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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 지리적 위치
쿠바는 북위 20-23.5도 북회귀선 남쪽 남북아메리카 대륙사이의 멕시콤만에 위치해 있다. 북쪽은 약 300㎞의 플로리다 해협을 사이에 두고 플로리다 반도, 북동쪽은 올드바하마 해협에 의해 바하마, 동쪽은 워드워드 해협에 의해 이스파니올라섬, 서부해안은 유가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가탄 반도와 210㎞ 떨어져 있다.
2) 면적
총면적은 110,922㎢로 한반도의 1/2 크기이다. 쿠바섬과 청년의 섬과 약 3,715개의 소규모 섬들로 이루어졌다. 쿠바섬의 동서 길이가 약1,300㎞이고 평균 너비가 80㎞인 동서로 뻗은 길다란 섬이다. 카리브해의 가장 큰 섬나라로 쿠바해안의 최장길이는 약1,250㎞이고 해안선은 총3,735㎞이다.
3) 인구 10,999,041명(97년 7월)
(1) 인구성장률 : 0.42%
(2) 연령분포도 : 0-14: 22%(남 1,255,844 ; 여 1.190,860)
15-64: 69%(남 3,770,154 ; 여 3,753,094)
65 이상: 9%(남 483,858 ; 여 545,231)
(3) 평균수명 : 75,2세(남 72.83 여 77.71세)
4) 수도
쿠바의 수도 하바나(Havana)는 1519년 건설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쿠바섬 북부에 위치한 풍경이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약 2,100,000명이 거주하고 있다.
5) 인종구성
쿠바의 인종은 크게 스페인계 백인, 흑인, 혼혈인, 원주민인 인디오의 4인종으로 나뉜다. 스페인 정복 전에는 인디언(타이노족)이 약 112,000명에 달하였으나 스페인 점령 이후 토벌과 금광에서의 혹사등으로 인디언들은 거의 사라져 현재는 절멸하였다. 인디언들을 대신할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아프리카로부터 팔려온 흑인 노예들이 현재의 쿠바 흑인의 선조이다. 1900년초 대규모의 스페인계 백인이주민들이 정착하여 현재의 백인이 되었다. 인구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 뮬라토 인종 쿠바의 정치, 경제,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뮬라토 51%
백인 37%
흑인 11%
중국 1%
6) 언어
주요언어는 스페인어이며 주로 사용되는 외국어로는 러시아어와 영어이다.
문자해독율은 95.7%이다.
7) 기후
아열대성 해안 기후에 속한다. 1-2월의 겨울이 가장 서늘하다. 아열대성 무역풍권에 속하므로 연중 미풍이 분다. 겨울에는 북동무역풍, 여름에는 동풍 또는 남동무역풍이 분다. 연 평균기온은 25.5℃, 1월 평균기온은 22.5℃ 이고 8월 평균기온은 28℃로서 기온의 교차가 매우작다. 특히 6∼9월의 4개월간은 일사량이 높고 한낮의 기온이 30℃가 넘어 35℃에 달하는 경우도 있다. 동절기인 1∼2월에는 최저기온이 10℃ 이상인데 한랭전선이 남하하면서 내륙지방의 온도가 내려간다.
일년중 우기(5월∼10월)와 건기(11월∼4월)의 구분이 뚜렷하다. 연평균 강우량은 1,380㎜로 대부분이 5월에서 10월사이에 내린다. 연간 습도는 높은 편이다. 우기의 평균습도는 82%, 건기의 평균습도는 80%로 연평균습도는 81%이다. 수도 하바나의 강수량은 10월이 가장 높은데 180㎜이고 2월이 가장 낮아 40㎜로 연평균 98㎜이다. 우기(雨氣)중 9월∼10월에 태풍 하리케인의 내습으로 북서부지방은 풍수해를 자주 입는다. 태풍시의 폭우는 오후에 2-3시간 천둥 번개를 동반하여 집중적으로 내린다.
8) 국가 정치 구조
사회주의
9) 종교
우위종교 : 카톨릭
소수종교 : 개신교, 여호와의 증인, 그리스정교
2. 역사
1) 약사(略史)
1492년 콜롬부스에 의해 발견/ 쿠바를 스페인 영토로 선포
1519년 아바나 건설
1868-1878년 제 1차 쿠바독립전쟁
1895년 제 2차 쿠바독립전쟁
1898년 파리조약으로 스페인으로부터 해방
1898-1902년 미국의 군정
1902년 독립, 팔마가 대통령으로 선출
1906-1909년 미국의 제 2차 군정
1909년 고메스 대통령 집권
1933년 바티스타(Batista)대통령 집권
1959년 카스트로(Castro)의 혁명
1961년 미국과의 외교단절(사회주의 노선 공식 선언)
1965년 쿠바 공산당 창당
1975년 쿠바 공산당 제 1차 전당대회, 신헌법 인준(認准)
1976년 전국인민권력회의 실시, 신헌법 제정
1980년 제 2차 공산당 전당대회
1982년 미국의 경제재제조치 강화
1986년 제 3차 공산당 전당대회,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 추구
1988년 EC와 외교관계 수립
1991년 제 4차공산당 전당대회/소련 특혜무역협정 종료/배급제 실시
고르바초프 쿠바 주둔 소련군 철수
1992년 미국의 봉쇄조치 강화
1993년 구 소련군 전면 철수
1994년 쿠바 난민 미국 유입(미-쿠바간 관계 악화)
1996년 미국 헬름 스버튼법 제정으로 쿠바에 대한 제제조치 더욱 강화
2) 역사
(1) 스페인 점령기
1492년 콜롬부스가 최초로 도착했을 때 쿠바에 있던 원주민은 시보네이족, 과나아타베이족, 이들보다 뒤에 정착했던 아라와크(타이노)족 등의 인디언이었다. 콜롬부스는 쿠바를 스페인 영토로 선포했고 1511년 디에고벨라스케스가 바라코아에 최초의 유럽인 영구정착지를 세웠다. 스페인인들은 쿠바를 7개의 자치제로 나누고 멕시코 진출을 비롯한 스페인의 중앙 아메리카 탐험의 근거지로 만들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신대륙과 스페인 본국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개자로 번영하여 금은보화를 운반하는 스페인의 배가 통행하였다. 그로 인하여 마이그스, 모오간(H. Morgan) 등의 유명한 대해적이 횡행하여 여러 도시가 파괴되었다.
17세기에 들어서 경쟁관계에 있는 유럽 강대국들이 침략해옴에 따라 식민지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18세기에는 영서(英西)전쟁에서 영국이 점령하므로 하바나는 자유무역항으로 번영하여 노예매매의 중심지가 되었다.
18∼19세기에 걸쳐 사탕수수 재배의 발전, 노예노동력의 수입, 설탕산업의 성장 등에 힘입어 쿠바는 번영을 누렸다. 19세기에 설탕산업을 세계최고수준으로 기계화했고 1860년경에는 전세계 설탕의 약 1/3을 쿠바에서 생산했다. 1865년 노예매매가 중단되고 1886년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멕시코 인디언과 중국인 노동력이 증가했다. 19세기 말에는 미국이 주요 교역상대국이자 투자국이었다.
(2) 독립운동
스페인은 쿠바의 정치적 자치를 허용하지 않고 세금부담을 증대하자 제1차 쿠바독립전쟁인 10년전쟁(1868-1878년)이 발발해 군사적 교착상태에 빠졌다. 제2차 독립전쟁은 1895년에 발발했는데 스페인은 이 전쟁에 20만명 이상의 병력을 배치했다.
19세기에 들어서자 미국이 진출하여 스페인 지배에 불만을 가진 쿠바인들의 반란을 원조하였다. 1898년 하바나 항에 정박중이던 미국함대 메인호 선상에서 원인불명의 폭발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미국도 스페인에 대항하여 제 2차 독립전쟁에 참가했다.
(3) 미국의 지배
1898년 미국과 스페인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쿠바는 미국의 점령하에 들어 갔다. 같은해 파리조약에 의해 쿠바의 독립을 인정받았으나 플라트(Platt) 수정조항에 의해 군사기지가 설치되는 등 미국의 내정간섭이 계속되었다. 1901년 미국은 관타나모만의 해군기지 설립권과 쿠바의 국내외 행정을 감독 할 권리를 얻어냈다. 1902년 토마스 에스트라다 팔마가 쿠바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폭동기였던 1905-1906년을 거쳐 1906-1909년에는 미국의 제2차 점령이 실시되었다.
(4) 쿠바독립
1909년 자유당 출신의 호세 미겔 고메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새로운 행정부가 출발하게 되었다. 고메스 대통령은 재임기간중 뇌물수수, 부정부패, 아리카계 쿠바인에 대한 사회적 부정 등이 구조적으로 고착되었다. 1933-1959년 바티스타(Batista)에 의해 독재정권이 계속되었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더해만 갔다.
(5) 카스트로 혁명 정권
계속적인 미국의 투자와, 설탕산업, 관광산업, 도박산업에 힘입어 경제발전이 계속되었으나 부의 불평등한 분배와 정치적 부패가 지속되던 끝에 1958년 오랫동안 망명생활과 농민과 도시중간층의 지지를 받은 대정부 게릴라전을 지속했오던 혁명적 공산주의자 피델 카스트로가 바티스타 대통령의 장기 독재를 타도하고 혁명에 성공하였다.
카스트로 정권은 1959년 6월 농지개혁법을 시행, 쿠바에 있는 미국인 소유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이로 인해 미국의 경제보복이 일어났다. 1960년 소련과 수교하고 1961년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되었다. 혁명후 카스트로는 자본주의를 폐지, 외국인소유 기업의 국유화, 농업의 다각화와 근대화 등 일련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1961년 4월 사회주의 혁명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1961년 5월 소련과 대사관 교환 설치했으며 1961년 12월 사회인민주의 혁명통일당(PPC)을 창설했다.
미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어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反)카스트로 망명군의 1961년 피그스 만 침입과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때 최악에 달했다.
1965년 10월 쿠바공산당이 결성되고 1972년 공산당 기구개혁과 제도가 정비되었다. 1975년 공산당 전당대회가 개최되었고 1976년 2월 신헌법에 공포되어 사회주의 헌법이 구체화 되었으며 같은해 12월 새로운 국가기구가 발족하였다.
1960-1970년대에 소련의 위성국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혔고, 제3세계로 확산되는 공산주의 혁명에서도 소련을 대신해 활약했다.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운동을 지원해왔으며 앙골라, 에디오피아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카스트로 정부는 모든 계층에 대한 교육, 의료 혜택을 실시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경제는 여전히 침체되었고, 계속 소련의 경제적, 군사적 원조에 크게 의존하였다.
1980년 12월 각급 대표부와 공산당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2차 공산당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카스트로 체체확립을 기반으로 실용주의적 경제정책을 수용하면서 공산주의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1986년 12월에 개최된 제3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는 소련의 영향력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사회주의노선을 채택하여 소련과 동구권의 국제적 변화속에서 사회주의를 더욱 강화했다. 소련과 동구권의 변혁이후 쿠바는 개방과 개혁의 압력을 받고 있으나 이를 계속 부인하면서 독자적 사회주의 추구라는 구호 아래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1991년 제4차 공산당 전당대회를 개최하면서 구 소련과 동구의 붕괴후 야기되는 정치적, 경제적 고립을 탈피하고자 사회주의 체제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부분적인 개혁안을 도입하였다. 이런 원칙하에 중국식 개혁모델을 점진적으로 도입하여 극심한 경제난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수출증대와 관광산업의 활성화를 위한 외국자본 유치나 개인의 부업을 인정하는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이 도입단계에 있다. 1992년 7월 구 소련과의 동맹관계를 명시한 헌법전문의 일부를 삭제하고 동시에 종교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직접, 간접선거의 도입 등 헌법개정을 승인하였다. 천안문사건으로 고립된 중국에 접근하여 1990년 5월 중국공산당이 쿠바를 방문하였다. 개헌후 국가인민회의 의원 선거를 1993년 실시되었으나 98.7%의 투표율로 카스트로 의장이 선출되었다.
3. 정치
1) 정체(政體)
쿠바는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1959년 이래 카스트로 루스(F. Castro Ruz) 정부가 강력한 사회주의 개혁을 단행하고 미국의 의존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독립에 노력해온 현재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이다. 미국의 경제봉쇄, 미주기구로부터 제명을 받으면서도 공산국과 관계를 맺고 정치, 사회면에서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다.
2) 국가원수
국가원수는 국가평의회 의장과 동시에 행정부의 수반이 된다. 1993년 3월에 재취임한 피델 카스트로 루스(Fidel Castro Ruz)이 혁명이후 장기집권하고 있다.
3) 입법부
국가 최고기관인 국가인민회의는 전인민의 주권을 대표하며 헌법개정권과 입법권을 갖는 유일한 기관이나 카tm트로 정권의 명목상의 기관일 뿐이다. 인민회의는 법률이 정한 방법과 절차에 따라 전국 169개의 지방인민회의에 의해 선출되는 대표의원으로 구성된다. 의원의 55%는 시인민회의(Asamblea Municipal del Poder Popular)가 추천하며, 45%는 공산당이 직접 임명한다. 인민회의 의원은 5년임기로 선출되나 전시나 선거행위를 저해하는 예외적 상황의 경우에는 의회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그 임기를 연장할 수있다. 인민회의는 일년에 두번 정기회기와 의원의 1/3의 제안 또는 국가평의회의 승인을 얻어 특별회기를 갖는다. 입법, 예산심의와 승인, 외교, 노선승인 등의 사항을 결정한다.
1980년 12월 구성된 국가평의회(Consejo de Estado)는 국가인민회의 의원 중에서 선출된 의장, 제1부의장, 부의장 5명, 서기, 평의원 23명의 31명으로 구성된다. 국가인민회의 폐회 기간 중에는 이 회의에서 선출되는 국가평의회가 그 기능을 대행하며 국가평의회 의장이 국가원수이며 정부의 최고책임자이다. 국가평의회는 국가와 정부를 대표하여 일반정책을 담당하여, 자신 행정행위에 대하여 국가인민회의에 책임을 지며 행정행위를 설명해야 한다.
4) 행정부
국가평의회에 의해 구성된 의장, 제1부의장, 부의장 8명, 서기, 국가기획 위원회 의장, 각부 장관 23명이 각료회의(Consejo de Ministros)를 구성한다. 각료회의는 최고집행 및 행정기관으로서 공화국 정부를 구성한다. 각료회의는 국가인민회의에서 결정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및 국방활동을 조직하고 수행한다. 각료회의는 각종 안건을 국가평의회에 보고하고 법률안, 법령, 산안 등을 국가인민회의에서 승인을 받은 후에 실행한다. 각료회의 위원은 국가인민회의에서 선출되고, 각료회의 의장, 제1부의장, 부의장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는 행정부문별 중앙기구를 조정하고 부처간의 협조체제를 구축한다.
5) 정당
카스트로 혁명이후 소련의 영향으로 극단적인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위한 일당 독재정권을 유지하여 왔다. 쿠바 공산당만이 유일한 국가정당으로 당원수는 약 61만명이다.
쿠바공산당의 제1차 전당대회는 1975년 하바나에서 개최되었다. PPC는 초창기부터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Raul Castro Rus)가 제1서기와 제2서기를 차지하고 있다. 223명으로 구성된 중앙위, 정치국, 서기국(1991년 폐지), 5개의 위원회가 있다. 1976년 헌법은 쿠바공산당이 최고권력당임을 천명했으며 PPC의 정치국이 최고 정책결정기관으로서 모든 공식 통치기구들을 장악하고 있다.
6) 선거
모든 선거와 국민투표에 자유, 평등, 비밀의 원칙이 유지되며 16세 이상의 성인남녀에게 투표권이 주어지며 피선거권은 18세이상의 성인남녀에게 주어 진다.
7) 지방제도와 지방행정
행정구역은 14개의 지방과 1개의 특별 자치지역(피노스섬)과 그 아래에 최소행정구역인 169개의 시로 나뉜다. 각 지방마다의 직장과 단체의 시민 대표들로 구성되는 지역인민회의가 각 행정 지역의 최고 권력기구이다.
14개 주(州)에는 시인민회의에 의해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되는 주(州)인민회의가 있으며 주인민회의가 각 지방을 관리하는 최고기관이며 입법기관이다. 정단위별로 선거에 의해서 구성되는 지역인민회의는 경제계획이나 예산문제, 치안문제, 문화, 복지, 교육 및 사회적 문제 등에 관련된 중요정책을 결정한다.
4. 외교
1) 외교정책
쿠바는 카리브해 입구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서 16세 기부터 강대국들의 진출기지가 되었다. 현재는 파나마 운하를 포함 미국과 중남미와 카리브해 국가들을 연결할 수 있는 중간지점으로서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쿠바의 외교정책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쿠바의 지정학적인 위치와 미국과 구 소련의 정책변화이다.
미국과의 외교단절후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경제 제재와 미주기구(OAS)로부터 추출되는 등 국제적인 고립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이후 소련과 외교관계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다국간 관계를 확대를 추구하고 특히 제3세계 지역에서 좌익혁명운동과 혁명정부를 지원을 천명하고 군사적, 경제적 개입을 통한 적극적인 대외지향적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구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 붕괴 후 중남미제국과 베트남, 중국 등과의 우호를 중시하고 있다. 국제환경의 변화와 쿠바 자체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스트로는 기존의 외교정책을 고수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쿠바의 외교정책은 점차 지지기반을 잃어가고 있다. 또한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붕괴 이후 주요 수출시장과 경제지원국을 상실함으로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으며 미국의 경제제재가 더욱 심해져 국제적 압력과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용주의적 외교노선으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2) 남북한과의 외교관계
(1) 대남한관계
1949년 7월 18일 쿠바는 남한을 승인하고 1956년 친설사절단(양유찬 대사)을 쿠바에 파견하였다. 한국전쟁시 유엔결의에 따라 1개 중대의 병력을 파병원조로 제의하였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긴급구호결의에 따라 270만 달러 상당의 지원을 제공하였다.
1959년 1월 카스트로의 쿠바 공산화로 외교관계가 단절되어 아직까지 양국 간의 통상관계 및 외교관계가 전무한 상태이다. 카스트로 정권은 한국에 대하여 적대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북한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2) 대북한관계
북한은 쿠바의 카스트로 공산정권 수립후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소련을 배경으로 점진적으로 관계를 심화하여 왔으며 국제무대에서 북한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쿠바의 상주 공관이 주재한 지역에서 쿠바는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5. 경제
1) 경제개요
쿠바는 서반구에서 최초로 공산주의 공화국이 된 국가이다. 중앙계획경제 체제를 운영하며 사탕수수에서 수출되는 설탕 생산과 수출이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다.
1989년 이후 쿠바가 경제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된 원인으로는 우선 소련과 동구제국의 급진적인 정치, 경제개혁으로 쿠바에 대한 물자공급을 지연시키거나 취소함으로 오는 물자부족, 또한 미국은 지속적으로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조치를 취했으며 쿠바의 주종인 설탕의 국제가격하락과 쿠바내 계획경제체제의 실패, 통화부족으로 인한 서구국가들과의 통상관계수립이 불가능한 여러 가지 상황이 복합되어 쿠바의 경제는 치명적인 상태에 이르렀다. 1990년 카스트로 정권은 경제적 위기를 평화시의 특 긴급상황이라 규정하고 소득 증대를 위한 관광산업개발과 외국인의 투자유치를 확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2) 주요 경제지표
1980년 중반 소련으로부터 도입한 원유 재수출을 통해 필요한 외환을 확보하고 산업활동을 유지함으로 한때 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던 쿠바는 1986년부터 경제침체 조짐을 보이다 1990년 마이너스 경제성장을 한후 1992년 이후 극심한 경제난을 겪게 되었다. 이는 1987∼1989년 전체 무역의 80%를 차지하던 동구화 소련과의 무역이 사회주의국가들의 붕괴에 따라 1990년대에 들어 급격하게 감소한 데 그 원인이 있다. 미국의 금수조치의 지속 및 토리첼리법안을 통한 통제강화와와 설탕 등 농산물의 가격불안정이 쿠바경제성장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쿠바의 역사
남미에서 쿠바 섬으로 처음 사람들이 건너온 것은 BC 3500년경으로 여겨진다. 이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거나 수렵 채집 생활을 하였으며 뒤이어 농경 사회를 이룩한 아라왁 인디언이 합류했다. 스페인인들이 15세기 후반에 들어오기 전까지 100,000명에 이르는 쿠바 토착민의 3/4은 타이노어를 사용하던 아라왁인들이었다.크리스토퍼 콜롬부스는 1492년 10월 27일 쿠바를 발견하였으며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땅'에 홀딱 반했지만 스페인인들은 이것을 무시하고 그들의 최초 기지를 이스빠니올라(Hispaniola)의 산또 도밍고(Santo Domingo)에 건설했다. 1512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뚜엘랴르(Diego Vel耿quez de Cu複lar)는 300명을 이끌고 이스빠니올라를 떠나 쿠바로 향하여 스페인령임을 선포하고는 2년 내에 일곱 곳의 개척지를 건설했다. 스페인인들은 수천 명의 원주민을 죽였으며 벨라스케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원주민을 모두 서쪽으로 쫓아버렸다. 그러나 쿠바는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1516년 벨라스케스가 멕시코로 네 번의 원정을 후원하여 그 중 1519년에서 1521년까지의 에르난 코르테스(Hern烱 Cort乶)의 정복이 이루어진 이후에 쿠바는 남미로 가는 스페인의 관문으로써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엔꼬미엔다 체제가 구축되면서 커다란 사유지가 형성되어 종교 교육의 구실 아래 인디언에 대한 노예화가 필연적으로 진행되었다. 1542년에 이 체제가 폐지될 때까지 혹독한 착취와 유럽인이 가지고 온 질병에 의해 인디언 인구는 5,000여명 수준까지 감소하였다. 이런 상황에도 별로 당황하지 않고 스페인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하여 노예 노동력의 수를 유지했다. 북미의 노예 매매와 다르게 쿠바의 아프리카 노예들은 부족별로 함께 살도록 되어져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문화 중 몇몇 측면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목장에서 일하도록 보내졌고 소와 관련된 생산 - 가죽이나 말린 소고기 -은 18세기에 담배가 쿠바의 주요 돈벌이가 되기 전까지 기간 산업이 되었다.
점점 다른 유럽 국가의 세력이 카리브해의 스페인 지배를 위협하였는데 1655년에 영국이 자메이카를 차지하고 하이티는 1697년에 프랑스 수중에 떨어졌으며 쿠바 역시 계속해서 공격의 위협을 받았다. 영국 군대는 1762년 6월 6일 쿠바를 침입하여 아바나를 포위하고 11개월 동안 점령하였다. 이 기간 동안 영국은 4000 명의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하고 쿠바의 무역망을 광대한 범위로 넓혔다. 1783년 미국 독립으로 인한 시장의 창출과 1791년 하이티의 노예 폭동으로 쿠바 설탕 생산의 최대 경쟁자가 사라짐에 따라 설탕 생산이 쿠바의 주요 산업이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새롭게 수입되는 수만 명의 노예들 덕분에 1820년까지 쿠바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설탕을 생산하는 국가였다.
1810년에서 1825년까지 시몬 볼리바르(Sim蚤 Boliv痙)가 남미에서 펼친 혁명 활동 이후에 서반구에서 스페인 식민지로 남게된 나라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뿐이었다. 스페인 충성파는 예전 식민지를 떠나 쿠바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쿠바의 첫 독립 전쟁은 크리올 농장주인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뻬데스(Carlos Manuel de C乶pedes)의 지휘하에 1868년 10월에 발발하였다. 10년 동안 200,000명이 죽었지만 결국은 반란군은 모든 힘을 다 써버렸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사면을 보장하는 조약에 서명하였다. 스페인이 내부적인 자치권을 얻으려는 크리올 사회를 달래는 동안 미국은 이 식민지를 병합하려고 준비중이었다. 그러는 동안 일단의 쿠바 반란군이 미국으로 망명해 스페인 식민 정부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시작했다. 그 중에는 국민적인 영웅이 된 시인이자 수필가인 호세 마르띠(Jos Mart縯)도 있다. 마르띠와 그의 군사 지휘관인 막시모 고메스(M經imo G藻ez)는 1895년 동부 쿠바에 상륙하였으나 몇 주 뒤에 백마를 타고 눈에 잘 띄는 마르띠는 스페인과 접전 중에 총에 맞아 죽었다.
고메스와 반란군 지도지인 안또니오 마세오(Antonio Maceo)는 서쪽으로 진군하며 지나는 동안 설탕 농장, 밭, 마을 등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다. 스페인은 거의 내전 수준이 되어버린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무자비한 군인 발레리아노 웨일러(Valeriano Weyler)를 보냈고 그의 대책은 성공했지만 쿠바의 농업 중심 경제는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1897년 6월 쿠바 독립에 대해 강경파의 입장을 고수하던 스페인 수상, 안토니오 카노바스(Antonio C烱ovas)가 쿠바와 연관이 있는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했고 새로운 스페인 정부는 쿠바에 대해 좀더 회유적인 접근을 시도했다.그러는 동안 미국은 쿠바를 병합할 모든 준비를 마쳤다. 미국의 대중적인 신문들은 1898년 1월 아바나 항구 바로 바깥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메인호의 폭발을 두고 전쟁의 분위기를 선동했다. 이어 스페인이 쿠바를 $3억 불에 팔라는 제의를 거절하자 전쟁을 선포했다. 스페인이 항복하기 전까지 교전상태는 3개월 간 지속되었다. 미국의 선전포고는 쿠바가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존중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푸에르토리코와 괌, 필리핀을 병합하는 동안 군사적으로 쿠바를 점령하는 것에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존 R 브룩(John R Brooke)을 쿠바 총독으로 세웠고 그와 그의 후임들은 공공 사업을 연이어 추진하여 학교를 세우고 공중 보건을 개선시키는 등 모든 것들이 쿠바가 미국에 종속되도록 계획하였다. Platt 수정조항은 미국이 쿠바 국내의 문제에 대해 미국의 자유 재량으로 개입할 권리를 주는 것으로 Platt 수정조항을 승인하거나 아니면 무기한 미국의 군사 지배하에 남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받은 쿠바는 울며 겨자먹기로 덜 나쁜 것을 선택하였다. 1903년 미국은 이 수정조항을 이용하여 관따나모(Guant烱amo)만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고 쿠바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도록 했다. 오늘날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이 기지는 쿠바에게는 모욕이며 미국에게는 말만으로 쿠바의 자율적인 결정권을 존중한다는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다.1920년대 미국 회사들은 쿠바 농장의 2/3를 소유했으며 미국이 금주법 같은 것을 가지고 노는 동안 관세로 인해 쿠바의 제조 산업은 불구가 되었지만 도박이나 매춘에 기반을 둔 관광산업은 성행하였다. 1930년대 대공황으로 물가가 급등하면서 사회적 동요로 번졌으나 헤라도 마챠도 이 모랄레스(Gerado Machado y Morales) 대통령에 의해 난폭하게 진압되었다. 1933년 8월 마랄레스는 쿠데타에 의해 제거되고 육군 하사관인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가 권력을 잡았다. 20년이 넘도록 부패한 바티스타가 정권을 잡고, 또는 부정한 방법으로 유지하는 동안 쿠바는 무너져갔으며 국가의 자산은 점점 외국의 손에 넘어갔다.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불공평은 마침내 젊은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에 의해 이끌어진 3년 간의 게릴라 활동으로 막을 내렸다. 바티스타는 4000만 US$의 정부 기금을 가지고 쿠바를 벗어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도망갔다.
카스트로는 수상에 취임하자 즉시 국가 경제의 개혁에 착수하여 임대와 전기 요금을 내리고 400 헥타르 이상의 토지 소유에 대해서는 국유화하였다. 미국 소유의 원유, 전화, 전기 회사와 설탕 공장의 국유화에 따라 미국의 이익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미국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대신에 미국은 쿠바의 설탕 수입을 줄였고 CIA는 카스트로를 전복시킬 새로운 혁명군을 훈련시키고 무장시켰다. 소련은 쿠바의 설탕 잉여분을 사들였으며 무역과 기술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쿠바의 중산층은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마자 대부분 쿠바를 탈출하였다. 이들 망명자의 대부분은 바로 물 건너 미국의 마이애미에 정착하여 격렬한 반 카스트로 운동을 벌이며 미국의 대외 정책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961년 4월, 1400명의 쿠바 망명자와 CIA에 의해 훈련받고 무장된 미군에 의해 벌어진 피그만 침공을 물리친 데 대해 쿠바군을 칭찬하는 연설을 하며 카스트로는 최초로 쿠바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었음을 언급했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Che Guevara)는 적극적으로 남미와 아프리카의 게릴라 단체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자이레, 앙골라, 모잠비크, 볼리비아(게바라는 볼리비아에서 미국 고문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살되었다), 에티오피아 등의 인민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나 고문을 파견하였다. 미국의 대응은 이들 나라의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쿠바에 대해 금수조치를 내려 양국 간의 교역과 여행을 엄격하게 금지시키는 것이었다.
소련이 제공하는 대규모 원조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경제는 황폐화되었고 양국 간의 관계 역시 1989년 동유럽이 무너지자 러시아가 11,000명에 달하는 군인과 기술자를 철수시키면서 곧 악화되었다. 미국은 엄격한 무역 금지 조치를 고수하였고 쿠바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빠르게 고립되었다. 1991년 12월 쿠바 헌법은 마르크스-레닌 주의에 대한 모든 언급을 제거하도록 고쳐졌다. 카스트로는 공공연하게 공산주의에 대한 충성을 언급하였지만 소련식 모델에 대한 개혁은 벌써 물밑에서 진행 중이었다. 1993년 쿠바인이 미국 달러를 가지거나 사용할 수 있으며 100가지의 상업 분야에서 자영업을 허락하고 산지 시장을 여는 것을 허용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미국 달러 수입이나 이익에 대한 세금이 1994년에 징수되었고 1996년 10월에는 외국 회사가 전적으로 사업을 소유하거나 운영할 수 있으며 부동산을 매입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개방에 대해 미국이 취한 행동이란 해묵은 금수조치를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1996년 헬름스-버튼 법령을 만들어 쿠바에서 몰수된 재산을 이용하는 외국 회사에 대해서는 미국의 투자자들이 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쿠바에 대해 차관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충고하였다.
쿠바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인권 침해에 대해 비판을 받아왔다. 정치적인 탄압으로 인해 단지 쿠바의 현재 지도체제를 비판한다는 이유나 정치적인 반대 세력을 규합하려 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진 양심수는 적어도 500여명에 이른다. 비록 이러한 상황이 한탄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힘센 이웃 나라인 미국이 항상 쿠바를 불안정하게 만들려 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황 바오로 2세는 1998년 쿠바를 방문하는 동안 쿠바 정부의 고집과 미국 정부의 금수 조치에 대해 함께 비난함으로써 이것을 인정했다. 당시 교황의 방문에는 5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이것은 미국이 양국 간의 직항편 운행을 2년 동안 금지시킨 조치를 철회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1998년 10월 찾아온 허리케인 죠지는 교황처럼 환영할 만한 것이 못됐다. 인명피해는 소수에 그쳤지만 수천 명의 주민이 수재민이 되었으며 많은 가옥이 거센 바람에 파괴되었고 더 많은 집들이 폭풍으로 인해 광범위하게 번진 홍수를 피하기 위해 버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