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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꼴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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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는 문학이야기 스크랩 [열하일기]로 살펴보는 사행단 구성
이선웅 추천 0 조회 809 12.04.21 22: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열하일기]로 살펴보는 사행단 구성

 

 청이 심양에서 북경으로 천도한 다음해인 1645년(조선 인조 23년)부터 북경의 옛 이름인 연경으로 가는 사행을 연행(燕行)이라 불렀고 조선사절중에는 여행의 기록을 다수 남겼는데 이를 연행록이라한다. 정기 사행은 정조사(正朝使)를 정월 초하루(음력 1월 1일)에 맞춰 가도록 구성하였고, 동지 즈음에 보내는 동지사(冬至使), 황제와 황후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와 1년마다 공물을 바치는 사행인 연공행(年貢行)등이 있었다.

그런데 청은 조선에 대한 배려로 이를 모두 통합하여 1년에 한 번 조공하는 것으로 간소화시켰다.

정기 사행과 달리 특별한 안건이 있을 적에 보내는 임시 사행으로는 청나라의 정책이나 외교적 처사에 감사의 뜻을 표하는 사은사(謝恩使), 국가 중대사에 대해 청원하기 위해 보낸 주청사(奏請使), 황제의 칠순이나 팔순 등 경사가 있을 때 보내는 진하사(進賀使), 청 황실에 상(喪)이 났을 때 가는 진위사(進慰使), 황제나 황태자 등의 국장(國葬)이 있을 때 가는 진향사(進香使) 등이 있었다.

영조의 부마이자 연암의 삼종형 박명원이 정사로 임명되어 갔던 1780년의 사행은 진하 겸 사은사행으로, 당시 청나라의 황제였던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이었다. 이들은 1780년 5월 25일 한양을 떠났다가 같은 해 10월 27일에 서울에 도착한다.

 

다음은 사행단의 구성이다.

 

☞ 삼사

삼사란 정사, 부사, 서장관을 말한다. 각각 1명씩을 임명하며, 이들을 ‘결함’이라 하여 품계를 한 등급씩 올려 보냈다. 정사와 부사는 반드시 귀한 집안의 저명한 사람으로 선별하여 의전을 책임지는 상징적 존재로 삼았고, 서장관 역시 평소 명망을 쌓아 풍습과 도덕규범을 감당할 만한 인물로 임명했다. 서장관은 일행을 규찰할 임무가 있었으며 매일 보고 들은 바를 적어서 연행에서 돌아온 후에 그 문서를 제출해야 했다. 또 사행단이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의주 부윤과 함께 일행이 지닌 물품들을 점검하는 것도 서장관의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 역관

총 19명이 정원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외국어의 통역 및 번역을 맡았던 부서인 사역원에 임명해 보냈다. 이들 가운데 3명이 ‘당상역관’에 임명되었는데, 당상역관은 중국어는 물론 접대에도 능통한 인물들이 발탁되었다. 또 역관 중 3명은 ‘관주관’에 임명되어 삼사의 식사를 돌보았고, 1명의 장무관은 사행 중의 문서를 담당했다. 역관에게는 사신을 수행해서 외국에 다녀오는 것은 출세와 치부의 방법이었다. 특히 연행에서 합법적으로 휴대할 수 있었던 인삼 80근의 팔포를 가지고 엄청난 자금을 확보하여 무역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따라서 몇몇 유력한 집안이 이익을 독점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중국어를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역관으로 뽑혀 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 사자관

외교 문서를 맡아 보던 관아인 /승문원/에서 서원 1명을 차출하여 임명했는데, 사자관은 청나라 조정에 올리는 각종 문서의 글씨 쓰는 일을 담당했다.

 

의원

궁중 의료를 담당하는 내의원과 국립의료원이라 할 수 있는 혜민원에서 번갈아 임명했다.

 

☞ 사자관

외교 문서를 맡아 보던 관아인 /승문원/에서 서원 1명을 차출하여 임명했는데, 사자관은 청나라 조정에 올리는 각종 문서의 글씨 쓰는 일을 담당했다.

 

화원

사행의 중요한 대목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입수하기 어려운 지도나 그림을 베껴 그리고, 새로운 그림 기법을 배우는 일 등이 화원이 하는 일이었다. 도화서에서 1명을 발탁했다.

 

군관

총 7명이었는데, 정사는 4명, 부사는 3명, 서장관은 1명을 데려갈 수 있었다. 대체로 전·현직의 무관을 데려갔으나, 자제군관이라 하여 손아래 친인척을 기용해서 그들의 견문도 넓혀 주고, 또 사행길의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였다. 연암 박지원도 정사 박명원의 자제군관이었다.

 

우어별차

중국어, 몽고어, 만주어 학습을 위해 사역원에서 1명을 뽑았다.

 

만상군관

모두 2명을 의주 사람 중에 뽑았는데, 연행길에 삼사가 머무르는 곳을 정돈하고 식량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마두와 하인들

말을 돌보고 모는 일을 하는 마두에게는 견마잡는 사람과 짐 실은 말을 모는 사람이 있었는데, 같은 마두라도 견마잡이가 그나마 옷도 제대로 입고 어느 정도 말 탄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준도 되었다고 한다. 특히 국경에 있는 의주에는 사행 관리들의 견마잡이로 평생을 보낸 마두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마두들은 관가에서 노자로 쓸 돈을 지급받았지만, 미리 가족들에게 다 주고 자신들은 빈손으로 들어가서 길가의 논밭이나 과수원, 일반 민가 등에서 훔쳐 먹는 일이 많았다.

 

☞ 『열하일기』 속 1780년 사행단 멤버들

 

 사행단의 규모는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래서 몇 개의 무리로 나누어 움직였는데, 정사가 속한 상방, 부사가 속한 부방, 서장관이 속한 삼방이 있었다. 각 방마다 역관과 수행을 담당하는 비장이 배치되었다. 『열하일기』에서 계속 코믹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진사 정각은 바로 상방 비장이었다.

 

1. 정사 박명원

사행단의 총지휘자, 연암의 삼종형이다. 영조의 딸인 화평옹주의 남편으로서 금성위에 봉작된 왕족이다. 연암 같은 무직자가 연행을 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이 '형님의 빽' 덕분이다. 근엄하면서도 결단력이 있다. 일정이 빡빡하자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행들을 재촉해 임무를 완수한다. 열하에선 판첸라마 덕분에 몇 번이나 곤경에 처한다. 연암에 대해서는 자상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2. 부사와 서장관 정원시, 조정진

이들은 압록강을 건너 책문을 통과한 후 머물게 된 한족의 집에서 연암과 서로 인사를 나누게 된다. 부사인 정원시의 할아버지와 연암의 할아버지는 함께 공부한 동창 사이여서 두 집안 간에는 대대로 교류가 있어 왔다. 연암은 이들과 연행길에 몇 번 해돋이를 보자고 약속했으나 정작 함께 보지는 못한다. 글 속에 이들이 눈에 띄게 등장하지는 않지만, 가만히 보면 연암이 이들과 함께 어울려 구경한 일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3. 수석 역관 홍명복

연암이 압록강을 건널 때 "자네 길을 아는가?"라고 물으며 '사이의 철학'을 펼친 인물. 역관인 만큼 무슨 일이 생기면 청나라 관리와 조선 사행단 사이에 나서서 중재를 하는 경우가 많다.

 

4. 의원 변계함

임금의 의원인 태의관, 책문에 들어서면 청나라 관인들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하는데, 혼자 말을 타고 달려가 봉변을 당할 뻔 했으나 수역 홍명복 덕분에 화를 면했다. 성경에서 연암이 예속재와 가상루의 친구들을 밤에 몰래 만나러 나갈 때 같이 가자고 했으나 눈치 없이 수역에게 나가도 되냐고 물어봤다가 타박만 당하기도 하고, 북경에서 한밤에 몽고군이 쳐들어 왔다는 연암의 장난에 속아 "우린 이제 죽었다"고 울부짖기도 하는 등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대표적으로 눈치 없는 인물 중 한 명이다.

 

5. 상방 비장 노이점, 정각, 박래원, 주명신 등

진사 정각은 식자층이긴 하나 별로 똑똑한 구석은 없는 인물로 나온다. 『열하일기』에 아주 많이 등장하긴 하지만, 대부분 '띨띨한' 모습으로 나온다. 연암이 벽돌론을 설파할 때, 말 위에서 졸다가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잠꼬대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달걀을 특히 좋아해 '초란공'이란 별명이 붙었고, 한 점포에서 연암과 함께 「호질」을 같이 베껴 쓰기로 하였는데 엉터리로 베껴서 연암이 다시 뜯어고쳤단다.

 

6. 마두/와 하인들 득룡, 장복, 창대, 시대, 대종, 태복 등 그 외 다수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마두들은 연경에 예닐곱 번씩 드나든 이가 꽤 많다. 정진사의 마두인 태복도 그렇고, 그 수완과 말솜씨를 인정받은 득룡도 상판사의 마두였다. 상방의 마두인 시대나 의원 변계함의 마두인 대종도 중국말을 잘하는 장면이 『열하일기』에 종종 등장한다. 특히 득룡은 열네 살 때부터 중국을 드나든 '중국통'으로, 중국어에 능통한 데다 처세술도 능란하기 이를 데 없어 사행단에선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중국으로 귀화할까봐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 놓을 정도로 수완이 좋다. 책문을 통과할 때 청나라 사람들을 기막힌 수법으로 멋지게 속여 넘긴다.

연암의 수행인들인 장복과 창대는 『열하일기』의 주연급 조연이다. 장복은 하인이고, 창대는 마두다. 술은 입에도 못 대고, 일자무식인 데다 고지식하기로는 둘째라면 서러운 '환상의 커플'. 중화주의가 뼛속까지 침투하여 중국은 '되놈의 나라'라며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종종 어이없는 해프닝을 저질러 연암을 질리게 한다. 갑작스럽게 열하행이 결정되면서 장복이만 북경에 남게 되자, 울고불고 하는 바람에 연암이 그걸 빌미로 '이별론'을 한바탕 늘어놓는 구실을 만들기도 한다. 창대는 가는 도중 부상에, 몸살에 거의 죽을 고생을 한다. 덕분에 연암이 창대를 돌보는 처지가 된다.

 

☞『일성록』에 나타난 1780년 사행단의 출발과 귀환 장면

 

1780년 5월 25일 출발

성정각에서 삼사를 불러서 보았으니, 상사 박명원, 부사 정원시, 서장관 조정진이다.

(정조) "이 더운 날에 만 리 먼 길을 다녀오는 것은 과연 어려운 일이다. 경 등이 모름지기 다녀와야 할 것이다. 여행 일정은 어떻겠느냐?"

박명원 일러 고하되 "요동버판은 때마침 장마철이어서 온통 진흙밭일 것입니다. 사람과 말이 지나가기 어려울 터인데, 비록 빨리 갈 수는 없겠지만 한 달 사흘쯤 걸려 도달하면 8월 13일 이전에는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 "사신의 귀중함은 오직 사정을 잘 알아서 그때그때 잘 응대하는 것에 달려 있다. 이번에 경 등은 모름지기 잘 해주길 바란다. 상주문 1절은 예비로 두 개를 준비하여 가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경 등은 모름지기 서로 상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박명원 일러 고하되 "이 일은 신 등이 삼가 마땅히 그때에 닥치면 처리하도록 하겠사옵니다."

 

1780년 10월 27일 도착

중국에서 돌아온 사신을 선정전으로 불러서 보았으니, 상사 박명원과 부사 정원시다.

"만리길을 무사히 다녀왔으니 너무도 다행스럽고도 다행스럽구나."

박명원과 정원시 "폭염을 무릅쓰고 중국에 들어갔다가 큰비를 맞으며 돌아왔는데, 저희 일행이 아무 탈이 없었으니 이는 성은이 미치지 않은 바가 없는 일입니다."

"황제의 총애가 예전에 비해 융숭하고 무거웠다고 하던데, 과연 어떠하였는가?"

박명원 "신 일행이 황도에 도착하니 황제께서는 열하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예부에 문서를 올렸더니, 예부에서는 신 등이 들어온 의도를 보고하였습니다. 황제는 '조선 사신들은 열하로 와서 대기하라'고 칙명을 내렸습니다. 신 등은 그날 즉시 길을 나서서 열하로 가니, 황도에서 열하까지 7백 리나 되었습니다. 출발한 지 8일만에 열하에 도착하여 표전과 예물 목록을 올리니, 황제는 크게 기뻐하면서 저희를 불러서 만나 주었습니다. 황제는 먼저 전하의 안부를 물으시면서, '너의 국왕은 제후로서의 예를 공경하면서도 부지런히 지켜 이렇게 사신을 보내니 너무 가상하도다. 너의 나라에도 일이 많을 터인데 도리어 미안하구나' 하고 말씀하시고는 술을 하사하였습니다. 그 뒤로 연희나 잔치를 마련하는 날이면 반드시 저희를 불러 들여서 가까운 자리에 앉아 감상하고 즐기도록 하셨으니, 그 접대는 다른 나라 중에서도 으뜸이었습니다.

"사신단의 접대가 특별했을 뿐 아니라 칙서의 내용과 보내온 예물도 예법으로 우대하였다 할 만하다. 예법으로 우대한 것에 대하여 감사의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신을 보내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겠도다."

정원시 "앞에서는 비록 이번 일보다 못했는데도 사신을 보내 은혜에 감사를 표했었는데, 하물며 이번처럼 특별한 은혜를 입은 때는 당연한 일이옵니다."

"방물(예물)도 또한 같이 보내라. 황도에 도착한 뒤에 만약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후 동지사가 사용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박명원 "신이 여러 차례 왕래하여 대국의 사정을 잘 알고 있사온데, 방물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가더라도 그것을 물리쳐서 받아들이지 않는 전례는 없습니다.

"열하는 궁실의 장려함이나 백성들의 번성함이 황도에 비하여 어떠하더냐?

박명원 "궁실의 크고 웅대함은 황도만 못하였지만, 만든 수법의 기묘하고 사치스럽고 아름다움은 황도보다 더했습니다. 백성들의 번성함은 황도의 3~4할 가량 되었습니다."

"저 나라는 사람들의 장수를 기원할 때 반드시 금불상으로 합니다. 이번에 금부처를 보낸 것도 역시 전하의 장수를 기원하려는 본뜻이 있어서입니다만, 신이 돌아오는 도중에 이미 연교(임금이 연석에서 내리는 명령)로 영변 향산에서 받들어 모시도록 하셨으므로, 향산의 깔끔한 사찰로 보내 봉안하도록 하였습니다."

"경 등은 정말 노고가 많았다. 물러가 쉬도록 하라."

 

『일성록』이란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권675에 수록된 '군서표기'(群書標記)의 '일성록' 조항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동정(動靜)과 언행을 날마다 기록해 둔 것이 있었다. 즉위한 후에는 그 규모를 확대하고 형식을 다듬어서 모든 조치와 정령(政令), 관리 승진 문제 및 상벌을 모두 날짜별로 기록하여 참고자료로 삼았는데, 증자의 '날마다 세 가지 측면에서 반성한다.'고 한 말에서 따와 '일성록'이라 이름하였다."

1760년(영조 36년)부터 임금이 자신의 동정을 일기 형식으로 직접 기록한 책이며, 철종 때의 화재로 일부 손실되기는 했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들어 있지 않은 기록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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