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erors of the Qing Dynasty
순치제(順治帝) 청나라 제3대 황제(재위 1643-1661년)
휘는 복림(福臨),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연호는 순치(順治), 법명은 행치(行痴)이다. 만주어로는 이지? 다산 한(Ijish?n Dasan Han)이라 하고, 몽골어로는 아이비어 자사크 칸(Eyebeer Zasagch Khaan)으로 불리기도 한다. 홍타이지의 9남으로 어머니는 그의 후궁이었던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이다.
제1대 누르하치와 2대 홍타이지까지는 아직 만리장성을 넘지 못하고 만주족의 본거지인 심양의 궁에 기거했다. 하지만 제3대 순치제에 이르러 명나라에 이자성의 난으로 북경이 포위되자,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자금성 뒤 경산에서 목을 매어 자살한다. 이로써 드디어 만주족의 청나라는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을 함락한 이자성을 몰아내고 자금성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하지만 순치제는 실질적인 힘이 없었고, 그를 황제로 세운 황부섭정왕인 도르곤에 의해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이룩된다. 때문에 순치제의 어머니 효장문황후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황숙이었던 도르곤의 부인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정사에는 효장문황후가 도르곤의 부인이 되었다는 정식 기록은 없지만, 도르곤이 황숙섭정왕에서 황부섭정왕으로 칭호가 바뀌고, 실제 모든 권력은 도르곤에서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아들을 지키기 위한 효장문황후와 도르곤에게 모종의 거래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여하튼, 청나라의 역사는 제3대 순치제부터 시작되는데, 때문에 그는 심양이 아닌 베이징에서 100km 떨어진 준화시의 청동릉에 묻혔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효장문황후도 원래대로 하면 황후의 능은 황제와 합장하거나 황제릉 옆에 조성되어야 하므로, 효장문황후의 능은 심양의 소릉(청태종, 홍타이지의 능)에 있어야 하지만, 그녀는 남편보기가 두려웠는지, 남편이 아니라 아들인 순치제의 곁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을 남겼다. (순치제는 6살에 도르곤에 의해 황위에 올라 24살에 죽는 바람에 그녀보다 먼저 죽었다.) 따라서 그녀의 유언에 따라 순치제가 있는 효릉에서 좀 떨어진, 청동릉 영역권 밖에 임시 안장을 한다. 그리고 비록 심양에서 수백킬로가 떨어져 있지만 남편인 소릉의 영역권이란 뜻으로 그녀의 능은 소릉의 서쪽, 즉 '소서릉'으로 명명된다. (이도 문제가 되어, 그녀의 사후 36년이 지나서 증손자인 옹정제때가 되어서야 조성된 것이다.)
효장문황후의 소서릉(昭西陵) 청동릉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인데, 황릉이 너무 넓어서 여기서 사진만 찍고 내부는 관람하지 못했다.이때만 해도 왜 이 무덤만 황릉의 담장 밖에 있는지 제대로 몰랐기에..
강희제(康熙帝) 청나라 제4대 황제(재위 1661년 ~ 1722년)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휘는 현엽(玄燁) 또한 만주어로는 얼허 타이핀 한(Elhe Taifin Han) 몽골어로는 엔크 암갈란 칸(Enkh Amgalan Khaan)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묘호는 성조(聖祖), 시호는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짧은 시호로는 인황제(仁皇帝)이다. 연호는 강희(康熙)이다. 제3대 황제인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이자 순치제의 후궁 출신인 효강장황후 동가씨(孝康章皇后 ?佳氏)의 소생으로서 자금성(紫禁城)에서 태어난 최초의 청나라 황제이다.
산해관 입관(入關) 이후 통일 황조로서의 두 번째 황제이기도 하다. 청나라의 강건성세를 열은 황제로서 한족이 아닌 이민족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황제들 중 한명이다. 또한 61년간의 재위기간으로 최장수 재위기간의 기록도 가지고 있다.
강희제의 경릉(景陵)으로 들어가는 신도, 청동릉
옹정제(雍正帝) 청나라의 제5대 황제(재위 1722-1735년)
휘는 윤진(胤?),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짧은 시호로는 헌황제(憲皇帝)이며, 연호는 옹정(雍正)이다. 또한 만주어로는 후왈리야순 톱 한(H?waliyasun Tob Han) 몽골어로는 나이랄트 퇴브 칸(Nairalt T?v Khaan)이라 불리기도 한다. 제4대 황제인 강희제(康熙帝)의 넷째 아들이며 강희제의 후궁 출신인 효공인황후 오아씨(孝恭仁皇后 烏雅氏)의 소생이다.
순치제부터 청동릉에 황릉을 만든 관례에 따라 그도 청동릉에 황릉을 만들어야했지만 능 조성중 물이 샌다하여 그는 청동릉의 능묘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의 청서릉에 다시 능묘를 조성하는데, 그래서 각각 베이징의 동과 서에 위치한다고 청동릉, 청서릉 이렇게 명명된다. 문제는 옹정제가 아버지를 따라 묻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다음 황제인 건륭제는 황릉을 어디에 조성하는가가 골칫거리가 되었다. 결국 내린 해법이 건륭제 자신은 청동릉에 묻히지만 그 다음 황제는 청서릉에 이렇게 교대로 능을 조성하기로..
현재 북경의 옹화궁은 옹정제가 왕자 시절에 기거하던 곳이다.
옹화궁 : http://blog.daum.net/mickeyeden/16155584
건륭제(乾隆帝) 청나라 제6대 황제(재위 1735-1796년)
어릴 때부터 제왕으로서의 자질이 보여 할아버지 강희제와 아버지 옹정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1735년(옹정 13년), 옹정제가 급사하자 저위비건법에 따라 황위에 올라 먼저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갈등을 조정하며 내치를 다진 후 대규모 정복 사업과 문화 사업을 펼쳤다. 또한 10차례에 걸친 정복 사업을 펼쳐 준가르와 위구르를 복속시키고 티베트, 버마, 베트남, 네팔까지 진출하는 등 현재 중국 영토의 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내놓고 여기에 사치, 반란, 서방과의 부실한 외교, 그리고 희대의 탐관오리로 평가받는 화신을 20여년간 총애하여 말년엔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빈번히 일어나고 국고가 비어 결국 청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795년(건륭 60년) 말, 자신은 감히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재위 기간을 넘을 수 없다며 재위 60년째에 태상황제로 물러났지만 막후에서 정책 최고 결정권을 행사하여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 재위기간 60년에 태상황제로서 실권을 장악한 4년까지 합치면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한 황제였다. 스스로를 십전노인(十全老人, 열 번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끈 노인)이라 칭하고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하였으며, 중국 최후의 태평성세인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건륭제의 정치적 모습보다 더욱 나의 관심을 끌게 한 것은 바로..
왼쪽은 말년의 건륭제 초상, 오른쪽은 신구 아저씨 닮지 않았나요? 중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황제이다 보니 건륭제의 초상은 시대별로 차이가 나는데, 천단에서 본 건륭제의 초상은 즉위 초 젊을때의 모습이고 나이든 건륭제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신구아저씨 황제의 딸 주인공으로 신구아저씨 어떠신지?ㅋ
건륭제의 능묘는 청동릉에 조성된 유릉인데, 현재 지하궁이 개방되어 있다.
가경제(嘉慶帝) 청나라 제7대 황제(재위 1796-1820년)
묘호는 인종(仁宗)이다. 건륭제의 15남이다. 건륭제의 총애를 이용하여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던 화곤을 처형하고 강기를 숙청하였다. 즉위 초기에 백련(白蓮 : 1796-1804), 천리(天理 : 1813)의 난이 일어났고 평정하였으나 한때는 반군이 자금성까지 침입하기도 했다. 이를 계유지변이라 한다. 재정 개혁을 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도광제(道光帝) 청나라 제8대 황제(재위 1820-1850년)
휘는 민녕(旻寧), 묘호는 선종(宣宗)이다. 가경제의 차남으로 태어나서 지친왕(智親王)으로 봉해졌다. 결국 1840년 제1차 아편 전쟁으로 이어졌고, 1842년 난징조약으로 홍콩이 영국에 넘어감은 물론 상하이 등 5개 항구가 개항되어 서구 열강이 대대적으로 쇄도해오는 길을 열어주었다.
함풍제(咸豊帝) 청나라 제9대 황제(재위 1850-1861년)
휘는 혁저(奕?)이며, 묘호는 문종(文宗)이다. 재위기간 중에 홍수전(洪秀全)의 태평천국(太平天國) 운동이 일어나 중국 대륙이 휘청거렸다. 1856년 이후 영국-프랑스와의 군사분쟁(애로 호 전쟁)이 격화되어 1860년 함풍제는 열하(熱河)로 피난을 갔다. 그 사이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공세가 베이징까지 이르러 이궁(離宮) 원명원(圓明園)이 전소(全燒)되었다. 이후 함풍제는 자금성으로 돌아와 1861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후궁중 한명으로 유일하게 그의 혈육을 남긴 이가 바로 그 유명한 '서태후'이다. 함풍제 이후로 정권은 바로 서태후의 손에 들어갔고 결국 그녀가 죽자 청나라도 함께 망한다.
서태후(西太后)의 생전 모습
동치제(同治帝) 청나라 제10대 황제(재위 1861-1875년)
휘는 재순(載淳), 묘호는 목종(穆宗)이며, 동치는 연호이다. 청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사이에서 체결된 베이징 조약으로 인하여 청국의 대외 위신이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연해주와 사할린, 홍콩 등을 열강들에게서 탈취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호응하여,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정신이 함양된 양무(洋務)운동이 시작되었다. 두 태후인 동태후와 서태후가 섭정하는 동시에 숙부인 공친왕마저 정치 일선에 나서서 정국에 혼란이 가중되었고, 정권을 계속 유지하는 생모 서태후와 친정을 하고 싶은 동치제 간의 알력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20세의 젊은 나이에 천연두로 목숨을 잃었다.
광서제(光緖帝) 청나라 제11대 황제(재위 1875-1908년)
묘호는 덕종(德宗)이며, 몽골말로 빠다라올트 투르 칸이라 불린다. 청나라 역사상 최초의 방계 혈통 출신 황제이다. 즉위 초에는 서태후가 섭정을 했으며 양무(洋務)운동으로 부분적이나마 중국의 근대화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1894-1895년의 청일전쟁이 청나라의 패배로 끝나 대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등 중국에서의 열강의 각축은 더욱 치열해졌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한 무술(戊戌)개혁을 실행하여 완전 근대화를 꾀하였다. 당시 캉유웨이 등의 지식인들은 러시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영국, 일본과 협력할 것을 제안하는 한편, 신문에 개혁안을 싣는 등 개혁운동의 선두에 섰으나, 보수적인 서태후, 이홍장(李鴻章) 등이 반격을 가하여 개혁에 가담한 지식인들이 망명을 하거나, 사형당하는 등, 개혁은 수포로 돌아가고 서태후의 섭정이 재개되었다. 광서제는 서태후와 함께 시안으로 피난을 갔고 광서제의 애비(愛妃) 진비(珍妃)는 서태후의 명령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베이징 의정서가 성립되어 광서제는 베이징으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실권이 없었다. 1908년 서태후가 죽기 바로 전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독살 의혹이 있으며, 최근에 법의학적으로 독살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청나라 제 12대 황제는 선통제(宣統帝)로서 재위기간 1908년 ~ 1912년인데,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로 3살에 황제가 된 애신각라부의(愛新覺羅溥儀)이다. 당근, 그의 초상을 천단 재궁에서 볼 수는 없었다.
참고문헌: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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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든의 배낭기 원문보기 글쓴이: Ed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