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들, 물이 어울린 정읍
권종순(법륜행)당간지주답사반
정읍시는 노령산맥의 줄기에 있는 내장산 국립공원의 수려한 아름다움과 여기서 흘러내리는 정읍천과 동진강이 만나 비옥한 옥토를 가졌다. 땅을 한 자만 파면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다하여 우물정(井)의 정읍이란 이름을 붙었으며, 지금은 수력발전시설이 있어 수자원 역시 풍부한 곳이다.
먼저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에 있는 원백마을로 향했다.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진 가운데 넓은 들판이 있는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큰 당산나무와 남근석이 있고, 그 옆에는 개천을 사이에 두고 장승 두 기가 있었다. 이러한 조형물들은 마을 주변의 지형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역할이었다. 마을을 두르고 있는 산모양이 여근곡이어서 음기기 강하여 남근석을 세워,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마을이 번성하기를 기원한 것이다. 또한 농경사회에서는 인구가 곧 부를 창출하는 것이므로 다산을 빌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여기의 남근석은 다른 지방에 있는 것에 비하면 왜소하고 볼품이 없었지만, 아들을 낳게 하는 영험이 있다고 한다. 옆에 있는 당산나무의 갈라짐이 묘한데 남근석이 그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은 보는 재미를 더했다. 현재 이 바위는 전북민속자료 제13호로 지정되었다.
300년된 백암리 남근석/ 이 돌을 네 번 돌고 할머니 장승/할아버지장승 두 기가 있는데
한 번 안으면 아이를 낳는다는 전설 이 유명 역시 소원을 빌면 아들을 낳는 다는 전설
칠보면 무성리에는 무성서원이 있다. 옛 지명은 태산현으로 태산군수를 지낸 신라 고운 최치원선생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건립되었다. 원래 이름은 태산서원이었으나 숙종 때 무성(武城)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무성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은 다른 서원에 비해 작았지만 고졸한 멋이 있었다.
무성서원 출입문/현가루
무성서원 부속건물
무성서원 강당
무성서원 제사공간인 사당은 강당 뒷쪽에 있음.-전학후묘
읍내의 도로변에 있는 피향정은 최치원이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고 현재의 정자는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정자의 밑기둥은 돌을 깎아 받쳤으며 정자에 오르는 계단도 돌계단을 이용하여 더욱 당당한 모습이다. ‘호남제일정‘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을 만큼 품격 있는 정자인데 지금은 번잡한 시내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호남 제일정/ 피향정
정자를 받치고 있는 돌기둥
산외면 오공리에 있는 김동수 고가는 동진강 줄기가 굽어 흐르는 둑길을 건너서 있었다. 뒤는 창하산이 앞은 동진강이 굽어 흐르는 동남향의 집으로 풍수의 조건을 갖추었으며, 또 집 앞은 잘 정비된 논밭이 있었다. 이 집은 김동수의 6대조 김명관이 1770여 년경부터 10년 동안 지어서 완성했다고 한다. 그 오랜 정성을 들인 흔적은 곳곳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바깥사랑채와 바깥행랑채가 한 마당을 이루고 있으며, 다시 안행랑채를 경계로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안채와 안사랑채가 있었다. 이는 호남 상류주택의 대표적인 분산형배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사랑채
정갈한 사랑채
이 집은 다른 양반가옥에서 보이는 근엄한 규범보다는 살림살이의 편리함을 추구하였다. 사랑채보다 안채와 행랑채가 더 아름다운 집이었다. 벽면을 이용한 공간구성과 집 안과 밖, 어디를 보아도 조각보를 보듯 아름답게 분할된 벽면이었다.
이 집을 경주 양동마을과 비교해 보면 넓은 평야에 지은 분산형배치 구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양동마을은 산간지형을 이용한 것으로, 북부지방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ㅁ‘자의 구조로 폐쇄적이며 기품과 위엄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넓은 평지에 안채와 사랑채가 여유 있게 자리하고 있으며, 평야의 넉넉한 삶과 호탕한 기질이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가옥 중에 가장 독창적이고 살뜰한 집을 보았다.
단아한 안채
안채의 중앙 마루
부엌의 수납공간 부엌의 환풍구
마루의 수납공간 부엌의 수납공간
오밀조밀한 안채
건물의 뒤 벽면의 아름다운 분할
그래도 정읍에서 제일 자랑거리는 내장산과 내장사가 아닐까 한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내장사는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고 백제 무왕37년(636)에 영은사로 창건되었다. 입구부터 시작되는 단풍나무는 어떤 품종인지 모두 작은 잎으로 별을 닮았다. 수많은 별들이 은하수를 이루듯 별모양의 단풍은 길을 따라 하늘을 덮었다. 신록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색색의 물이 든다면 그 아름다움은 가히 장관일 것이다.
백양사 일주문
일주문의 기둥은 큰 나무를 껍질만 벗기고 색을 칠한 듯 육중한 몸으로 진(眞)과 속(俗)의 경계를 지키고 있었다. 신록의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내장사를 들어서는 순간 너무 아쉬움이 컸다. 경내는 예전의 모습을 찾을 곳이 아무 곳에도 없었다. 그것은 역사의 아픔이기도 했다. 이 지역은 한국전쟁 때 노령산맥이 전투지역 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불타버렸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50년대 이후 지어진 건물로 주변의 경관과 잘 어울렸지만, 근래에 세운 석탑과 석등은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옛 것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관음전에 있는 동종이었다. 조선 영조44년(1768)에 조성한 것으로 장흥 보림사에 시주한 것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어떤 경로로 이곳으로 옮겨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조선시대 동종
몇 개의 면을 넘나들며 다닌 정읍은 수려한 산세에 물과 전답 넉넉한 고장이었다. 결실을 맺은 보리는 황금빛으로 일렁이고, 그 너머는 벌써 심은 모들이 줄을 지어서 보는 이의 마음도 넉넉하고 푸근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