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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탕’ 뒤러(1496년)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 언뜻 보면 중세 말 목욕탕 장면을 그린 풍속화로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또 다른 제재가 감추어져 있다. 욕실 안을 들여다보는 남자는 시각, 음악을 듣는 남자는 청각, 꽃을 든 남자는 후각, 플루트를 연주하는 남자는 촉각, 맥주를 마시는 남자는 미각을 각각 상징한다. 한마디로 이 그림은 풍속화인 동시에 인간의 감각을 표현한 ‘오감의 우의화’인 셈이다.
감각의 퇴화
언젠가 독일에서 본 NHK 다큐멘터리. 일본에서 가장 눈이 좋은 이들을 케냐의 마사이족에게 데려간다. 문명에서 온 이 일본인들이 원시의 자연에 사는 부족과 대결을 벌인다. 누군가 몇 킬로미터 밖의 방송용 차량 위에 올라가 다양한 몸짓을 하면, 그 동작을 육안으로 보고 흉내 내는 경기. 일본에서 가장 눈이 좋다는 사람들은 식별에 실패했으나, 마사이족 사람들은 어린아이부터 백발의 할머니까지 그 동작을 즐겁게 따라한다.
원시 부족은 대개 뛰어난 감각능력을 갖고 있다. 예컨대 아메리칸 인디언은 땅에 귀를 대고 소 떼의 위치와 거리를 알아낸다. 대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간들은 생명활동의 대부분을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른바 ‘문명’이라는 게 시작되면서 인간은 자연과 대결하는 가운데 감각보다 점점 더 이성에 의존하게 된다. 인공적인 이성은 고도로 발달하나, 대신 자연적인 감각은 급속하게 퇴화하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감각능력이 사라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은 이에 관해 재미있는 얘기를 한다. 원거리 지각에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는 원시 부족도 근거리 지각에는 매우 둔감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바람에 실려오는 들소 떼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들 몸에서 나는 악취는 전혀 맡지 못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짐멜은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문명화가 진행될수록 한 지역의 인구밀도가 높아진다. 그럴수록 타인의 존재에서 쾌와 불쾌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게 되고, 이 때문에 근거리 지각에 극도로 민감해진다. 한마디로 문명화가 진행될수록 감각능력은 떨어져도, 감각에서 느끼는 쾌와 불쾌의 감정은 극도로 예민해진다는 것이다. 이른바 ‘미적 취향’은 바로 여기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냄새의 사회학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에는 아파트 건물 벽이 머금은 유구한(?) 된장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냄새를 맡지 못한다. 한국에 돌아와 원 없이 생마늘을 먹은 날 밤, 입에서 나는 마늘 냄새 때문에 잠을 설쳤다. 하지만 이제는 마늘도 냄새가 없어졌다. 저녁 시간 버스나 지하철의 내부는 냄새로 된 차림표였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후각적 차림표를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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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레옹 제롬의 ‘판사들 앞의 프리네’(1861).
서구인들은 냄새에 민감해 몸에서 나는 냄새까지도 관리한다. 하지만 한국은 ‘냄새의 제국’, 우리는 비교적 냄새에 관대한 편이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그 냄새의 과잉이 극도로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 불쾌감은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이 담배 냄새에 찌든 택시에서 풍기는 악취를 맡을 때와 비슷하다. 물론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그 악취가 얼마나 끔찍한지 못 느낄 것이다.
서양에는 숲 속에 버려져 동물들 틈에서 자라난 아이들에 관한 기록이 더러 남아 있다. 인간에게 발견된 늑대 소년들은 너나없이 동물적인, 그리하여 초인적인 감각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인간사회에서 오래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은 문명화한 환경이 제공하는 자극의 과잉을 그 민감한 감각이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과민한 감각을 가진 예술가들이 종종 광기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어느 살인의 추억
감각의 극단은 때로는 예술로, 때로는 광기와 범죄로 나아간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는 감각의 과잉에서 빚어진 어떤 살인을 추억한다. 천부적인 후각을 갖고 태어난 주인공 그루누이. 그러나 정작 그의 몸에서는 이상하게도 냄새가 안 난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기에게는 고유한 냄새가 있다. 그런 냄새가 없는 아기가 있다면 얼마나 섬뜩하겠는가. 때문에 이 아이는 타인들에게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주곤 했다.
소년은 그 특출한 후각능력에 힘입어 천재적인 향수 제조자가 된다. 문제는 그가 사용하는 재료에 있었다. 꽃잎이나 그밖의 재료에서 냄새를 취하는 여느 향수 제조자들과 달리, 그루누이는 죽은 소녀의 살갗에서 향수의 재료를 구했다. 그루누이가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로 결심한 이후 도시에서는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진다. 희생자는 하나같이 아리따운 소녀들이었다. 도시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루누이의 엽기적인 살인행각은 오래지 않아 발각이 되고, 체포된 그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마침내 형장에 섰을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그가 형장에 서서 소녀들의 체취로 만든 향수병의 뚜껑을 열자, “그를 죽이라!”고 외치던 구경꾼들이 그 향기에 취해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심지어 살해당한 소녀의 아버지마저 그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자신의 무례를 용서해달라고 비는 게 아닌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향기 앞에서 인간이 만든 법은 무효가 된다. 형장에서 풀려난 그루누이는 파리 근교의 공동묘지를 거닐다가 향수병의 뚜껑을 연다. 그곳에 있던 노숙자와 부랑자들은 먼저 이 낯선 사내가 풍기는 냄새에 경탄을 하는 듯하더니, 곧 그에게 달려들어 그의 몸을 서른 조각으로 갈가리 찢고는 그것을 허겁지겁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향수의 해부학
소설은 몇 가지 전통적 모티브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 그리스에 프리네라는 여인이 신성한 장소에서 옷을 벗은 죄로 기소되었다. 당시에 이는 사형으로 다스려야 할 중죄. 이 재판에 여인의 애인이 변호인으로 나섰다. 그가 준비한 변론은 말이 아니라 여자의 몸. 배심원들 앞에서 여인의 옷을 들추어 그녀의 알몸을 보여준다. 보라, 이 신적인 아름다움을. 이 앞에서 인간의 법은 무효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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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세레담의 ‘5감’ 풍속화.
‘유미주의’는 종종 범죄와 결합된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로마의 황제 네로에게는 로마 시내에 불을 지르고 그 광경을 보며 노래를 읊었다는 전설이 따라다닌다. 아름다움 앞에서 다른 모든 가치는 상대화된다는 프리네의 전설.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범죄마저 정당화된다는 네로의 전설. 이 그리스의 시각적 유미주의, 로마의 청각적 유미주의가 그루누이의 엽기적 살인행각 속에서 후각적 버전으로 변주되는 것이다.
처형되는 자리에서 모든 관중이 그루누이의 향수에 취해 감동의 눈물을 쏟는다는 모티브. 여기서는 ‘바로크적’이라 해야 할 어떤 ‘과잉’이 느껴진다. 이 장면은 아마도 바로크 시대의 처형에서 영감을 얻은 것일 것이다. 그 시대의 사형장에서는 종종 사형수도 울고, 형리도 울고, 관객도 우는 감동적인 순교의 드라마가 연출되곤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루누이의 몸이 갈가리 찢기는 것은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연상시킨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잃은 슬픔에 산과 들을 헤매고 다니다가, 질투한 바쿠스의 여사제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한다. 오르페우스가 온몸이 찢겨 죽은 최초의 음악가였다면, 그루누이는 그렇게 살해된 최초의 후각 예술가였다.
부랑자들이 그루누이의 몸을 뜯어먹는 장면은 중세의 ‘성자전’을 연상시킨다. 중세에 ‘성자’로 통하던 이들은 가끔 제자들에게 살해당해 큰 솥에 삶아지곤 했다. 그 시체가 영험하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모티브는 좀더 오랜 기원을 갖는다. 예수가 베푼 ‘최후의 만찬’을 생각해보라. “이것은 나의 몸이니, 받아먹으라.”
피노키오 되기
“등을 창고 벽에 기대고 장작더미 위에 다리를 쭉 뻗고 앉은 그는 눈을 감은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는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않았다. 단지 아래로부터 퍼져 올라오다가 뚜껑에 덮인 것처럼 지붕 밑에 갇혀서 그를 감싸고 있는 나무 냄새를 맡을 뿐이었다. 냄새를 들이마시고 그 냄새에 빠져 자신의 가장 내밀한 땀구멍 깊숙한 곳까지 전부 나무 냄새로 가득 채운 그는 스스로 나무가 되어버렸다. 그러고는 나무인형, 피노키오가 된 것처럼 그 장작더미 위에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한참 뒤, 거의 30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나무’.”
그루누이의 소년 시절 일화다. ‘나무’의 냄새를 제대로 맡기 위해서 그루누이는 ‘나무’가 되었다. 이런 것을 미학에서는 ‘미메시스(닮기)’라 부른다. 나무를 이해하기 위해 그루누이는 스스로 나무를 닮아야 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라면 이를 ‘되기(devenir)’라 부를 것이다. 그루누이의 피노키오 되기. 스스로 나무인형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는 나무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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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빈 바우긴의 ‘5감’(1630). 거울은 시각, 악기 뉴트는 청각, 꽃은 후각, 와인은 미각, 카드와 체스놀이는 후각을 나타낸다.
이 구절은 하나의 낱말을 배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나무’라는 낱말을 우리는 너무 쉽게 배우고, 너무 쉽게 사용한다. 그 말은 그것이 충족시켜야 할 어떤 실용적인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간단히 버려진다. “나무 좀 가져와.” “여기, 있어.” “고마워.” 이렇게 한 사람의 손에서 다른 사람의 손으로 나무가 성공적으로 전달되면, 그 낱말은 다 사용한 연장처럼 그냥 버려지고 만다.
우리는 이렇게 낱말을 도구로 쓰고는 버린다. 하지만 ‘나무’라는 말은 원래 우리에게 나무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줘야 한다. 그 색깔, 모양, 감촉, 냄새….우리는 언어까지도 일회용 소모품처럼 너무나 쉽게 소비한다. 이때 사물은 색깔과 모양과 감촉과 냄새를 잃어버리고 세상에서 사라져버린다.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할 때, 사라졌던 세계는 그 충만한 현상학적 질을 가지고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끝) |
진중권 /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