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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世宗大王
성군(聖君) 또는 대왕(大王)이라고 호칭이 붙는 세종(世宗. 1397~1450)은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당대에 이미 ' 해동요순 (海東堯舜) '이라 불려 지금까지 비판(批判)이 금기시(禁忌視)되다시피 하였으며, 초인화(超人化), 신격화(神格化)된 부분마저 있다. 그러나 신격화의 포장을 한 겹 벗겨버린다고 해도 세종(世宗)이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儒敎政治)와 찬란한 민족문화(民族文化)를 꽃피웠고, 후대(後代)에 모범이 되는 왕이었다는 사실에 반론(反論)이 제기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조선의 4대 왕, 세종(世宗)의 이름은 ' 이도(李淘) ',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諡號)는 장헌(莊憲)으로, 정식 시호는 '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이다. 1418년 6월 3일, 조선의 제 3대 임금, 태종(太宗)은 세자 ' 이제(李悌 ..양평대군) '를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忠寧大君)을 왕세자로 삼았다.
태종(太宗)은 '태종실록(太宗實錄)'의 기록을 통해 ' 행동이 지극히 무도(無道)하여 종사(宗社)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대소신료(大小臣僚)가 청하였기 때문에 ' 세자(世子 ..양녕대군)를 폐하고, 반면에 ' 충녕대군(忠寧大君)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자못 학문을 좋아하며, 치체(治體 .. 정치의 요체)를 알아서 매양 큰 일에 헌의(獻意 ..윗 사람에게 의견을 아룀)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 '하기에 왕세자로 삼는다며 그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두 달 뒤 태종(太宗)은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 앉았다. 주상(主上)이 장년(壯年)이 되기 전까지 군사(軍事) 문제는 직접 결정하고, 국가가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정부와 6조(曺) 그리고 상왕(上王)이 함께 의논한다는 조건부(條件附) 양위(讓位)이기는 하였지만 전격적인 결단이었다.
그렇게 조선의 제4대 임금에 오른 세종(世宗)의 나이는 당시 22세, 어린 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갑자기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는 바람에 준비가 부족하였다. 집권 초기 대부분의 사안(事案)에 대하여 ' 상왕(上王)의 뜻이 이러하니 ... '또는 ' 상왕(上王)께 아뢰어보겠소 ..'라는 말을 반복해야 될 만큼 어려운 입장이었다. 엄한 아버지의 시험을 치루는 갑갑하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 세종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무섭게 공부하며 그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마련한 정권의 안정
장자(長子) 상속의 원칙이 자리잡아가던 조선 초기, 세종의 아버지 태종(太宗)은 기왕에 세자(世子)로 책봉된 양녕대군(讓寧大君)을 폐(廢)하고 궁궐 밖으로 내친다. 그리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 (忠寧大君)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충녕대군이 바로 후일의 세종(世宗)이다. 오직 정의롭고 평화로운 다음 시대를 열기 위한 용단(勇斷)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어갈 세종(世宗)에게 방해가 될만한 세력들을 찾아서 모두 극형(極刑)으로 처단한다. 아들인 세종의 왕비(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버지인 심온(沈溫)도 그 차원에서 사약을 내려 죽이고 말았다.
태종 이방원(李芳遠)은 다음 시대의 왕(王)인 세종(世宗)의 치세(治世)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을 것으로 확신이 들었을 때, 왕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태종은 52세의 나이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을 세자로 책봉하고, 불과 두 달만에 왕위를 물려준 것이다. 병(病)도 없었다. 그리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나지만, 병권(兵權)만은 내놓지 않았다. 세종이 무서웠을까 ? 아니다. 세종이 오로지 국가경영에만 힘을 쓸 수 있도록 세종을 뒤에서 도와주기 위해서이었다. 태종(太宗)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나면서 세종(世宗)을 불러서 말한다. ' 천하의 모든 악명(惡名)은 이 아비가 가지고 갈 것이니, 주상(主上)은 만세(萬歲)에 성군(聖君)의 이름을 남기도록 하라 '
자신의 뒤를 이을 세종(世宗)이 마음놓고, 수성군주(守城君主)로서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길을 닦아놓은 창업군주(創業君主)로서의 면모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조선의 역대(歷代) 왕(王)들 가운데 스스로 왕위를 물려준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는 왕위에 집착하지 않고, 국가의 미래를 내다보는 넓은 안목으로 세종에게 왕위를 스스로 물려주며, 뒤에서 세종을 조용히 도와준다.
조선의 역사는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싸움이었다. 그는 강력한 왕권(王權)을 세우기 위하여 신권정치(臣權政治)를 주장하는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 등을 죽이거나 몰아내고, 또한 그의 이복형제(異腹兄弟)와 4명의 처남(妻男) 더욱이 세종(世宗)의 장인(丈人)이자 자신의 사둔인 '심온(沈溫)'까지 죽이게 되는 것도 단순히 권력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조선을 굳건히 세우고자 하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 세종(世宗)의 자질을 믿고, 그가 국정을 충분히 보살필 수 있도록 외척(外戚) 세력을 배척한 것이다. 세종(世宗)의 치적(治蹟)은 아버지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이 만들어 놓은 토대위에서 꽃 피웠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책을 읽어대던 호학(好學)의 군주(君主)이었다. 세종의 독서(讀書)는 유학(儒學)의 경전(經典)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역사(歷史), 법학(法學), 천문(天文) ,음악(音樂), 의학(醫學) 등 다방면에서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쌓았다.
호학의 군주 好學의 君主
세종 스스로 경서(經書)는 모두 100번 씩 읽었고, 딱 한 가지 책만 30번을 읽었으며, 경서(經書)외에 역사서(歷史書)와 기타 다른 책들도 꼭 30번 씩 읽었다고 한다. 몹씨 추울 때나 더울 때에도 밤새 글을 읽어, 나는 그 아이가 병이 날까 두려워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하였다 그런데도 나의 큰 책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는 태종(太宗)의 말이 전할 정도이었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들은 정리하고 비교하는 능력까지 갖추었다. 사실 세종(世宗)은 그저 경전(經典)의 문구나 외워 잘난 척하는 것을 매우 경계하였다. 그 내용과 이치를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더 깊은 생각을 하라고 학자들에게 주문할 정도이었다.
1422년 태종(太宗)이 죽고 재위 4년 만에 전권(專權)을 행사하게 된 세종(世宗)은 아버지 태종(太宗)이 만들어놓은 정치적인 안정 속에서 자신의 학문적 역량(力量)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하였다. 테종(太宗)이 잡아놓은 국가의 골격(骨格)을 완성해 나가는 방법으로 세종(世宗)이 택한 방법은 매우 학구적(學究的)이다.
선현(先賢)의 지혜를 신뢰하였던 세종(世宗)은 우선 유학(儒學)의 경전과 사서(史書)를 뒤져 이상적(理想的)인 제도를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골격만 갖춰진 제도를 세부사항까지 규정해 나갔다. 작은 법규(法規)를 하나 만들 때에도, 그 제도에 대한 역사를 고찰하고 각각의 장단점(長短點)을 분석한 뒤 그 단점(短點)을 보완하는 방안, 다른 제도와의 관련성, 현재의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였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다 보니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우선 제도 연구의 기본이 되는 사서(사서)들이 부족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세종은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비롯한 사서(사서)들이 더 정확하고 풍요로워지도록 학자들을 다그쳤다. 중국의 사서도 열심히 연구하였다. 대표적인 역사서인 '자치통감(자치통감)' 완질을 구해 읽고 학자들을 동원하여 이에 대한 주석서인 '자치통감훈의(자치통감훈의)'를 편찬하였는데, 이 주해본(주해본)은 중국에서 간행된 것보다 완성도가 더 높다는 평을 들었다. 경전과 사서에서 찾아낸 제도를 적용하려면 우리 땅에 대해서도 보다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었다. 세종은 지방관들에게 각 지역의 지도, 인문지리, 풍습, 생태 등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였고, 이를 수합하여 편찬했다. 많으자료를 가행하려다 보니 인쇄술(인쇄술)이 빠른 속도로 발저하였다, 세종 치세(치세)에 인쇄 속도가 10배로 성장하였다.
태실지 胎室址
이곳에는 세종(世宗)의 태(胎)가 봉안되어 있었다. 예로부터 태(胎)는 생명을 준 것이라 하여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특히 조선 왕실은 국운(國運)과 관련이있다고 하여 태(胎)를 더욱 소중하게 다루었다. 조선 정부는 새로 태어난 왕실 자식들의 태(胎)를 묻기 위하여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이 기구에서는 태(胎)를 봉안할 명당(名堂)을 물색한 다음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그곳에 묻게 하였다.
세종대왕의 태(胎)는 이러한 절차에 따라 왕위에 오른 해인 1418년에 이곳(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에 봉안되었다. 그러나 이 태실(태실)은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적(倭賊)에 의하여 크게 훼손되었다. 조정은 선조(宣祖) 31년인 1601년에 대대적으로 이곳을 보수하였고, 영조(英祖) 10년인 1734년에는 다시 비석을 세우면서 정비하였다.
그러나 뒷날 왕실의 태실(태실)이 길지(길지)에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일제(일제)는 1929년에 조선왕조의 정기(정기)를 끊기 위해 전국에 산재(산재)한 왕실의 모든 태실(태실)을 겨이도 양주(양주)로 옮기고, 태실(태실)이 있던 땅을 모두 민간에 팔아버렸다. 이곳에 있던 세종(세종)의 태실(태실)도 이 때 양주(楊州)로 옮겨 갔으며, 지금은 그 자리에 민간인의 무덤이 들어서 있다. 다만영조(영조) 때 세운 비석(비석)과 주변에 흩어져 있는 석조물(석조물)을 통해 이곳이 세종대왕의 태실지(태실지)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세종의 형제들
세종(世宗)은 1397년, 당시 정안공(定安公)이었던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안공(定安公)이 왕세자(王世子)가 되면서 잠재적 왕위계승권자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1408년 12살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1412년, 16살에 둘째 형 '효려운(孝寧君)과 함께 대군(大君)으로 진봉되어 ' 대광보국 충녕대군 (大匡輔國 忠寧大君) '이 되었다.
그는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그는 형(형)들을 일종의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형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세자(世子)의 자리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욱 독서와 학문연구에 정진하기도 한다. 넷째 동생으로 병약(病弱)한 성녕대군(成寧大君)에게는 동기간 중 자신이 병간호를 할만큼 유난히 각별했는데, 그러나 '성녕대군'는 일찍 죽고 말았다.
실록(實錄)에는 충녕대군의 도발적(挑發的)인 행동도 기록되어있다. 충녕대군(忠寧大君)은 '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 '라는 어느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아버지 태종(太宗)에게 전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세자인 이제(李悌 .. 양녕대군)에게 ' 마음을 바로 잡은 뒤에 몸을꾸미라 '고 충고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충녕(忠寧)은 세자(世子)이자 형(兄)인 양녕대군과 관계가 악화(惡化)되었다.
그 후 1418년에 태종(太宗)이 맏형이자 동복형(동복형)인 이제(李悌 ..양녕대군)를 태종이 신하들과의 회의에서 '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無道)하여 종사(宗社)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신료(大小臣僚)가 청(請)하여기 때문에 이미 폐(廢)하였다 '라고 하며 김한노(金漢老)와 연관되는 등의 심각한 비행(非行)으로 왕세자에서 폐위(廢位)되고, 충녕대군의 학문과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황희(黃喜)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22살의 충녕대군을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고, '이제'를 양녕대군으로 강봉(降封)하였다.
부왕(父王)이 왕세자를 폐위할 것을 예감한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세자(世子) 자리를 기대하였으나, '이제'는 충녕대군에게 세자(世子)의 자리가 갈 것이니 포기하라고 하였다. 결국 부왕이 금지한 불교(佛敎)에 호감을 갖다가 심취하게 된 '효령대군'은 바로 출가(出家)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양녕대군은 경기도 광주(廣州)로 내쳐졌다.
충녕대군은 처음에는 세자(世子) 자리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 해 8월 8일 태종은 왕위를 왕세자에게 물려주고 연화방(蓮花坊)의 옛 세자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충녕대군은 이를 거두어줄 것을 여러번 청하였지만 태종의 결심이 굳건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8월 10일 조선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바로 세종(世宗)이다.
세종실록 世宗實錄
조선 제4대 왕, 세종의 재위 기간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세종의 재위 기간인 1418년 8월부터 1450년 2월까지 세종의 재위(在位) 31년 7개월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 163권 154책으로 활자본(活字本)이다. 본래 이름은 ' 세종장헌대왕실록 (世宗莊憲大王실록) '이다. 조선시대의 다른 왕의 실록과 함께 일괄하여 국보(國寶)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163권 가운데 제1 ~ 127권은 편년체(編年體)의 본문이며, 제128 ~ 163권은 오례(五禮) 8권, 악보 12권, 지리지(地理誌) 8권, 칠정산 8권으로 구성된 지(志)부분이다. 앞머리에 권별 목록이 수록되어 있으며, 제1권의 총론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세종의 성장 및 즉위 과정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행장, 지문 등이 별도로 실려 있지 않으며 명나라 예부(禮部)에 보낸 고부문(告訃文)에서 재위기간 중의 주요 치적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문종 2년인 1452년에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이 총재관이 되고 편수관 박팽년, 기주관(記注官) 신숙주, 기사관(記事官) 김명중 등 약 60명의 인원을 6방으로 나누어 각기 6, 7년간의 기사를 분담(分擔)하도록 하여 편찬을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편년체로 편집되었으며, 세종시절에 이루어진 문화정리사업을 기록하기 위하여 별도로 지(志)를 붙였다. 편찬과정에서 사신(史臣)이 황희, 최윤덕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이유로 총재관들이 내용을 고쳐 기록한 사건이 있었고, 기주관(記注官)이 사초(史草)에 기록된 재상(宰相)에 대한 일을 집안에 누설하여 문제가 된 일도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全州史庫本)만 남고 모두 소실(燒失)되자, 1606년에 다시 4부을 인출하였다.
세종은 조선시대 왕 가운데 가장 뛰어나 능력을 가졌고,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세종이 위대(偉大)한 성군(聖君)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세종은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한 어진 왕이었다.
제도, 학문, 예술의 기틀을 잡다
1422년 태종이 죽고 재위(在位) 4년 만에 전권(專權)을 행사하게 된 세종(世宗)은 태종(太宗)이 만들어 놓은 정치적(政治的) 안정(安定) 속에서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했다. 태종이 잡아놓은 국가의 골격(骨格)을 완성해 나가는 방법으로 세종(世宗)이 택하 방법은 매우 학구적(學究的)이었다.
선현(先賢)의 지혜를 신뢰하였던 세종은 우선 유학(儒學)의 경전과 사서(史書)를 뒤져 이상적(理想的)인 제도를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골격(骨格)만 갖춰진 제도를 세부(細部)사항까지 규정해 나갔다. 작은 법규를 하나 만들 때에도, 그 제도에 대한 역사를 고찰하고 각각의 장단점(長短點)을 분석한 뒤 그 단점(短點)을 보완하는 방안, 다른 제도와의 관련성, 현재의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였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다 보니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우선 제도(制度) 연구의 기본이 되는 사서(사서)들이 부족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세종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비롯한 사서(史書)들이 더 정확하고 풍요해지도록 학자들을 다그쳤다. 중국의 사서(史書)도 열심히 연구하였다. 대표적인 역사서인 ' 자치통감 (資治通鑑) '의 완질(完帙)을 구해 읽고 학자들을 동원하여 이애 대한 주석서(註釋書)인 '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義) '를 편찬했는데, 이 주해본(註解本)은 중국에서 간행된 것보다 완성도가 더 높다는 평을 들었다.
경전(經典)과 사서(史書)에서 찾아낸 제도(制度)를 적용하려면 우리 땅에 대해서도 보다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었다. 세종(世宗)은 지방관(地方官)들에게 각 지역의 지도(地圖), 인문지리(人文地理), 풍습(風習), 생태(生態) 등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였고, 이를 수합하여 편찬하였다. 많은 자료를 간행하려다보니 인쇄술(印刷術)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세종 치세(治世)에 인쇄 속도가 10배로 성장하였다.
물론 이렇게 많은 내용을 세종 혼자 연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종은 집현전(集賢殿)의 연구 기능을 확대하여, 정인지(鄭麟趾), 성삼문(成三問), 신수주(申淑舟) 등 당대의 수재(秀材)들에게 연구를 분담시켰다. 이렇게 해서 윤리(倫理), 농업(農業), 지리(地理), 측량(測量), 수학(數學), 약재(藥材)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편찬하고, 관료, 조세(租稅), 재정(財政), 형법(刑法), 군수(軍需), 교통(交通) 등에 대한 제도를 새로 정비하였다.
이 때 정해진 규정(規定)들은 나중에 조선에서 시행된 모든 제도(制度)의 기본(基本)이 되었다. 세종은 과학기술(科學技術)과 예술(藝術)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세종 초에 천문학(天文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書雲觀)을 설치하였으며, 혼천의(渾天儀), 앙부일구(仰釜日舅),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박연(朴堧)을 등용하여 아악(아악)을 정리하고 맹사성(孟思誠)을 통해 향악(鄕樂)을 뒷받침하여 조선에 적합한 음악(音樂)을 만들기도 하였다.
위대함, 애민(愛民)정신에서
세종은 백성들에게 자주 은전(恩典)을 베풀었고, 사면령(赦免令)을 빈번히 내렸으며, 징발된 군사(軍士)들은 늘 기한(期限) 전에 돌려보냈다. 노비(奴婢)의 처우를 개선해주기도 했다. 주인이 혹형(酷刑)을 가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실수로라도 노비(奴婢)를 죽인 주인은 처벌하도록 하였다. 이전에는 겨우 7일에 불과했던 관비(官婢)의 출산휴가(出産休暇)를 100일로 늘렸고,
그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었다. 더욱이 출산(出産) 1개월 전에도 쉴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왕(王)이 너무 관대하면 백성들이 요행수를 바라게 된다며 신하들이 반대하였지만, 세종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펼쳤다. 관대하고 은혜로운 왕이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도 이러한 애민정신(愛民精神)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거의 없다. 세종(世宗) 최대(最大)의 업적이면서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는지, 구체적인 창제 동기가 무엇인지, 어떠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전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세종의 단독 작품인지, 집현전(集賢殿) 학자들과의 공동작업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엄청난 반대(反對)를 예상한 세종이 비밀리(秘密裏)에 작업한 일이기에 그럴 것이다.
다만 ' 사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판단을 내린 뒤에야 죄(罪)의 경중(輕重)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모든 율문(律文)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 큰 죄(罪)의 조항(條項)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吏讀文)으로 번역하여 민간에게 반포하여 우부우부(愚夫愚婦)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나 '... 라는 세종의 말과 '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들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訟事)를 칭단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 '라고 훈민정음 서문(序文)에 정인지(鄭麟趾)가 쓴 글을 종합하여 훈민정음 창제의 실제 목적을 짐작해 볼 뿐이다.
집현전 集賢殿
1392년( 태조 원년) 7월에 제정된 관제(官制)에 따르면, 고려(高麗)의 제도를 도습하여 보문각(寶文閣), 수문전(修文殿), 집현전(集賢殿) 등이 그대로 존치되어 있었으나,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집현전(集賢殿)을 확대하여 실제의 연구기관으로 개편하였다.
집현전(集賢殿)은 학자(學者) 양성과 학문 연구를 위한 기관이었다. 집현전의 가장 주요한 직무는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경연(經筵)은 왕과 유신(儒臣)이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는 자리로 국왕이 유교적(儒敎的) 교양을 쌓도록 하여 올바른 정치를 ㅎㄹ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서연(書筵)은 장차 왕(王)이될 세자(世子)를 교욱하는 것이다.
집현전관은 외교문서(外交文書) 작성도 하고 과거(科擧)의 시험관으로도 참여했으며, 집현전이 궁중에 위치하고 있고, 학사(學士)들이 문필(文筆)에 능하다는 이유로 그들 중 일부는 사관(史官)의 일을 맡았다. 그리고 중국 고제(古制)에 대하여 연구하고 편찬사업을 하는 등 학술사업을 주도하였다. 세종(世宗)은 학사(學士)들의 연구에 편의(便宜)를 주기 위하여 많은 전적(典籍)을 구입하거나 인쇄(印刷)하여 집현전에 보관시키는 한편, 능력있는 소장 학자에게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전을 베풀었다. 이로써 수많은 뛰어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하여 배출되었다.
세종(世宗) 20년대부터 집현전은 정치적(政治的)인 역할도 수행하게 되었다. 세종은 1442년에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하여 세자(世子)가 서무(庶務)를 처결하게 하였다. 이때 첨사원(詹事院)의 관원(官員) 후보(候補)로는 서연관(書筵官)이 가장 유리하였다. 서연관(書筵官)은 모두 집현전관(集賢殿官)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집현전관'은 첨사원(詹事院)을 통해 정치(政治)에 참여하게 되었다. 1443년부터는 세자(世子)의 섭정(攝政)이 이루어졌으므로 '집현전관'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문종(文宗)이 즉위하면서부터는 '집현전관'의 정치기관으로의 진출이 늘어났다.
이곳에서 이룩한 업적은 학문(學文) 연구와 편찬(編饌)사업 등이다. 편찬(編纂)사업으로는 고려사(高麗史), 농사직설(農事直說), 오례의(五禮儀),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 삼강행실(三綱行實), 치평요람(治平要覽), 동국정운(東國正韻),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의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한국 문화사상 황금기를 이룩해 놓았다.
37년간 존속하였던 기관이지만, 조선의 학문적 기초를 닦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많은 학자적 관료를 배출하여 세종대 뿐만 아니라 이 이후의 정치, 문화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게 하였다. 후에 집현전과 같은 기능은 홍문관(弘文館)에서 대신(代身)하게 되었다. 그러나 1456년(세조 2),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핞의 사육신(死六臣)을 비롯하여 반대파 인사가 집현전에서 많이 나오자, 세조(世祖)는 집현전을 페지(廢止)하는 한편 소장된 서적은 예문관(藝文館)에서 관장하게 되었다.
세종은 즉위하자 집현전을 확대하여 실제의 연구 기관으로 개편하였다. 그 직제는 겸관(兼關)으로 영전사(領殿事) 2명, 대제학(大提學) 2명, 제학(提學) 2명과 전임관(專任官)인 부제학(副提學) 1명, 직제학(直提學) 1명, 직전(直殿) 1명, 응교(應敎) 1명, 교리(校理) 1명, 부교리(副校理) 1명, 수찬(修撰) 1명, 부수찬(副修撰) 1명, 박사(博士) 1명, 저작(著作) 1명, 정자(正字) 1명이 있었다. 그 인원은 몇 차례 변경되면서 운영되었으며 1436년 20명으로 확정되었다.
세종(世宗)은 ' 해동의 요순 (海東의 堯舜)'이라 일컬어졌고, 성종(成宗)은 '세종의 고사'를 따라 간언을 받아들이고 선비를 사랑했나이다. 세종과 성종을 따르는 것이 곧 성인(聖人)을 본받는 것이라 했습니다. 명종실록. 1548년 3월 14일
1450년 세종대왕이 훙(薨)했다. 당대 사람들은 세종의 치세(治世)를 두고 태평성대의 상징인 요순시대(堯舜時代)에 견주었다. 사실 지도자가 '요순(堯舜)'이라는 칭호를 역사서에 남기면 그처럼 영광일 수 없다. 임금이 누구인지 신경쓸 필요없이 잘 다스린 시대, 또 해뜨면 일하고 해지면 그만두면 되는 시대, 그래서 부른 배를 두드리고(鼓腹 .. 고복) 땅을 구르며 (激壤 .. 격양) 노래를 흥얼거리며 살았다는 시대... 그런 태평성대의 지도자를 빼닮았다는 소리이니 얼마나 좋은 평가인가. 후대의 신하들은 자신이 모시는 임금들에게 ' 세종대왕과, 세종을 빼닮은 성종을 본받아야 한다 '고 한 목소리를 냈다.
부족국가로 구성된 시기에 중국은 태평성세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 시기가 바로 '요순시대(堯舜時代)'이다. 요(堯)임금은 나라 이름을 당(唐)이라 하였으며, 순(舜)임금은 나라 이름을 우(虞)라고 했다. 이 '요순시대'는 중국에서 이상적(理想的)인 정치가 베풀어져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았던 태평서세로, 중국사람들은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을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숭앙하고 있다. 백성들의 생할은 풍요롭고 여유로와 심지어는 군주(君主)의 존재까지도 잊고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는 세상이었고, 정치는 가장 이상적인 선양(禪壤)이라는 정권이양방식으로 다툼이 없었다. 선양(禪讓)은 당시 가장 도덕을 갖춘 사람을 임금으로 추대하는 방식으로, 후대의 혈연(血緣)에 따라 왕위를 세습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요(堯)임금은 원래 허유(許由)가 어질고 덕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허유(許由)는 이 말을 듣고 기산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래도 계속 요(堯)임금의 또 다른 요구가 계속되자 허유(許由)는 못들을 말을 들었다고 강물에 귀를 씻었으며, 그의 한 친구는 한술 더떠서 더러운 귀를 씻은 물을 먹일 수 없다고 하며 말을 상류(上流)로 끌고갔다는 고사가 전한다. 이는 바로 당시의 태평성세를 칭송하는 전설(傳說)로 중국인의 이상적인 정치와 민생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결국 요(堯)임금은 순(舜)이라는 사람이 훌륭하다는 소문을 듣고 몇 가지 시험을 거친 후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이 시대를 요순(堯舜)시대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태평성세(太平盛勢)를 표현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요(堯)임금은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던 순(舜)을 등용하여 자신의 두 딸을 아내로 삼게 히고 천하의 정치를 섭정(攝政)하게 하였다. 요(堯)가 죽은 뒤, 순(舜)은 요(堯)의 아들 단주(丹朱)에게 제위를 잇게 하려 하였으나, 제후들이 순(舜)을 추대하므로 순(舜)이 천자(天子)에 올랐다고 한다.
해동의 요순 海東의 堯舜
해동의 요순(海東의 堯舜)으로 불리는 세종(世宗) .. 백성들을 긍휼(矜恤)히 여기는 세종의 애민정신(愛民精神)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세종 9년이 1427년, 집현전 응교(應敎) '권채(權採)' 부부가 여종을 학대한 일이 적발되었다. 허락을 받지 않고 병든 할머니를 문병갔다는 이유로 집 안에 가둬두고 구더기가 섞인 똥과 오줌을 강제로 먹였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권채(權採)와 그 아내 '정씨'는 자백 대신에 형조판서(刑曺判書)에게 책임을 돌리는 등 적반하장의 추태를 부렸다. 그러자 세종(世宗)은 장탄식하며 ' 권채 부부를 형벌로 신문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 진실로 차별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良民)과 천인(賤人)을 구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는가. 권채(權採)가 기어코 복죄(服罪)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형벌로서 신문할 것이다 '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임금의 지시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던 것일까. 그로부터 17년 후인 세종 26년인 1444년, 임금이 형조(刑曺)에 지엄한 영(令)을 내린다. 노비(奴婢)는 비록 천민(賤民)이나 다같이 하늘이 낸 백성이다. 그 어찌 제멋대로 형벌를 행하여 무고(無辜)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노비(奴婢)가 죄를 지었거나 말았거나 관(官)에 알리지 않고 구타, 살해한 자는 옛 법령에 따라 처단할 것이라고 재차 단호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이 뿐이 아니다. 죄수(罪囚)들의 인권(人權)에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각 도(道)의 관찰사들은 들어라. 올해는 유난히 더위가 심하구나. 그래서 유배형(流配刑) 이하의 죄수는 모두 사면(赦免)하라. 또 석방되지 않은 죄수는 옥(獄)에서 더위 때문에 죽게 될까 내 마음이 몹시 근심된다. 죄수들이 병나지 않게 잘 돌봐 주거라 .. 세종실록 1443년 7월12일
세종 30년인 1448년 8월 25일 세종의 유시(諭示)는 다음과 같다. 매년 4~8월까지 냉수(冷水)를 제공하라. 5월부터 7월10일까지 몸을 씻겨라. 매월 한 차례씩 머리를 감겨라. 10월부터 정월까지는 옥(獄) 안에 짚풀을 두텁게 하라. 죄수에 대한 배려는 또 있다. 옥(獄)에 갇힌 죄수 가운데 홀아비와 과부의 어린 자식들을 돌보지 않으면 아이들이 굶주리고 추워서 죽음에 이를 것이 아닌가. 지금부터는 그 친족에게 주고, 젖먹이 아이는 젖 있는 사람에게 주어라. 또 친족이 없으면 관가(官家)에서 거두어 보호하고 기르도록 하라. 잘 돌보는 지 서울에서는 사헌부,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규찰하라. 1413년 7월28일.
복역 중인 홀아비나 과부의 아이들을 국가 차원에서 돌볼 것을 지시한 것이다. 심지어 제대로 돌보고 있는지 지금으로 치면 감사원(大司憲)이나 도지사(觀察使)가 감찰하라고 특별지시하였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주상께서는 일전에 유배 중인 도형수 가운데 늙은 어버이가 있는 자에게는 휴가를 주어서 1년에 한번씩 만나보게 허락하고 그 휴가일수(休暇日數)는 모두 복역일수에 통산하라고 하셨습니다. 1444년 7월12일. 요즈음의 귀휴(歸休)제도를 이미 세종시대에 시행하였다는 것이다. 귀휴제도 자체도 대단한 일인데, 귀휴일수를 복역기간에 산입(算入)시킨다는 교지(敎旨)를 세종은 내린 것이었다.
또 있다. 세종이 관가(官家)의 여노비(女奴婢)들에게 출산휴가(出産休暇)를 대폭 늘려주었다는 소식이다. 1430년 10월 19일의 일이다. ' 옛적에는 관가(官家)의 노비(奴婢)의 출산(出産) 후 휴가를 7일 주었다. 100일 더 주어라. 또 출산 직전까지 일을 하다 보면 미처 집에 가기도 전에 아이를 낳는 경우도 있다. 산전(産前) 휴가도 1개월 더 주어라 ' 이것도 부족하였는지 4년 후에는 다음과 같이 전교한다. 산모(産母)에게 출산휴가를 주었지만, 남편에게 전연 휴가를 주지 않으니 산모(産母)를 누가 돌볼 수 있는가. 이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다니 진실로 가엾다. 이제부터는 산모의 남편도 30일간의 출산휴가를 주어라. 참으로 선진적인 성군이 아닌가.
다른 사람도 아닌 노비(奴婢)에게 출산휴가를 듬뿍 주었을 뿐 아니라 그 남편에게까지 한달간 쉬면서 부인을 간호하라고 했으니 말이다. 또 조선시대에는 중죄인(重罪人) 가운데 전가사변(全家徙邊)이라고 해서 모든 가족을 변방으로 쫓아내는 형벌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지나는 각 고을의 수령들은 죄인을 함부로 취급하고 홀대하기 일쑤였다. 세종은 ' 이들이 지나가면 각 고을의 수령들은 식량과 의복을 두둑히 공급하라'고 지시하였다. 또 ' 이들 가족이 정착하는 고을은 토지를 주어 구휼(救恤)하여 생업에 지장이 없도록 하라'는 교시(敎示)를 내렸다. 세종 18년 11월17일
과연 '해동의 요순'이었을까?
그런데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우선 세종 21년인 1439년 12월 15일의 실록을 보자. 지금 복역 중인 미결 사형수가 190명에 이르자, 임금은 ' 근래 기근(饑饉)이 겹쳐 도적이 흥행하고 분쟁이 더욱 서하여 사형수가 예전보다 배(倍)가 된다. 내가 부끄럽게 여겨 깊이 반성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종 임금은 ' 고의(故意) 살인이 아닌 과실치사(過失致死)와 전과 3범의 절도(竊盜) 등은 좀 형(刑)을 감(減)하면 어떻겠느냐 '고 의정부에 물었다. '의정부(議政府)가 법을 존중하면서 사형수의 수(數)를 좀 줄일 방안이 있는지, 그 법조문을 살펴보고 의논하라'고 하였다.
이에 영의정 황희(黃喜), 우의정 신개 등이 임금의 뜻에 따라 의논한 뒤 ' 아니되옵니다'라고 반대한다. 사람들이 모두 범죄를 가볍게 여겨 범법행위가 나로 늘어날 것이 두렵다는 이유이었다. 결국 사형수의 숫자를 감하자는 세종의 생각은 중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후대 사람들은 이 대목 또한 세종의 애민정신을 일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칭소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소홀하게 넘어가는 대목이 있다. 바로 세종 시절에 사형수(死刑囚)가 190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가 말하는 '요순시대'와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요(堯)임금 치세(治世) 때에는 ' 한 사람만 죽이고 두 사람에게 형벌을 내렸는 데도 천하가 다스려졌다'고 하였다. 나아가 ' 위엄은 엄격하지만 사용하지 않고 형벌을 두고도 쓰지 않는데 이상적(理想的)' 이라고 사기(史記)에서는 말한다.
요(搖)임금의 뒤를 이은 순(舜)임금은 정상의 형법을 기물 위에 두고 오형(五刑)에 해당되는 죄를 지은 사람은 유배형으로 낮추었다. 오형(五刑)이란 묵(墨 ..얼굴이나 팔뚝에 죄명을 문신), 의(의 ..코베기), 비(비 .. 발뒤꿈치를 자르기), 궁(宮 ..거세형), 대벽(大劈 .. 참수) 등을 말한다. 신체에 해(害)를 가하는 벌(罰) 대신 유배형으로 경감했다는 것이다. 순(舜)임금이 관리들에게 입버릇처럼 했다는 말이 있다. '신중하라. 신중하라. 오로지 형벌은 신중히 해야하느니라 .. 欽哉 欽哉 惟刑之靜哉
이런 측면에서 사형수를 190명이나 만든 세종(世宗)은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할까. 또 살펴보아야 할 반전(反轉)의 기록들이 있다. 세종시대에는 특별히 도둑이 창궐하였나 보다. 서울 한복판에서 도둑을 맞는 집이 없는 날이 없고, 이를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거리 위에 들립니다. 이제는 내탕(內帑)의 금작(金爵)과 봉상시(奉常寺)의 은찬(銀瓚)까지도 털리니 .. 이들을 잡아도 장(杖) 몇 대나 자자형(刺字刑 .. 얼굴에 죄명을 새기는 벌)에 불과합니다. 죄를 받은 그 날부터 인명을 잔해하고 물건을 약취해서 온 백성이 이를 원망하며, 그 고기를 씹고자 해도 어쩔 줄 모르고 .. 세종실록 1435년
도적떼의 고기를 씹고 싶을 정도..이었다니 얼마나 포악한 도적들이 들끓었다는 것인가. 게다가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탕고(內帑庫)에서 금으로 만든 술잔인 금작(金爵)이, 제사를 관장하는 봉상시(奉常寺)에서 제기(祭器)까지 잇달아 털렸다니 오죽했던 것일까. 도둑이 창궐하는 세태를 개탄한 대신들이 다음과 같이 계책을 낸다. 활민서를 보면 송(宋)나라 때 흉년이 들자 도적떼가 나타나 마을 백성들을 결박하고 쌀을 빼앗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한쪽 발의 힘줄을 끊는 단근형(斷筋刑)의 벌을 내렸습니다. 단근형(斷筋刑)은 팔다리를 끊는 것이 아니라, 그 억세고 날랜 힘만 꺾을 뿐입니다. 그러니 생업에는 방해되지 않습니다. 1436년.
요컨데 다시는 도적질을 하지 못하게 발뒤꿈치 힘줄을 끊어버린다는 것이었다. 세종은 고심 끝에 이 형벌안을 추인하고 말았다. 하지만 발뒤꿈치 힘줄을 끊는다고 도둑이 근절(根絶)되었을까. 물론 아니었다. 1년 뒤인 1437년 7월 21일 형조(刑曺)는 ' 단근형(斷筋刑)을 당한 뒤에도 절도하는 자는 다리 양쪽의 힘줄을 모두 끊도록 하자 '고 건의하였다. 세종은 형조(刑曺)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불과 한달도 채 되지 않은 8월12일 힘줄이 끊겼는데도 걷거나 달릴 수 있는 전과자의 힘줄을 다시 끊게 하였다. 힘줄을 끊겼는 데도 달리고 걷는 자가 있사옵니다. 율문 보자례(補刺例)에 따라 다시 끊어야 합니다. 단근(斷謹)하였을 때의 관리와 옥졸(獄卒)이 다시 걷거나 뛰는 전과자들의 힘줄을 다시 끊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역시 도적질은 끊이지 않았다. 2년 뒤인 1439년의 실록을 보자. 의정부(議政府)가 두 번째 힘줄을 끊긴 뒤에도 도적질하는 자가 퍽 많습니다. 단근(斷筋)의 입법취지는 힘줄을 끊음으로써 종신(終身)할 때까지 폐인(廢人)이 되어 도적질하지 못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과자들은 힘줄을 끊긴 지 두어 달 만에 또 도적질을 합니다. 지금부터는 왼발의 전근(前筋)을 끊어서 시험해 보게 하소서. 세종(世宗)은 의정부의 상소(上疏)를 따랐다,. 세조와 성종 등도 단근형(斷筋刑)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였다. 오히려 세조와 성종에 이를수록 단근형에 대한 법이 촘촘해지고 엄중해졌다. 어찌되었건 단근형(斷筋刑)은 오히려 약소한 편이었다. 다음 실록의 기사를 보자. 사노(私奴) 매읍동이 본주인을 때려 죽였으므로 능지처사(陵遲處死)시켰다. 1418년... 형조(刑曺)가 함길도 북청의 여자 '금슬'이 간부(姦夫) 정인중과 더불어 본남편과 시어미와 딸을 죽였사오니 모두 형률(刑律)에 따라 능지처사(陵遲處死)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439년
능지처사(陵遲處死) .. 위의 글은 모두 세종시절의 기록이다. 세종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씨를 발휘하면서도 능지처사의 끔찍한 형벌을 내린 것이다. 물론 죄질(罪質)에 따라 형벌은 다를 수 있다. 또 그래야 질서가 바로 잡힌다. 따라서 법대로 처단하되, 인정을 발휘하는 이른바 '실질적인 법치주의자'라는 이름을 얻을만 하다. 그러나 능지처사(陵遲處死)라는 벌(罰)은 극형 중의 극형이다. 능지(陵遲)는 말 그대로 산이나 구릉(丘陵)의 완만한 경사이다. 그러니까 '능지처사'는 되도록이면 천천히 고통을 극대화하면서 사형에 처하는 극형(極刑)인 것이다.
문제는 해동(海東)의 요순(堯舜)이자 백성을 사랑하였던 세종시절에 '능지처사'를 받은 이가 60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세종실록'에는 능지처사, 능지처참, 거열(車裂) 등의 표현을 찾아보면, 능지처사 51명, 능지처참 7명, 거열 2명이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모반대역(謀叛大逆)이나 불충한 말을 한 죄인은 단 2명에 불과하였다. 절대다수는 주인을 죽이거나 부모와 남편 등을 살해한 강상죄인(綱常罪人)들을 벌한 것이다. 세종이 도둑을 잡는다고 힘줄을 끊는 단근형(斷筋刑)을 만들고, 공공연히 사람의 사지(四肢)를 찢는 능지처사를 시행하였다는 것을 어찌 보아야 할까.
세종은 조선시대 왕 가운데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세종이 위대한 성군(聖君)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능력 때문 만은 아니다. 세종은 백성을 사랑한 어진 왕이었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도 이러한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대하여는 전(傳)하는 기록이 거의 없다. 세종 최대의 업적이면서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는지, 구체적인 창제 동기가 무엇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었는지 전하지 않는다. 심지어 세종 단독 작품인지 집현적 학사들과의 공동 작업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엄청난 반대를 예상한 세종이 비밀리에 작업한 일이기에 그럴 것이다. 다만,
사리(事理)를 잘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파단을 내린 뒤에야 죄(罪)의 경중(輕重)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다 율문(律文)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 큰 죄(罪)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吏讀文)으로 번역하여 민간에게 반포하여 우부우부(愚夫愚婦)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 ...라는 세종의 말과
그러한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訟事)를 청단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 라고 훈민정음 서문에 정인지(鄭麟趾)가 쓴 글을 종합하여 훈민정음 창제의 실제 목적을 짐작해 볼 뿐이다.
세종(世宗)이 한글을 만들 때에는 '훈민정음 (訓民正音)'이었는데, '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소리는 글자와 통한다. ' 바른 '이라는 꾸밈말을 붙인 이유는 한자를 빌려 쓰는 것과 같은 그러한 구차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글자라는 뜻이다. '훈민정음'은 바로 이 이름을 쓴 책이고 그밖의 여러 문헌에도 이 이름은 많이 쓰이고 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사실이 기록에 나타나기는 '세종실록' 25년(음력 1443년)이다. 그해 12월조에 ' 이달에 임금께서 몸소 언문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내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한다.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 是謂訓民正音' 이라는 기록이 있다.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한글이 만들어진 것은 1443년 음력 12월이다. 그러나 이때에 아직 책(冊)으로서 국민에게 반포되지 않았던 듯하여 '세종실록' 28년(1446년) 병인 9월조에 ' 이 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졌다. 是月訓民正音成 '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것은 '훈민정음'이라는 책이 만들어진 것을 말함이니, 1443년 음력 12월에 일단 완성된 훈민정음 글자를 다시 다듬고, 그 자세한 풀이를 하여 '훈민정음'이라는 책으로 내기는 1446년 음력 9월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40년 7월에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크트머리에 붙인 정인지(鄭麟趾)의 글에 ' 正統十一年九月上澣, 臣鄭麟趾 拜手稽首謹書 '라는 말로 보아 더욱 분명해지는 일이다. 정통(正統) 11년은 1446년이다.
영릉 영릉
세종대왕은 1418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在位) 32년만인 1450년 54세를 일기(일기)로 승하하였다. 그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는 4년 전인 1446년 먼저 죽은 후 경기도 광주(廣州)에 묻히며, 그 곁에 따로 우실(右室)을 만들어 놓아 세종(世宗)의 사후(死後)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세종(世宗)이 죽은 후 미리 준비한 이 우실(右室)에 묻히게 되었다.
세종이 죽은 후 조선에는 좋지 않은 일이 계속되었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文宗)은 즉위 2년 만에 죽고, 그 아들 단종(端宗)은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쫒겨나 결국 죽음을 당하는 등, 크고 작은 사건이 많아 세조(世祖)는 세종(世宗)의 능(陵)이 길지(吉地)가 아니라면서, 천장(遷葬 .. 왕릉의 이장을 천장이라고 함)을 검토하지만, 서거정(徐巨正) 등 신하들의 반대로 좌절된다.
영릉가백년 寧陵可百年
세조(世祖)가 죽고 예종(睿宗)이 즉위하면서 다시 천장(遷葬)이 거론되었다. 1468년 예종(睿宗)은 노사신(盧思愼), 서거정(徐巨正) 등 신하를 여러 곳에 보내어 천장(遷葬)할 곳을 물색하도록 명하였다. 광주(廣州), 이천(利川) 그리고 여주(驪州)의 땅을 보고 돌아온 신하들은 예종(睿宗)에게 보고한다. 이계전(李季甸)의 무덤이 있는 곳이 자손이 번창하고,만세(萬歲)에 업적을 계승할 땅입니다. 세종(世宗)을 모실 장소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습니다 '
이 보고를 받은 '예종(睿宗)'은 결심하고 이계전(李季甸)의 후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지금의 이곳으로 천장(遷葬)을 추진하였다. '이계전'의 후손들은 벼슬을 높여 주었다. 이계전(李季甸)의 후손(後孫)들이 이장(移葬)을 하려고 산소를 파서 유해(遺骸)를 들어내니, 그 밑에서 글을 새겨 넣은 작은 비석(碑石)이 나왔다.
그 비문(碑文)에는 ' 여기서 연(鳶)을 날리어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이 연(鳶)이 떨어지는 곳에 이 묘(墓)을 옮겨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여러 후손들이 신기하게 여기어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연(鳶)은 바람에 날리어 약 10리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곳으로 이장(移葬)하였고, 자손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연(鳶)이 떨어진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이 '연주리'가 되었다. 영릉가백년(英陵可百年)이라는 말이 있는데, 세종(世宗)이 이곳에 묻힘으로써 조선(朝鮮)의 역사(歷史)가 100년 더 연장(延長)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세종대왕기념관 세종대왕기념관
세종(世宗)은 재위(在位) 초반에 장녀(長女) 정소공주(貞昭公主)가 요절(夭絶)하고, 재위 후반에는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이 잇따라 요절을 하게 되어,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탄에 빠졌고, 곧 불교(佛敎) 사찰을 찾아단며 이들의 명복(冥福)을 비는 등 불사(佛事)를 주관하기도 했다.이어 소헌왕후(昭憲王后)마저 승하하면서 그는 생애 후반 불교(佛敎)에 귀의하게 된다.
세종의 말년
조선의 건국 이념은 유교(儒敎) 성리학(性理學)이었기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셋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불사(佛事) 중창(重創)과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먼저 죽은 가족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太宗)의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國政)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악화되었다.
중풍(中風), 임질(淋疾 .. 지금의 요로결석), 노안(老眼) 등 각종 질병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몰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世子) '향(珦 .. 후일 문종)' 의 섭정(攝政)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세종의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결국 1445년부터 세자 '향(珦 ..후일의 문종)'에게 섭정(攝政)하도록 하였다. '세종실록'을 보면, 집권 후반부에는 이러한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溫泉)에 행차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세종이 걸린 중풍(中風)은 현대의학 용어로는 뇌경색(腦硬塞)과 뇌출혈(腦出血)을 포함하는 용어로서, 뇌경색(腦硬塞)은 비만(肥滿)으로 인한 혈관 내 콜레스테롤 수치 증가로 인하여 발병하며, 뇌출혈(腦出血)은 뇌경색 직전인 상화에서 고혈압이 있으면 발병하게 된다. 1450년 음력 2월 17일(양력 4월8일) 5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450년 음력 2월 17일 (양력 4월 8일), 세종(世宗)은 54세를 일기로 승하(昇遐)하였다.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종(文宗) 원년 3월 10일, 시호(諡號)를 '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英文睿武人聖明孝大王) '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세종(世宗)'이라고 정하였다. 5월 21일 좌의정 황보인(皇甫仁)이 길복(吉服)을 입고 빈전(殯殿)에 나아가서 시호(諡號)의 책보(冊寶)를 올렸는데, 그 시책(諡冊)은 다음과 같다.
세종(世宗)은 죽어서도 부왕(父王)인 태종(太宗)의 곁에 있고자 하였으나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손자인 예종(睿宗) 시절에 경기도 여주(驪州)로 천장(遷葬)되었다. 그러나 천장(遷葬) 후 1년도 안되어 예종(睿宗)이 갑자기 사망하여 흉지(凶地)가 아니냐는 논란이 나왔으나 곧 무마(撫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