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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고창 42코스 역방향
선운산 관광안내소-선운사-천마봉-화천마을-화산마을-심원면사무소
20230322
1.선운사 동백꽃과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
43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한 뒤 곧바로 42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한다. 42코스 역방향은 선운사 경내를 거쳐 선운산 등산 코스로 들어간다. 아산면 삼인리 선운산을 넘어 심원면 연화리로 내려가 월산리 심원면행정복지센터 앞에서 42코스 탐방을 마치게 된다. 전체 거리 11.6km, 소요 시간 4시간 30분, 매우 어려운 과정이라고 한다. 10시 14분 출발, 목적지에서 버스가 오후 3시에 출발한다고 하니 4시간 40분 안에 탐방을 마쳐야 한다.
"달님이시여, 높이높이 돋으시어 멀리멀리 비추어 주십시오." 백제 노래 '정읍사'의 첫머리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달님에게 자신의 마음을 비는 전형적인 형식의노래이다. 드보르작의 오페라 <루살카> 중 아리아 '달에게 부치는 노래'보다도 1300여 년이나 앞서서 백제 여인은 이 노래를 불렀다. 이 아리아는 물의 요정 루살카가 자신의 사랑을 지상의 연인에게 전해 달라고 달님에게 부탁하지만, 백제 여인은 행상 나간 남편이 밤길에 무사하기를 달님에게 부탁하는 노래로서 루살카의 아리아보다 사랑의 고귀함이 드높은 망부가이다. '정읍사'의 전통은 선운산에 올라서 서울로 정역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가 '선운산가'에서 유래하는데 '선운산가'는 노랫말이 전해지지 않고 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도솔산 선운사 일주문으로 들어가는 길에 '선운산가'비가 세워져 있어 선운산 탐방길은 망부의 사랑 노래로시작된다.
선운사 일주문을 지나면 선운사 부도전에 백파율사비가 있다. 선운사 백파율사비는 1858년(철종 9년)에 세운 것으로,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체와 '大機大用' 글자로 유명하지만, 이 비를 더욱 빛나게 한 것은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의 '秋史와 白坡와 石顚' 시 때문일 것이다. 추사와 백파의 논쟁, 추사의 진심과 백파의 선견, 석전의 의기가 미당의 절창으로 아름답게 전해진다.
"질마재 마을의 절간 선운사의 중 백파한테 그의 친구 추사 김정희가 만년의 어느날 찾아들었습니다./ 종이쪽지에 적어온 '돌이마(石顚)'란 아호(雅號) 하나를 백파에게 주면서, "누구 주고 싶은 사람 있거던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파는 그의 생전 그것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아껴 혼자 지니고 있다가 이승을 뜰 때, "이것은 추사가 내게 맡겨 전하는 것이니 후세가 임자를 찾아서 주라."는 유언으로 감싸서 남겨놓았습니다./ 그것이 李朝가 끝나도록 절간 서랍 속에서 묵어오다가, 딱한 일본 식민지 시절에 박한영이라는 중을 만나 비로소 전해졌는데, 石顚 박한영은 그 아호를 받은 뒤에 30년 간이나 이 나라 불교의 대종정 스님이 되었고, 또 불교의 한일합병도 영 못하게 막아냈습니다./ 지금도 선운사 입구에 가면 보이는 추사가 글을 지어 쓴 백파의 비석에는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말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추사가 준 아호 '석전'을 백파가 생전에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이 겨레의 미래영원에다 가만히 유언으로 싸서 전하는 것을 알고 추사도 "야! 단수 참 높구나!" 탄복한 것이겠지요."(서정주의 '秋史와 白坡와 石顚' 전문)
선운사 천왕문과 만세전을 거쳐 대웅전 뒤 동백나무 숲으로 갔다. 선운산 동백나무는 춘백(春柏)이므로 꽃이 늦게 피어난다. 동백숲의 동백꽃이 이제 한두 송이씩 피어나고 있다. 선운사 동백꽃이 동백꽃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 것은 서정주의 시 '禪雲寺 洞口' 때문일 것이고, 이를 대중들 가슴에 콕 박히게 한 것은 송창식이 미당의 '禪雲寺 洞口'에 헌사한 노래 '선운사' 때문일 것이다. 시의 절조(絶調)와 노래의 절창(絶唱)이 선운사 동백숲에서는 절로 흘러나온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서정주의 '禪雲寺 洞口' 전문)
아직 일러 동백꽃은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목이 쉬어 남은 작년의 동백꽃은 무엇을 말함인가? 막걸릿집 여자의 삶, 육자백이의 가락, 목이 쉬어 남은 동백꽃, 이들의 뜻이 선운사 동백꽃을 동백꽃의 최고 자리에 올려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막걸릿집 여자가 풀어내는 육자백이 목멘 가락 속에 솟아오르는 선운사 붉은 동백꽃은 삶의 깊은 한(恨)으로 피어난 동백꽃으로 다른 동백꽃이 결코 이를 수 없는 곳에 자리한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송창식의 '선운사' 1절)
삶의 깊은 恨으로 응어리진 선운사 동백꽃은, 송창식의 노래 '선운사'에 의해 대중의 가슴에 동백꽃 눈물을 주루룩주루룩 쏟아낸다. 이 노래에서는 선운사 동백꽃 숲은 이별의 현장이다. 깊은 恨의 눈물처럼 후두둑 떨어지는 동백꽃을 보는 순간, 이별은 恨의 승화로 이어져 그 누구도 결코 이별할 수 없다고 노래한다. 송창식의 '선운사'는 선운사 동백꽃을 슬픔의 최절정으로 승화하는 빛나는 절창이다. 그리하여 선운사 동백꽃은 다른 동백꽃이 범접할 수 없는 동백꽃의 대명사가 되었다.
동백꽃 진수(眞髓)의 현장을 떠나 선운산으로 오른다. 도솔암을 거쳐 마애불에 이르렀다. 마애불의 정확한 명칭은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東佛庵址 磨崖如來坐像)으로, 도솔암 내원궁 아래 커다란 바위벽에 새겨져 있는 불상이다. 이 불상은 연꽃무늬를 새긴 받침돌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길손은 종교가 없고 예술적 가치에 대하여 잘 모른다. 오직 불상의 복장(腹臟)에 비밀스러운 기록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에 관심이 갈 뿐이다. 이 비기(秘記)는 무엇일까? 이 비기에는 조선의 멸망,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민중의 꿈이 서려 있다. 이 비기를 꺼내는 사람이 새 세상을 연다는 것인데, 이 비기를 꺼낸 사람은 동학 접주 손화중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세상은 동학에 의해 새롭게 열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은 패배하고 그렇게도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던 민중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학의 천지개벽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슬픈 사연이 마애불 복장에 전해 내려온다.
마애불을 살피고 급경사 계단을 오르면 천마봉 단애가 눈앞에 나타난다. 천마봉(天馬峰)은 말이 하늘로 뛰어 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 천마봉 정상에서의 조망이 단연 최고다. 선운계곡이 발밑에 보이고, 투구바위, 사자바위 등이 있는 국기봉 능선이 건너편에 펼쳐지며 멀리 동북쪽으로 43코스에서 걸어온 소요산과 수강산이 모두 조망된다. 천마봉에서 서쪽의 낙조대는 가까이 있다. 예전에 올라본 낙조대 암봉에 오르고 싶었지만, 위험한 듯 포기하고 그 옆 전망뎈에서 서쪽 구시포항에서 동호항으로 이어지는 명사십리 해안을 조망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42코스의 절정은 천마봉과 낙조대에서 끝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멋진 풍경이 그 절정 지역을 보완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천상봉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암봉에서 뒤돌아보면 천마봉에서 낙조대로 이어지는 능선, 그 뒤쪽에 배맨바위가 조망된다. 그 건너편으로 사자바위, 멀리 소요산과 수강산이 모두 조망된다. 숲 속에서는 부분의 절경에 도취하고, 산봉에서는 숲 전체를 조감하며 경탄한다. 걸어온 풍경과 힘겨웠던 고행이 모두 환희가 되어 반짝인다.
선운산 풍경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곳은 개이빨봉(견치봉) 가는 능선에서이다. 견치봉은 바로 눈 앞에서 손짓하고 구시포항에서 동호항으로 이어지는 명사십리, 동호항 앞 외죽도(소죽도와 대죽도), 41코스 탐방길이 가늠된다. 미지의 새로운 곳에 대한 벅찬 감동으로 저곳을 걸었다. 지금 이곳에서 걸었던 저곳을 내려보고 있으니,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는 감회에 사로잡힌다. 저곳을 걸을 때 놓치고 덤벙덤벙 스쳐간 그곳이 아쉬움으로 가슴을 누른다. 조금이라도 더 살피고 배우려 했던 모습이 그리움으로 꽃핀다. 삶은 철저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현실에서는 그 마음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살아온 날들은 아름답게 수놓여 있고 살아갈 날들은 벅찬 기대로 손짓한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2.34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9분
관광안내소 앞에 서해랑길 고창 43코스 안내도 및 여러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서해랑길 42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한다.
서해랑길 43코스 시작점 표지를 찾아 보았으나 위치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송악은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덩굴식물이다. 줄기에서 뿌리가 나와 주변 물체에 달라붙어 올라간다. 주로 남부의 섬이나 해안지역에서 자라며, 대략 전북 김제시까지가 내륙의 북방한계선이다. 고창 삼인리 송악은 높이가 15m나 되며 줄기의 둘레가 0.8m에 이른다. 나무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크기로 보아 적어도 수백 년은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방한계선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송악으로 알려져 있다. 생물학적 학습 가치가 매우 높으며 송악으로는 유일하게 천녕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송악은 10월에 황록색 꽃을 피우고 다음해 5월이 되면 포도송이 같은 열매를 맺는다. 송악의 줄기와 잎은 고혈압, 요통, 간염, 지혈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민간에는 송악 밑에 있으면 머리가 맑아진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송악은 남부지방에서는 소가 잘 먹는다 하여 소밥나무라 부르기도 하며, 상춘등(常春藤), 토고등(土鼓藤), 담장나무 등으로도 부른다.
설명안내판에 소개된 송악의 내용을 간추린다. "송악은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덩굴식물. 나무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수백 년은 되는 것으로 추정되며, 북방한계선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송악으로 알려져 있다. 송악은 남부지방에서는 소가 잘 먹는다 하여 소밥나무라 부르기도 하며, 상춘등(常春藤), 토고등(土鼓藤), 담장나무 등으로도 부른다."
"선운산 생태숲은 선운산에 자생하는 고유 수종 보호 및 생태계 보존과 자연적 천이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특색 있는 공간을 조성하고, 산림 생태계와 구성 종 사이의 관계 등을 연구하여 그 결과를 학생 및 일반인이 관찰할 수 있는 환경 교육장으로 조성하였다. 총사업비 50억 원을 들여 2005년 4월 5일~2008년 5월 31일에 걸쳐 공사를 하였다. 생태숲 복원 지구와 학습 지구, 연못 지구와 구성되어 있다. 생태숲 복원 지구에는 느티나무 휴게소, 자생 수목 군락지, 소나무 군락지, 서어나무 군락지, 동백나무 군락지, 움집터 군락지, 팔각정 등을 갖춘 보존 지구로 이루어져 있다. 학습 지구는 건생초지원, 팔도숲, 야외 스탠드 등을 갖춘 생태 교육장 시설이 있다. 연못 지구는 습생초지원, 복분자 비교원, 생태 연못 및 습지, 진입 광장, 가로휴게소, 선운사 진입 도로, 꽃무릇 비교원 등이 있다. 생태 연못 및 습지에는 어류 관찰대가 설치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禪雲山歌는 실전(失傳)된 백제 가요의 하나로, 작자와 연대는 미상. 원사(原詞)도 한역사(漢譯詞)도 전해지지 않고, 제목과 유래만 『고려사(高麗史)』 악지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 전해오고 있다. 장사(長沙)라는 지역에 사는 사람이 정역(征役)에 나갔는데 돌아올 기한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오지 않자, 그 아내가 선운산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올 방향을 바라보면서 못내 그립고 걱정스러운 심정을 읊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征役이라 함은 일정한 나이 이상이 되어 서울에 가서 일에 복역하는 것을 말한다. 부역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수난은 천한 백성이라면 으레 겪어야만 했고, 그래서 남편과 이별한 아내의 노래는 거듭 되풀이되었다. 백제 가요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고려사악지에 있는 禪雲山歌는 정역(征役)에서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亡夫)의 애절한 사연의 백제가요로서 그 유지(遺址)가 남아있으면서도 가사가 전해지지 않아 아쉬움이 여간 아니었는데 주봉관씨의 뜨거운 애향심으로 천오백년의 한(恨)을 풀게 되어 여기에 그 사적(事蹟)을 적는다. 1981년 5월 3일 고창문화원
‘나라 위한 싸움에 나간 지아비/ 돌아올 때 지내도 돌아오지 안으매/ 그 님 그린 지어미 이 산에 올라/ 그 가슴에 서린 시름 동백꽃같이 피어/ 노래하여 구름에 맞닿고 있었나니/ 그대 누구신지 너무나 은근하여/ 성도 이름도 알려지진 안했지만/ 넋이여 먼 백제 그때 그러시던 그대로/ 영원히 여기 숨어 그 노래 불러/ 이 겨레의 맑은 사랑에 늘 보태옵소서.’ 미당 서정주 지음, 평강 정주환 씀
미당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禪雲寺 洞口)' 시비를 거치지 못하고 아쉽게도 그냥 통과하였다.
"선운산은 도솔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선운’이란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이고 ‘도솔’이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이라는 뜻으로 선운산이나 도솔산 모두 ‘불도를 닦는 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선운사 부도전으로 가서 부도 및 백파율사비를 보고 나온다.
선운사 백파율사비(禪雲寺 白坡律師碑)는 조선시대 스님인 백파율사 긍선(亘璇, 1767-1852)을 기리려고 1858년에 세운 비석이다. 백파율사와 어울린 명필가이며 학자인 추사 김정희가 비석에 직접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백파율사 긍선은 고창 무장 출신으로,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10대손이다. 12세에 선운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조선 후기 수선결사(修禪結社)로 불교를 중흥하려던 화엄종의 대가이다. 백파가 60세 때(1826) 선종 종파들의 특징을 자신의 논리로 밝힌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짓자,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와 그와 친밀하고 불교에도 박식했던 추사는 편지로 백파와 논쟁했다. 특히, 1843년에 추사는 '백파망증 15조(白坡妄證十五條)'에서 15가지를 근거로 백파의 논지가 잘못되었다며 신랄한 표현으로 백파와 그 제자들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들의 제자들이 서로 이어가며 100여 년 동안 논쟁하였다. 백파가 입적한 지 3년 뒤인 1855년 그 제자들의 부탁에 추사는 비문을 써 주었다. 비문은 백파가 입적한 순창 영구산 구암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3년 후인 1858년에 백파가 출가한 선운사로 보내져 지금의 백파율사비가 세워졌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높이는 2.36m, 몸돌 높이는 1.4m이다. 야외에 있어 비가 훼손되는 것을 막고자 2006년에 선운사 성보박물관으로 이전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선운사 일주문을 지나 선운사 천왕문 입구 이르기 전 오른쪽에 부도전이 있다.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 화엄학의 종주 백파대율사의 대기대용비> 선운사 백파율사비는 1858년(철종 9년)에 세운 것으로,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我東近無律師一宗惟白坡可以當之故以律師書之 大機大用 是白坡八十 年藉手著力處或有以機用杀活 支離穿鑿是大不然凡對治凡夫者無處非 殺活機用 雖大藏八萬無一法出於殺活機用之外者特人 不知此義妄以殺 活機用為白坡拘執着相者 是皆蜉蝣撼樹也是烏足以知 白坡也昔與白坡 頗有往復辨難者即與世人所妄議者大異 此個處惟坡與 吾知之難萬般苦口說人 皆不解悟者安得再起師來相對一笑也 今作白坡 碑面字若不大書 特書於大機大用一句 不足為白坡碑也畫正雪竇白巖諸門徒 果老記付 貧無卓錐氣壓須彌事親 如事佛家風最眞實厥名兮互璇不可說轉轉 阮堂學士金正書 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 日立
아동근무율사일종유백파가이당지고 이율사서지/ 대기대용 시백파팔십년자수착력처 혹유이기용살활/ 지리천착 시대불연 범대치범부자 무처비살활기용/ 수대장팔만 무일법출어살활기용지외자특인/ 부지차의 망이살활기용 위백파구집착상자/ 시개부유감수야 시오족이지백파야 석여백파/ 파유왕복변난자 즉여세인취망의자대이/ 차개처유파여오지지 수만반고구설인/ 개불해오자 안득재기사래 상대일소야/ 금작백파비면자 약불대서특서어대기대용일구/ 부족위백파비야 서시설두백암제문도/ 과노기부 빈무탁추 기압수미사친/ 여사불 가풍최진실 궐명혜긍선 불가설전전/ 완당학사김정희 찬 병서/ 숭정기원후사 무오오월 일립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율사(律師)의 한 종파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白坡)만이 이것에 해당할 만하다. 그러므로 율사로 썼다.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백파가 80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다. 혹자는 기(機), 용 (用)을 살(殺), 활(活)로 지리멸렬하게 천착(穿鑿)하기도 하나 이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무릇 평범한 사람들을 상대하여 다스리는 자는 어디에서건 살, 활, 기, 용이 아닌 것이 없으니 비록 팔만대장경이라 하더라도 살, 활, 기, 용의 밖으로 벗어나는 것은 한 가지 법도 없다. 다만 사람들이 그 의리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살, 활, 기, 용을 백파를 구속했던 착상으로 여긴다면 이는 모두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드는 것과 다름없으니 이것이 어찌 백파를 충분히 아는 것이겠는가. 예전에 백파와 더불어 자못 왕복하면서 어려운 문제를 분변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곧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아는 것이니 비록 온갖 말을 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모두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율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오게 하여 서로 마주하여 한 번 웃을 수 있겠는가. 지금 백파의 비석에 새길 글자를 지음에 만약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한 구절을 큰 글씨로 특별히 쓰지 않는다면 백파의 비(碑)로서 부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써서 설두(薛竇)와 백암(白巖) 여러 문도(門徒)에게 보인다. 다음과 같이 써서 붙인다.
가난하기로는 송곳 꽂을 땅도 없었으나/ 기개는 수미산(須彌山)을 누를 만하였네.
부모 섬기기를 부처 섬기듯 하매/ 가풍(家風)이 가장 진실하도다.
그 이름 긍선(亘璇)이니/ 전전(轉轉)한다 말할 수 없다네.
완당(阮堂) 학사(學) 김정희(金正喜)가 글을 짓고 글씨를 쓰다.
숭정 기원후 네 번째 무오년(철종 9, 1858년) 5월 일 건립하다.
선운사(禪雲寺)는 백제 27대 위덕왕 24년(577)에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창건한 뒤 통일신라기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3년(1354) 효정(孝正)스님이 퇴락한 법당과 요사를 중수(重修)하였다. 조선시대에 절을 크게 중창(重創)한 스님은 행호극유(幸浩克乳)스님이시다. 행호스님은 성종(成宗)의 숙부인 덕원군(德源君)의 도움을 받아 1474년에 2층의 장육전(丈六殿)과 관음전(觀音殿)을 완공한 이래 10여 년에 걸친 대작불사(大作佛事)를 통하여 선운사의 옛 모습을 되찾아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임에도 왕실의 원찰로 법등을 환하게 밝히게 되었다. 그러나 선조(宣祖) 3년(1597)의 정유재란 때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고, 이후 광해군 5년(1013) 봄에 일관(一寬)스님과 원준(元俊)스님이 힘을 합하여 1619년까지 6년에 걸쳐서 보전, 법당, 천불전, 지장전, 부도전, 능인전을 중건하여 다시 사찰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1720년까지 중건과 중수가 계속되었고 그 뒤에는 외형적인 불사보다는 걸출한 고승대덕들이 많이 배출되어 사격(寺格)을 드높였다. 조선후기 화엄학의 대가인 설파상언스님과 조선후기 선문(禪門)의 중흥조 백파긍선스님을 비롯하여 구한말의 청정율사 환응탄영스님, 그리고 근대불교의 선구자 석전박한영스님이 선운사에 출가하거나 수행하시면서 당대의 불교를 이끌었던 명문사찰이 되었다. 선운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290호이며 여기에 모셔진 세 분의 부처님들은 보물 제1752호이다. 박물관에 불보로 전시되어 있는 금동지장보살좌상은 보물 제279호이고, 영산전목조삼존불상, 육층석탑(六層石塔), 범종, 만세루, 화엄종주백파율사대기대용지비를 비롯하여 석씨원류, 선운사사적기 등의 중요한 문화재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경내의 동백나무숲, 장사송, 송악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조계종 초기불교 전문교육기관인 선운사 불학승가대학원에서는 불학연찬에 매진하고 있으며, 산내 암자인 참당암에서는 수좌스님들이 참선수행을 통해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불교의 사회적 실천을 위해 선운사 창건주이신 검단스님의 중생구제의 원력을 이어 고창군종합사회복지관 등 여러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며, 승려노후 수행마을을 조성하여 노스님들이 아름답게 노후를 회향할 수 있도록 조력(力)하고 있다. 선운사 사부대중은 도솔천, 그 희망의 나라를 꿈꾸며 불자는 물론 지역주민들과 함께 복지와 문화, 수행공동체를 이루고자 오늘도 정진하고 있다.
천왕문을 통과하여 대웅보전 뒤의 선운사 동백나무 숲을 구경하고 나온다.
만세루 뒤에 대웅보전이 있으며 그 뒤쪽에 동백숲이 펼쳐져 있다.
"禪雲寺 대웅전 바로 앞에 있는 萬歲樓는 선운사 창건 당시에 있었던 것으로, 고려 시대에 중건된 적이 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중건되었다. 긴 장방형이고 ‘누(樓)’라는 이름은 붙어 있으나, 낮은 단층 건물이다. 만세루는 자연스러운 부재가 많이 사용되어 해학적인 느낌마저 주고 있다. 선운사 창건 당시부터 건립되어,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주로 강당이나 법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고창 선운사 만세루는 정면 9칸 측면 2칸으로, 일자집 익공계 맞배지붕 형식이다. 누(樓)는 넓은 평면에 비해 높이가 낮다. 정면의 가운데 칸[御間]은 폭이 390㎝로서, 양쪽 협간(夾間)에 비해 두 배 정도 넓다. 중앙 3칸은 앞뒷면 중앙에 놓인 고주(高柱)를 생략하여 앞뒷면을 통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좌우 3칸은 중앙에 기둥이 들어서 있는데, 그에 따라 중앙 3칸은 대들보가 앞뒷면 기둥에 걸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좌우 3칸은 고주를 올려 가구를 결구하였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바닥은 우물마루다. 자연석 기단에 일부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였고, 자연목을 다듬지 않은 채 사용하였다. 가운데 칸의 양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판벽으로 처리하였으며, 내부의 서쪽 앞 두 칸씩은 칸막이로서, 2층 구조로 만들어 종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낮은 동자주를 얹었고, 기둥 윗부분에는 작은 나무토막들을 포개 쌓았다. 뒷면이 대웅전과 마주보며 개방되어 있는 것은 설법을 위한 강당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앞면의 판창(板窓)을 열면 대웅전의 앞마당에서부터 강당을 포함한 공간이 막힘없이 트여 있어, 통풍과 전망을 아울러 배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 강당 역할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다도 체험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1974년 9월 27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었다. 2020년 6월 1일 보물 제206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 범종각과 오른쪽 만세루 사이에 배롱나무가 서 있고, 뒤쪽에 선운산 주봉 도솔봉(수리봉)이 솟아 있다.
오른쪽 대웅보전은 보수공사 중인 듯. 사월초파일 연등을 다는 시설물 뒤쪽에 선운사 동백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선운사 대웅보전 옆에 노란 수선화가 절정으로 피어 있다.
선운사 동백나무는 춘백이므로 이제사 동백꽃이 피기 시작한다.
고창 선운사 동백(高敞禪雲寺冬柏)나무 숲은 조선 성종 때인 15C에 행호선사가 산불에서 사찰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하였다고 한다. 3,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대웅전 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군락의 규모는 16,500㎡이다. 동백나무는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柏), 추백(秋柏), 동백(冬柏)으로 부르는데, 이곳 동백은 3월 말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여 4월 중순에 절정을 이룬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중국 등 따뜻한 지방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잘 자란다. 이곳 선운사 동백나무 숲은 동백나무 서식지의 북방 한계선을 알 수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 동백나무 숲은 아름다운 사찰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사찰림이라는 문화적 가치뿐만 아니라 사찰을 보호하는 방화림 역할도 하고 있어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 있다.
선운사 동백나무는 춘백이므로 이제 동백꽃이 피어나고 있다. 동백나무 숲을 보고 천왕문 앞으로 되돌아와 도솔천(선운천)을 따라 도솔암 방향으로 올라간다.
앞쪽의 산봉은 구황봉(왼쪽)과 인경봉(오른쪽)인 것 같다.
서기 577년 백제 위덕왕 24년에 선운사를 창건하신 검단선사가 전국을 돌다 선운산에 이르러 이곳에서 부처님의 현몽을 보고 선운산 수리봉에 올라 선운사 터를 정하였다는 설화에 따라 이 자리에 쉼터를 조성하고 검단정(黔丹亭)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 정자에서 10여 분 동안 간식을 먹고 출발한다.(11:07)
왼쪽 도솔천을 따라 올라가면 진흥굴과 장사송을 만날 수 있는데, 도솔천을 건너서 반대쪽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왼쪽은 도솔폭포 가는 길, 오른쪽 야자매트길을 따라 올라 고개를 넘는다.
이 바위에는 선문사를 창건한 검단선사의 설화가 깃들이 있다. 백제 위덕왕 24년(서기577)에 검단선사가 선운산에 사찰을 창건하고자 하였다. 오늘날 선운사가 있던 자리는 큰 연못이었고, 그곳에 용이 살았다. 검단선사가 연못의 용을 내쫓고 둘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갈 무렵 아랫마을에서는 눈병으로 힘들어 했다. 수도중인 검단선사 앞에 미륵이 나타나 "미륵바우 아래의 돌과 숯을 연못에 던지면 눈병이 낫는다"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미륵바우' 아래의 돌과 숯을 가져다 던져 연못을 메우니 눈병은 저절로 낫게 되었고, 연못도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신기하게 여긴 사람들은 미륵이 나타났던 '미륵바우'에 정성을 다하니 병이 낫고 근심 걱정도 사라졌다. 그로부터 '미륵바우'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돌탑 오른쪽 뒤 미륵바위 얼굴이 보인다. 미륵바위의 지형학적 생성원인에 대해 설명안내판에 이렇게 적혀 있다. "미륵바우가 있는 이 곳을 지형학적으로 암괴원(岩塊原, block field)이라 부른다. 선운산은 서해안을 통과하는 북서풍을 그대로 맞아 서릿발작용과 같은 주빙하지형 발달이 활발하였다. 선운산의 암괴원은 빙하지형 주위 땅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여 암석에 틈(절리)이 생기고, 여기에 서릿발작용이 가해져 날카로운 모서리의 바위덩어리가 되며, 갈라진 바위는 중력에 의해 본체에서 떨어지게 된다. 특히, '미륵바우' 아래를 흐르는 풍천(도솔천)이 강바닥을 깎아 바위를 낙하시키고 작은 알갱이들을 제거했다. 이렇게 바위가 낙하하는 과정에서 '미륵바우'와 같은 형태가 만들어졌다."
도솔암으로 올라가는 문루이다.
오른쪽 도솔암 마당에 사월초파일 연등을 다는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처사님방 1개, 보살님방 2개로 이루어져 있다.
사자바위는 마치 사자가 돌아 앉아 오가는 사람을 내려다보는 형국으로, 선운계곡으로 침입하는 마귀를 방어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오른쪽으론 도솔 내원궁 가는 길, 왼쪽 마애불 방향으로 이어간다.
보물 제1200호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東佛庵址 磨崖如來坐像)은 커다란 바위벽에 새긴 불상으로 신체 높이가 약 15.7m, 무릎 너비는 약 8.5m이며 연꽃무늬를 새긴 받침돌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마애불의 양식으로 보면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성 시기는 신라 말기, 고려시대, 조선시대 등으로 의견이 다양하고 백제 위덕왕 때 검단선사가 새겼다는 전설도 있다. 마애불 머리 위에는 네모난 구멍들이 뚫려 있는데 그 구멍에 목재가 박혀 있는 것도 있다. 이것들은 마애불의 장엄함을 위해 설치한 닫집(법당의 부처를 모신 자리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이 있었던 흔적이다. 가슴 아래 새겨진 복장(불상을 만들 때, 그 가슴에 금·은·칠보와 같은 보화나 서책 따위를 넣음)에는 비밀스러운 기록이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내용은 복장 안에 보관된 비기가 알려지는 날 조선은 망한다는 것이다. 18세기 말 전라감사 이서구가 그 기록을 꺼내 보려다 천둥 소리와 함께 벼락이 떨어져 '전라 감사 이서구가 열어 본다'라는 대목만 보고 도로 넣었다고 한다. 100여 년 후 동학 농민혁명이 움트던 1892년에 동학 접주 손화중이 그 기록을 무사히 꺼내 가져갔다고 한다. 당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농민들의 염원을 엿볼 수 있는 전설이다.
마애여래좌상 옆 줄기가 2갈래로 갈라진 소나무가 인상적이다.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은 일명 도솔암 마애불로 불리고 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선운산을 구성하고 있는 유문암 절벽에 마애여래좌상이 조각되었으며, 머리 주위를 깊이 파고 머리 부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두껍게 새겨졌습니다. 불상을 새긴 절벽을 보면 암석이 물리적, 화학적 풍화작용을 받아 파인 모양의 타포니 현상과 아랫부분에 점성이 강한 유문암에서 볼 수 있는 마그마가 흐른 자국인 유상구조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서해랑길은 왼쪽 낙조대 가는 계단을 따라 오른다.
철계단을 올라가 전망바위에서 조망하는 풍경이 멋지다.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禪雲寺兜率庵內院宮)은 선운사 도솔암의 지장보살상을 안치한 불전. 설화에 의하면, 수미산 꼭대기로부터 12유순(由旬) 되는 곳에 도솔천이라는 천계(天界)가 있고, 거기에 내원궁과 외원궁이 있다고 한다. 내원궁에는 미륵보살이 장차 부처가 되어 세상을 제도할 때를 기다리며 머물고 있다고 전한다. 따라서 선운사도솔암내원궁은 미륵보살이 안치된 전각이어야 한다. 나한전 뒤의 가파르고 좁은 돌계단 위쪽 천인암(千仞岩)이라는 바위 위를 상도솔암이라고 하는데 그 위에 있으며, 원래 선운사도솔암내원궁은 통일 신라 때부터 있었다고 전한다. 1511년(중종 6)에 중창하였고, 1694년(숙종 20)에 3창(三創), 1817년(순조 17)에 4창(四創)하였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에 마애불과 내원궁, 중앙 아래에 도솔암, 중앙 위쪽에 투구바위, 맨 뒤 중앙에 소요산이 조망된다.
올려보는 천마봉 모습이 멋지다. 오른쪽 산길로 올라가서 천마봉으로 향한다. "말이 하늘로 뛰어 오르는 형상의 천마봉은 낙조대와 함께 선운산의 자연 경관과 선운계곡의 비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선운산 천마봉(天馬峰)은 중생대 화산암이 기반암이다. 천마봉에는 크게 세 개의 단애가 발달되어 있다. 첫 번째는 암봉과 암봉의 하부에 발달한 수직단애로 개이빨산에서 청룡산[314.0m]으로 향하는 산릉에 있고, 단애면에는 타포니(tafoni)[풍화에 의해 형성된 구멍 모양의 지형]가 있다. 두 번째는 천마봉의 북쪽 하곡 반대쪽 곡사면에 발달한 수직 단애로 상하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 번째는 천마봉에서 청룡산 방향에 위치한 전형적인 수직 단애로, 단애면에는 절리가 발달되어 있지 않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 뒤에 소요산, 그 오른쪽에 석산 개발 흔적이 있는 낮은 산봉 오른쪽이 수강산이다.
"천마봉바위라는 지명은 진흥왕 혹은 검단선사가 천마(天馬)를 타고 건너뛸 때 생긴 발자국이라는 전설에서 유래하였다. 천마봉바위는 하늘을 날며 장엄한 자태를 뽐내는 말 형상이 단애를 이룬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에 사자바위, 중앙 오른쪽 산봉이 국기봉이다.
왼쪽이 국기봉, 그 오른쪽이 쥐바위, 중앙 오른쪽이 청룡산, 맨 오른쪽 산봉 왼쪽에 배맨바위가 보이지 않는다.
맨 왼쪽에 청룡산, 그 오른쪽에 배맨바위가 살짝 보인다.
오른쪽에 낙조대 바위가 솟아 있으며 왼쪽 철계단을 통하여 산봉우리를 넘으면 배맨바위에 이른다.
중앙 왼쪽에 마애불과 내원궁, 중앙에 도솔암, 오른쪽 능선 끝에 투구바위, 중앙 맨 뒤에 소요산, 그 오른쪽에 수강산이 보인다.
왼쪽 철계단 산봉을 넘어서 가면 배맨바위에 이른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낙조대로 향한다.
예전에 낙조대 바위에 올랐는데, 이번에는 오르지 않고 그 옆 전망대에서 전망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선운산의 기암괴석 : 약 8천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의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선운산은 주로 유문암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화산력과 화산재로 만들어진 응회암보다 마그마로 만들어진 유문암이 단단하고 균질하여 풍화로 부스러지는 것에 강해 큰 덩어리로 쪼개지는 경우가 많이 가파른 수직절벽을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천마봉에서 관찰 할 수 있는 특징들 : 해발 284m 바위 봉우리 천마봉은 주로 유문암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주변 바위에서 서로 다른 색의 유문암과 응회암이 서로 불규칙적으로 번갈아 가며 보이는 유상구조와 광물들이 모여 암석 속에서 성장한 구조인 구과상구조를 볼 수 있습니다.
중앙 맨 끝에 명사십리 해안이 보인다. 왼쪽과 그 뒤 해안 쪽은 해리면 일대, 오른쪽은 심원면 일대이다.
100m 아래에 용문굴이 있으며, 서해랑길 역방향은 소리재 방향으로 이어간다.
건너편 왼쪽에 사자바위, 그 앞쪽에 천마봉, 중앙 오른쪽에 낙조대, 그 오른쪽에 배맨바위가 조망된다.
참당암은 오른쪽으로, 서해랑길은 왼쪽 소리재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은 해리면 2km, 오른쪽은 참당암 1km, 서해랑길은 개이빨봉 1.25km 방향으로 직진한다.
청동기 시대의 지배자들의 무덤인 고인돌 3기가 있다. 남방식 고인돌인데 받침돌이 없어진 것 같다.
견치봉 입구 0.24km 지점이다. 소리재에서 올라와 오른쪽으로 꺾어간다.
앞의 저수지는 심원면 도천리 도천저수인 듯. 중앙 뒤쪽에 명사십리 해안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왼쪽에 해리면 동호리 동호항과 그 앞에 소죽도와 대죽도, 앞에 견치봉, 오른쪽 건너편에 변산반도 곰소만이 보인다.
왼쪽은 견치봉 0.5km 가는 길, 서해랑길은 선운산 수리봉(도솔봉) 2.03km 방향으로 직진한다.
왼쪽 수리봉 1.9km 방향으로 이어간다. 이곳에서 1.2km 더 가면 수리봉·연천마을 갈림목에 이른다.
수리봉·연천마을 갈림목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이다.
견치봉 입구에서 1.2km를 걸어 수리봉·연천마을 갈림목으로 와서 왼쪽으로 꺾어 연천(蓮千)마을 가는 길로 내려간다.
심원면 연화리 연천마을 내려가는 길, 오른쪽에 솟은 산봉은 연화봉이다. 연화봉에서 연화리(蓮花里) 지명이 유래하였다.
"연천골은 연화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연화천(蓮花川)의 발원지이다. 연천골에 약 네 아름드리나 되는 당산나무가 바위 사이에 서 있는데 나라에 큰 변란이 생기면 칡덩굴이 온 나무를 휘감는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연천(蓮千)마을로 내려가며 왼쪽의 국사봉, 오른쪽의 개이빨봉(견치봉)을 조망하였다.
수령 300년의 느티나무가 연천(蓮千)마을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연천(蓮千)마을 민가에서 수돗물을 마시고 부족한 물을 보충하였다.
연화리 연천(蓮千)마을에서 화산(花山)마을로 이어지는 화산연천길을 따라간다.
전봇대 뒤에 선운산 국사봉, 오른쪽 나무 뒤에 선운산 개이빨봉(견치봉)이 보인다.
정면에 연화봉이 우뚝하다. 왼쪽으로는 연화동으로 이어지고, 서해랑길은 화산연천길을 따라 화산마을로 이어간다.
화산연천길을 따라 연천고개를 넘어 화산마을로 내려간다.
왼쪽으로 김해 김씨 문중 선영 표석이 세워져 있다.
왼쪽에 인삼밭, 아래에 심원면 연화리 화산마을이 있고, 해안은 월산리 사등마을인 듯. 건너편에 변산반도 곰소만이 보인다.
"연화리(蓮花里)는 연화봉(蓮花峯)[224m] 아래에 있는 마을이므로 연화라 하였다. 연화리는 심원면의 동부에 있다. 조선 시대 무장군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연화리·월산리(月山里)·화산리(花山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연화리라 하고 심원면에 편입하였다. 금산리·화산리·신기리 3개의 행정리와 금산·화산·연화·연곡·연천·신기·샛터·마산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각시매·뜰건너·서당촌[일명 서당꿀]·수통매기 등의 마을도 있다.
금산(琴山) 남쪽에 산세가 순하고 아름다워 각시와 같다는 각시매[일명 씨산(氏山)]가 솟아 있는데 옥녀탄금혈(玉女彈琴穴)이 있다고 한다. 각시매는 각시매 아래 있어 붙인 이름으로 옥녀탄금혈이 있어 금산이라고도 한다. 화산은 연곡 서쪽 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뒷산 모양이 꽃처럼 생겨 붙인 이름이다. 뜰건너는 화산 남쪽 도랑 건너에 있는 마을이고, 새터는 금산 북쪽에 새로 이룬 마을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서당촌은 수통매기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큰 서당이 있었기에 붙인 이름이다. 수통매기는 화산 서북쪽 목이 되는 곳에 있는 마을로 화산의 수구가 되는 자리여서 붙인 이름이다. 연곡은 연화동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고, 연천골은 연화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연화천(蓮花川)의 발원지이다. 연천골에 약 네 아름드리나 되는 당산나무가 바위 사이에 서 있는데 나라에 큰 변란이 생기면 칡덩굴이 온 나무를 휘감는다고 한다. 해마다 정월 초에 당산제를 지냈다. 샛터 동북쪽 연화천에는 1958년 놓은 길이 20m의 연화교(蓮花橋)가 있다. 연화리에 심원면 화산 전통마을숲이 있고, 교육 기관으로 심원중학교가 있다. 문화 유적으로 연화리 각씨메 당산과 연화리 2구 화산 당산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소리재펜션이 아담하게 예쁘다.
선운산 도솔봉 산줄기 자락에 어느 문중인지 문중 선영이 조성되어 있다.
연화리 화산마을은 연곡 서쪽 선운산 산줄기 아래에 있는 마을로 뒷산 모양이 꽃처럼 생겨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화산마을 숲은 느티나무, 팽나무, 곰솔이 주요 수종을 이루고 있다.
주변환경이 아름다운 화산마을은 자연과 주민들이 조화를 이루며 행복한 삶의 영원함과 밝은미래을 의미한다. 이 사업은 마을 주민들의 미적 향유를 위해 작가들과 함께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사업명 : 2020 공공미술 프로젝트, 작품명 : 조화-하모니 2121, 작가팀명 : 홍익디자인팀, 주관 : 고창문화재단
마을유래 : 1700년대에 형성되었으며 산봉우리에 올라 내려보면 마치 연꽃 같다고 하여 '연화(蓮花(花山)마을'이라 유래되었다. 선운산 뒷자락과 연화봉 주위로 연천동(蓮千洞), 연곡(蓮谷), 연화동(蓮花洞), 화산(花山)마을, 수통목 등의 자연부락이 있었으나 연화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연화동 주민들은 이주를 하였다. 연화봉에는 원불교 교조 소태산이 깨달음을 얻기 전 마지막 정진을 했다는 초당터가 있어 원불교 성지로 관리되고 있다. 전해오는 전설로는 연화봉 위에 연꽃방죽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초입의 벚나무 꽃길과 오래된 마을숲이 절경을 이루고 고창군 지정 걷기길인 '고인돌 질마재따라 100리길'이 마을 안길을 지나고 있다. 마을에서 호젓한 등산로를 따라 30분이면 마이재를 거쳐 선운산 주봉인 도솔봉(수리봉)에 오를 수 있다. 청정 환경이 잘 보존되어 황새, 원앙, 황조롱이 등의 귀한 새들도 많이 찾는다. 마을농특산물 : 복분자, 양배추, 고추, 약초, 조청 등/ 마을볼거리 : 벚나무 꽃길, 마을숲과 모정, 소태산 초당터, 천동굴, 연화저수지, 선운산 등산로
마을숲의 주요 수종은 느티나무, 팽나무, 곰솔이고, 화산마을은 선운산 산줄기 아래 자리하고 있다.
연곡길로 들어가면 끝에 연곡마을이 있고, 그 뒤에 연화저수지 제방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화산연천길을 따라간다.
서해랑길은 벚나무 가로수가 조성되어 있는 화산연천길을 계속 따라간다.
연화리 연화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바라보면 바다 건너편에 부안군 변산반도 내변산 산줄기가 보인다.
월산천의 화산교를 건너 연화1길을 따라 금산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연화1길 금산마을 앞에서 오른쪽 월산천 둑방으로 나가 월산천을 따라 이어간다.
"금산(琴山)마을 남쪽에 산세가 순하고 아름다워 각시와 같다는 각시매[일명 씨산(氏山)]가 솟아 있는데 옥녀탄금혈(玉女彈琴穴)이 있다고 한다. 각시매 아래에 있는 금산마을은 각시매마을이라고도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연화1길 금산마을 앞에 식초문화도시 고창 1호 식초마을 항아리 발효 '초담'을 홍보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연화리 화산마을 뒤쪽 중앙에 선운산의 주봉인 도솔봉(수리봉)이 가늠된다.
월산천(月山川)에 금산교(琴山橋)가 있고 맞은편에 선운산의 상봉 경수봉(鏡水峰)이 우뚝하다.
연화리의 연곡천이 연화천을 합수하여 흐르다가 월산리 지역을 흐르기에 월산천이라 이르는 것 같다. 둑방길을 따라간다.
"월산천은 심원면 월산리 마을을 통과하여 흐르고, 월산리에서 월산천이 연화천에 합류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월산천은 개이빨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내리면서 지류인 연화천과 합류하고, 농경지 구간인 금산마을과 신기마을을 지나 연곡천에 흘러든다. 그리고 하류인 월산마을과 하천 주변으로 형성된 농경지 구간을 흘러내려 서해에 유입된다. 하상의 재료는 대부분의 구간에서 굵은 자갈과 잔자갈 그리고 모래가 혼재되어 있다. 유역의 분수령은 동쪽의 경수산과 남쪽의 개이빨산이다. 월산천의 지류는 연화천·연곡천 등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심원면 연화리(蓮花里) 신기(新基)마을 건너편 구릉 아래의 마을은 심원초등학교가 있는 월산리(月山里) 마산마을이다. 심원면(心元面)은 산의 지형이 ‘마음 심(心)’자, ‘으뜸 원(元)’자와 비슷하여 지명을 심원면(心元)이라 하였으며, 연화리(蓮花里)는 연화봉(蓮花峯, 224m) 아래에 있기에 연화(蓮花), 월산리(月山里)는 풍수지리상 마을 뒷산이 마치 반달 모양을 하고 있어 ‘월산(月山)’이라고 하였다 한다.
월산천 둑방길을 따라와서 심원로와 만난다. 심원로 건너편에 월산리 심원초등학교, 오른쪽에 연화교가 있다.
오른쪽 둑방길을 따라와 심원로를 건넜다. 월산천에는 1958년에 세워진 길이 20m의 연화교(蓮花橋)가 있다.
심원로 건너편은 금산 북쪽에 새로 이룬 연화리 신기(新基, 새터)마을이고, 이쪽은 월산리 마산마을이다.
"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 1935년 5월 1일 심원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81년 3월 7일 심원국민학교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94년 3월 1일 주산국민학교를 통폐합하였다. 1996년 3월 1일 심원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16년 2월 12일 제77회 졸업식을 포함하여 6,73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서기 어린 경수봉 구름에 솟고/ 서해의 푸른 물결 파도치는 곳/ 호남에서 역사 깊은 배움에 동산/ 횃불도 밝아라 진리와 이상/ 아 아 희망의 우리의 심원/ 아, 아, 찬란한 우리의 전통'(교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914년 3월 1일 부군(府郡) 폐합 시 심원면으로 하여 10개 법정리로 관할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면사무소 설치 시기는 뚜렷한 기록은 없으나 그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65년 3월 10개 법정리·24개 마을, 1990년 1월 10개 법정리, 26개 마을, 3개 도서(외죽도·내죽도·미여도)로 관할 구역이 개편되어 현재에 이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심원로 건너편 심원우체국이 있는 곳은 심원면 연화리, 이곳 심원행정복지센터가 있는 곳은 심원면 월산리이다.
심원면 월산리 심원면행정복지센터 앞에서 서해랑길 고창 42코스를 역방향으로 마치며 이를 기념한다.
42코스 안내도에 거리 11.6km, 소요 시간 4시간 30분, 난도 매우 어려움으로 적혀 있다. 직접 탐방한 42코스 주요 지점은 선운산 관광안내소, 선운사 부도전, 선운사 동백숲, 도솔암과 마애불, 천마봉과 낙조대, 소리재, 견치봉 입구, 연천마을, 화산마을, 금산마을, 신기마을, 심원초등학교, 심원면행정복지센터이며, 전체 탐방 거리는 12.34km, 4시간 9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