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인터뷰 장소는 주로 교회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민센터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염리동 주민센터 1층은 민원 업무를 보는 사람들로 복닥거렸다. 계단을 오르니 “솔트카페”가 나왔다. 가운데 큰 나무가 놓인 예쁜 북카페였다. 그곳에 아름다운교회 홍성택 목사가 있었다.
알고 보니 홍 목사는 “솔트카페”의 대표이사이자, 염리동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주민센터는 그의 주 활동무대였다.
그와 주민센터와의 인연은 6년이 되어간다. 교회 개척부터 주민센터를 통해 매달 두 분씩 도운 것이 인연이 됐다. 그 후 주민센터의 추천을 받아 주민자치위원으로, 그리고 현재 주민자치위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길지 않은 시간, 토박이보다 속속들이 염리동을 알게 됐고, 주민 대표가 됐다.
그는 초기에 교회 사역과 지역을 섬기는 일 사이에서 고민했다. “위원장이 되니 교회 일보다 주민센터 일이 더 많다. 교회는 예배시간에 가서 설교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주민센터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보낸다. 이 마을의 대표니까. 처음에는 뭐하는 걸까 생각했다.” 그는 이런 혼란을 실천신학으로 정리했다. “나도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목회관이다. 교인들 잘 목양해서 큰 예배당도 짓고,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 만들어서 잘 지내는 걸 교회라고 생각했다. 교회 성장이 부흥이라 여겼다. 그러다 대학원에서 종교사회학을 배우면서 새로운 신학의 틀을 만들게 됐다. 부흥은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나가 어떻게 섬기는가에 달려있음을 깨달았다. 이후로 사회가 교회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고민하게 됐다.”
하지만 교인들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목사는 교회의 녹을 먹는 이니까. “교인들에게 신학 교육을 많이 시켰다. 여름방학이 되면 네다섯 시간씩 교회론을 가르쳤다. 신학이 제일 중요하다. 교인들도 신학 공부를 해야 한다. 신학이 형성되면 세상에서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교회에서 복만 바라는 건 무당에게 찾아가는 것과 같지 않나.”
세상 안으로 깊숙이 내딛은 홍 목사와 교인들로 인해 염리동은 통합과 연대의 장이 되어갔다. 주택정책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는 “마을 만들기 사업”에서 염리동은 선두주자다. 작년 주민자치위원장이 된 그는 염리동을 하나로 엮는 “마을 만들기 사업”을 구상했다.
역사를 공부하고, 인적 자산, 유무형 자산을 톺아보면서 마을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나갔다. 염(鹽)리동은 마포 나루를 통해 한양으로 들어가는 소금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던 곳이었다. 소금 장수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마을의 역사를 꺼내 “똑똑한 소금마을 이야기”라는 오늘의 이야기로 풀어냈다. 소금으로 오이지, 간장, 된장을 함께 담그는 공동체 활동, 맛내고 부패하지 않는 소금 정신을 알리는 연극 공연, “솔트카페”와 “천일염 사업”을 구상했다. 전국 주민자치 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상금 7000만원으로 마을 만들기는 실현됐다.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냉랭한 도심이 온기를 품은 마을이 되어 갔다. 서먹한 이들이 서로 알아가며, 친밀함을 나눴다. 이웃 간의 해묵은 오해와 갈등도 어느새 풀어졌다. 연대는 그 어렵다는 교회 사이에서도 이뤄졌다. 염리동에 거주하는 교회 10곳이 연합해 ‘교동협의회’를 조직했다. 교단을 넘어서 한 마을의 이웃한 자로서 재정 지원과 장소 제공 등 마을 사역을 위해 연대한다.
홍 목사의 이름 뒤에 여러 직함이 따르지만, 사람들은 그를 “목사님”으로 부른다. 위원장님으로 불렀던 이들도 이내 다시 목사님으로 부른다고 한다. 세상에서 일하면서도 목사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는 그는 교회와 세상이 융합하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느끼고 있다.
홍 목사와 함께 주민센터 2층에서 1층 문 밖을 나가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카페 직원들, 주민들, 공무원 등 만나는 한 분 한 분 인사하고, 안부를 건넨다. 그곳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곰살궂게 주민들을 대하는 그를 보며, 교회 담장을 넘어 세상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저릿하게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