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천공에 무척 흥미롭게도 이런 상태는 때때로 며칠씩 가기도 했으
며, 그리고는 종묘 초헌관 차례가 되어 왕가의 후손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배천공은 그것이 그저 시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세종대왕의 자손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며
그 선조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 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배천공
은 창가에 서 있기가 힘들면 몸을 돌려, 보료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와
가구 넘어 열린 창문을 통해 앞동산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그는
타향의 외로움에서는 벗어났지만, 왕가 후손다움과 자기자신과 합천
이씨에 관해서는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7일 동안 시경(詩經)이 주장하는 대로 앞동산을 거닐며 중용
(中庸)의 산책을 하고 부모님의 농사를 도우며 시간을 보냈다.
배천공은, 중매한다던 구터에서 7일이 지났어도 아무 소식이 없어
광범위한 전주 이씨(全州李氏) 대관(大觀)을 읽었다. 읽으면서 아주
생소하고 부분적으로 아주 중요한, 바로 우리의 의자나 책상 같은 형
태를 지닌 역사나 인물은, 자신의 욕심과 이기주의와 나태를 극복한
산물이었는데,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관된
신념 속에 부단히 정진하고 노력한 대가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연산군 말기 채홍사(採紅使)는 한마디로 임사홍의 권력 욕심
이 부린 정신적인 타락에 대한 죄를 열거해 놓은 것이어서 그 부분을
읽는 내내 역겹고 불편해 배천공은 책을 내려놓고 창 밖을 바라보다
가 다시 책상으로 돌아갔다.
봄, 아침인데도 무척 쌀쌀했으며, 그의 마음은 책을 막 읽고 난 후라
시계의 태엽이 감겼다가 풀렸다가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밖에 인기
척이 시계 가는 소리처럼 들려왔지만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구별하
기 힘들었다. 잠시 후 그는 창문을 열고 그 인기척을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기분을 느꼈다. 사람의 발길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 꿈일까? 정일까?
사랑일까? 그리고 인생, 그것은 무엇이기에 정원에 목련은 활짝 피어
아름답지만 때가 되면 떨어져 사라져가는 것처럼 소멸하는 것들의
표면을 비추며 지나가는 빛과 같아야 하는가?
그는 오랫동안 이러한 실체들의 거대한 무랑 억겁(無量億劫)을 의식하
며 앉아 있었고 시계는 그게 인생(人生)이라는 듯이 똑딱거리고 있었다.
“똑똑.”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의식을 깨트리자 그는 “들어
오세요.” 기계적으로 말을 했다. 문은 아주 천천히 열렸고, 뜻밖에 어머
니가 합천이씨 그녀의 사주단자(四柱單子)를 내밀었다.
배천공은 믿기지 않은 듯 그 사주단자를 큰소리로 읽어보고는 배천공
은 어머니께 깊이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인사는 구터 한 사장님께 해야지.” “네 그분께도 감사하고 어머니 아
버지께도 감사드립니다.”
“사주단자 그 안에 무엇을 발견했기에 그리 놀라고 기뻐하는지 궁금
하구나?”
배천공은 그 사주단자를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이번에는 그 글이 헛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글자 하나하나가 놀랍도록 명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후부인 될 합천이씨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敎理) 유(迪)님의 4대손이며,
선비 정간(廷幹) 님의 따님으로 선조 36년 계묘(1603)년 생으로 나이는
20세이고 배천공 어언 34세인데 이렇게 어리고 참한 분을 아내로 맞을
생각을 하니 뛸 듯이 기뻤다.
이 결혼은 얼마 전 아버지 후천공에서 구상된 것으로 이것은 배천공에
는 아주 만족스럽게 오늘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겼으며, 자신에게도 이
런 실질적인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 몹시 기뻐하고 있었다. 그 이후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리고 그해 봄 배천공은 한번 혼례를 치른
경험 때문인지 별로 긴장하지 않았다. 태연스럽게 혼사를 치렀다.
후부인 합천이씨는 늘 시아버지 후천공과 지아비인 배천공을 하늘처럼
떠받치는 부덕(婦德)한 분이셨으며, 어려울 때나 기쁠 때나 늘 곧고 아름
다운 지조를 지닌 절조(節操) 있는 분이었다.
그래 배천공도 어린 아내를 늘 알뜰살뜰 챙기며 매안에서 10달 넘게 신혼
생활을 했지만, 자녀가 없었다. 그래도 배천공은 저녁이면 따스운 물을
대야에 떠다가 부인의 발을 씻어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안채 부모님께
아침 문안 인사드리려 갈 때도 혹여 넘어져 다칠까 봐 꼭 손을 잡고 갔다.
그러나 배천공은 늘 생가(生家)가 황해도 배천 천리 먼 곳에 있어, 친아버
지를 비롯한 형제자매와 친척들을 자주 찾아뵙지 못한 그것이 항상 안타
까웠다. 그러던 중 이씨 부인과 재혼 하자, 그 사실을 고향 조상님들께 알
리기 위해 배천을 다녀오기로 했다.
배천으로 귀성하는 날이 밝아왔다. 배천공은 축시가 되자 부인을 깨웠다.
그리고 어젯밤에 적은 짧은 서찰을 건네줬다.
猫头鹰 猫头鹰 猫头鹰 哭泣 부엉이 부엉부엉 곡위
花無一語紅開夜 화무일어홍개야
月有多情白照林 월유다정백조림
木末搖時天角客 목말요시천각객
銀光去處故鄕心 은광거처고향심
부엉이 부엉부엉 울던 자리...
꽃이 말없이 붉게 피어나는 밤.....
달이 정이 많아 하얗게 비추는 숲.......
나무 끝 흔들리는 때 하늘 모서리 나그네에게
달 빛 가는 곳은 고향을 그리는 마음....
그리고 ................................................
我是世宗大王的后裔。나는 세종대왕의 후예.
你的爱是对我的,그대의 사랑은 나를 향한 것,
你是我的船,灯塔 그대는 나의 배, 등대
为了你的幸福 그대의 행복을 위해
明辈子尽最大努力 내 일평생 최선을 다하리
“그러니까, 나 없는 동안 부모님 잘 모시고 잘 계시오. 내 후딱 다녀오리다.”
“네, 서방님!”
“여... 여, 여보, 사랑하오.”
둘을 꼭 껴안은 채 한참 떨어질 줄 모르다가 밖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놀라
아쉬운 마음을 진정시키고, 부인과 손을 꼭 잡고 안채에 들어가 어머니 아
버지께 귀향 인사를 올렸다. 머슴들이 불을 밝히니 온 동네 개들이 짖어
대자 말들이 놀라 이리저리 뛰며 히힝 울었다.
배천공은, 재혼한 그해 초겨울 어느날 마두, 칠복이와 함께 배천으로 떠
났다. 간간이 비가 내렸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갔다. 저녁 늦게 한밭(대전)
골에 이르자 녹초가 되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찾아간 주막마다 만원이라
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맨 끝에 아주 후미진 주막, 손님 둘이 있는 방에
겨우 여장을 풀었다. 늦은 저녁이라 밥도 없고 찬도 없어 누룽지를 끓여
허기를 달랜 후 먼저 잠이 든 두 사람 틈에 끼어 새우잠을 잤다. 어찌나
피곤했든지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일어났는데,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온몸
이 한기가 든 것처럼 오돌오돌 떨렸다. 그런데 배천공만 그런 줄 알았는
데 칠복도 똑같은 증세로 끙끙 앓고 있었다. 그래도 어제 비를 좀 맞으며
달려왔으니 감기겠지 하고 한밭 골을 떠나 달리고 달려 나흘 만에 생가
배천에 도착했다.
열이 펄펄 끓는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서니 먼저 동영이 버선발로 나와
엎드려 절을 하며 “아버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하니 “오...냐... 잘 있었느...
냐...” 하며 푹 쓰러졌다. 온 집안 식솔들이 놀라 빨리 안방으로 모셔 들이
고 급히 의원을 불렀다. 그런데 의원이 진맥하더니 “돌림병(장티푸스)입
니다. 그러니 어서 모두 이 방을 나가세요.” 했다. 그런데 마두 칠복인 차츰
회복되고 있었는데, 배천공은 동영이 밤낮으로 간호한 보람도 없이
인조1년 계해(1623) 12월 8일 향년 서른다섯에 돌아가셨다.
남편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남원에 알려지자, 놀란 이씨 부인이 절망한
나머지 남편의 뒤를 따르려고 <진나라의 부호 석승이 조왕의 공격을 받아
패하자, 애첩인 녹주가 별장인 금곡원의 청량대에서 떨어져 자살한 것처럼)
높은 곳에서 몸을 던졌다. 그러나 다행히 죽음을 면했는데 몇차례의 위험
한 고비를 넘긴 끝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후 몸을 추스른 부인은
곧 천리 길을 달려가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또 오 년을 시묘하면서 조석
으로 올리는 제사음식을 거르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이 생전에 아꼈던 언치 : 말의 안장 밑에 깔아 등을 덮어 주는
천 그것을 어루만지며 베게 삼아 잠을 잤다.
또 남편에겐 향주머니 사대(絲帶) : 평상시에 입는 겉옷에 두르는 실로
짠 허리띠, 몸에서 나는 나쁜 냄새를 없애기 위한 향주머니를 열어놓고
주곡(晝哭)해 언제나 눈가에 축축한 눈물이 고였으며,
두 뺨에는 피눈물을 흘린 흔적이 길게 나 있었다.
그리고 남편과 사별한 후로 평생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다.
고기도 먹지 않았다.
그 이후, 정묘년(1627)에 호란(胡亂)이 일어나자, 배천공의 아들
동영(15)이 계모(繼母) 이씨를 모시고, 할아버지의 제2의 고향 남원 사매면
대산리 매안리(여의터)로 내려왔다.
18 충의위공(휘 동영) 행록
공의 휘는 동영(東英)이고 자는 수부(秀夫)이며, 관직은 행 충의위(行忠義衛)
이다. 후천공(後天公) 휘 경여(景輿)님의 맏손자이다.
아버지는 (헌, 배천공)이시고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 판관(判官) 민중
(敏中)님의 따님이시다. 계모는 합천 이씨(陜川李氏) 선비 정간(廷幹)님의
따님이시다. 공은 광해5년 계축(1613) 12월 26일에 아버지의 본생가인
배천에서 태어났다.
6살에 친어머니의 상을 당하고, 11살에 아버지의 상을 당했는데 어린 나이에
도 불구하고 성인처럼 장례를 잘 치렀다.
공은 항상 부모를 일찍 여윈 것을 한스러워했다. 그 때문에 계모를 모시는 일
에 성심을 다하였고, 할아버지 후천공을 봉양하면서 공경과 사랑의 마음으
로 정성을 다하였다.
남원 매안(여의터)에 온 지 11년이 되던 인조 무인년(1638)에 할아버지 후천
공께서 돌아가셨다. 공은 고인이 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예법에 따라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영리하고 남달랐다. 학문을 하는 데에 있어 배운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몸에 실천하니, (면수배앙面粹背盎 : 윤택한 기운이
얼굴에 나타나고 등에 넘쳐흐른다.) 즉 군자의 내면에 축적된 아름다움이
몸에 그대로 나타나다. 또 글 솜씨는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빛이 났다. 공은
산업에도 관심을 두어 직접 경영하는데, 모든 일에 두루 밝아서 일처리를
했다. (그러한 노력으로 살림이 윤택해졌으나 결코 이윤을 위해 도리(道理)
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공은 인조27년, 불행하게도 몹쓸 병이 들어 살날이 얼마 안 남은 것을 직감
한 공은 아들 둘을 불렀다.
“큰애 도(燾)야 어서 오너라. 넌 요즘 어떻게 자내냐?”
“네, 아버님께서 한시바삐 몸을 추수려 일어나시기를 천지신명님께 비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래, 고맙구나. 근데 올해 몇이냐?”
“11살입니다.”
“후(煦), 너는 몇 살이냐?”
“소자 7살이옵니다.”
“책은 어디까지 읽었느냐?”
“요즘 명심보감(明心寶鑑) 안의편(安義篇)을 읽고 있습니다.”
장남 (도燾. 용산공)이 대답하였다.
“오래 기억에 남은 구절이 있으면 얘기해 봐라.”
“네, 莊子曰. 兄弟爲手足 夫婦爲衣服. 衣服破時更得新 手足斷處難可續.
뜻은 이러합니다. 장자가 말하였다. “형제는 手足이 되고 부부는 의복이
된다. 의복이 떨어졌을 때는 새 것으로 갈아입을 수 있거니와, 수족이
잘라진 곳은 잇기가 어렵다.”
“내가 너희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어 흐뭇하구나.
앞으로 너희 형제 서로의 수족(手足)이 되겠느냐?”
“네, 아버님. 꼭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구나.”
“막내 너는 어디를 읽고 있느냐?”
“저는 明心寶鑑(명심보감) 戒性篇(계성편)을 읽고 있습니다.”
차남 (煦, 첨추공)이 대답하였다.
“너도 기억에 남은 구절이 있으면 얘기해 봐라.”
“忍一時之忿이면 免百日之憂니라. 인일시지분이면 면백일지우니라.
한때의 분함을 참으면 백일의 근심을 면하니라.
"즉 한때의 분을 참지 못해서 함부로 행동하다가 무슨 일을 저지른
다면, 그것이 동기가 되어 큰 근심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일을 그르
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한때의 분함을 참아 넘긴다면
다음 순간 안도감을 얻게 되고 무한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참는 것이 복이 된다>는 말이옵니다."
“음, 좋은 말이구나. 그런데 거기에 하나 덧붙인다면 의로운 일에는
의로는 분노와 의로운 행동을 해야 한다.”
“네, 명심, 명심하겠습니다.
공은 점점 기력이 쇠하는지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면서.................
“네... 네, 선조...시산군 할아버지 유훈을 잊지 말아라...”
“네, 아버님.”
“항상 중용(中庸)하라. 항상 명예(名譽)롭게 살아...라...”고 하고
인조27년 기축(1649) 6월 9일 향년 서른일곱에 돌아가셨다.
묘소는 보절면 갈치 약산(藥山) 갑좌(甲坐)로 모셨다.
그 동영 할아버지 첫째가 용산공이고 둘째가 첨추공이시다. 그 자손
들이 남원 사매면 매안이(여의터)에 전주이씨 집성촌을 이루고
누대에 걸쳐 충. 효. 예의 고장으로 현재까지 화기애애하며 일치
단합하면서 풍요롭고 살기 좋은 마을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