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호리한 체구의 柳주필은 1981년 1월부터 만 22년간 덕수궁 앞 돌담길을 지나 조선일보에 출퇴근했다. 신군부의 계엄군이 쫙 깔렸던 그 거리를, 6월 시위로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던 그 거리를 뚜벅뚜벅 걸어다녔다. 운전면허증이 없는 그는 아침 저녁 지하철을 이용했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 그의 깡마른 정신은 시대와의 타협을 거부했다. 철저한 자유주의자를 자부했던 柳주필은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낡은 시대의 도그마, 집단의 깡패 논리에 철저히 맞섰다. 그는 지금도 만년필로 원고지에 글을 꾹꾹 눌러 쓴다.
柳根一의 모습은 2003년 2월 덕수궁 앞에서 사라졌다.
조선일보 주필직을 마지막으로 언론계를 떠난 후 그는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끊고 지냈다. 「에딘버러 펠로십」을 받아 영국의 옥스포드·케임브리지 대학에서 6개월간 공부했고, 그 후 사촌동생이 운영하는 필리핀의 농장에서 소일했다.
필리핀에서 오이 농사
10개월 만에 귀국한 그를 지난 1월5일 분당 서현구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1000평 정도의 비닐하우스에 오이농사를 지으러 필리핀으로 간다. 1월7일 떠난다』고 하기에 서둘러 약속을 정했다. 『세상 등지고 음풍농월하는 사람을 왜 만나러 와』라고 했지만, 柳주필은 1년 만에 만나는 두 후배기자를 반갑게 맞아 줬다.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1년 가까운 外遊(외유)로 더욱 예리하게 벼려져 있었다. 권력과 정치권을 겨냥했던 비판의 칼날은 이제 한국의 지식인과 국민들을 향해 全方位로 겨눠졌다. 정년퇴직이 그에게 선물한 자유였다.
장난기 어린, 하지만 세상을 준열하게 꾸짖는 그의 목소리는 현역시절보다 더 쩌렁쩌렁했다. 부엌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부인 이정민 여사가 『아휴, 그 얘기는 제발 쓰지 마세요』라고 걱정할 정도였다.
『나는 이제 인생을 졸업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의 비판정신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論客 柳根一에게 은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웬 오이농사입니까. 필리핀 오이가 맛이 있나요.
『필리핀 오이는 맛이 없어요. 우리나라 육종학자가 새로 개발한 오이를 키우는데 참 맛이 좋아. 뚝뚝 끊어지고 물이 많아요. 사촌동생이 땅을 좀 떼 줘서 해보는 거예요』
―1000평이면 오이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올 텐데 시장에 내다 팔 겁니까.
『사촌동생 다 줘야지』
―영국, 필리핀에서 재미가 어땠습니까.
『평생을 지지고 볶고 살다가 40여 년 만에 여유를 맛봤어요. 내 인생에서 요즘 처럼 행복할 때가 없었던 것 같아. 내가 여태 왜 그렇게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인생살이 졸업을 하고 돌아보니까 우리가 사는 방식이 썩 좋은 방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方一榮(방일영) 고문이 돌아가셨을 때 잠깐 한국에 들어왔는데, 장례식장에 가서 보니까 젊은 사람들이 전부 FBI 요원 같아. 검은 넥타이에 검은 양복, 모두 로봇처럼 착착 각이 지게 움직여. 영화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기계집단 같아 보이더라고』
―우리가 여유 없이 메마르게 사는 까닭이 뭘까요.
『우리 역사를 한번 돌아봐. 살아남기가 보통 힘든 나라가 아니었잖아. 칼만 안 찼다뿐이지 다들 검객이야. 南과 北이 똑같아요. 한국적인 속성이 더 극대화된 게, 북한이지. 우리도 비슷해요. 영국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못사는 필리핀 사람들도 아등바등을 안 해. 우리는 4등 하면 3등을 해야 하고, 3등 하면 2등 해야 하고, 남이 1등 하면 끌어내려야 속이 시원하잖아. 영국은 좋은 학교를 나와서 좋은 직장 가진 사람들도 조그마한 집에 앞뜰 하나, 그리고 축구구경을 할 수 있으면 만족이야. 굉장한 야망들을 갖고 살지 않아요. 그렇다고 영국이 우리보다 뒤진 나라인가』
―평등에 대한 강한 집착, 치열한 경쟁이 우리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 아닌가요.
『물론이지. 하지만 이제 한번 찬찬히 뒤돌아볼 때가 됐어요』
글이 무력해진 暴民의 시대가 왔다
―바깥에서 한국을 바라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간단히 얘기하면 「盧武鉉 1년」의 평가라고나 할까요.
『정치하는 사람들이 죽으려고 애를 쓰고, 살 생각을 안 해. 발버둥을 치는데 고치고 수습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를 전부 해체시키려고 발버둥이야. 헷갈려』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구체적으로 들어갈 것도 없잖아요. 서로가 칼질하고, 남의 밑에 있는 것을 빼내서 쓰러뜨리고. 「너 죽고 나 죽자」, 「하늘이 반쪽이 나도 좋다. 아니 하늘과 땅이 맞붙어 맷돌질을 해도 좋으니까 미운 놈은 다 죽여 버려야겠다」 이런 콩가루 집안 같은 인상을 받았어요』
―大選자금 비리 문제로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너 죽고 나 죽자고 싸우는 걸 얘기하시는 겁니까.
『아니, 본질적으로는 盧武鉉 정부의 이념과 정책이야.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우리가 망하지 않고 먹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지난 50년간 이미 검증이 끝난 얘기 아냐? 어떤 게 망하는 길이고, 어떤 게 사는 길인가 판별능력이 그렇게도 없나. 선택지가 두세 개밖에 없는 거라고. 「민족 자주」해서 어디로 가자는 거야. 성장 안 하고 나눠 먹을 재주가 있나. 백치들이야』
―우리 국민들이 煽動(선동), 정확하게 말해 詐欺(사기)에 정신을 잘 뺏기는 이유가 뭘까요.
『정치인들 선동이 팍팍 먹혀들어. 나는 요새 정치인 욕 안 합니다. 국민들이 바보야.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다 국민들이 뽑은 사람 아니오. 선진국 국민될 자격이 없어. 朝鮮日報 주필할 때야 이런 얘기할 수가 없지. 이젠 내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싶어요. 충청도 사람들이 행정수도 이전하겠다니까 盧武鉉씨한테 표 주잖아요. 내 원적이 충청도요, 충청도 사람만 욕하려는 건 아니야. 그런데 한나라당이 수도권의 충청도 표 떨어질까 봐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를 못 해. 한국 사회는 이제 衆愚(중우)의 시대가 끝나고, 暴民(폭민)의 시대야. 어느 누구도 권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매일 매일 내 멋대로 산다」, 「나하고 뜻이 맞지 않는 놈은 없애 버린다」 이런 폭민의식이 팽배해 있어요』
―평생 글을 써 오셨는데, 글로써 暴民을 설득한다는 게 어느 정도나 가능할까요.
『한국은 심정적으로는 이미 內戰(내전) 상황이야. 말의 단계를 벗어났어. 談論(담론)의 영향력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시대가 온 거지. 「너는 지껄여라. 웃기네. 이건 뭐야. 나는 내 맘대로 한다」. 인터넷에 흘러넘치는 욕설과 저주를 보세요. 토론이 먹혀들 자리가 있나. 公論이 형성될 수 없는, 토론과 대화가 먹혀들지 않는 시대가 왔다 이거죠』
―10代 아이들도 인터넷 검색만으로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순식간에 찾아냅니다. 하지만 뒤죽박죽 나열된 정보가 곧 바로 지식은 아니죠. 인터넷에 떠도는 조악한 글들에서, 「손바닥에 굳은살이 안 배긴 사람은 인민의 敵」이라고 학살한 크메르 루주 소년군들의 단순함을 발견하고 섬뜩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T.S. 엘리엇이 20세기 초에 이미 간파한 거예요. 지식이 보편화되고 대중화되면서 「사이비 지식」, 「옐로 페이퍼 지식」을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衆愚的(중우적) 문화가 팽배하니까, 그 반발로 知的 모더니즘이 발생한 거지. 대중이 모르게 아주 어렵게 써버리는 거야. 20세기 초 영국의 지식인들이 衆愚에 대한 공포로 떨었는데, 이제 우리 사회에 폭민의 시대가 온 거라고. 배운 사람, 지성 있는 사람,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의 말에 「자식들, 지들이 알면 얼마나 알아」라는 반응이 곧장 튀어나오는 사회 말이야』
저질주의가 진짜 지식을 거꾸러뜨렸다
―글이 가장 잘 통한 시대는 언제였습니까?
『역시 1980년대죠. 反전두환 운동이 한참 일어났을 때 말이에요. 아무도 말을 못했을 때, 바늘 구멍만 한 구멍을 뚫고 모기만 한 소리로 「민-주-화」 하고 외치면, 확성기처럼 울릴 때야. 보람 있었지. 그런 때가 있었어요』
―柳주필이 「格」이라는 칼럼에서 『권위주의 시대의 敵이 권력의 횡포와 억압이라면, 민주화시대는 저질주의가 敵』이라고 썼습니다. 언론이 권력의 횡포와 억압에 맞서듯이 저질주의에도 맞서야지 않겠습니까.
『영국에는 타블로이드 신문의 세계가 있고 「더 타임스」의 세계가 따로 있어요. 미국도 마찬가지고. 문화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은 「진짜 지식」이 대중사회를 적당히 다루면서 끌고 갈 수 있는 역량이 있어요. 사이비 지식이 핵심적인 리더십을 장악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는 中樞(중추)가 중우적 문화에 먹혀 버렸어. 한국 사회에서는 저질주의가 진짜 지식을 거꾸러뜨렸어요』
―盧武鉉 대통령과 康錦實 법무부 장관이 『선처해야 한다』는 뜻을 표시했지만, 현직 부부장 검사가 「宋斗律을 구속 수사해야 한다」는 칼럼을 쓰고, 검사·국정원 실무자들이 구속을 관철시켰습니다. 「송두율 구속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이스태블리시먼트, 즉 중추그룹이 상당히 튼튼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는 관측도 있습니다.
『宋斗律 건은 좀 다르게 봐야 되는 것 아닐까. 宋斗律을 옹호하는 측이 전혀 예기치 못한 명백한 간첩활동 증거 때문에 궁지에 몰린 거야. 우리 사회를 지키는 건강한 抗體(항체)가 있긴 있어요. 군사정권이나 민주화시대나 이걸 압살하려고 했지만 없애지 못했거든. 하지만 宋斗律 건은 면역력 탓은 아닌 것 같아. 이른바 진보세력이 虛를 찔린 거지』
한국 정당은 유랑극단 가설무대
―기성세대가 지금 상황을 너무 심하게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문제는 저항적인 「언더그라운드 문화」로 존재해야 운동과 집단들이 국가권력의 중추인 청와대와 여당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민족 자주」, 「평등」이 강조될 수는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非주류로 남아 있어야 하는 부분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이 위기라는 겁니다』
―한국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불안정한 정당구조 아닐까요. 대한민국의 정당은 「유랑극단 가설무대」입니다. 주연배우가 신파극 하나 끝내면 무대가 싹 철거됩니다. 한국의 정당 모두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갓난아기들입니다. 책임정치의 핵인 정당이 이렇게 미성숙 상태니까, 어디에도 책임을 물을 수가 없습니다. 盧武鉉 대통령이 당선 자축연을 자신의 정당이 아니라 「노사모」라는 팬 클럽과 함께한 것도 기형적인 한국 정치의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죠.
『우리나라엔 대통령만 있고, 정당이 없는 거야. 지금 한국 정치의 양상은 제도권 밖의 暴民들이 의회와 정당을 기반으로 한 「엘리트 민주주의」를 치고 들어가는 모습이에요. 엘리트 민주주의 구조 전체를 「앙시앙 레짐(舊체제)」으로 규정하고 치면, 그 다음에는 뭐가 오느냐. 衆愚정치가 오고, 대한민국이 망가지는 거지』
李承晩은 外界人
―한국의 기성층은 지난 40년간 두 개의 기적을 이뤄 냈습니다. 하나는 1만 달러 개인소득이라는 경제적 성취고, 다른 하나는 정치의 민주화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기성층은 자칭 진보세력의 공격 앞에 맥없이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한국의 보수층, 기성층, 이스태블리시먼트 계층이 직무유기를 한 거예요. 공익은 커녕 자기 私益조차 수호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야. 세금을 안 내. 자기네들이 말하는 체제, 私益 체제를 지키기 위해 투자를 해야 되잖아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체제무임승차 체제야. 폭민의 시대가 왜 왔느냐는 성찰 못지않게, 왜 이렇게 우리의 기성층이 폭민들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지느냐는 측면도 생각해야 해요. 우리처럼 기성층이 「노블레스 오블리제」, 체제 유지비 지불을 안 하는 나라는 없을 거야』
―그에 비하면 한국의 좌파들은 대중을 선동하고, 우리 사회를 밑바닥에서부터 激動(격동)시킬 역량을 갖추고 있죠.
『우리 기성층이 체제유지에 뜻이 없으니까. 다들 아이들 미국에 보내 놓고, 흉흉해지면 뜨려고 주머니에 미국行 비행기표 넣어 둔 거요. 돈 있는 자는 돈으로, 머리가 있는 자는 머리로 이 체제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안 해요』
―우리가 비용을 지불해서 지켜야 할 체제의 알맹이는 뭘까요.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이죠. 1945년 이후 해방공간에서 지식인의 90% 이상이 좌파였고, 대한민국의 건국에 반대했어요. 그런데 나머지 10%가 욕을 먹어 가면서 대한민국을 세웠어요. 저쪽은 인민공화국을 세웠고. 어느 쪽이 잘 한 건가는 자명하잖아. 그러면 대한민국을 잘 세운 것 아니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그 건국의 정신을, 존재의 이유를 지키자는 거지. 대한민국이 있어야 보수도 있고 진보도 있는 겁니다. 그걸 안 지키면 보수도 없고 진보도 없어요』
―李承晩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 평생 나쁜 사람으로 생각해 왔지. 근래에 생각이 달라졌어요. 李承晩이 바로 지식인 전부가 인민공화국으로 가자는데 혼자 대한민국으로 가자고 한 사람이거든. 李承晩까지 인민공화국으로 갔으면, 내가 지금 분당 서현동 아파트에서 살 수 있겠어. 확실히 李承晩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는 나올 수 없는 외계인이었어. 李承晩이 대한민국을 건설한 사실 그것 하나만은 잘했다, 그걸 인정하게 됐다는 거지』
―李承晩이 조선왕조를 전복시키려다가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 점에서 진짜 혁명가죠.
『왕조 전복과 함께 유교를 타파하려고 했지. 중국을 떠나자는 거야. 조선왕조가 丙子胡亂(병자호란·1636년) 때 망했어야 했어요. 조선조의 양반들은 明(명)을 조국으로 생각했어요. 明나라가 망하고 나서 「우리가 小中華(소중화)다」 「만동묘(明나라 神宗의 가묘)를 짓는다」하면서 정신분열증에 빠져 버렸어. 사실 淸나라가 우리와 인종적으로 아주 가까워요. 자기들이 우리를 형제라고 했잖아. 역사를 가만히 보면 우리가 중국에 고마워할 게 별로 없어. 지금 反美·親中하자는 친구들은 뭘 잘못 보는 거야. 우리가 천년 이상 중국 아래서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살았어요. 먹고 사는 데 큰 보탬도 안 됐고』
反美·親中·親北의 일맥상통
―지금 우리 사회에서 反美·親中·親北, 이 코드가 딱 맞아떨어지는 정신계통입니다.
『맞아, 딱 그대로야』
―金泳三 대통령을 시작으로 金大中·盧武鉉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임시정부의 직접적인 계승자」를 자처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역사관에는 李承晩이나 朴正熙,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는 「민족사적 정통성은 북한에 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존재 이유」에 대한 공감대가 전혀 없는 겁니다.
『이게 민족주의가 걸려 있어서 그래요. 反日이라는 저항 민족주의가 슬쩍 反美로 흘렀어요. 외세에 저항하는 게 저항 민족주의의 최고 가치거든. 20세기에야 실험 결과가 나오기 전이라고 하지만, 1980년대 말에 모든 결론이 났단 말이야. 이제 제3세계, 비동맹권이라는 말조차 사라졌어요. 모두가 세계적인 자유시장경제 체제에 들어와서 먹고 살고 있어요. 급진 좌파적 민족주의를 극단으로 몰고 간 한반도 북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300만 명이 굶어 죽고, 사상 유례 없는 폭압적 전체주의 독재가 자행되고, 삶의 질이 전혀 없고… 다 입증된 것 아닙니까? 북한에서 뭘 더 볼 게 있어』
―소련 동구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질 때 한국의 좌파적 지식인들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1980년대에 주사파 운동을 했던 제 후배 하나는 『자살을 할까 생각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중국의 문화혁명과 쿠바를 찬양해 온 대표적 지식인이 「지적 반성문」을 쓰기도 했고요. 그런데 요즘은 親北 좌파들이 진보라는 이름 아래 다시 발호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한심해. 걱정이야. 한국의 진보세력이라는 게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주사파에 먹혀 버렸어요. 사실상 진보세력이 사라진 거야. 反김정일적인 대한민국內의 좌파가 진보지, 휴전선을 넘어 金正日한테 가면 진보가 아니야. 盧武鉉 주변에 포진한 이들은 前近代 세력이오. 민족자주, 진보를 전매특허받은 것처럼 사용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대원군하고 전봉준하고 손 잡은 것 같은 守舊요. 前近代 세력의 가장 쉬운 도피처가 민족주의요』
세 차례 8년여의 獄苦, 極左에서 右派로 선회
柳주필의 청년시대는 질풍노도라는 표현 그 자체였다.
청년시절 그의 이념적 좌표는 한국 사회의 極左(극좌)임이 분명했다. 그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右派 논객으로 언론인 생활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한민국 언론인 가운데 그만큼 이념의 진폭이 컸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울大 정치학과 2학년 때인 1957년 문리대 신문에 기고한 글로 그는 첫 구속됐다. 정치학과 동기이자 학내 서클 「신진회」에서 함께 공부했던 高建(고건) 총리는 『柳根一의 글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거의 직역한 듯한 내용이었다』고 기억했다.
5·16 쿠데타가 터지자, 서울대생 柳根一은 4·19 이후 학생운동권에서 추진된 남북 청년학생회담 등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체포돼 7년3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1970년대엔 민청학련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돼 또 한 차례 감옥생활을 했다.
柳주필은 서울大 문리대와 학내 서클 「신진회」에서 받은 知的 세례가 자신을 「親北 좌파」로 빠지지 않게 한 힘이었다고 했다.
『대학에 입학했더니 「신진회」라는 서클이 있어요. 민주사회주의랄까 사회민주주의를 연구하는 서클이었어요. 그 서클이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영국식 민주사회주의를 연구하는 서클이었던 게 내 인생을 좌우하게 됐어요. 평생을 과격한 사람으로 낙인 찍혔지만, 내가 공산주의자, 즉 볼셰비키로 안 간 것은 유럽식 민주주의적 세례를 받은 때문인 것 같아요. 내 딴에는 휴전 이후 최초의 민주사회주의 학도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학 2학년 때 필화사건으로 수감되면서, 그는 한국 현대사의 한 모퉁이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미결수로 석 달 수감된 후 軍에 입대했고, 미군부대와 육군본부에서 만기 제대하고 보니, 4·19 의거는 이미 끝나 있었다.
柳根一은 4·19를 주도했던 후배들로부터 운동권 대선배로 대접받았다.
『우파적 학생운동 계열이 있었고, 反美·反帝를 주장하는 계열이 있었는데, 나는 양쪽에서 모두 형님 소리를 들었어요. 양쪽의 중심을 잡아 주는 역할을 했어요. 민청학련 때 사형당한 이문규가 내 한 해 선배였어요. 내가 알기로 反美·反帝 계열의 조직 상층부는 북한에 닿아 있었어요. 「李承晩이 미우니까, 金日成이 좋다」 이런 식의 선택을 했던 거지, 이게 나중에는 「全斗煥이 미우니까, 金日成이 좋다」로 까지 이어졌지. 하지만 엄밀한 지식인이라면 그런 선택은 하지 말아야지. 유럽의 지식인들이 히틀러가 싫다고 스탈린과 손을 잡았어요. 이건 악마의 선택이었어』
4·19 의거는 李承晩 정부가 꽉 틀어 막았던 통일 논의에 물꼬를 텄다.
대학가에는 민주통일전국학생연맹(민통학련)이라는 학생 대중조직이 결성됐고, 柳根一은 선배로서 참여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5·16 쿠데타가 터졌고, 柳根一은 즉각 구속됐다. 죄목은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6조 위반」. 3년6개월을 소급해서 처벌할 수 있도록 한 「혁명 형법」이었다.
柳주필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5년 刑을 선고받았다.
柳주필의 부친 柳應浩(유응호) 선생은 충남 공주 출생으로, 京城帝大(경성제대)와 東京帝大(동경제대)에서 조선어를 공부한 언어학자였다. 광복 후 서울大 언어학과 교수를 지냈고, 6·25 전쟁 당시 월북해서 金日成종합대학 교수를 지냈다. 1950년대 末 숙청당해 지방으로 추방됐다가, 김형직 사범대학에 복직해 그곳에서 生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柳주필은 자신의 가족사를 처음으로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越北해서 金日成대학 교수가 된 아버지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柳주필을 모델로 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주변에서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들어서가 아니라 「광장」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최인훈씨한테는 물어보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기분이 근사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내가 몽상가였던 거야. 「北도 아니고 南도 아니다」, 「경계인이다」, 이런 건 대한민국 현실에서 용납이 안 돼. 분명하게 선택한 놈이 처자식들을 먹여 살렸어요. 나처럼 제 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을 구하겠다고 우쭐대는 것은 독립운동 시절로 끝을 내야지. 일전에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는데 탤런트 박근형이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役을 했어요. 이 친구가 광복 이후 큰 사업에 성공하고, 국회의원도 하고 출세를 해요. 드라마에서 이렇게 말하더군. 「여봐, 우리나라 같은 나라에서는 선택을 분명히 해야 해. 둘 중 하나밖에 없어. 셋은 없어」 참 기가 막힌 얘기야』
―부친이 金日成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5·16 후 군사재판에서 중형을 받게 된 것 아닙니까.
『그런 측면이 있죠. 아버지는 北으로 올라가 숙청당해 반동분자가 되고, 南에서는 아들인 내가 용공분자로 핍박을 받고, 기구한 가족사지』
―아버님께서 왜 가족들을 놔두고 월북한 겁니까.
『부친은 내가 어렸을 때 沒정치적인 학자였어요. 그런데 6·25전쟁이 나기 전에 느닷없이 5·30 총선에 출마를 하시더라고. 그리고 선거 며칠 전에 구속이 됐어요. 확실하게 알아봐야겠지만, 남로당에 가입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6·25가 터지고 감옥에서 나오셨어요. 9·28 수복 두 달 전쯤에 북한당국이 「남한의 모든 교수들은 평양에 와서 3개월간 재교육을 받으라」고 해서 혼자 평양에 가셨다가, 우리와 헤어지게 되신 거죠』
―부친의 월북 후 행적을 어떻게 확인했습니까.
『1990년대 초반에 탈북자가 늘어나면서, 북한에서 나온 사람에게 들었어요. 아버님이 숙청을 당해서 함경도에서 강제노역을 하시다가, 김형직 사범대학에 복귀했지만, 평생 감시원이 따라붙은 외톨이 생활을 했대요. 가끔 영화를 보여 주는데 아버님 주변에는 아무도 앉질 않았다는 거야. 그런 사람이 우리 아버지 하나가 아니에요. 북한을 선망해서 올라간 남쪽 지식인들이 전쟁에 죽고, 숙청당해 죽고, 비참한 말로를 맞았어요』
―黃長燁 前 노동당 비서가 부친과 金日成대학에서 같이 근무한 것 아닌가요.
『왜 아니겠어. 몇 년 전에 黃長燁 선생이 조선일보를 방문했어요. 화장실에 가시는 데 제가 옆에서 안내를 했어요. 이분이 참 신사셔. 남들이 있을 때는 아무 말 안 하다가, 둘이 있으니까 내게 아버님 얘기를 해요. 「아버님이 金日成대학에서 쫓겨나고 숙청당해서 나쁘게 될 때 내가 별로 도움이 못 됐다. 미안하다」고. 내가 「무슨 말씀이시냐. 남쪽에서도 정치범 근처에는 아무도 얼씬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드렸지』
柳주필은 『黃長燁 선생은 우리 아버님과 흡사한 분』이라고 했다.
『黃선생을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나요. 남한에서는 없어진 선비고, 그 시대 대학교수의 전형이에요. 그때 대학교수는 정신적 사표였어요. 너보다 아는 게 많다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고고해야만 했거든요. 黃선생한테는 그게 남아 있어요』
柳주필은 20代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다. 15년 刑이 조금씩 깎여 7년8개월이 됐지만, 24세에 감옥에 들어가서 31세에 옥문을 나섰다. 그는 감옥생활에서 무얼 잃고 무얼 얻었을까.
『투쟁적 관점에서는 타락이었지만, 인간적 성장이라는 측면에서는 많은 것을 얻었어요. 인간적인 성숙이 선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필요 이상으로 과격해져 있는 부분이 많았는데, 거품이 쫙 빠졌어요』
―15년 刑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한다는 게 20代 초반의 젊은이에겐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을 텐데.
『내가 바탕이 낙천적인가 봐요. 감옥살이를 즐겁게 잘 했어요. 오전에 「서양철학사」, 오후에 「플라톤」 이런 식으로 시간표를 짜서 책을 읽었어요. 책을 조금 읽다 보면 「식구통」하고 저녁 먹으라는 소리가 들려. 사회과학책은 읽을 수 없으니까, 문학·철학·역사 책을 주로 읽었어요. 어머니가 책을 들여 보내 주셨고』
―부인께서 7년간 옥바라지를 하고, 柳주필이 출옥한 직후에 결혼했다고 들었습니다.
『내 나이가 사십만 되어도 그 얘기를 할텐데, 육십 넘어서 그런 얘기하면 너무 쑥스럽잖아. 그 부분은 좀 봐줘요』
―「내 인생이 여기 감옥 안에서 끝나지 않나」하는 불안은 없었습니까.
『감옥살이를 한 3년쯤 하면 내가 언제 바깥에서 생활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감각이 완전히 달라져. 6년쯤까지 잘 지냈어요. 6년이라는 게 긴 시간이라는 실감이 안 나. 그 무렵 낮잠이 깜빡 들었는데, 「초등학교 졸업한 아이가 대학생이 될 만큼 긴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다」는 생각을 했어. 화들짝 놀라서 일어나 보니 감옥 안이더구먼』
人生의 은인 洪璡基
1968년 출옥 후 柳주필은 곧 바로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소년중앙부 기자로 취직했고, 「월간중앙」 부장을 거쳐, 1974년부터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중앙일보 설립자 洪璡基(홍진기) 회장과는 감옥에서 알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감옥에서 운동을 하러 나갔더니 「이봐. 미스터 유」하면서 저를 부르세요. 嚴妃(엄비)가 만든 「李王職(이왕직)장학회」가 있는데, 선친과 洪회장께서 여기서 장학금을 받아 함께 경성제대에서 공부를 하셨어요. 자유당 때 법무장관을 지내시다 4·19 이후 구속됐죠. 나보다 먼저 나가셨는데, 차입물을 보내 주고, 안양교도소에 면회도 자주 오셨어요. 감옥에서 나오니까 곧바로 「중앙일보에서 일하라」고 부르셨어요. 내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는데, 洪회장이 석방 탄원서에 제일 먼저 서명을 하셨어. 아들처럼 참 끔찍하게 돌봐주셨어요. 내 인생의 은인이에요』
―1981년 초에 조선일보로 옮길 때 洪회장이 말리지 않았습니까.
『진노를 하셨지. 중앙일보에 있으면서 내가 정치현실에 대한 칼럼을 쓸 수가 없었어요. 조선일보로 옮겨 새롭게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컸어요. 나중에 洪회장이 조선일보 오너에게 전화해서 「잘 부탁한다」고 얘기를 하셨어요』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근무하던 柳주필은 1974년 5월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구속됐다. 그의 아파트 거실에는 8개월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옥하는 그가 큰아들 정택을 번쩍 들어올리는 큰 사진이 걸려 있다.
첫댓글 글씨도 봣지만 무슨글씨도모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