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지 말고 걸어라 / 신형호
즐겁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흐른다. 밤 열 시쯤 되었을까? 신천 둔치 산책길은 잿빛 연무에 젖어 평온하다. 허연 머리를 풀어헤친 갈대들이 선선한 바람에 허리를 굽힌다. 파동 IC 앞 둔치 길은 가로등 불빛이 대낮같다. 휴대용 녹음기에서 흐르는 경쾌한 음악 따라 마음이 사뿐사뿐 스텝을 밟는다.
추억의 팝송 몇 곡 다음에 멋진 경음악이 이어진다. 나도 모르게 얼굴은 하회탈이 되어 어깨를 들썩인다. ‘벤처스 악단’의 전자 기타 음악이다. 첫 곡은 ‘마이 블루 해븐’. ‘~딴 따다 단 딴 따다따다 따다 단 딴~’. 캄캄한 밤하늘에서 별빛이 내려오는 듯 가슴이 환해진다. ‘파이프라인’ ‘쟝고’ ‘상하이드’ 등 트위스트 음악이 줄줄이 연주되면 영혼은 어느새 꿈속을 거니는 듯하다.
‘벤처스 악단!’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밴드가 아닌가. ‘비틀스’와 함께 60, 70년대 세계의 팝을 완전히 덮어 버린 악단이다. 언제 어디서 들어도 온몸이 감전된 듯 짜릿함을 주는 전자 기타의 매력. 그 속에서 함께 한 젊은 시절의 꿈과 사랑을 떠올리게 한 악단. 당시 ‘워싱턴 포스트’ 지는 “신이 내린 금세기 최고의 악단”, ‘뉴욕 타임즈’ 에서는 “지구인 역사상 가장 훌륭한 밴드”라고 극찬한 연주 그룹이다.
‘벤처스 악단’의 연주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69년 늦가을이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주말에 친구들과 팔공산 등산을 갔다. H 대학교에 다니는 친구의 누나와 그녀 친구 몇 명도 함께 했다. 생전 처음으로 가는 1박 2일 등산이라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산속의 야영은 기대했던 낭만보다 불편이 더 많았다. 좁은 텐트 안에서 작은 모포 한 장으로 밤새 추위에 뒤척였다. 새벽에 설핏 잠들었다가 경쾌한 음악 소리에 잠을 깼다. 계곡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짙푸른 소나무의 허리를 안고 정적이 온 산을 감싸는 시간이었다. 한 누나가 가져온 야외전축에서 흘러나왔다. 그때 내 귀에 파고든 곡이 ‘마이 블루 해븐’ 이었다. 고요한 산속, 새벽 햇살도 아직 스며들지 않은 숲 속에 저렇게 맑고 흥겨운 음악이 흐르다니. 한참 동안 온몸이 짜르르 떨렸다.
불빛에 펼쳐진 산책길은 느릿하게 이어진다. ‘샌프란시스코’에 이어 ‘엘 콘도 파샤’가 허공을 가른다. 길 모퉁이 아무도 없는 벤치에 앉았다. 울렁이던 가슴이 잠시 진정된다. 음악 속에서 남아메리카의 콘도르가 머리 위를 맴도는 게 연상된다. 갑자기 저쪽 물가에 있던 백로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끼욱, 끼욱.” 유유히 날개 짓하며 건너편 하늘을 가로지른다. 내가 백로이고 백로가 내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든다. 문득 돌아보니 사방은 고요하다. 풀벌레 소리도 없다. 무생물의 세상이다. 갑자기 홀로 무인도에 버려진 듯 적막감에 싸인다. 두려워진다. 내 삶을 돌아보게 되고 죽음이 생각난다. 죽음에도 법칙이 있을까?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과 같지 않을까?
“자연이 생에 부여한 단 하나의 법칙이 바로 죽음이다.”라고 한 미국의 소설가 잭 런던의 말이 떠오른다.1) 죽음이란 삶과 대비되는 말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삶을 치열하게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차분하게 오늘을 잘 보내는 것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한다. 곰곰 생각하면 죽음은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좋은 삶을 산 사람이 좋은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까. 최근에는 ‘웰 빙(잘 사는 법)’이란 말과 ‘웰 다잉(잘 죽는 법)’이란 말이 함께 사용된다. 우리는 죽음이란 말 자체에도 두려움을 느낀다. 죽음에 초연한 사람이 과연 몇이 있을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최초의 치료법은 삶에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라고 한 영국의 수필가 윌리엄 해즐릿이 죽음에 대한 적절한 대처법을 설명해 주고 있다2).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한 담론이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방송 매체마다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꽃을 피운다. 모두가 인간의 몸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엇을 전제로 할까? 결론은 죽음을 전제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몸에 이로운 어떤 음식을 먹고, 건강을 위해 어떻게 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죽음과 삶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질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잘 보낸 삶 뒤에 차분한 죽음이 온다.3)’는 얘기처럼 오늘을 사는 삶이 중요하지 아닐까?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라는 말을 떠올려 보았다. 살아가면서 삶의 본질은 잊어버리고 너무 앞만 보고 뛰어가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세상은 복잡해 지는듯하지만 삶은 간단해진다. 한 박자 늦추고 천천히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잘 사는 방법이다. ‘3초만 기다리기’ ‘때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유용한 불편함 즐기기’4)라는 천천히 사는 법도 지켜볼 만하다.
하늘을 올려보니 별빛도 없다. 다시 ‘벤처스’의 ‘워크, 돈 런(뛰지 말고 걸어라)’이란 곡이 흐른다. 수십 년 지난 과거지만 미래를 내다보고 작곡한 모양이다. 경쾌하고 발랄한 트위스트 음악 속에서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늦은 밤 신천 둔치는 한 해를 갈무리하는 풀들로 울긋불긋하다. 과거의 향수를 불러오면서도 미래의 길을 슬쩍 일러주는 것이 ‘벤처스’ 음악이다. 삶과 죽음에는 경계가 없다. 느리게 돌아가는 차분한 삶속에 죽음을 뛰어넘는 답이 기다리지 않을까. (14.11.11.)
1).2).3). 한겨레 칼럼. 삶과 죽음의 법칙<김호>에서 인용
4)한국슬로시티본부. ‘슬로라이프 실천하는 법’에서 인용.