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은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1900~ 1992)가 1985년부터 ‘일요건강’에 연재한 글을 모아 간행한 회고록이다.
1933년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결혼한 후 1965년 이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서거할 때까지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록에는 대한민국의 독립과 건국, 6·25전쟁 등 현대사의 주요 장면이 포함돼 있다. 주요 내용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독립을 위한 情熱과 氣品에 끌려 결혼
西洋 부인 백안시 하는 風土 개의치 않아 獨立 기대하며, 당당하게 外交활동 전개
1933년에 내가(당시 33세) 이 박사를 처음 만나게 된 곳은 스위스 제네바의 레만 호반에 있던 호텔 드뤼씨의 식당이었다.
그 당시 이 박사는 일본의 만주 침략을 규탄하고 있던 국제연맹에서 만주의 한국 동포들이 또다시 일제의 학정 밑에 놓이게 된 애절한 사연을 알리고 한국을 독립시켜야만 극동의 평화가 유지된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앉아있는 식탁으로 온 이 박사(당시 58세)의 첫 인상은 기품 있고 고귀한 동양신사로 느껴졌다. 그가 주문한 식단은 ‘사우어크라우트’라는 시큼하게 절인 배추와 조그만 소시지 하나, 그리고 감자 2개가 전부였다.
다음날 나는 신문에서 그분의 사진과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장문의 인터뷰기사를 보았다. 신문기사에서 그분은 “한국이 독립해야 아시아의 평화는 이룩될 수 있다”고 열렬히 주장하고 있었다.
58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넘치는 정열과 젊음을 지닌 한국의 독립투사와 얘기를 나누게 되면서, 나는 조금씩 마음이 끌려갔다. 나는 어머니의 따가운 눈총을 느꼈지만, 이 외로운 한국독립운동가의 바쁜 일손을 돕기로 했다. 나는 이 당시 33세로 영어통역관 국제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속기와 타자가 특기였다.
그 다음해인 1934년 10월 8일 하오 6시30분, 이 박사와 뉴욕의 몽클래어 호텔 특별실에서 윤병구 목사와 존 헤인즈 홈즈 목사의 합동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온 민족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독립투사의 국제결혼에는 말 못할 어려움이 많이 따랐다. 그 분을 보필했던 하와이의 동지들이 “서양부인을 데리고 오시면 모든 동포들이 돌아설테니 꼭 혼자만 오시라”는 전보를 두 번씩이나 보내 왔을 때, 나는 친정 어머니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남몰래 눈물을 많이 흘렸다. 그러나 자기 소신대로 행동하는 남편은 하와이로 서양 부인인 나를 데리고 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부두에는 ‘이 박사가 서양부인을 데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수많은 동포 구경꾼들이 나와 우리를 맞아 주었다.(1935. 1. 24.) 서양부인에 대한 호기심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하와이 한국동포 1,000명 이상이 모이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결혼 초부터 남편과 나는 매일 새벽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생활을 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은 남편이 독립운동을 할 때나, 대통령직에 있을 때나, 하와이 병실에서 돌아가실 때 까지 한결같이 계속되었다.
우리가 결혼하자, 이 박사의 비정규 여권을 내줄 때마다 국적문제로 고심했던 미 국무부의 시플리 여사는 지겨운 나머지 나에게 남편을 설득하여 미국시민권을 받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편의 대답은 한결같이 “한국이 독립할 것이니 기다려 주시오”라는 것이었다. 이 당당한 무국적자 남편과 내가 이로 인해 겪은 고초는 그분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이룰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박사는 주차를 할 때 외교관 전용의 VIP주차장을 이용하였다. 한국이 일본에 강점되어 독립된 국가가 아니던 당시에 이것은 분명 규칙을 무시한 것이었겠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박사로서는 미국에 대해 참으로 할 말이 많았다. 1882년에 미국은 대한제국과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느냐? 멀쩡한 외교관계를 파기한 것이 미국이 아닌가? 이 박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고 구미위원부 위원장이다. 이러함에도 규칙위반이라고 문제가 된다면, 당당하게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함으로써 미국 시민들에게 알리는 홍보 기회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워싱턴의 경찰은 워낙 유명한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승만 박사를 의식하였음인지 호화로운 외교관 승용차들 사이에 세워진 초라한 중고차에 대해 시비를 걸어오는 일이 없었다. 정리/김정은 기자 hyci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