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통계 23] 진보는 평등을 걷어차야 한다.
보수는 자유! 진보는 평등?
조동근(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는 2월 19일 개최한 ‘이명박 정부 1주년 평가와 과제’라는 심포지엄에서, 이명박 정부는 4년 동안 한국의 이념 지형을 정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명박 정부는 남은 4년 동안 우리나라의 ‘이념 지형’을 정리할 필요가 있음. “보수=수구세력” “진보=민주화 세력”의 고정관념을 버려야....... '보수 vs 진보'가 아닌 정치․경제사상에 기초한 ‘우파 vs 좌파’의 분류를 정당하게 받아들여야...... “우파는 자유를 핵심적 가치로 삼으며, 개인의 자율과 선택을 중요시 하는 이념사조”를, “좌파는 평등을 핵심적 가치로 삼으며,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중요시 하는 이념사조”를 의미. 국가와 시대에 적합한 이념지형의 모색도 ‘경쟁을 통한 발견과정’임. (MB노믹스 1년 평가와 향후 정책과제)
바른사회시민회의는 보수임을 당당히 표방하는 시민운동 단체이다. 2002년 3월 출범하여 지금까지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연초부터 지금까지 ‘폭력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도입을 위한 온라인 서명운동’을 홈페이지 대문에 걸어놓고 벌이고 있다. 물론 이명박 정부가 수없이 저지르는 민주주의와 인권 유린 행위는 폭력으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어쨌든 이들의 핵심 구호는 ‘살기 좋은 나라는 자유주의 이념과 민주질서를 지키려는 노력이 치열한 곳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보수 쪽에서 차지하는 이 단체의 위상은 진보 쪽의 ‘참여연대와 경실련’을 합쳐놓은 것만큼 되지 않을까 한다.
심포지엄에서 조동근은 ‘진보’라는 단어에는 좋은 의미가 듬뿍 담겨있다고 볼멘소리를 하였다. 그래서 ‘참신한 것’ vs ‘낡고 좀 고리타분한 것’의 이미지가 강한 ‘진보’ vs '보수'의 대립구도가 아니라, (북한, 빨갱이, 급진, 사회주의가 연상되는) '좌파' vs (대한민국, 국군, 온건이 연상되는) '우파'의 대립구도로 가자는 것이다. 물론 ‘진보’라는 단어를 버리고, ‘좌파’라는 단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서구와 달리 ‘좌파’라는 단어에는 북한 냄새와 피비린내가 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사람들이 낸 책의 제목이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인 것을 보면, ‘좌파’라는 단어를 당당하게 쓰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좌파’와 ‘우파’로 불리는 것은 싫어해도, ‘우파’는 자유와 개인의 자율, 선택을 중시하고, ‘좌파’는 평등과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중시한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결론만 먼저 말하면, 우파는 자유가, 좌파는 평등이 대표 상품이 된다면 한국 좌파는 영원히 비주류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나는 한국에서 좌파 혹은 진보의 대표 상품은 결코 평등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중에 비친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다. 형식 논리로 보아도 자유의 대립 항은 평등이 아니라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로 바뀐 ‘국기에 대한 맹세’(2007년 8월 개정, 기존 것은 1972년 제정)는 국가의 핵심 가치를 참으로 잘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지금 한국은 ‘세습 귀족’이 있는 것도, 보통 사람들이 상종하기를 꺼려하는 ‘백정’이 있는 것도 아니며, ‘여성 참정권’ 같은 명명백백한 평등 과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지금 한국의 평등 과제는 실질적 평등(기회 균등)의 문제이다. 평등이 대중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시절(19세기~20세기 중반)의 그런 차별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평등이 최상위 가치로 왔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격차의 합리적 조정으로 향해야 할 진보 에너지를 격차의 축소, 그것도 결코 가능하지도 않는 상향평준화 쪽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이다. 부가가치(잉여)의 분배 구조로 보면 성장과 통합의 핵심 걸림돌은 우리 내부의 불공평한 분배나 불합리한 상벌체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등이라는 프레임은 자본(기업)의 몫을 많이 쟁취하지 못한데서 문제(예컨대 비정규직 문제)의 원인을 찾는다. 그런 점에서 평등은 굽어진 동전을 볼록한 면은 그대로 두고, 오목한 면만 피려는 쪽으로 에너지를 몰아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힘은 엄청 들지만 성과가 있을 리 만무하다. 요컨대 평등이라는 가치는 진보에도 보수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이긴 하지만, 지금 한국 진보가 최상위로 받들어 모실만한 시대정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한국 사회의 진보와 개혁 에너지를 엉뚱한 데로 몰아가기에 해악이 큰 가치라는 것이다.
자유, 평등, 정의, 공평
자유는 인간이 하나의 독립된 개체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이다. 정의, 즉 바람직한 사회운영 질서=규칙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필요로 하는 가치이다. 정의=질서는 희소한 자원과 가치를 합리적․전략적으로 분배하는 게임규칙과 무한한 자원과 가치를 할당하는 (부모와 자식 간, 부부간, 신과 인간 간) 사랑(Agape)(人倫)이 양대 지주이다. 도식화 하면 아래 그림과 같다.
게임규칙은 합리적인 상벌(평가보상)체계를 구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희소한 자원을 둘러싼 인간 상호 간의 갈등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무력투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고, 필요한 경우 상호 협력을 통해 지속적으로 물질적․문화적 생산력을 높이도록 유인(동기부여)하는 체계이다. 게임규칙 혹은 상벌체계는 집단 간의 힘 관계나 생산력이나 문화 등에 따라 변한다. 봉건 왕정, 자본주의 시장경제, 민주주의, 법치주의, 평등, 공평도 본질적으로 게임규칙에 속한다. 개개인의 지적, 육체적 능력은 별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한, 북한, 조선의 물질적 문화적 수준 차를 보면 게임규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대 문명사회가 공유하는 합리적 게임규칙의 핵심은 경쟁 방식과 목적의 합치를 전제로, 경쟁 입구(출발선)에서의 평등과 경쟁 출구에서 합리적 불평등이다. 전자는 기회균등 또는 공정으로 불리고 후자는 공평으로 불린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담보하는 게임규칙은 공정하고 공평해야 한다. 공정해야 더 많은 사람이 경쟁에 참여하여 창의와 열정을 발휘한다. 동시에 공평해야, 즉 그 격차나 차별이 합리적이어야 승자는 나태하지 않고, 패자는 재도전 의지를 잃지 않는다. 공평은 지속가능한 성장과 통합을 뒷받침하는 상벌체계(평가보상체계)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기여, 부담, 의무와 사회적 권리, 이익, 혜택의 균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점점 더 분화되어 얽히고설키는 가치생산 사슬간의 균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입구, 출구에 구애받지 않고 공평을 합리적 불평등이라고 본다면 불평등해야 할 이유가 없으면 평등해야 한다. 그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평등은 공평의 특수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공평, 즉 합리적 불평등은 시대와 문명을 초월하여 한 사회의 성장과 통합의 관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벌체계는 게임규칙의 핵심인데 이 역시 그 내포하는 의미는 공평과 가장 유사하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아리스토탈레스는 정의를 “시민에게 전리품과 명예를 분배할 때 어떤 종류의 평등”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는 평등을 ‘수학적 평등’과 ‘비례적 평등’으로 나누었다. 수학적 평등은 기계적 평등을 의미한다. 비례적 평등은 그 인물이 소유하고 있는 덕과 자손, 재산을 고려하여 분배하는 원칙이다. 바로 여기서 평등 개념의 원형인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가 도출되었다. 따라서 이 평등 개념에는 기계적 평등과 공평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것은 같게’라는 원칙은 대단히 간명하고 강력하다. 가난한 사람도, 노예도, 여성도, 백정도, 돈 없는 사람도 같은 인간이라는 선언은 간명하고, 힘도 있고, 역사적 진보에 기여하는 바도 컸다. 일자무식꾼도, 교도소 수감자도, 장애인도, 재외국민도 모두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선언도 마찬가지다. 그 선언이 받아들여지면, 헌법상 국민기본권이 자동으로 보장된다. 그래서 평등은 신분제 철폐, 민주주의 발전(보통선거권), 국민기본권 확충(사회적 최소한 상향 등) 등 다방면에서 역사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였다.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원칙은 어떤 조건에서 얼마나 달라야 하는지라는 문제에 답해야 한다. ‘같은 것은 같게’라는 원칙이 격차가 0인 상태를 지향한다면,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원칙은 격차가 0일 수도 있고, 0.1일 수도 있고, 1일 수도 있고, 10일 수도 있다.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닌 것이다. 더욱이 전근대적 특권을 철폐하는 대중 운동이 크게 벌어진 시기에는 자원 배분 혹은 합리적 불평등 문제는 자유 시장에 맡기면 된다는 생각(자유방임주의)이 만연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자유와 평등을 우파와 좌파가 공유하는 가운데, 조동근의 말대로 우파는 자유를, 좌파는 평등을 중시하는 구도가 성립한 것이다.
한편 선진국의 좌파 혹은 진보 정당들이 여전히 평등주의를 주요한 상품으로 파는 것은, 사회투자국가론을 떠받치는 새로운 ‘사회정의’ 철학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평등’을 내세워 전근대적 특권 철폐, 보통선거권 쟁취, 국민기본권(사회복지 제도) 확장에 앞장 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진보 세력은 민주화에 관한 한 신화가 있지만, ‘평등’을 내세워 창조한 신화는 별로 없다. 여성운동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진보가 평등을 내세우면 항시 대기업. 공기업 노동조합이 연출한 비상식적인 현상을 들먹이며 '결과의 평등을 하자는 거냐'는 시비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요컨대 평등은 산업화, 민주화와 달리 한국민들의 가슴을 뛰게하는 가치가 결코 아니다. 공화주의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유럽, 미국, 일본에서 치열한 민권 투쟁을 통해 쟁취한 성과를 그대로 수입하여 제헌헌법부터 반영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화 투쟁은 이미 헌법에 명시된 가치를 확인하고 지키는 투쟁이었지, 새로운 기본권(예컨대 보통선거권)을 집어넣자는 투쟁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계사적 시간대와 한국사적 시간대
한국의 성장과 통합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질곡은 평등(프레임)으로는 제대로 인식할 수도 없고, 해법도 제대로 낼 수가 없다. 각종 통계를 종합하면 한국은 기업 전체의 평균 이윤율과 안정성은 별로 높지 않다. 그러나 공공부문(공기업, 공무원), 대기업, 정규직, 전문직 등 수백만 명의 이른바 괜찮은 직장인, 노블레스, 사회적 강자의 처우와 권리는 한국 생산력 수준에 비해, 또 그 사회적 기여, 부담에 비해 너무 높고 안정적이다. 반면에 2천만 명에 육박하는 3비층(비경제활동인구에 포함된 사실상 실업자, 공식실업자, 비임금근로자,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근로자들은 너무 열악하고 불안하다. 전자는 대체로 시장원리나 시장경쟁의 파도를 막아주는 높은 보호 장벽(보호 규제나 단체협약 등)을 가지고 있지만 후자는 벌거벗은 채로 노출되어 있다. 전자가 과소시장(경쟁) 상황에 놓여 있다면, 후자는 과잉시장(경쟁) 상황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전자의 선진국 수준의 삶과 후자의 후진국 수준의 삶은 동전의 양면 관계이다. 당연히 성벽 위로 올라가는 좁은 사다리 아래서는 박터지는 경쟁이 일어나지만 용케 성벽 위에 올라가고 나면 너무 널널하다. 한 번의 승부로, 한때의 행운으로, 부모 잘 만나 팔자를 고친 승자(?)들은 나태하고, 다수 패자들, 후발자들, 불운한 자들의 진입 비용은 너무 높다. 이것이 각종 공시, 고시, 사교육, 유학 열풍, 살인적인 대기업 입사경쟁률, 공기업 취업 비리의 근원이다. 게다가 한국은 부동산 불로소득이 너무 크고, 불공평하게 분배되어 왔다. 소선거구제 단순다수득표제로 인해 영남과 호남은 특정 정치세력의 독과점 상황이다. 여기서도 시장(정치소비자의 선택/심판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과잉시장(경쟁)과 시장실패는 대체로 세계사적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화, 지식정보화, 자유화(신자유주의 사조), 중국의 부상 등으로 집약되는 세계사적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는 대부분의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보편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의 시장에 대한 조정. 통제 능력에 따라, 사회안전망 수준에 따라, 과소시장의 규모에 따라 과잉시장과 시장실패의 패악은 다르게 나타난다. 한국은 국가의 조정. 통제 능력과 사회안전망은 취약하다. 시장의 압력을 사회적 약자에게 전가하는 과소시장의 규모가 너무나 크다. 설상가상으로 자유화. 자율화의 이름 아래 소비자와 하청중소기업에 대한 합법적 약탈을 일삼는 보수이익 집단이 강성하다. 따라서 시장의 압력이 3비층으로 총칭되는 사회적 약자, 후발자, 청년세대, 미래세대에게 집중되고, 시장의 패악도 심하게 나타난다. 외환위기, 카드대란, 부동산 폭등이 그 단적인 예다. 바로 여기서 신자유주의 반대 담론이 힘을 얻는다. 하지만 이는 혹독한 시장을 만드는데 누구 못지않게 지대한 공헌을 한 과소시장 영역의 모순 전가 행태에 대해서는 진보는 함구한다.
한국사적 시간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은 공평
정치적, 경제적 과소시장(경쟁)과 거대한 부동산 불로소득은 한국적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부동산 불로소득은 규제. 촉진권을 쥔 정치인 및 관료와 그 최대 수혜자인 토건족, 그리고 부동산 관련 정보가 빠른 노블레스들의 합작품이다. 사실 경제적, 정치적 과소시장(경쟁)과 과잉시장(경쟁)이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정의로운 질서(게임규칙)를 창조하는 국가=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보수와 진보를 초월하여 이익집단들은 단기적이고 협소한 이익을 추구하는데 대단히 유능하기 때문이다. 이 이익집단에는 기업, 노조, 직능협회, 사학재단, 언론, 토건족은 말할 것도 없고 허술한 민주적 통제 하에 놓인 일부 정부 부처, 지방정부, 검찰, 법원도 포함된다. 이렇게 보면 무능하고 때론 사악한 공적 존재와 유능한 사적 존재의 모순, 특히 후자와 전자의 유착이나 후자에 의한 전자의 포획이야 말로 이 시대 한국의 가장 핵심적인 모순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과소시장은 사민주의에 심취된 사람들과 공공부문 종사자에 의해 공공성의 징표로 선전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양반 특권 의식의 잔재이자, 개발연대의 고속성장을 위해 설치한 규제/촉진책의 유산이자, 1987년 이후 점차 그 건강성을 잃어온 대기업. 공기업 중심 노동운동의 유산이자, 부동산 관련 규제를 다루는 노블레스들의 농간이다.
노블레스, 사회적 강자의 눈높이와 권리 의식은 이미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가 있지만, 그 의무감과 연대의식은 지금이 아닌 과거의 한국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에 힘 있는 집단의 처우는 끝없이 올라가고, 힘없는 집단은 바닥을 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 흉내를 내어 국가가 특별히 배려하는 쪽, 예컨대 기초생활보호대상자는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싫을 정도로 많은 혜택이 쏟아진다. 바로 여기서 줄. 푸. 세로 집약된 자유주의, 반좌파 담론이 힘을 얻는다. 물론 이들 역시 보수이익 집단이 안주하고 있는 일부 과소시장 영역(신문 시장 등)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할 수만 있다면 정치적, 경제적 독과점을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이는 사상이념을 초월한다. 사실 줄. 푸. 세를 대표상품으로 팔고 있는 박근혜조차도 자신의 근거지(대구.경북)에서의 정치적 독과점을 보장하는 선거제도를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다.
왜 굳이 공평인가? 신평등주의로는 안되나?
사실 자원 배분 기제로서 시장과 민주주의가 잘 작동한다면, 다시 말해 이익집단과 정치, 관료에 의한 시장과 민주주의의 왜곡이 충분히 감내하고 동의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굳이 공평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 독과점과 소비자 약탈 등 시장 왜곡의 문제와 사회적 약자 보호 문제는 평등 개념의 확장인 공정(기회, 조건, 출발선의 평등)으로 얼마든지 대처할 수가 있다. 기회, 조건, 출발선의 평등의 전제조건인 사회적 최소한의 상향의 당위성은 얼마든지 끌어낼 수 있다. 예컨대 미국 민주당은 ‘해밀턴 프로젝트’에서 공교육 투자와 자본에 대한 접근성 제고가 -이는 곧 사회적 최소한의 상향이다- ‘경쟁의 기회와 참여자를 늘려 장기적인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새로운 경제발전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영국 노동당은 이 개념을 ‘사회투자국가’이론으로 정리하였다. 즉 사회적 최소한의 상향은 기존의 소비적 복지지출과는 확연히 다른 사회투자이며, 사람이나 사회적 자본이 국가 경쟁력의 요체로 되는 지식정보화 시대에는 그 어떤 투자 못지않게 생산적인 투자라는 것이다. 사회투자국가 이론을 떠받치는 핵심 철학(새로운 ‘사회정의’)은 평등한 시민권(Equal citizenship), 사회적 최소한(The social minimum), 기회의 평등(Equality of opportunity), 공정한 분배(Fair distribution)로 구성되어 있다.
사회투자국가론을 뒷받침하는 '사회정의'론(신평등주의)은 사실 경쟁 입구 관리 원칙과 경쟁 출구 관리 원칙의 일부를 합쳐놓은 것이다. 물론 출구 관리 원칙의 핵심은 사회적 최소한의 상향이다. 이를 도식화하면 아래 그림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회투자국가의 '사회정의' 론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만으로도 영국의 사회문제의 대부분을 해결 할 수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노동당 3기 연속 집권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미국과 영국의 토양에서 성장, 발전한 '사회정의'론으로는 한국의 독특한 문제, 즉 사회적 강자들의 과도한 지대추구 성향으로 인해 정치, 경제 등 다방면에서 과소시장(경쟁)과 과잉시장(경쟁)이 나타나는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해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의 안에 포함되어 있던 공평을 끌어낸 것이다.
단적으로 기존 평등 프레임으로는 거대한 부동산 불로소득의 문제점과 해법이 잘 보이지 않는다.
(헨리 조지가 말한대로 토지 국유화와 이용권 입찰 방식으로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있지만 한국에서는 때를 놓쳤다)
무엇보다도 전통적 평등 프레임이든 영국 노동당이 업그레이드 한 '사회정의' 프레임이든 한국의 사회적 강자들이 갖고 있는 엄청난 경제적 지대(地代)=자릿세와 가치생산사슬의 심각한 불균형의 문제점과 해법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수호 전민주노총위원장이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고 성토한 현상; ‘왼쪽 바퀴를 끼우는 작업을 하는 연봉 5천만 원짜리 정규직과 오른쪽 바퀴를 끼우는 연봉 2천만 원짜리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봐야하고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정치통계22]에서 말했듯이 평등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자본이 자신의 이익을 떼어내어 2천만 원짜리 비정규직을 5천만 원짜리 정규직으로 만들어야 한다. 물론 자동차 회사가 이익을 많이 내면 이는 불가능한 해법은 아니다. 문제는 한국 자동차 회사의 정규직 연봉과 고용안정성은 한국의 소득수준을 감안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최고라는데 있다. 평균 연령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뿐이 아니다. 전후방 협력업체의 노동자들의 정규직 연봉이 2천~3천만 원이며, 이곳의 비정규직은 1천5백만 원 내외라는 것이다. 물론 노동의 양과 질은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원청회사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본래 기업 내에서만 통하는 논리가 아니다. 게다가 힘 관계상 이들 협력업체의 이익은 납품단가 인하를 통해서 원청대기업이 얼마든지 빨아갈 수 있다. 원청회사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면 이익 손실분의 상당부분은 협력업체에 전가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또 있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삼성전자, 은행 등 굴지의 기업들의 경영사정은 좋은 편이지만 평균적으로 한국 기업들의 전반적인 경영사정은 선진국에 비해 결코 좋지 않다. 이윤율도 낮고 무엇보다도 들쑥날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 근무하는 정규직의 평균적 처우는 소득 수준을 감안하면 선진국 보다 확실히 높고, 고용도 안정적이다. 부가가치의 분배 구조를 볼 때 한국 단위 노동(정규직+비정규직)이 가져가는 몫(노동소득 분배율을 노동자 비율로 나눈 값)이 크기에 한국 정규직이 가져가는 몫이 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평등, 신평등 프레임으로는 이 불합리한 격차 문제를 제대로 인식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다. 공평은 '사회정의'론의 철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경쟁출구에서의 격차나 차별이 승자는 나태하지 않게, 패자는 재도전 의지를 잃지 않도록 조정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할 수 있다. 역동적인 사회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자유 vs 평등이 아니라 자유 vs 정의/공평
귀가 아프게 얘기하지만, 한국의 가치생산 사슬은 부동산 불로소득에 의해, 독과점에 의해, 우월적 지위에 있는 존재의 약탈적 거래 행태에 의해, 토건족. 토호 등의 재정약탈에 의해, 단결투쟁력에 의해, 기타 기득권 편향의 법, 제도에 의해 매우 왜곡되어 있다. 이것이 한국 사회의 성장과 통합을 가로막는 거대한 걸림돌이다. 이 중 일부는 ‘공정(기회, 조건, 출발선의 평등)’ 개념으로 해법을 낼 수 있으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공평은 한국사적 시간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이다. 그러므로 한국 진보는 개정판 ‘국기에 대한 맹세’가 정식화 한 대로, 국가의 핵심 가치를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자유와 정의라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당연히 진보는 정의를 중심 가치로 내세워야 한다. 저들이 자유를 대표 상품으로 내세우면 우리는 정의를 대표 상품으로 내세워야 한다. 그것이 너무 둔탁하면, 좀 생경하지만 날카로운 공평을 휘둘러야 한다. 자유 vs 공평도 괜찮은 대립구도이다.
공평을 내세워 불로소득과 정치적, 경제적 지대를 공격해야 한다. 가치생산 사슬의 균형, 상벌체계의 정상화, 합리적 불평등을 부르짖어야 한다. 모든 격차를 지속가능한 경제사회 발전이 가능하도록 조정해야 한다고 부르짖어야 한다. 가치생산 사슬 전반이 건강하게 맞물려 돌아가도록 전후방 협력업체를 둘러싼 공정거래 문제, 기업가 정신 및 창업률 문제, 벤처중소기업 지원문제, 지식노동과 육체노동의 파이 배분 문제, 더 나아가 선거제도, 정치자금제도, 세금제도, 보건의료 복지제도, 거대한 3비층, 청년(미래)세대 문제를 사회적 화두로 올려놓고 대안을 내야 한다. 논쟁을 주도해야 한다.
또한 한국 보수세력을 약탈의 자유를 추구하는 도적떼라고 몰아붙여야 한다. 가치생산 사슬의 불균형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화전민들, 오로지 시장 영역만 보는 외눈박이들이라고 몰아붙여야 한다. 반면에 우리는 과잉시장, 과소시장,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민주주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보는 균형잡힌 사람들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진정한 시장주의자, 진정한 자유주의자, 진정한 평등주의자, 진정한 진보주의자는 우리 공평을 부르짖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끝-
첫댓글 많이 배우고 갑니다.
보수=우파 자유를 최대의 가치로인정하고, 진보=좌파 평등을 최대의 가치로 인정한다는 논리는 이해하기 어렵네요. 우리나라에선 오히려 좌파가 자유를 더 많이 찿고 우파가 국가의 개입을 더 강조하는 경우가 많지요. 현대국가는 우파정책과 좌파정책을 혼용해서 구사하기 때문에 사실상 좌파니 우파니 하는 구시대적 이념박물관은 폐기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