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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운자는 모두 -p로 짧게 닫히는 입성자다. 첫 단락의 부드러운 평성운과 달리 소리가 급하게 막히고 끊어진다. 이러한 입성운은 꽃잎이 배와 노에 부딪히고, 물과 바람을 두려워하며,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불안한 움직임을 청각적으로 나타낸다.
한국 한자음에서도 ‘즙·겁·접’으로 읽혀 입술을 닫거나 막는 느낌이 남아 있다. 꽃잎은 첫 단락에서 물과 바람 사이를 유연하게 오갔지만, 이 단락에 이르면 더 이상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 운율도 꽃잎처럼 짧게 막히고 끊긴다.
낙화와 두보의 표박
물과 바람 사이에서 불안하게 떠도는 꽃잎은 만년에 배를 타고 표박하던 두보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게 한다. 시의 相을 문법적으로 곧바로 ‘나’라고 옮기기는 어렵다. 《두시언해》도 이를 “다 서르 저허 놋다”, 곧 “모두 서로 두려워한다”고 풀이한다. 그러나 꽃잎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꽃잎의 두려움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꽃과 시인은 점차 겹쳐진다.
바람에 밀리고 물에 이끌리면서도 어느 한 곳에 편안히 머물지 못하는 꽃잎은 전란과 정치적 격랑 속에서 끊임없이 떠돌던 두보의 또 다른 모습처럼 보인다. 꽃잎이 배 곁에 붙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배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만년의 두보가 실제로 거주하고 이동하던 삶의 공간이다. 배 곁의 낙화와 배 안의 시인은 서로 다른 존재이면서도 같은 물과 바람에 놓여 있다.
사람의 품과 꽃잎의 자존
꽃잎은 물과 바람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사람의 품으로 경박하게 날아들려 하지 않는다. 赤憎은 ‘몹시 싫어하다’를 뜻하는 당대의 구어적 표현이다. 꽃잎은 사람의 품속으로 몸을 맡겨 당장의 위험을 피하는 일을 경박한 행동으로 여기는 듯하다.
이어지는 珍重은 ‘소중히 여기다’라는 뜻과 함께 ‘자중하다, 스스로를 귀하게 대하다’라는 태도를 나타낸다. 꽃잎은 사람에게 다가가 붙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지킨다.
赤憎輕薄遮入懷
경박하게 문득 사람의 품으로 날아드는 것을 몹시 싫어하고,
珍重分明不來接
귀한 몸인 양 분명 사람에게 다가와 붙으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만년의 두보가 지키려 했던 자존이 겹쳐 보인다. 두보 역시 배를 타고 떠돌며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아무에게나 자신을 의탁하여 삶을 보전하려 하지는 않았다. 사람에게 의지하면 당장의 위태로움은 피할 수 있지만, 자신의 뜻과 존엄을 쉽게 내맡길 수는 없다. 사람의 품으로 날아들지 않는 꽃잎은 그런 두보의 내면을 상징한다.
이러한 자중은 편안한 선택이 아니다. 꽃잎이 사람의 품에 들지 않음으로써 다시 물과 바람의 위협에 노출되듯, 두보의 자존 역시 그를 더 외롭고 위태로운 자리로 몰아넣는다. 둘째 단락을 지배하는 입성운 楫·怯·接의 급박한 소리는 바로 이러한 긴장과 막힘을 강화한다.
다시 날아오르려는 꽃잎
사람의 품에 의지하지 않은 꽃잎의 앞날은 고단하다. 오랫동안 비에 젖었기 때문에 다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기 어렵다. 반쯤이라도 높이 떠오르려 하지만 이내 모래에 감기고 풀에 걸린다. 마침내 꽃잎은 터럭보다 가늘어져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된다.
濕久飛遲半欲高
오래 젖어 날아오르는 것이 더디고 반쯤 높이 오르려 하지만,
縈沙惹草細於毛
모래에 감기고 풀에 엉겨 붙어 터럭보다 가늘어진다.
꽃잎은 여전히 높이 오르려 한다. 그러나 비에 젖은 무게와 모래와 풀이 그것을 붙잡는다. 높이 오르려는 의지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현실의 힘은 그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는다. 세상에 뜻을 펼치려 했으나 번번이 좌절되고, 마침내 변방과 물 위를 떠돌게 된 두보의 신세가 이와 다르지 않다.
호운으로 열리는 마지막 장면
마지막 네 구에서는 운이 다시 평성으로 바뀐다. 운자는 高·毛·勞로, 모두 호운(豪韻)에 속한다.
이 운들은 중고음에서 -aw 계열의 크고 열린 소리를 가졌다. 한국 한자음에서도 ‘고·모·로’로 ‘ㅗ’ 모음이 반복되기 때문에 운의 관계가 비교적 잘 느껴진다.
둘째 단락의 楫·怯·接이 짧게 닫히는 입성운이었다면, 마지막의 高·毛·勞는 다시 길고 열린 평성운이다. 꽃잎이 배 곁에 갇혀 있던 좁은 장면에서 벗어나 모래와 풀, 꿀벌과 나비, 잠자리와 때까치가 있는 더 넓은 자연의 세계로 시선이 확장된다.
그러나 이 열린 소리가 완전한 해방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꽃잎은 높이 오르려 하지만 모래와 풀에 걸리고, 잠자리는 넓은 공간에서도 때까치를 피해야 한다. 운은 열리지만 삶의 위험은 계속된다.
벌과 나비의 흥취, 잠자리의 두려움
모래와 풀 사이에서 꽃잎은 쇠잔해지지만, 꿀벌과 나비에게 봄날은 한창이다. 꿀벌과 나비는 꽃을 찾아다니며 한껏 흥겨운 마음을 낸다. 生情性의 生은 ‘유난히도’라는 강조어가 아니라 ‘마음을 일으키다, 본성이 발동하다’라는 동사다. 벌과 나비에게 꽃을 향한 본능과 흥취가 생겨난다는 뜻이다.
蜜蜂胡蝶生情性
꿀벌과 나비는 한껏 흥겨운 마음을 내는데,
偸眼蜻蜒避伯勞
곁눈질하는 잠자리는 때까치를 피한다.
그러나 자연의 세계가 모두 평온하고 즐거운 것은 아니다. 한쪽에서는 잠자리가 곁눈질하며 자신을 노리는 때까치를 피한다.
꿀벌과 나비는 꽃의 아름다움과 꿀을 즐기지만 잠자리는 생존을 위해 주변을 살핀다. 같은 봄날, 같은 자연 안에서도 어떤 생명은 흥취를 누리고 어떤 생명은 위협을 피해야 한다. 봄의 화려함과 생존의 불안이 한 장면 안에 공존한다.
마지막 운자 勞에는 이러한 양면성이 담긴다. 勞는 여기서 새 이름 伯勞의 일부이지만, 글자 자체로는 ‘수고로움·고단함’을 연상시킨다. 高·毛·勞의 열린 평성운은 자연의 공간을 넓히면서도, 마지막을 ‘勞’로 맺어 꽃잎과 잠자리와 시인의 고단한 생애를 함께 환기한다.
비바람 속에서도 지켜지는 존엄
두보는 아름다운 봄 풍경과 낙화를 바라보며 ‘새로운 시구’를 장난삼아 짓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장난스러운 의인화 속에는 만년의 두보가 겪은 표박과 위태로움이 스며 있다. 푸른 물은 유혹하고, 바람은 질투하며, 꽃잎은 지치고 두려워한다. 사람의 품으로 경박하게 날아들기를 거부한 꽃잎은 다시 높이 오르려 하지만 모래와 풀에 걸리고 만다.
이 시의 운율도 그 움직임을 따른다. 첫 단락의 부드러운 枝·籬·吹는 꽃과 물과 바람이 서로 이끌리는 모습을 나타낸다. 둘째 단락의 짧고 급한 楫·怯·接은 배 곁에 몰린 꽃잎의 피로와 두려움,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 긴장을 들려준다. 마지막 단락의 열린 高·毛·勞는 시선을 넓은 자연으로 돌리지만, 그 자연 안에도 여전히 좌절과 포식의 위험이 존재함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이 시의 환운은 낙화의 세 단계와 맞물린다.
나무와 물 사이의 이끌림
→ 배 곁에서의 두려움과 자중
→ 모래와 풀, 생명들의 세계에서 맞는 쇠잔과 위협
겉으로는 낙화의 움직임을 재치 있게 그린 관찰시이지만, 그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만년의 두보가 보인다. 비바람에 떠밀리면서도 사람의 품에 가볍게 몸을 맡기지 않고, 다시 높이 오르려다 미미한 존재로 쇠잔해지는 꽃잎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 했던 두보의 자화상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세 차례 변하는 운은 그 자화상이 겪는 유혹과 위기와 쇠잔을 소리로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