이르러 이 책자를 등초
하여 내려왔다. 곧바로 정서하여 한 권의 책으로 짜고자 하였으나 몸이 괴로워 오늘 내일 뜻을 이루
지 못하던 차에 사미승 수홍 (修洪)이 시자방에서 노스님의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그가 다도를 배우고
자 하여 정초 (正抄) 하려 하였으나 역시 몸이 편치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등초를 그대로 놓아 두
었다. 그러다.좌선하는 도중 틈틈이 짬을 내어 완성한 것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음은 어찌 군자의
일이기난 하겠는가. 총림 (叢林.승려들이 모여 좌선.경학을 수도하는 선원 )에도 조주풍 (趙州風) 도의
깊은 뜻을 널리 편 당나라 때 고승) 이 있어 이제껏 알지 못했던 다도를 탐구하고자 외람되지만 이에
초시 (初示)하는 바이다. 병인년 (1830) 중춘 (中春) 눈서린 창가에서 화로를 안고 삼가 씀
위의 기록은 초의가 「다신전」의 말미에 적어 놓은 것인데 초의는 이 「다신전」을 쓸 때쯤 더욱 차
의 깊이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6년 후 추사 김정희를 통해 알게된 홍현주 (洪顯周 정조대왕의 사위)
의 부탁으로 "동차"(東茶) 곧 "한국의 차"를 찬미하는「 동다송 」(東茶頌) 을 저술하여 다서의 불모지
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